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의 기도문 중에는 여자로 태어나질 않고,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한다는 기도문이 있다. 이에 대한 궁금증을 아니 가질 수 없었던 한 생도가 랍비에게 물었더니, 랍비가 이르기를, 이는 남자로서 그만큼 국가에도 책임을 지고 있듯이, 남자가 여인보다도 무거운 책임을 지닌 것임을 뜻하며, 남자로 태어났으니 이 중차대한 책임을 잘 감당해야 하겠다는 긍정의 기도라고 설명하여 주었다.
아무리 완벽하게 기록된 기도문이라 하더라도, 조금은 시대나 상황에 따른 차질도 일어나고, 심지어는 괴리가 되기도 한다. 회당에서 매일 드려지는 기도 가운데에, 나사렛 당을 없이하여 달라는 기도는, 없어지기는커녕, 전 로마가 나사렛 예수를 신앙하는 정황이 벌어지자, 상당한 고난을 치루는 결과를 경험하였다. 그럼에도 이러한 성향의 기도가 개선되질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칭 빛을 세상에 비춰준다고 공공연하게 공언하면서, 오히려 거꾸로 가는 것이 현실이 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바울이나 요한의 복음을 집중해서 수차례 읽어가다 보면, 아주 역발상적인 상황들이 진행되고 있음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로마서 서신인 두루마리를 여인인 뵈뵈 집사가 고린도에서 바다를 건너 로마에 전달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로마서 마지막 부문에 이 서신을 전달하는 뵈뵈를 위한 소개문에서 발견되어진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여인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넌다는 것이 불가하게 여겨졌었는데, 어떻게 그 시절에 여인의 몸으로서 바다를 건너가, 로마의 시민들을 일일이 찾아가며, 바울의 복음을 일점일획 자구하나 틀리지 않고, 낭독하며 해설하여 주었을까? 이런 일들이야말로 남자들이 해야 하던 일들이 아니었던가?
바울이 가장 중요시하는 그의 사역 마지막에 기록한 복음 내용은, 베드로의 서신에서도 들어났듯이 오해의 소지들이 있어서, 자칫 잘못하여 사사로이 해석했다가는 바울도 추락하고, 로마서도 추락하고, 바울의 희생이 헌신짝보다도 못하게 되었을 결과가 올 수도 있는 것이다. 복음이란 실천력이 퇴색하여지면, 이론만 난무하게 되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신도들에게 주의를 단단히 하였는데, 끼었던 반지가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를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에서 빠져 나가는 것처럼, 믿음과 행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당부하였는데, 이는 실제로 그러한 일들이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이 삼여 년 간 가이사랴에서 구금되었다가, 황제에게 재판을 받으려고 로마 항구에 도착하였을 때에, 뵈뵈가 전한 복음을 읽고서 성숙하여진 시민들이, 줄을 서서 바울의 로마 입성을 환대하였다. 이는 뵈뵈의 복음 전달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사례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아직도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서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들이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합병되어 국가의 모든 것을 상실한 1920년에, 어린 나이에 여성으로서,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여인의 입에서 나온 “두려워 말라”는 강론이나, 1921년의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를 보면, 김활란여사의 가슴과 머리는 얼마나 담대하고 의지가 강하였든지, 한국여성의 기개가 어떠함을 알 수 있다.
여인들을 대놓고 응원한 복음서는 어느 복음서보다도 요한복음서가 맨 앞이다. 바울도 여인들을 존중하고 격려하며 차별하지 않았는데, 어느 익살맞은 장난꾼이 그랬는지는 몰라도, ‘여인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문구를 바울 서신에 몰래 집어넣은 것이었다. 이러한 행위는 몇몇 문장을 첨부함으로써 그 진리가 가진 가치와 뜻을 퇴색시키려는 것이다. 일본의 독도 주장이라던 지, 중국의 광개토대왕비의 훼손 사건 등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뇌가 있는 자라 하면, 누구라도 복음서 자체가 진리를 변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도 여인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일을 서슴없이 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은 이 지상에서 가장 소외된 사마리아여인을, 유다의 가장 최고봉인 학자와 견주어서, 가장 명백하게 복음의 빛을 받아, 생수가 솟아나는 인격자가 되었음을, 복음서 앞자리에 상정시켰다. 어디 이 뿐이랴? 복음서 맨 마지막 십자가상에서의 대화에서, 예수의 어머니가 요한교회의 어머니가 된다. 요한교회가 어떻게 여인들을 존경해 주고, 지도자의 자리에 함께 앉게 하였을까? 오늘 같은 이 혼란스러운 정국에서도, 묵묵하게 예수를 잉태하고, 그리스도를 양육해낸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이 아닐까?
ⓒ 교회연합신문 & ecumenicalpress.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