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 바이러스 때문에 온 세상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한국에서는 이 바이러스 감염을 예방하려고 마스크를 사기 위해서 아우성이고, 각급 학교는 봄학기 개강을 미루고 있고, 회사원들은 재택근무가 늘고 있다. 거리에 사람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경제는 이미 바닥을 쳤고, 민심은 흉용해가도 있다. 두려움이 우리들의 마음과 몸을 휘감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의 역사상 경험해보지 못했던 엄청난 역대급 사건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두려움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언젠가 진압될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갖는 두려움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두려움을 이겨야 한다.
우리 인간에게는 여러 종류의 두려움이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예기치 않은 불행에 대한 두려움, 건강에 대한 두려움, 자식들의 안전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불편한 인간관계로부터 생긴 두려움, 물질의 소유와 손실에 대한 두려움, 전쟁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정신적인 소외감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죄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 이유도 없는 막연한 정체불명의 두려움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우리 인간들은 다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두려움이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우리들의 정상적인 생명활동을 억누르고 억압하여 마비시키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생명체요 대단한 힘을 가진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바이러스는 사단과 비슷한 존재이다. 한번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온통 정신이 마비되고, 손발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한결같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하고, 권면한다. 그렇다면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이며,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며, 우리 마음 가운데 바닷속 같은 평안을 누리고 살 수 있는 것일까?
현대 실존철학자들은 대부분 인간의 불안 문제와 씨름한 사람들이다.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 방식이 불안이라는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죽는다는 유한성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키에케골은 인간의 삶이란 자신의 의지가 개입할 수 없는 어떤 힘에 방치되어 비연속적인 순간으로 떠밀려 움직여 나가는데, 이 가운데서 인간은 고독하고 불안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야스퍼스는 불안을 한계상황이라고 말한다. 어떤 심리학자는 “인간의 불안은 모체의 태반에서 떨어져 나오는 순간 경험하게 되는 심리상태라고 말한다. 안전하고 영원할 것 같던 자궁이라는 환경에서 세상으로 떠밀려 나오는 순간, 태아는 최고도의 불안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눈꺼플을 통해 들어오는 형광등 불빛은 아프고, 정지상태에 있던 폐의 움직임은 울음이라는 언어로 고통을 알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타의에 의해 경험하게 된 세상은 두려움 그 자체다. 인간은 그렇게 불안을 안고 세상과 만난다.”고 말한다 (‘불안은 다스릴 수 있는가?’ 『한국경제』 2015.06.10.). 철학자나 심리학자들은 다같이 인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한계성과 인간으로서의 그 한계성을 극복할 수 없는 무기력함이 그 불안의 시작이고, 인간의 삶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불안에 떨면서 발버둥치고, 불안과 공포 가운데서 죽어간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신을 창조하고, 그에게 평안을 기대하고 잠시 그를 통하여 평안을 누리는 것 같지만 그것은 그들이 만든 우상일 뿐 자기 최면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이며,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 낼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모든 것의 시조가 아담이지만 두러워하는 사람들의 시조도 아담이었다. 아담은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눈이 열리자 그들이 벌거벗을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진노와 징벌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와 그의 아내는 무화과나무의 잎으로 옷을 만들어 벌거벗음을 가렸다. 그때 하나님께서 찾아 오셔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아담이 대답하기를 ‘제가 동산에서 주님의 소리를 듣고, 제가 벌거벗은 것이 두려워 숨었습니다.”(창 3:10)라고 대답했다. 아담은 자신이 벌거벗은 것이 두려웠다고 했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을 자세히 보면 “제가 동산에서 주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했습니다. 벌거벗었기 때문에 내가 숨었습니다.”라고 번역해야 옳다. 한글 개역이나 바른 성경처럼 벌거벗은 것이 두려워서 숨은 것이 아니라,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한 것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무소부재하시며 거룩한 창조주이시오 공의로운 심판자이시다. 그런데 보잘 것 없은 한 피조물이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께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이미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나무의 열매를 따 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다”고 선언하셨다. 이제 아담은 하나님과 함께 동산을 거닐던 아담이 아니다. 아담은 변했다. 아담은 죽을 죄인이 되었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자이다. 이러한 자에게 두려움이 없겠는가? 인류 최초의 인간이 갖게 된 최초의 두려움은 온 세상의 심판주 하나님 앞에서 갖는 죄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죄의식과 그에 수반되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인간이 겪는 최초의 두려움이고 불안이었다.
우리 인간은 다 아담과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기 때문에 아담과 함께 죄인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담과 함께 죽게 되는 것이다. 죄인 아담이 경험했던 죄의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다 함께 경험하고, 함께 무서워하게 된 것이다. 인간이라면 다 죄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람과 연대성을 가진 모든 피조물에게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있다. 두려움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죄의 삯이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죄가 있는 곳에 두려움이 있고, 죽음이 있는 곳에 두려움이 있다.
사람들이 죄의식을 갖거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면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는가? 보통 가까운 친구나 친족이나 상담사를 찾아가거나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서 그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두려움을 이기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잠시 마음이 시원하게 느끼고, 잠을 자고 나면 좀 평안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은 다시 찾아온다. 두려움의 문제는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근원적인 해결은 없다. 설령 자살을 한다고 해도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이 원초적인 두려움과 불안의 문제는 죄와 죽음의 문제와 연결된 일이다. 우리의 불안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자는 바로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자여야 한다. 예수께서 체포되기 전 성만찬 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겨주니, 내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으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마라.” (요한 14:27)
이후 부활하신 예수께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한 20:19, 21, 26)라고 세 번이나 말씀하셨다.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께서 가장 먼저 그의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자기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시며, 하신 말씀이 바로 인간의 불안과 두려움을 해결하셨음을 선언하신 복음의 메시지였다. 불안의 문제가 그만큼 우리 인간들에게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에 그 문제부터 해결하시고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먼저 알리셨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다.
한글개역이나 바른성경, 그리고 대부분의 영역본들의 요한 20:22의 번역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그들에게 (그들을 향하여 「개역」) 숨을 내쉬시며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아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헬라어 성경 원문대로 번역하면 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을 내 쉬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고 되어있다. 결코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아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숨을 내쉬며 제자들을 향하여 성령을 뿜어내신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뿜어내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이 오순절 이전에 받은 첫 번째 성령세례라고 주장한다. 성령세례는 오순절에 한번 있었던 일이다. 두 번, 세 번 계속 받는 것이 아니다.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새언약의 선지자로 세우시고 성령으로 인치신 위임식이다. 따라서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을 “누가의 성령세례”라고 말하는 반면, 이 요한복음 20장에 나오는 이 사건을 “요한의 성령세례”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세례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확신시키며, 두려움 때문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는 사건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나,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쉬지 않았다. 그냥 숨을 쉬셨다. 자신이 죽은 사람이나 유령이 아니라, 숨을 쉬는 살아있는 사람임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킨 것이다. 그의 부활하신 몸이 살아있는 인간들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며, 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불안을 몰아내고 성령을 주신 것이다. 제자들은 바로 사흘 전 만찬석상에서 빵과 포도주로 예수님과 새언약을 맺은 자들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 배신한 것이다. 자기들도 예수님처럼 체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살기 위하여 도망갔을 것이다. 그들은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그들 나름대로의 이상과 꿈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꿈과 이상은 산산이 부숴지고, 물거품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실망하고 좌절하며 불안해하고, 자신들에게 화도 나고, 앞날이 두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죄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원초적인 두려움을 가진 자들이다. 아담처럼 죄의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꽉 차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자신이 죽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을 이기고, 인간의 두려움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들이 평안하도록 성령을 주신 것이다. 제자들의 마음속의 모든 불안을 몰아내시고, 그들 안에 성령이 거하시며, 평안이 그들의 마음을 다스리시도록 성령을 주시는 것이다. 성령을 제자들에게 불어 넣은 것이 아니라 성령을 주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마음의 평안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우리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내재하실 때, 비로소 참다운 평화, 원초적인 영원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해야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게 하는 것인가?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3:15-16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너희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여라. 이 평화를 위해 너희가 한 몸 안에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너희는 감사하는 자들이 되어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안에 풍성히 머물게 하여라. 모든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며,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를 부르며,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하여라.” (골 3:15-16)
여기서 바른성경은 헬라어 “에이레네”
를 “평화”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개역성경은 “평강”으로 번역하고 있다. 평강, 혹은 평안이라는 말이 더 좋을 것 같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평안이 너희 마음을 지배하게 하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마음”보다는 헬라어 원문은 “카르디아”(καρδια) 곧 “심장”(heart)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우리의 심장을 그리스도의 평안이 다스리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생전에는 평안을 약속하셨고, 부활하신 후에는 평안을 주셨다. 바울은 이제 우리가 평안하도록, 평안을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평안을 얻은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께, 그리고 예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안에 풍성하게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과 함께 평안을 주셨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평안이 우리의 마음에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라고 말하면서,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머므르게 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머무르게 하다”라는 말과 “다스리다”는 말이 중요하다. 헬라어 “에노이케오” 라는 말은 “to dwell in,” 곧 “안에 머무르다,” “거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무르게 하라는 말이다. 말씀이 항상 내 속에 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헬라어 “브라뷔오” 라는 말은 마치 재판관처럼 행한다는 의미이다. 통치한다(rule)는 의미이다. 지금까지는 우리의 마음을 “불안”이 다스렸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평안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말씀이 우리 안에 항상 풍성하게 차고 넘치며, 말씀이 나를 다스리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평안이 깃들려면 성령이 우리 안에 머물러야 하고, 성령이 우리 안에 머므르려면, 우리 안에 말씀이 풍성하게 머믈러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말씀과 더불어 감사와 찬송이 넘쳐야 한다. 말씀과 성령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성령과 말씀은 동전의 앞뒤와 같아서 말씀이 있는 곳에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 마음에 평안을 원하다면 말씀이 내 속에 항상 풍성하게 차고 넘쳐야 한다. 성경 말씀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모든 지혜로 말씀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한다. 말씀을 가르쳐면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두려움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내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넘칠 것이다. 내 마음 안팎에서 말씀과 성령과 감사와 찬송이 차고 넘쳐야 우리는 참 평안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 가운데 우리의 심령은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온갖 정체불명의 불안의 종노릇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평안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말씀이 충만하면 성령이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하면 불안과 두려움이 도망간다. 그리스도의 평안은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여러 종류의 두려움이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예기치 않은 불행에 대한 두려움, 건강에 대한 두려움, 자식들의 안전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불편한 인간관계로부터 생긴 두려움, 물질의 소유와 손실에 대한 두려움, 전쟁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정신적인 소외감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죄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 이유도 없는 막연한 정체불명의 두려움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우리 인간들은 다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두려움이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우리들의 정상적인 생명활동을 억누르고 억압하여 마비시키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생명체요 대단한 힘을 가진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바이러스는 사단과 비슷한 존재이다. 한번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온통 정신이 마비되고, 손발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한결같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하고, 권면한다. 그렇다면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이며,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며, 우리 마음 가운데 바닷속 같은 평안을 누리고 살 수 있는 것일까?
현대 실존철학자들은 대부분 인간의 불안 문제와 씨름한 사람들이다.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 방식이 불안이라는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죽는다는 유한성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키에케골은 인간의 삶이란 자신의 의지가 개입할 수 없는 어떤 힘에 방치되어 비연속적인 순간으로 떠밀려 움직여 나가는데, 이 가운데서 인간은 고독하고 불안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야스퍼스는 불안을 한계상황이라고 말한다. 어떤 심리학자는 “인간의 불안은 모체의 태반에서 떨어져 나오는 순간 경험하게 되는 심리상태라고 말한다. 안전하고 영원할 것 같던 자궁이라는 환경에서 세상으로 떠밀려 나오는 순간, 태아는 최고도의 불안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눈꺼플을 통해 들어오는 형광등 불빛은 아프고, 정지상태에 있던 폐의 움직임은 울음이라는 언어로 고통을 알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타의에 의해 경험하게 된 세상은 두려움 그 자체다. 인간은 그렇게 불안을 안고 세상과 만난다.”고 말한다 (‘불안은 다스릴 수 있는가?’ 『한국경제』 2015.06.10.). 철학자나 심리학자들은 다같이 인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한계성과 인간으로서의 그 한계성을 극복할 수 없는 무기력함이 그 불안의 시작이고, 인간의 삶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불안에 떨면서 발버둥치고, 불안과 공포 가운데서 죽어간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신을 창조하고, 그에게 평안을 기대하고 잠시 그를 통하여 평안을 누리는 것 같지만 그것은 그들이 만든 우상일 뿐 자기 최면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이며,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 낼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모든 것의 시조가 아담이지만 두러워하는 사람들의 시조도 아담이었다. 아담은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눈이 열리자 그들이 벌거벗을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진노와 징벌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와 그의 아내는 무화과나무의 잎으로 옷을 만들어 벌거벗음을 가렸다. 그때 하나님께서 찾아 오셔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아담이 대답하기를 ‘제가 동산에서 주님의 소리를 듣고, 제가 벌거벗은 것이 두려워 숨었습니다.”(창 3:10)라고 대답했다. 아담은 자신이 벌거벗은 것이 두려웠다고 했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을 자세히 보면 “제가 동산에서 주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했습니다. 벌거벗었기 때문에 내가 숨었습니다.”라고 번역해야 옳다. 한글 개역이나 바른 성경처럼 벌거벗은 것이 두려워서 숨은 것이 아니라,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한 것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무소부재하시며 거룩한 창조주이시오 공의로운 심판자이시다. 그런데 보잘 것 없은 한 피조물이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께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이미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나무의 열매를 따 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다”고 선언하셨다. 이제 아담은 하나님과 함께 동산을 거닐던 아담이 아니다. 아담은 변했다. 아담은 죽을 죄인이 되었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자이다. 이러한 자에게 두려움이 없겠는가? 인류 최초의 인간이 갖게 된 최초의 두려움은 온 세상의 심판주 하나님 앞에서 갖는 죄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죄의식과 그에 수반되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인간이 겪는 최초의 두려움이고 불안이었다.
우리 인간은 다 아담과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기 때문에 아담과 함께 죄인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담과 함께 죽게 되는 것이다. 죄인 아담이 경험했던 죄의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다 함께 경험하고, 함께 무서워하게 된 것이다. 인간이라면 다 죄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람과 연대성을 가진 모든 피조물에게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있다. 두려움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죄의 삯이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죄가 있는 곳에 두려움이 있고, 죽음이 있는 곳에 두려움이 있다.
사람들이 죄의식을 갖거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면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는가? 보통 가까운 친구나 친족이나 상담사를 찾아가거나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서 그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두려움을 이기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잠시 마음이 시원하게 느끼고, 잠을 자고 나면 좀 평안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은 다시 찾아온다. 두려움의 문제는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근원적인 해결은 없다. 설령 자살을 한다고 해도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이 원초적인 두려움과 불안의 문제는 죄와 죽음의 문제와 연결된 일이다. 우리의 불안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자는 바로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자여야 한다. 예수께서 체포되기 전 성만찬 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겨주니, 내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으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마라.” (요한 14:27)
이후 부활하신 예수께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한 20:19, 21, 26)라고 세 번이나 말씀하셨다.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께서 가장 먼저 그의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자기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시며, 하신 말씀이 바로 인간의 불안과 두려움을 해결하셨음을 선언하신 복음의 메시지였다. 불안의 문제가 그만큼 우리 인간들에게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에 그 문제부터 해결하시고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먼저 알리셨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다.
한글개역이나 바른성경, 그리고 대부분의 영역본들의 요한 20:22의 번역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그들에게 (그들을 향하여 「개역」) 숨을 내쉬시며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아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헬라어 성경 원문대로 번역하면 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을 내 쉬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고 되어있다. 결코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아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숨을 내쉬며 제자들을 향하여 성령을 뿜어내신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뿜어내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이 오순절 이전에 받은 첫 번째 성령세례라고 주장한다. 성령세례는 오순절에 한번 있었던 일이다. 두 번, 세 번 계속 받는 것이 아니다.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새언약의 선지자로 세우시고 성령으로 인치신 위임식이다. 따라서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을 “누가의 성령세례”라고 말하는 반면, 이 요한복음 20장에 나오는 이 사건을 “요한의 성령세례”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세례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확신시키며, 두려움 때문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는 사건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나,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쉬지 않았다. 그냥 숨을 쉬셨다. 자신이 죽은 사람이나 유령이 아니라, 숨을 쉬는 살아있는 사람임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킨 것이다. 그의 부활하신 몸이 살아있는 인간들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며, 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불안을 몰아내고 성령을 주신 것이다. 제자들은 바로 사흘 전 만찬석상에서 빵과 포도주로 예수님과 새언약을 맺은 자들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 배신한 것이다. 자기들도 예수님처럼 체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살기 위하여 도망갔을 것이다. 그들은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그들 나름대로의 이상과 꿈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꿈과 이상은 산산이 부숴지고, 물거품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실망하고 좌절하며 불안해하고, 자신들에게 화도 나고, 앞날이 두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죄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원초적인 두려움을 가진 자들이다. 아담처럼 죄의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꽉 차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자신이 죽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을 이기고, 인간의 두려움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들이 평안하도록 성령을 주신 것이다. 제자들의 마음속의 모든 불안을 몰아내시고, 그들 안에 성령이 거하시며, 평안이 그들의 마음을 다스리시도록 성령을 주시는 것이다. 성령을 제자들에게 불어 넣은 것이 아니라 성령을 주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마음의 평안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우리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내재하실 때, 비로소 참다운 평화, 원초적인 영원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해야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게 하는 것인가?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3:15-16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너희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여라. 이 평화를 위해 너희가 한 몸 안에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너희는 감사하는 자들이 되어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안에 풍성히 머물게 하여라. 모든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며,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를 부르며,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하여라.” (골 3:15-16)
여기서 바른성경은 헬라어 “에이레네”
를 “평화”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개역성경은 “평강”으로 번역하고 있다. 평강, 혹은 평안이라는 말이 더 좋을 것 같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평안이 너희 마음을 지배하게 하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마음”보다는 헬라어 원문은 “카르디아”(καρδια) 곧 “심장”(heart)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우리의 심장을 그리스도의 평안이 다스리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생전에는 평안을 약속하셨고, 부활하신 후에는 평안을 주셨다. 바울은 이제 우리가 평안하도록, 평안을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평안을 얻은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께, 그리고 예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안에 풍성하게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과 함께 평안을 주셨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평안이 우리의 마음에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라고 말하면서,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머므르게 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머무르게 하다”라는 말과 “다스리다”는 말이 중요하다. 헬라어 “에노이케오” 라는 말은 “to dwell in,” 곧 “안에 머무르다,” “거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무르게 하라는 말이다. 말씀이 항상 내 속에 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헬라어 “브라뷔오” 라는 말은 마치 재판관처럼 행한다는 의미이다. 통치한다(rule)는 의미이다. 지금까지는 우리의 마음을 “불안”이 다스렸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평안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말씀이 우리 안에 항상 풍성하게 차고 넘치며, 말씀이 나를 다스리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평안이 깃들려면 성령이 우리 안에 머물러야 하고, 성령이 우리 안에 머므르려면, 우리 안에 말씀이 풍성하게 머믈러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말씀과 더불어 감사와 찬송이 넘쳐야 한다. 말씀과 성령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성령과 말씀은 동전의 앞뒤와 같아서 말씀이 있는 곳에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 마음에 평안을 원하다면 말씀이 내 속에 항상 풍성하게 차고 넘쳐야 한다. 성경 말씀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모든 지혜로 말씀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한다. 말씀을 가르쳐면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두려움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내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넘칠 것이다. 내 마음 안팎에서 말씀과 성령과 감사와 찬송이 차고 넘쳐야 우리는 참 평안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 가운데 우리의 심령은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온갖 정체불명의 불안의 종노릇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평안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말씀이 충만하면 성령이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하면 불안과 두려움이 도망간다. 그리스도의 평안은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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