경북 상주 태생
장차남(張次男 1940.9.10~ ) 목사는 경상북도 상주시 복룡동에서 부친 장수만(張守萬)과 모친 김봉필(金鳳弼)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나 네 살 때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해 여섯살 때 해방(解放)을 맞이했고, 이듬해 2월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이미 국경선엔 소련군이 지키고 있었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걸어서 건너야 했다. 3.8선을 넘을때는 돈을 주고 고용한 안내원을 따라 한밤중에 고향을 향해 움직여야 했다.
그는 말한다. 만약 그때 조국으로 귀환하지 못했다면 지금 저희 가족은 만주에 살면서 조선족으로 불리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기독교 복음에 접할 기회를 놓쳤을지 모른다. 중국에서의 종교개방이 이루어진 것은 최근의 일이었으니까.…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생각한다. 열한살 때 6.25 전쟁이 일어나서 피난길에 나섰는데 나룻터에 와 보니 배 한 척이 있는데 서로 타고 건너겠다고 아귀다툼이었다. 이미 형은 강을 건너갔고 남은 가족들은 얕은 강쪽으로 아버지의 목마를 타고 낙동강을 건넜다. 어릴 때는 몸이 약해 병치레를 많이 해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쳤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엔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라는 부친의 말씀에 할아버지께서는 갈 때는 못 가더라도 시험은 쳐보라고 하셨다. 시험에 합격은 했으나 학비가 걱정이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시기 중학교 때 중병을 앓고 있을 때 예수님을 알게 되었는데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는 신앙적인 계기가 되었고, 19살 되던 1958년 당시 김천(金泉)에 있는 경서고등성경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엔 모두 어려운 시가라 정식 고등학교에 못가서 성경학교를 통해 신학교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으로 1959년 김천시 무안동의 천막교회의 개척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자전거로 가서 수요기도회를 인도하고 토요일이면 그곳에서 자고 주일예배를 인도하였다.
그해 9월 제44회 대전총회에서 예장이 합동과 통합으로 나뉘는 아픔을 겪었다. 상주의 모(母)교회는 통합측이었지만, 장 전도사는 다음 해에 서울에 있는 총회신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합동측 목사의 길을 걷게 된다.
경서성경학교 거쳐 총회신학교 졸업
부산지역서 40여년 간 목회
“삼손의 손에 잡힌 나귀턱뼈처럼”
교계의 화합과 연합일치에 열심
일본어로 기록된 총회록 번역사업 결의
부산지역서 40여년 간 목회
“삼손의 손에 잡힌 나귀턱뼈처럼”
교계의 화합과 연합일치에 열심
일본어로 기록된 총회록 번역사업 결의
1960년 동대문에 있는 서울창신교회(권연호 목사)에 출석했는데, 그해 연말부터 교육전도사로, 1966년말까지 강도사가 되기까지 섬겼고, 그후 대구로 내려가 삼덕동에 있는 성덕교회(聖德敎會)에서 강도사로 1967년 11월 목사로 장립 받고 부목사로 섬기고 있던 중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중앙교회(노진현 목사)의 부름을 받고 내려가 6년 반을 섬기다가, 1975년 2월 해운대교회로 와서 2년간 시무하던 중, 같은 지역 내에 있는 온천제일교회에 1977년부터 32년간 위임목사로 봉직하고, 교단이 정한 70세 정년보다 1년반 앞당겨 조기은퇴함으로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말한다. 지금 돌아보아도 목회의 길이 저에겐 참 순탄했어요. 누구에게 삿대질 한번 안 받아보고, 멱살 안잡혀 보고… 물론 교회라는 곳이 온갖 애환과 빈부귀천 팔도강산 사람이 다 섞여있는 곳이라,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잘 헤쳐나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는 또 자신을 삼손의 손에 들린 나귀턱뼈같은 존재였다고 고백한다. 자신은 늘 하나님의 장중에 붙잡혀 지금까지 인도해 주셨다고 생각할 때, 지난 58년의 목회사역에 고단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소회를 밝히고 있다(나의 목회 회고록 ‘소명과 순명’, 쿰란출판사 2015, p.48 이하 참조.)
그는 교정(敎政)에도 남다른 면이 있다. 장차남 목사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성품을 지닌 한국교회 대표적인 보수 교계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다.
경서고등성경학교를 마치고 총회신학교 대학부와 대학원에 진학(구 총신예과 및 본과), 박형률 박사 지도로 조직신학관계 논문지도를 받고 졸업하였다(Th.M 과정).
부산에서 사역의 3분의 2가 넘는 목회를 하면서 노회를 이끌어가는 부산노회장으로 부산신학교(교단 인준) 교수와 교장, 영·호남 기독교지도자협의회 공동회장, 한국교회대부흥100주년기념대회 상임공동대회장, 한국교회 일치를 위한 교단장협의회장, 기독교 C.T.S-TV 공동대표, 북한교회세우기연합공동대표 등을 역임하면서 지도력을 발휘하였으며, 은퇴 후에는 부산에서 서울로 거쳐를 옮겨 온천제일교회의 후임목회자가 마음놓고 편히 소신을 가지고 목회하도록 배려하는 형으로 교계에서 몇 안되는 존경받는 지도자이다.
그는 자신의 목회철학 회고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는 평생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으로 하나님께 평생 인고(忍苦)의 목회, 중용(中庸)의 목회, 섬김(奉仕)의 목회를 모토(Motto)로 최선의 목회를 하려고 미력을 다했노라고… (신앙계 2016년 8월호, 최선미 기자와의 대담 p.10~16참조).
장차남 목사는 자신의 회고록인 <소명과 순명> 머릿글에서 자신의 한평생 삶을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나의 일생을 소명(召命)과 순명(順命)으로 인식한다. 내가 성도가 되고 목사가 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곧 소명(召命)이다. 그후 나의 사역 일체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르는 순명(順命)이었다. 더블어 내 생애 전체가 소명과 순명이로되 결코 내가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회고록 같은 책 프로로그 참조).
나는 장로교 목사로 칼빈주의 정통신학 노선이자 수구적이면서 보수적의 입장이다. 하지만 진부하고 화석화 된 수구적인 보수주의가 아니라 참으로 보수의 가치를 존중하되 지키면서 개혁적이고 실천적인 보수가 되어야 한다고 믿어왔다.
장차남 목사의 회고록 소명과 순명을 내면서 앞장서서 추진했던 김승동 목사(구미상모교회)는 간행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연극의 제목이 아무리 멋이 있어도 주인공이 마지막 무대에서 많은 관중으로부터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내려와야 제목다운 연극이 되고 조연이나 관련자들까지 피곤이 물러가고 주인공과 함께 했던 시간이 행복으로 가슴에 밀려 올 것이다. 남편이 남편다워야 아내가 행복하고, 아버지가 아버지 다워야 자녀가 행복하다. 어떤 자리에 앉았다가 내려올 때 자신이 어떤 평가를 받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현 로마교황 프란시스코(Francisco)가 뒷담화(남의 뒤에서 험담하는 것)만 아니해도 성자(聖者)라고 했듯이, 장차남 목사가 그런 분이 아닐까 여겨질 때가 많다. 타인을 질타하는 것보다 그럴 마음의 이유가 있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지 않을까요? 하면서 언제나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대화를 하는 것이다.
장차남 목사는 2006년 9월 19일에서 22일까지 자신이 시무하고 있는 부산 온천제일교회에서 개회된 제91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교단의 수장이 되는 자리에 올랐다가 2009년 5월 5일 온천제일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받은 후 현재까지 총회장 재임시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은퇴 후에도 지금까지 교계의 화합과 연합일치를 위해 타교단장들과 교류를 하면서 교계 지도자로 리더쉽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그의 신앙인격과 포용력을 나타내주는 지도자의 모습이라 하겠다.
그에게는 문필력이 있어 2015년 3월 20일에 간행된 회고록 <소명과 순명> 외에도 ① 목회 40년 그 현장을 말한다. ② 한국교회 목회 현장을 말한다. ③ 사랑하고 축복합니다가 있고, 또 강단에서 선포된 설교집 ① 한 생명의 가치 ② 승리자 예수 ③ 위대한 터전 ④ 새벽을 깨우는 신앙 ⑤ 위기상황에서 교회의 한 일 ⑥ 우리는 한 골육이다 ⑦ 나는 기도할 뿐이다. 등 17권에 이르는 저서들이 있다.
그가 재임했던 91회 총회에서 결의된 중요안건들을 보면, ① 평양대부흥100주년 기념예배를 장감성 연합예배로 드리기로 결의하고, 7월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신앙대회를 개최하기로 하다. ② 21세기 찬송가를 본교단 산하 개교회 예배용으로 사용하기로 하다. ③ 4월 마지막 주일을 장애인 주일로 허락하다. ④ 총회 안에 긴급구호단 설립을 허락하기로 하다. ⑤ 이단연구조사위원회를 상설키로 하다. ⑥ 총회차원의 전국교회 인재 데이터 구축하기로 하다. ⑦ 일본어로 기록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회의록을 임원회에 맡겨 한국어로 번역하도록 하다. ⑧ 예장출판사는 현행대로 운영하되 총회에서 파송된 이사들의 법적 권한은 총회의 권익확보를 위한 임무수행 범위를 제한하기로 하다.
장차남 목사의 사역을 정리하면서 우리교단 지도자들이 역사인식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장 목사는 슬하에 1남2녀의 자녀를 두었으며, 모두들 부모님들의 신앙의 대를 이어 가며 교회와 사회의 일원으로 충성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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