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꿈 꿔 온 스토리는 산산이 부서지는 환상일 뿐입니다. 목회자의 꿈은 꿈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요구하심이 아닙니다. 한참 세계를 뒤흔드는 목적 있는 삶이나 열정, 비전, 긍정적인 삶, 이런 거창한 꿈의 소리가 목회자들의 말 못하는 고민이었습니다. 목회자 자신도 따라갈 수 없는 먼 곳에 목표에 돌을 던져놓고 사람들을 몰아붙이는 삶이 자유로울 수 없어서 발생한 중병이 위선이요, 거짓말이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뻥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의 종말은 모라토리움으로 비참함을 체험해야 하는 것을 아는 목회자가 더욱 심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대 사회가 사는 방법이 큰 목소리입니다. 한국적 상황은 교통사고가 나도 목소리 큰 사람이 이득을 본다는 이야기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명함에 이력서를 넣고 다니는 사람 중에 목회자가 많다는 것도 아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덜 하겠지만 흰 와이셔츠 주머니에 경목이라는 꼬리 달린 카드를 넣고 과시하는 목사들이 얼마나 불편한 삶이겠습니까?
과시하려는 꿈이 현실이 되지 않음은 큰 축복일 수 있습니다. 진실은 언제나 치유를 가져오지만, 환상은 고통을 안겨줍니다. 목회자가 어렵다는 것은 환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허망한 환상입니다. 그래서 나의 진실함과 어울리지 않는 옷을 걸치고 다닙니다. 그 옷이 명품이라는 현대사회가 그보다 교회가 걸친 에봇이 되었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어설픈 가운은 벗어야 합니다. 시날산 외투 한 벌을 벗지 않아 돌무더기에 묻어버린 것을 보였을 뿐 아니라 큰소리쳤던 용기가 위선으로 변질되었을 때 죽는다는 것도 보았습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의 삶에 매여 있는 천국의 보상심리가 목사의 주 무기였습니다. 코너에 몰릴 때 강아지는 마루 밑으로 들어가서 죽을 힘을 다해 짖어댑니다. 목회자의 자기 자신의 욕망의 안타까움의 돌파구가 죽은 후 보상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음 이전의 삶을 우선하였습니다. 사는 척 폼을 잡고, 진정 멋있게 보이려고 애쓰며 상패나 학위나 갖가지의 사회적 상징들을 끌어 모으고 유행어를 말하면서도 자신의 뻥 뚫린 허전함을 수단과 비전으로 메우려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지나가 버린 날들은 나의 공력으로 나열할 수 있다면 그는 아직도 꿈을 못 깨고 있다는 사실임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오늘 이야기를 제리 프랭카우서의 저서인 「독수리와 닭」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새들의 왕인 독수리가 새끼 때부터 닭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닭 모이를 먹는 독수리는 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닭들처럼 행동하면서 더 이상 자신이 독수리라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주인은 독수리를 날 수 있도록 유도했습니다.
“넌 독수리야 날개를 펼쳐서 날아보아라”라고 지붕 위에서 그리고 산으로 올라가서 태양을 향해 번쩍 쳐들었습니다. 그러자 독수리는 부르르 떨더니 서서히 날개를 펼치기 시작하여 마침내 승리에 찬 소리를 지르면서 하늘을 향해 날아 올라갔습니다.
독수리는 창조하실 때부터 독수리였습니다. 비록 닭들과 함께 먹고살았지만, 독수리의 본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잠언서 20장 5절에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창조하실 때부터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우주의 모든 것을 다스릴 복을 이미 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무한대함을 품어 올릴 수 있는 것이 명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독수리로 태어난 본성은 그대로입니다. 언제인가 환경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소명하신 것입니다. 목회자가 기업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의 운영방식에 젖어있다고 기업인의 방법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현재 형통하고, 안정된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대로 바보같이 맹종하면서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도 본토 친척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의 궁에서 40년을 살았지만 그대로 둘 수 없기에 광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 사건의 핵심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떠남에 대한 것을 실패로 인식하게 하는 세상적 방법에 아주 약합니다. 독수리처럼 우리는 착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 존재로서의 근원과 본질을 잊어버리는 영적 건망증에 굴복해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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