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규 박사
“호주장로회의 한국선교는 정당한 평가 받지 못해”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상과 한국선교’ 등 저술
서울에서 출생... 미국 프린스턴과 호주 멜버른대학원에서 연구
정병준(鄭丙準)은 1963년 3월 18일, 서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줄곧 수도권에서 자랐고 교육을 받았다. 그는 사회적 기업가로 알려진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 박사가 설립한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과와 또 같은 대학의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M.Div)를 받고, 같은 해 5월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Th.M)를 마친 후, 호주 멜버른신학대학원에서 "이분법을 넘어: 호주 장로교 선교사의 통전적 선교이해와 한국선교에 대한 공헌-1889-1942"이란 제목으로 신학박사 학위(Th.D)를 받고 귀국했다. 이후 과천교화 협동목사, 부천 하늘소망교회 개쳑 설교목사, 세계선교회 이사, 대한예수교장로회역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는 예장통합 교단의 서울장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로, 한국교회사학회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등 학회 활동을 하면서 자신이 밝힌 바와 같이 한국교회 분열 현상에 대한 우려와 대안모색에 온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실증주의적 에큐메니칼 사관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할 정도로 그의 역사관은 폭이 넓다. 호주 멜보른신학대학원에서 연구한 박사학위 논문 역시 이같은 사관에서 작성된 글이기도 하다.
그의 전공분야는 한국교회사와 함께 선교역사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그의 주저로는 (1) 박사학위 논문을 번역한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사상과 한국선교 1889-1942> (2) 한권으로 읽는 기독교 역사와 사상(2016), (3) 강신명 목사의 생애와 사상(2016), (4) 무학교회 60년사(2009), (5) 21C 한국교회 에큐메니칼운동(2008 공저), (6) 한국기독교 탐구(2011 공저), (7) 대한예수교장로회 100년사(2015) 등이 있고, 외에도 10여권의 번역서가 있다.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에 대한 이해 향상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2007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출간했는데, 당시 연구소 소장 김흥수 박사가 간행사에서 밝힌 글을 여기에 인용함으로 정병준 박사의 사관을 엿보기로 하겠다. "이 책은 그동안 한국교회사 연구자들이 거의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의 한국선교에 대한 연구라는 점에서 기존의 연구자들과 구분되며, 연구 방법이나 연구 범위에 있어서도 기존의 연구들과 다른 점이 있다. 이 책은 연구 시기를 호주의 첫 선교사가 내한하누 1889년부터 선교상황의 악화로 호주선교사들이 철수하는 1942년까지의 비교적 긴 시기를 연구하고 있으며, 여섯 선교사들을 연구할 때는 젠다 연구(Gender Study) 관점을 적용하여 여성선교사들의 시각과 소리를 찾아내고 있다. 호주장로교 소속의 존 브라운 박사(Dr. John P. Brown)는 이 논문은 한국과 호주의 범위를 넘어서서 당시의 세계적인 사건들과 사회운동들, 그리고 세계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국제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성찰,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 1921년 뉴욕 국제선교대회, 1928년 예루살렘 국제선교대회 등을 통해 광범위한 콘테스트 안에서 호주선교부와 그 선교정책의 발전을 해석하고 있는 점이 두더러진다. 한국에서 미국장로교 선교부의 큰 규모와 광범위한 활동들에 대한 많은 책들이 기록되었다. 또한 미국에서 공부한 많은 한국인 학자들은 미국선교부들이 남긴 기록들을 다루어왔다. 그러나 호주선교부의 기록들을 토대로 활동한 장로회신학대학에서 가르쳤던 왕길지(Dr. Gelson Engel)와 권임함(Rev. Frank Cunningham), 그리고 세브란스 의과대학에서 가르쳤던 거얼휴 의사(Dr. Bugh Curroll)와 마라연 의사(Dr. Charles Mclaren)의 활동을 제외하고는 주로 경남지역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이 한국교회사 안에서 거의 알려지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교회와 경남지역의 그리스도안들에게 커다란 손실이었다. 이런 면에서 고신대학교 이상규 박사의 연구 작업은 이러한 공백을 부분적으로 채워왔다. 이번에 학위 논문을 쓴 정 박사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호주장로교 선교사들과 그들의 선교활동에 대한 이해를 크게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p.6 참조).
서울 중심의 역사이해가 경남을 중심한 호주선교 연구에 대한 방해
정병준 박사는 그의 책 서론에서 한국교회사를 논하면서 왜? 무엇을? 어떻게? 연구하며 기술해야 할 구조를 제기하였다. 그는 한국교회사 연구는 선교역사학자 라투레트(K.S. Latourete) 교수의 영향을 받은 역사가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전제 한 후, 1927년에 백낙준 박사의 한국개신교사를 비롯해, 그의 제자 민경배 박사의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기술한 민족교회 사관을 선언한 1968년을 기점으로 1979년부터 민족주의적 사관이 과도하게 엘리트 중심이라고 비판하고 나선 한신대학교의 주재용 박사가 민중교회사를 간행하면서 한국교회사를 민중(民衆)의 역사관으로 해석하려는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일부 신진 소장파 교회사가인 감신대학교의 이덕주 박사가 시도하는 토착교회의 역사관을 통해 역사를 기록하려고 하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의 전통과 함께 토착 종교문화의 특별한 가치를 수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전통과 토착문화 사이의 관계를 단절. 배척의 관계가 아니라, 연결. 완성의 개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같은 견해는 복음을 전파한 선교사들의 공헌을 인정하면서도 복음을 수용. 해석. 적용하는 토착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에 무게를 두고 기술한다. 또한 이들은 피선교지의 정치. 사회적 상황뿐 아니라 토착종교와 문화적 상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들은 사회정의와 해방의 문제와 함께 토착종교. 문화전통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선교사적(宣敎史的),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민중주의적(民衆主義的) 관점을 넘어서서 한국토착문화를 교회사 연구에 수용하는데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준 것은 사실이다. 한국교회사 연구에 어떤 접근 방법을 사용하던 간에 한국교회사 연구는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과 그들의 활동에 대해 보다 철저한 연구를 요청하는데, 그것은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의 기초를 놓은 일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역사 연구에 있어서 역사적 사건들은 늘 새로운 분석과 해석을 동반한다. 역사는 해석이다 라는 말의 뜻이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에 앞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실증적인 검증은 반드시 필요하며, 그것이 이루어 질 때 분석과 해석이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한국에서 호주장로회의 한국선교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가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이유가 아닌가 분석해 본다. 첫째, 국내에서 이루어진 대부분의 한국선교에 대한 연구가 미국선교사들에 편중되어 있다. 미국선교사들은 카나다와 호주선교사들보다 일찌기 한국에 왔고, 그 인력과 지원도 압도적으로 우세하였고, 선교지역 또한 광범위했다. 게다가 한국교회 사가들의 많은 숫자가 미국에서 훈련을 받았고, 그들의 역사관과 사용한 역사 자료들도 미국 중심적이었다. 둘째, 서울 중심적인 역사이해가 한반도 남쪽 끝에 위치한 경상남도(부산을 포함)에서 활동한 호주장로회에 대한 연구를 방해했다. 1950년-1980년대에 이르는 동안 한국의 민중들은 장기간의 독재로 고통을 겪었고, 한국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의 발전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의 통제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회적 경험은 향토사 연구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셋째, 한국교회와 호주교회 사이에 에큐메니칼 관계의 미성숙이 두 교회 사이에 학문적 교류를 방해하였다. 일제의 억압과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한국에서 철수했던 호주선교사들의 일부가 1947년부터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6.25 전쟁의 발발로 다시 철수했고, 휴전으로 전후에 선교사들이 재입국하였다. 이외에도 호주장로회는 한국으로 새로운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미북장로회보다 카나다와 호주장로회 역사 연구 부진의 원인을 그는 이와같이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다.
1977년에 이르러서는 호주장로교회는 감리교와 회중교회가 연합하여 호주연합교회(Uniting Church of Australia)로 발전하였다. 연합교회로 발전한 이후에도 선교사역은 계속되었다. 아쉽게도 이렇게 명맥은 유지되었으나 한국과 호주 두 교회 사이에 신학적. 인적 교류는 이민교회를 제외하고는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아쉬운 일로 남아 있다. (정병준, 같은 책 pp.16-18).
호주기독교는 복음주의적 에큐메니칼
정병준 박사는 한국교회사 연구자들이 무엇을(What) 연구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는 호주장로회 선교사들을 복음주의 에큐메니칼의 특성을 지닌 하나의 집단으로 보고, 그들의 통전적 선교이해와 형성과정을 연구하고, 그들이 1889년부터 1942년 어간 자신들의 신학사상에 근거해서 한국에서 수행한 선교정책과 선교활동을 연구해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한 후 첫째, 빅토리아 장로교회가 어떻게 복음주의 에큐메니칼 기독교에 도달하였는가? 둘째, 호주장로회 선교사들은 선교를 위해 그 복음주의 에큐메니칼 유산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셋째, 그들의 선교정책과 선교활동 안에서 발견되는 선교사상은 무엇인가? 넷째, 그들은 한국에서 어떠한 종류의 신학적 이분법들을 극복했고, 어떻게 극복했는가? 다섯째, 호주장로회는 한국에서 무슨 결과를 얻었는가?이다.
그래서 그는 연구 시기를 헨리 데이비스(Rev. Joseph Henry Davies)가 한국선교의 모험을 감행하는 것에서 출발해서 일제에 의해 추방된 마지막 5명의 호주선교사들이 멜버른에 귀국하는 싯점을 끝으로 삼고 있다. 이 기간 총 78명의 선교사들이 한국을 섬겼다. 이 시기는 일제의 통치기간(1910-1945)과 호주기독교 해외선교의 전성기와 겹쳐 있지만, 이 시기는 호주장로회의 초기 한국사역의 특징을 연구하는데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시기로 규정한다.
그는 또 어떻게(How)라는 명제를 제시해 자신의 연구를 진술하고 있다. 즉 문헌연구(文獻硏究)에 근거한 사회역사적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교회선교잡지, 공식보고서, 선교자료, 선교사 일기, 편지, 인터뷰를 통해 얻어진 자료들을 분석해서 선교사들의 사상과 선교정책의 유형과 특성을 일반화 하는 귀납적인 방법을 적용한다. 그러나 증거를 찾아내는 과정은 연구의 목적을 염두에 두고 행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연역적 과정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역사연구는 엄밀하게 연역과 귀납적 방법을 구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저자의 연구가 지닌 특징 중 하나는 호주선교사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파악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시도는 본국 선교본부와 선교사들 사이의 관계, 선교사들의 사회적 계층, 그들의 집단적인 신학과 사상을 이해하는데 효과적이고, 특별히 이 시도는 그들이 복음주의 에큐메니칼 신학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을 발견케 해주었다고 한다. 최근까지 한국선교에 대한 연구들은 선교사 개인과 그들의 사역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류대영 박사 같은 이는 한국에 온 미국선교사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보고 미국종교사의 탈식민지주의 관점에서 그들의 중산층적 성격을 규명하는 연구를 수행하기도 한다. 이러한 연구야 말로 한국선교사(史) 연구에 새로운 접근 방식을 제공했다고 보여진다. 하나의 집단으로서 선교사에 대한 연구는 그 집단 내부에 존재하는 세부 단원들에 따라 서로 다른 인식론적 존재론적 접근을 요청하기 때문에 다양한 분석들이 필요하게 된다.
호주선교사들은 이런 종교문화적인 환경속에서 은둔의 세계 속에 잠들어 있었던 한국에 와서 복음주의적 에큐메니칼 유산을 통해 기독교의 구원 메시지를 증거하였다. 호주선교사들의 복음주의적 에큐메니칼 기독교와 한국 경상남도 현장과의 만남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만남의 작용에서 선교사들의 통전적 선교이해가 더욱 깊어졌다고 보여지기도 하다. 정 박사는 그의 글 마지막 결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호주장로회 선교사역의 열매보다는 호주장로교회의 역사적 뿌리의 신학이 무엇인가에 강조점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