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지난 7월 10일부터 12일까지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담임 이재철 목사)가 교회창립 12주년과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해 개최한 신앙대강좌 ‘종교개혁의 환희와 고뇌’ 중 윤형철 교수의 강연 중 ‘루터’ 관련 부분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
△루터의 ‘영혼의 고뇌’
젊은 루터는 전형적인 중세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광부였던 루터의 아버지는 아들을 법률가로 출세시키려고 에르푸르트 대학에 보냈다. 청년시절에 루터는 죽음의 공포와 마주하는 몇 번의 사건을 경험한다. 스무 살되던 해에 루터는 칼에 다리동맥을 찔리는 큰 부상을 당해 과다출혈로 죽을 뻔 한다. 1505년 루터가 스물 두살이 되던 해에 흑사병으로 동생들을 잃는다. 곧이어 에르푸르트 대학교수들도 페스트에 감염되어 죽었는데, 한 교수가 죽어가며 자신이 수도사가 아닌 것을 한탄하고 죽었다는 소리를 전해들은 루터는 충격에 빠졌다. 같은 해에 루터는 죽음의 공포가 영혼 깊은 곳을 마비시키는 경험을 한다. 여느 때처럼 집에 들렀다가 학교로 돌아오던 길에 슈토테른하임이라는 벌판에서 벼락을 동반한 심한 폭풍우를 만난다. 폭풍우 속에서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루터는 일종의 발작공포를 일으키며 광부들의 수호성인인 성 안나를 소리쳐 부른다. “성 안나여 도우소서 그러면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루터는 그 때부터 자신에게 ‘영혼의 고통’(독일어로 안페추퉁겐)이 시작되었다고 후일 밝혔다. 루터는 곧바로 학교를 자퇴하고 집에 돌아와서 짐을 싸서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사가 된다.
△탑상체험
영혼의 고뇌에 짓눌려 있는 젊은 수도사를 안타깝게 여긴 선임사제 슈타우피츠가 루터에게 성경을 연구하라고 조언하고 신학공부를 종용하였다. 신설된 비텐베르그에서 학위를 받고 신학교수가 된 루터는 처음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가르치다가, 학장이었던 슈타우피츠의 권유를 받아 성경과목을 맡게 된다. 그렇게 해서 강의준비를 하며 연구한 성경이 시편과 로마서였는데, 이 성경 안에서 루터는 영혼의 고뇌로부터 탈출할 통로를 찾기 시작했다.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원의 탑 꼭대기에 마련된 서재에서 성경연구를 하였다(그래서 그가 복음의 정수를 발견한 체험을 ‘탑상체험’이라고 한다). 평소 루터는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을 싫어해서 로마서를 좋아하지 않았다. 로마서 1: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을 연구하면서, 루터는 앞부분의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것과 뒷부분의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고심했다. 중세인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이 사랑하실 만한 의인이 되기 위해 고해와 고행과 순례를 계속 하면서 매일 한걸음씩 천국의 사다리를 올라가듯 스스로 이뤄야 하는 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마서의 이 구절은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두 서술이 연결되려면 ‘하나님의 의’는 ‘내가 달성하는 의’가 아니어야 한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새롭게 발견한다. 의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고행과 고해와 금욕으로 따라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께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는 신자에게 전가된다. 죄인인 우리가 의인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위대한 교환’을 통해서이다. 오직 그 방법이 아니고선 이뤄질 수 없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의는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하신 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해서 나에게 주시는 완전한 의이다.
루터는 로마서1:17을 통해 복음을 발견했을 때 자신이 새로 태어나서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낙원에 이른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이 순간이 바로 ‘종교개혁의 환희의 순간’이다.
△95개조 논제
루터가 시편과 로마서 연구를 통해 새로이 발견한 복음으로 벅차있을 때, 면죄부 판매 문제가 불거진다.
95개조 논제에서 루터는 교황이 연옥 감독권을 가지고 면죄부를 파는 것의 허황됨과 어리석음을 조목조목 밝힌다. “교황은 하나님의 용서를 선포하는 것 말고는 어떤 죄도 용서할 능력이 없다. 교황은 교회법에 의한 이 땅에서의 형벌이나 감할 수 있을 뿐 죽은 자의 영혼에 대해서 어떤 형벌도 사할 수 없으니 연옥에 있는 자의 형벌을 감한다는 면죄부는 사기이며 교황의 탐욕일 뿐이다. 교황의 면죄부는 어떤 의미에서도 교회의 보물일 수 없으니 아무리 사소한 죄라도 없애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참된 보화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로부터 오는 거룩한 복음이다.”
종교개혁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후대에 기억될 이 일은 면면을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루터가 성채교회 정문에 이 논제를 붙인 것은 거기가 일종의 신학교 게시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만성절(All Saints’ Day)로 불리는 11월 1일에 신학교수들이 모여서 신학토론을 벌이는 것이 전통이 있었다.
95개조 논제는 로마교회의 개혁을 위한 선언문이 아니었다. 심지어 면죄부 신학 자체를 반대한 것도 아니었다. 루터는 면죄부가 남용되고 오해받는 것을 지적하려고 하였다. 로마가톨릭의 면죄부 신학에 따르면, 면죄부는 고해성사와 같이 현세적 처벌을 면하는 효과를 지닌다. 면죄부도 일종의 헌금이니 공로의 효과가 있다. 하지만, 면죄부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용서의 효과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신도들은 면죄부가 천국으로 가는 티켓인 양 여기고 심지어 앞으로 지을 죄를 위해서 넉넉하게 사두기까지 했다. 루터는 그런 오해와 남용에 대해 신학적 토론을 벌이고자 한 것이었다.
분명, 이때까지 루터는 아직 개혁의 칼이 아니었다. 본인도 로마가톨릭교회를 철저히 개혁하려는 의지를 품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그를 쓰시기로 하셨다. 95개조 논제는 인쇄술이라는 테크놀로지의 힘을 빌어 독일 전역과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은혜의 복음에 막 눈 뜬 수도사가 교황과 대주교의 탐욕을 지적하고 면죄부 교리의 한계와 오용을 지적하는 그 문서가 부패한 교회에 진저머리 내고 있던 사람들에게 반박과 비판의 논리를 제공한 것이다.
△루터, 하나님의 칼로 벼려지다.
루터의 95개조 논제가 일으키는 반향을 전해들은 교황 레오 10세의 심기가 불편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맥주로 유명한 독일을 빗대어 교황은 “어느 술 취한 독일 수도승이 지껄이는 헛소리이고, 술이 깨면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교황은 일파만파로 번져가는 95개조 논제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교황과 교회에 불경한 죄를 물어 종교재판에 회부해서 화형 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루터의 글과 사상이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그의 논리를 깨뜨리고 이단이요 거짓말쟁이로 만들어야 했다. 죽이는 것은 그 다음에 해도 될 일이다.
교황은 최고의 로마가톨릭 신학자들을 동원해서 1518년부터 2년 동안 세 차례 신학논쟁을 벌여서 루터를 공략하려 하였다. 하이델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토론회를 준비하려고 루터는 더욱더 성경연구에 매달렸고, 그 결과 자신의 신념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루터는 점점 로마가톨릭신학과 결별하게 되고, 하나님의 칼로 벼려지게 된다. 루터를 하찮은 수도승쯤으로 생각했던 교황 레오가 루터를 “주님의 포도밭에 침입한 멧돼지”라고 불렀을 때 루터가 로마교회에 치명적인 존재임을 예감했을 지도 모른다.
신학토론회를 끝내고 루터는 자신의 생각을 보다 정연하게 밝힐 필요를 느꼈다. 엄청난 집중력과 에너지를 쏟아 부어 1520년에 써내려간 세 편의 논문은 소위 ‘종교개혁 3대 논문’이라고 불리는데, 루터의 신학과 사상의 핵심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첫 논문인 <독일 귀족들에게 고함>(1520)에서 루터는 독일의 영주들과 귀족들에게 지지를 호소한다. “침묵의 시간은 끝났다. 이제는 말해야 할 때다”라고 시작하는 이 논문에서 루터는 교황의 폭정과 탐욕을 보호하고 있는 세 가지 장벽이 있는데 이것은 허탄한 논리로 된 종이 울타리와 같으므로 허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영적 권력이 세상 권세 위에 있다”는 주장이 교황권을 신성불가침으로 만든다. 루터는 영적 계급과 세속적 계급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영적 계급에 속하므로 이 주장은 거짓이라고 말한다(이것이 만인제사장설이다). 둘째,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만인제사장설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제의 중재 없이 스스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기에 이 주장 또한 거짓이다. 셋째, “오직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 루터는 교황은 전혀 개혁할 의지가 없으므로 왕과 영주와 귀족들이 공의회를 소집하여 교회의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논문인 <교회의 바벨론 유수>(1520)에서 루터는 로마가톨릭교회의 근간이며 사제의 절대적 권한의 근거인 성례 문제를 비판하면서 로마교회의 심장을 겨냥한다. 그리고 마지막 논문인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루터가 자신의 명분을 교황에게 이해시키려고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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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영혼의 고뇌’
젊은 루터는 전형적인 중세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광부였던 루터의 아버지는 아들을 법률가로 출세시키려고 에르푸르트 대학에 보냈다. 청년시절에 루터는 죽음의 공포와 마주하는 몇 번의 사건을 경험한다. 스무 살되던 해에 루터는 칼에 다리동맥을 찔리는 큰 부상을 당해 과다출혈로 죽을 뻔 한다. 1505년 루터가 스물 두살이 되던 해에 흑사병으로 동생들을 잃는다. 곧이어 에르푸르트 대학교수들도 페스트에 감염되어 죽었는데, 한 교수가 죽어가며 자신이 수도사가 아닌 것을 한탄하고 죽었다는 소리를 전해들은 루터는 충격에 빠졌다. 같은 해에 루터는 죽음의 공포가 영혼 깊은 곳을 마비시키는 경험을 한다. 여느 때처럼 집에 들렀다가 학교로 돌아오던 길에 슈토테른하임이라는 벌판에서 벼락을 동반한 심한 폭풍우를 만난다. 폭풍우 속에서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루터는 일종의 발작공포를 일으키며 광부들의 수호성인인 성 안나를 소리쳐 부른다. “성 안나여 도우소서 그러면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루터는 그 때부터 자신에게 ‘영혼의 고통’(독일어로 안페추퉁겐)이 시작되었다고 후일 밝혔다. 루터는 곧바로 학교를 자퇴하고 집에 돌아와서 짐을 싸서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사가 된다.
△탑상체험
영혼의 고뇌에 짓눌려 있는 젊은 수도사를 안타깝게 여긴 선임사제 슈타우피츠가 루터에게 성경을 연구하라고 조언하고 신학공부를 종용하였다. 신설된 비텐베르그에서 학위를 받고 신학교수가 된 루터는 처음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가르치다가, 학장이었던 슈타우피츠의 권유를 받아 성경과목을 맡게 된다. 그렇게 해서 강의준비를 하며 연구한 성경이 시편과 로마서였는데, 이 성경 안에서 루터는 영혼의 고뇌로부터 탈출할 통로를 찾기 시작했다.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원의 탑 꼭대기에 마련된 서재에서 성경연구를 하였다(그래서 그가 복음의 정수를 발견한 체험을 ‘탑상체험’이라고 한다). 평소 루터는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을 싫어해서 로마서를 좋아하지 않았다. 로마서 1: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을 연구하면서, 루터는 앞부분의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것과 뒷부분의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고심했다. 중세인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이 사랑하실 만한 의인이 되기 위해 고해와 고행과 순례를 계속 하면서 매일 한걸음씩 천국의 사다리를 올라가듯 스스로 이뤄야 하는 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마서의 이 구절은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두 서술이 연결되려면 ‘하나님의 의’는 ‘내가 달성하는 의’가 아니어야 한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새롭게 발견한다. 의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고행과 고해와 금욕으로 따라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께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는 신자에게 전가된다. 죄인인 우리가 의인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위대한 교환’을 통해서이다. 오직 그 방법이 아니고선 이뤄질 수 없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의는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하신 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해서 나에게 주시는 완전한 의이다.
루터는 로마서1:17을 통해 복음을 발견했을 때 자신이 새로 태어나서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낙원에 이른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이 순간이 바로 ‘종교개혁의 환희의 순간’이다.
△95개조 논제
루터가 시편과 로마서 연구를 통해 새로이 발견한 복음으로 벅차있을 때, 면죄부 판매 문제가 불거진다.
95개조 논제에서 루터는 교황이 연옥 감독권을 가지고 면죄부를 파는 것의 허황됨과 어리석음을 조목조목 밝힌다. “교황은 하나님의 용서를 선포하는 것 말고는 어떤 죄도 용서할 능력이 없다. 교황은 교회법에 의한 이 땅에서의 형벌이나 감할 수 있을 뿐 죽은 자의 영혼에 대해서 어떤 형벌도 사할 수 없으니 연옥에 있는 자의 형벌을 감한다는 면죄부는 사기이며 교황의 탐욕일 뿐이다. 교황의 면죄부는 어떤 의미에서도 교회의 보물일 수 없으니 아무리 사소한 죄라도 없애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참된 보화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로부터 오는 거룩한 복음이다.”
종교개혁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후대에 기억될 이 일은 면면을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루터가 성채교회 정문에 이 논제를 붙인 것은 거기가 일종의 신학교 게시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만성절(All Saints’ Day)로 불리는 11월 1일에 신학교수들이 모여서 신학토론을 벌이는 것이 전통이 있었다.
95개조 논제는 로마교회의 개혁을 위한 선언문이 아니었다. 심지어 면죄부 신학 자체를 반대한 것도 아니었다. 루터는 면죄부가 남용되고 오해받는 것을 지적하려고 하였다. 로마가톨릭의 면죄부 신학에 따르면, 면죄부는 고해성사와 같이 현세적 처벌을 면하는 효과를 지닌다. 면죄부도 일종의 헌금이니 공로의 효과가 있다. 하지만, 면죄부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용서의 효과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신도들은 면죄부가 천국으로 가는 티켓인 양 여기고 심지어 앞으로 지을 죄를 위해서 넉넉하게 사두기까지 했다. 루터는 그런 오해와 남용에 대해 신학적 토론을 벌이고자 한 것이었다.
분명, 이때까지 루터는 아직 개혁의 칼이 아니었다. 본인도 로마가톨릭교회를 철저히 개혁하려는 의지를 품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그를 쓰시기로 하셨다. 95개조 논제는 인쇄술이라는 테크놀로지의 힘을 빌어 독일 전역과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은혜의 복음에 막 눈 뜬 수도사가 교황과 대주교의 탐욕을 지적하고 면죄부 교리의 한계와 오용을 지적하는 그 문서가 부패한 교회에 진저머리 내고 있던 사람들에게 반박과 비판의 논리를 제공한 것이다.
△루터, 하나님의 칼로 벼려지다.
루터의 95개조 논제가 일으키는 반향을 전해들은 교황 레오 10세의 심기가 불편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맥주로 유명한 독일을 빗대어 교황은 “어느 술 취한 독일 수도승이 지껄이는 헛소리이고, 술이 깨면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교황은 일파만파로 번져가는 95개조 논제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교황과 교회에 불경한 죄를 물어 종교재판에 회부해서 화형 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루터의 글과 사상이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그의 논리를 깨뜨리고 이단이요 거짓말쟁이로 만들어야 했다. 죽이는 것은 그 다음에 해도 될 일이다.
교황은 최고의 로마가톨릭 신학자들을 동원해서 1518년부터 2년 동안 세 차례 신학논쟁을 벌여서 루터를 공략하려 하였다. 하이델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토론회를 준비하려고 루터는 더욱더 성경연구에 매달렸고, 그 결과 자신의 신념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루터는 점점 로마가톨릭신학과 결별하게 되고, 하나님의 칼로 벼려지게 된다. 루터를 하찮은 수도승쯤으로 생각했던 교황 레오가 루터를 “주님의 포도밭에 침입한 멧돼지”라고 불렀을 때 루터가 로마교회에 치명적인 존재임을 예감했을 지도 모른다.
신학토론회를 끝내고 루터는 자신의 생각을 보다 정연하게 밝힐 필요를 느꼈다. 엄청난 집중력과 에너지를 쏟아 부어 1520년에 써내려간 세 편의 논문은 소위 ‘종교개혁 3대 논문’이라고 불리는데, 루터의 신학과 사상의 핵심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첫 논문인 <독일 귀족들에게 고함>(1520)에서 루터는 독일의 영주들과 귀족들에게 지지를 호소한다. “침묵의 시간은 끝났다. 이제는 말해야 할 때다”라고 시작하는 이 논문에서 루터는 교황의 폭정과 탐욕을 보호하고 있는 세 가지 장벽이 있는데 이것은 허탄한 논리로 된 종이 울타리와 같으므로 허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영적 권력이 세상 권세 위에 있다”는 주장이 교황권을 신성불가침으로 만든다. 루터는 영적 계급과 세속적 계급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영적 계급에 속하므로 이 주장은 거짓이라고 말한다(이것이 만인제사장설이다). 둘째,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만인제사장설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제의 중재 없이 스스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기에 이 주장 또한 거짓이다. 셋째, “오직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 루터는 교황은 전혀 개혁할 의지가 없으므로 왕과 영주와 귀족들이 공의회를 소집하여 교회의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논문인 <교회의 바벨론 유수>(1520)에서 루터는 로마가톨릭교회의 근간이며 사제의 절대적 권한의 근거인 성례 문제를 비판하면서 로마교회의 심장을 겨냥한다. 그리고 마지막 논문인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루터가 자신의 명분을 교황에게 이해시키려고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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