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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나이가 나를 안아주다
    “20대, 30대 그리고 40대에도 나무의 나이테처럼 나이는 나와 함께 했고 나를 안아주고 있었습니다. 나의 나이를 사랑해주며 나답게 나이 드는 법, 이른 나이도 늦은 나이도 없습니다.” 이는 전 KBS 9시 뉴스 앵커 신은경 교수님의 저서 ‘내 나이가 나를 안아 주었습니다’라는 책의 내용에 나오는 글입니다. 신은경 교수님은 1981년 KBS 8기 아나운서로 선발 되었는데 3개월 연수 후 곧바로 KBS 9시 뉴스 앵커로 발탁되어 12년 동안이나 9시 뉴스를 진행하였던 앵커 역사상 우리 국민들에게 불멸의 전설로 기억되고 있는 분입니다. 온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아나운서를 꿈꾸던 모든 여자 후배들의 우상이 되었던 그녀도 이젠 인생의 하프 타임을 지나 회갑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갑을 맞으며 쓴 책이 ‘내 나이가 나를 안아 주었습니다’(마음의 숲)이었습니다. 신은경 교수님께서 고영기 목사님을 통해서 이 책을 저에게 전달해 주셔서 비행기에서 읽었습니다. 그분은 현재 교회 권사인데 저도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얼굴에 잔주름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젊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찌 그 분이라고 해서 삶의 고통이 없었겠습니까? 화려한 앵커의 자리에서 물러나서 흙 묻은 금수저의 삶을 살아왔을 터이니 말입니다. 더구나 남편의 지역구였던 서울 중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나와 낙선의 쓴 잔을 마셨기에 권사님 역시 절망의 광야를 걷고 눈물을 강처럼 흘렸겠지요. 아니, 남모르는 절망의 강을 건너기도 했을 겁니다. 어쩌면 그녀의 가슴에도 상처가 돌처럼 박혀 있을지도 모르고 그 돌들 위로 차가운 폭풍이 불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권사님은 “내 나이가 나를 안아 주었습니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저 역시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 은수저도 아닌 흙수저로 태어났습니다. 나무로 말하면 못생긴 나무로 태어난 것이죠. 게다가 제 삶의 광야에는 고난의 바람이 얼마나 모질게 불어 닥쳤는지 모릅니다. 겨울이면 못 생긴 나무 사이로 눈보라가 얼마나 많이 불어 닥쳤는지요. 돌이켜보면, 20대, 30대, 40대 아니 50대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제 인생이 편안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친 광야 길을 걸어왔습니다. 항상 삶의 고난, 역경과 싸워야 했고 휴식은 뒤로하고 말갈기를 휘날리며 황야를 달리는 군마처럼 달리고 또 달려왔습니다. 어쩌면 저 살벌한 광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검투사처럼 살아오기도 했고요. 때로는 성경의 가치와 진리를 지키기 위해 격문을 쓰다가 격문으로도 부족하여 사자후를 토해내느라 성대 폴립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아야 했지요. 그래서 벙어리가 되어야 했지만 하루에도 문자를 300여 통이나 날려대며 쉼없이 사명의 삶을 처절하게 살아왔던 인생 여정들... 그래도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제 나이가 저를 안아주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마치 소나무의 나이테가 자신의 몸을 따뜻하게 안아주듯이, 저의 나이가 저의 삶을 안아주고 또 안아주었습니다. 더구나 누군가에 의해 베임 당하지도 않고 이대로 서서 산을 지키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탄은 저를 쓰러뜨리려고 온갖 고난의 바람을 불게 하였습니다. 이리 저리 흔들어보고, 때론 뿌리 채 뽑아 버리려고 하였지만 오히려 저는 더 굳건히 서 있습니다. 요즘은 사탄이 주위 사람들을 통해 저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제 안에 상처의 가시를 넣어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 나이가 저의 마음을 안아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어찌 제 나이만이 저를 안아 주겠습니까? 바로 주님께서 제 나이를 통해 저를 안아주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셨던 것이죠. 담임목사를 향한 독점욕이나 때론 사일로 이펙트(부서 이기주의) 등을 통해 사탄이 아무리 저의 마음을 힘들게 할지라도, 주님께서 제 나이를 통해 저를 안아주게 하고 위로를 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성경을 보더라도 그처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야곱과 요셉, 그리고 모세와 다윗 등도 주님께서 그들의 나이를 통해서 안아주고 위로해 주셨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들의 삶을 끝까지 지켜주셨던 것처럼, 주님께서 이제 막 인생의 하프 타임을 지나가고 있는 저에게도 그런 은혜를 주시고 계십니다. 이미 전에도 그런 은혜를 주셨던 주님께서 지금도 아니, 저의 인생의 마지막까지 그런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지금껏 제 나이가 저를 안아 주었듯이 앞으로도 나이가 먹을수록 주님께서 제 인생이 더 무르익고 아름다운 결실을 맺도록 제 나이를 통해 더 그런 은혜를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아니, 저와 함께 대부분 인생의 하프타임을 살고 계실 우리교회 성도님들에게도 주님께서 여러분의 나이를 통해 여러분을 안아주시는 은혜를 경험하시길 기도합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1-27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말모이와 나
    ‘말모이’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선광현 목사를 비롯, 제 주변 분들이 그 영화를 보고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담임목사님이 생각났습니다. 목사님, 시간이 되시면 꼭 말모이 영화 한 번 보세요.” 그래서 몸살 중에도 사명감을 가지고 그 영화를 봤는데, 저 역시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젖었습니다. “아, 말과 언어를 지킨다는 게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사상과 정신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싸운다는 게 얼마나 고귀한 일인가.” 말모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 이름인데 “말을 모은다”는 뜻의 순우리말입니다. 주시경을 중심으로 국어사전을 편찬하려 하였으나 그가 사망하고 관련자들이 망명을 하면서 미완으로 그치고 맙니다. 영화는 그들이 끝내지 못한 말모이를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완성해 가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류정환은 조선어학회를 이끌어가는 대표입니다. 그는 대표적인 친일파인 경성제일중·고 이사장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라며 유학까지 다녀옵니다. 그런데 공부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류정환은 조선의 아이들이 일본 이름과 일본말을 쓰며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말을 지켜야겠다고 다짐하며 조선어학회의 수장이 되어 말모이를 완성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는 그를 불러서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한글사전 같은 것을 만들려고 하느냐. 다치기 싫으면 쓸데없는 짓 그만 하라”고 다그칩니다. 그러나 류정환은 포기하지 않고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서 사람들을 모으고 말모이를 완성하는데 진력합니다. 그런 그가 일본 경찰들에게는 눈엣가시입니다. 그래도 류정환은 조선어학회 동지들과 말모이 편찬을 멈추지 않고 진행합니다. 그들의 삶 하루하루는 참으로 처절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일본경찰에게 원고도 다 빼앗겨 버리고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던 조선생이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죽게됩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류정환은 조선생이 훗날 어떤 일이 있을지 몰라 말모이 원고를 일일이 다 손으로 기록하여 따로 보관해놓은 원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그 원고를 중심으로 마지막 편찬을 앞두고 전국의 국어학자와 교사들이 비밀리에 모여 공청회를 갖게 됩니다. 그때 류정환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말은 민족의 정신이고,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말이 모이고, 말이 모이는 곳에 뜻이 모이고, 뜻이 모이면 우리나라의 독립도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공청회가 끝나갈 무렵, 일본 경찰들이 급습을 합니다. 류정환은 조선어학회에서 허드렛일을 도왔던 김판수에게 어떻게든지 말모이 원고를 지켜달라고 하면서 맡기고 서로 흩어집니다. 류정환은 일본 경찰에 잡혀 투옥되고, 김판수는 말모이 원고를 가지고 도망가다 막다른 골목에 갇히게 됩니다. 김판수는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말모이 원고를 한 창고 속에 숨겨 놓은 후, 총에 맞아 죽음을 당하지요. 그리고 그가 숨겨 놓은 말모이 원고는 해방을 맞은 1945년 9월 8일, 서울역 운송창고에서 발견됩니다. 그 길고 긴 시련과 고난이 지난 후,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조선말 큰 사전'이 편찬됩니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식민지 국가로서 완벽하게 모국어를 회복한 나라는 우리나라가 거의 유일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모국어 사전을 갖고 있는 나라는 세계에 20여 개국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일제강점기 아래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선각자들의 투혼이 얼마나 위대하고 고결한 것입니까?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말과 글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저도 어떻게든지 글을 쓰고 책을 남기려고 노력하는 목회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언젠가 저는 떠나더라도 저의 글은 남아서 사상과 정신의 토양이 되고 밑거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사상전, 문화전의 중요성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영국교회가 소멸하고 미국교회가 쇠락해 간 이유는 그들의 말과 글을 빼앗겼기 때문이 아닙니까? 더 이상 성경을 말하지 못하고 기독교 언어를 쓰지 못하면서 점점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기독교적 사상과 정신의 뿌리가 뽑혀 나가 버린 것입니다. 제가 수많은 오해와 공격을 받으면서도 한국교회 생태계를 보호하는 공적 사역에 앞장서는 이유도 성경의 진리를 지키고 한국교회의 말과 언어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반기독교 세력의 최종 목표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말과 글을 빼앗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우리 모두 성경의 진리와 정신을 담은 말모이를 지키는데 힘을 모아야합니다.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이 모이는 곳에 성경의 진리를 외치는 말이 모이고, 그 거룩한 말이 모이는 곳에 한국교회와 건강한 사회를 지키려는 뜻이 모이고, 그 뜻이 모이면 한국교회도 능히 지켜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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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1-20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선각자 성도들에게
    작년에 김대중 정부 때 문화관광부장관을 하셨던 남궁진 전 장관님과 김옥두 전 의원님을 모시고 식사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분들은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 상황에서도 정말 충심을 다해 DJ를 주군으로 모시고 따랐다는 것입니다. DJ가 대선에서 낙선한 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으로 연구하러 갈 때도 끝까지 마음 변치 않고 모셨다는 것입니다. DJ에게 아무런 미래가 안 보이고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오직 그 분을 모시는 것을 영광과 보람으로 여기며 따랐다는 것이죠. 특히 신군부시절에 DJ와 함께 교도소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해도 그 자체를 영광과 기쁨으로 여기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분들은 DJ가 서거한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매주 수요일이면 동작동 국립묘지에 모여 DJ를 추모하며 그 분의 정신과 사상을 이어가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탄복 하였습니다. ‘아, DJ가 예수님도 아닌데, 어떻게 한 사람을 이토록 사랑하고 충성하며 따를 수 있단 말인가. 이미 이 땅을 떠났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변함없이 충정을 가지고 모실 수 있단 말인가.’ 그 분들의 그 지조와 절개, 충정 앞에 제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남궁진 전 장관님께서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현자가 있는데, 가르쳐주지 않는데도 싹이 나는 것을 보고 미래를 아는 사람을 ‘명자’라고 하고, 싹이 보이지도 않지만 기미만 보고도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을 ‘철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싹도 안 나고 기미도 안 보이는데 미래를 꿰뚫어보고 예측하는 사람을 ‘선각자’라고 하는데, 우리가 모셨던 DJ가 바로 위대한 ‘선각자’이셨지요.” 그래서 그들은 DJ를 따른다고 해서 아무런 미래도 보장되지 않고 희망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런 위대한 선각자를 주군으로 모시고 섬기며 따랐다는 것이죠. 그랬더니 어느 날인가는 자기가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위대하고 아름다운 분들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우리 교인들도 명자이고 철인이고 선각자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실 요즘 성도들을 보면 과거처럼 목숨 걸고 은혜 받으려고 하지도 않고, 허리띠를 졸라매며 헌신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다들 편하게 신앙생활하려고 하고 심리적 위로나 위무만 얻으려고 교회를 나갑니다. 조그만 어려움이나 희생해야 하는 기미만 보여도 교회를 옮기거나 아예 안 나가 버립니다. 그런데도 우리 교회 성도들은 지금까지 무조건 하나님을 섬기며 주의 종이 하자는 대로 따라주었습니다. 제가 위대한 선각자가 아닌데도 제가 하자는 대로 하고 가자는 데로 따르며 수많은 공적사역을 섬겨왔습니다. 특별히 작년에도 30주년을 맞아 허리띠를 졸라매고 얼마나 헌신하였습니까? 그런 성도들의 헌신으로 여러 가지 섬김과 나눔 행사를 하여서 교회의 이미지를 아름답게 고양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역대 송구영신예배 중에 가장 많은 성도들이 나왔고 그 피곤한 중에도 신년축복성회에 참석하며 미래에 받을 축복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선각자적인 믿음이 아니면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 교인들은 최소한 영적인 철인이고 선각자이지요. 이런 성도들이 모여서 이 시대에 찾기 힘든 교회, 야성적 믿음과 뜨거운 열정, 눈물의 헌신이 있는 대단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성도들을 하나님이 반드시 위로하시고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오죽하면 제가 30주년 다큐에서 이렇게 고백을 하였겠습니까? “훗날 천국에 가면 제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여러분을 섬기고 싶습니다. 여러분을 만난것이 제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고 선물입니다.” 2019년이라는 새로운 미지의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해에 곧바로 눈에는 보이는 것 없고, 귀에는 들리는 소리 없다 할지라도 첫 새벽길을 떠나는 선각자의 시린 가슴과 젖은 눈동자로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복을 주실 것입니다. 새 마음, 새 존재가 되어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을 통하여 이루시기를 소망합니다. 새해에도 우리 모두가 선각자 성도가 되고 선각자 교회가 될 때 하나님께서 요셉처럼 정수리의 축복을 주시고 갈렙처럼 후대에 반전의 축복을 누리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 선각자 성도여, 선구자 교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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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1-13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퍼스트 처치, 퍼스트 리더
    우리 교회는 개척 교회 때부터 송구영신예배와 신년축복성회로 새해를 시작했습니다. 지난 주도 만 명이 넘는 성도들이 교회 본당과 비전홀, 교육관을 가득 채우고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며 새해를 맞았습니다. 특별히 다섯 가지 기도제목을 적은 신년소원예물을 드리고 축복안수기도를 받으며 약속의 말씀을 뽑았습니다. 항간에 약속의 말씀을 무슨 뽑기나 하는 것처럼 지나치게 예언적이거나 마술적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니죠.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올 한 해 동안 약속으로 주시고 동시에 명령과 사명으로 주신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으로 이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고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응답으로 이루고 성취하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요 몇 년 동안 약속의 말씀이 대부분 사상전, 영전을 위한 엄중하고 무겁고 비장한 말씀들이 많이 뽑혔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약속의 말씀을 뽑기 전에 올 해는 제발 좀 평안하고 형통하고 위로해 주시는 말씀을 뽑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올해는 좀 평안한 말씀 좀 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손정완 장로님이 들고 있는 말씀함에서 약속의 말씀을 뽑았습니다. 그랬더니 시편 138편 7절의 말씀이 나온 것입니다.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저는 이 말씀을 보자마자 너무 마음이 무거운 것입니다. “올해도 또 힘들고 어려운 사상전, 문화전, 영전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 보구나...” 그때 저는 아브라함을 생각해 봤습니다. 아브라함 당시에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이나 다름이 없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가나안 땅은 호전적인 족속들로 가득하였습니다. 그래서 데라는 하란 땅에 그냥 머물러 버린 것이죠. 데라는 창조적 퍼스트 리더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많은 도전을 해야 했고 큰 희생의 대가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창조적 퍼스트 리더가 된 것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에게 정말 두렵고 무서운 세계요, 엄청난 모험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오늘날도 데라의 라인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따라간다고 하지만 하란 땅 정도에서 머물러 버리고 맙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창조적인 퍼스트 리더로 살아갈 수가 없고 기껏해야 패스트 팔로워의 삶을 삽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세계가 미지의 세계요, 모험의 세계요, 두려움의 세계이지만 거룩한 퍼스트 리더의 눈으로 보면 가나안 땅이야말로 반드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다스려주시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저 역시 지나온 수 년 동안 개교회를 넘어서 많은 공적 사역을 하다 보니까 많은 공격을 받았지요. 특별히 작년 같은 경우는 더 그랬습니다. 명성교회가 한참 공격을 받을 때 우리가 비난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교회이고 거룩한 영광성과 거룩성을 지닌 교회라는 점을 감안하면서 비판하자는 글을 썼습니다. 그랬다가 얼마나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까? 또 제가 남북화해와 평화를 강조하는 설교를 많이 하고 시도 쓰고 책도 내니까 몇몇 극단적인 보수분들은 무슨 좌파 목사라고 하면서 공격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동성애 차별금지법이나 NAP 등을 반대하는데 앞장서니까 몇몇 극단적인 진보분들은 꼴통 보수 목사라고 공격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목회자란 절대로 어느 정파에 속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로지 성경적 가치관과 세계관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목사로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욕먹을 각오도 하며 사역을 해야 하겠지요. 사실 우리 교회가 퍼스트 처치가 되고 제가 퍼스트 리더가 되어 활동을 하다 보니 행복한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말씀을 보면 올해도 퍼스트 리더로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욕도 먹고 저를 향한 안티도 더 많아질지도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저를 붙드시고 제 안티들의 분노를 막아주시고 당신의 오른손으로 저를 구원해 주시고 오히려 존귀하게 세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올해 모래바람 부는 길고 긴 황야를 걸을지라도 주님이 저와 함께 하시고 주의 오른손이 저를 구원하시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묵묵히 제게 주어진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그것이 저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고 명령이며 사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올 한 해도 우리 모두 퍼스트 처치를 이루고 퍼스트 리더가 되어 함께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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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1-06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속리산 골짜기에서의 사색
    죄송합니다 너무도 오랜만에 와서 마음이 때 묻다 보니 몸도 함께 때에 묻혀 이리도 오랜만에 왔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쉴 새 없이 전화하고 사람 만나느라 분주하기만 했던 지난 삶들이 (중략)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처음에 느꼈던 사랑 그 초심을 회복하여 다시 당신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소강석 시 ‘산에 와서’- 이는 제가 오래 전에 쓴 ‘산에 와서’라는 시입니다. 시를 썼던 당시도 엄청 바쁘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산은 항상 제 삶의 원형이요 근원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산에만 가면 그토록 무거웠던 어깨가 가벼워지고 머리가 얼마나 상쾌해지는지 모릅니다. 과학적으로 분석하면 음이온이 많아서 그렇다고 하겠지만 음이온의 이론을 넘어서 산은 제 삶의 근원이자 주님의 품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올해는 얼마나 바빴던지 그토록 좋아하는 산을 제대로 못 가봤습니다. 설악산 대청봉을 한 번 오른다는 게 일정조차 못 잡았고 제주도에 갔을 때도 시간이 없어 교래리 원시림을 뛰어다녔습니다. 산은 뛰어 다니는 게 아니라, 고도원 이사장님의 가르침대로 걷다가도 멈추고 사색에 잠겨야 합니다. 그러나 저의 산행은 제 삶의 여정처럼 멈추기는커녕 뛰어다녀야 했습니다. 아마존에 갔을 때도 배를 타고 강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며 밀림의 모습을 봤을 뿐, 밀림 속 깊은 길을 제대로 걷지도 못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아쉬운지 모르겠습니다. 돌이켜보니 올해는 가까운 불곡산도 못 가봤습니다. 올해 고작 간 곳은 고도원 이사장님이 운영하시는 충주의 ‘깊은 산속 옹달샘’입니다. 그곳에서 고도원 장로님을 따라 ‘용서의 길’을 잠시 걸으며 산책 명상을 배웠습니다. 그 후부터는 교회 뒷산을 갈 때도 산책로가 늘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어제 보던 나무가 다른 나무로 보였고, 엊그제 밟았던 흙길과 나무들이 새롭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연말정책당회 수련회를 속리산으로 갔습니다. 저녁강의와 오전강의를 마치고 점심 먹기 전에 잠시 장로님들과 옛날 세조가 걸었던 길을 걸었습니다. 왕복 6km를 걷는 동안 저는 황홀경에 빠질 정도였습니다. 수 백 년 된 소나무가 속리산의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런 소나무들이 마치 로뎀나무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니 세조가 걸었던 길은 주님과 함께 걷는 오솔길이 되어 버렸습니다. 장로님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면서도 시선은 소나무로 갔고 전혀 새로운 마음으로 나무들과 대화하곤 했습니다. 갑바도기아 신학자 닛사의 그레고리가 청결한 마음을 가지면 자연의 나무와 꽃과도 대화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저도 속리산 골짜기의 소나무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지요. “소나무야, 너는 어쩜 그렇게 잘 생겼니, 그토록 잘 생겼는데도 누가 베어가지도 않고 용케도 산을 지키고 있구나.” 그러다가 또 못 생긴 소나무를 향해서는 이렇게 격려를 하였습니다. “못 생긴 소나무야, 어쩌면 너는 나와 똑같이 생겼니? 그래도 너는 속리산을 지켜주고 나는 한국교회를 지키고 있으니 둘의 처지가 똑같구나...” 흙길 위에는 국립공원에서 멍석같이 생긴 코아네트를 깔아 놓았습니다. 우리가 흙으로부터 온 인생인데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가 돌아갈 흙길마저도 함부로 대할 수가 없는데, 코아네트가 흙길을 보호해 주고 있으니 너무 고마울 뿐이죠. 돌아오는 길에 꽁꽁 얼어붙은 호수가 보였습니다. 장로님들은 위험하다고 얼음 위로 가지 말라고 했지만 제가 보니 깨질 얼음판이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얼음 위에 서니까 얼마나 미끄러운지 엉덩방아를 찧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예 그 얼음판 위에 누워 버렸습니다. 하늘의 해가 눈이 부셔서 눈을 뜰 수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 저수지의 얼음판에서 썰매를 타던 추억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습니다. “아, 좋다. 너무 좋아.” 저는 50대 중후반의 목사가 아닌 순수한 어린아이가 되어 얼음판에 누워 버렸습니다. 자꾸 눈물이 나려고 했습니다. “아, 오늘 이런 시간을 갖네. 너무 황홀해서 눈물이 나려고 해. 나의 생이 이토록 눈부실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저는 그 자리에서 황홀감만을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빨리 서울로 올라가 약속된 일정을 지켜야 하고 다시 교회로 가서 수요예배를 인도해야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해 동안의 저의 삶은 전령을 왕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황야를 달리는 한 마리의 군마와도 같았습니다. 그래도 모처럼 짧은 산책 속에서 깊은 사색을 할 수 있었고 눈부시고 감격어린 순간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목양칼럼을 쓰면서 내년은 어떤 해가 될지 이런 눈부시고 감격어린 순간을 얼마나 누릴 수 있을지 기대를 해 봅니다. 무엇보다 한 해 동안 사랑하는 성도들이 제 옆에 있어주어 너무나 행복하고 또 행복했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8-12-30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진심과 중심
    제가 몇 주 전 한국교회 주요 목사님들과 함께 민주평통 김덕룡 수석부의장님과 조명균 통일부장관님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평화의 꽃길을 열어 가시는데 수고가 많으신데요, 저는 조금 염려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 대한민국과 북한이 좋은 관계를 이루고 남북의 정상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들 한미관계가 돈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정부가 북한측을 향하여 주는 애정을 미국에도 좀 전달을 하면 좋겠습니다. 말로만 미국과의 관계를 잘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진심어린 마음과 진정성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과연 트럼프 정부가 우리 정부를 얼마나 믿고 신뢰하는가 생각해 보셨는지요. 현실적으로 미국의 도움 없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이루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도 작년 구구절에 북한을 방문하려고 하는데 트럼프가 못 마땅하게 여기니까 못 간 것이 아닙니까? 중국도 트럼프의 눈치를 보는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물론 지나치게 눈치를 보자는 말은 아닙니다. 무조건 친미주의로 가자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우리 민족끼리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룬다 하더라도 대북제재가 풀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김정은 위원장도 CVID를 단 한 번에 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이 단계적으로 핵을 포기할 때마다 단계적으로 제재를 풀 수 있도록 우리 정부가 북한도 설득하고 미국과 공조를 잘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남북문제나 한미관계에 있어서 한국교회만큼 요긴하게 쓰임 받을 도구는 없다고 봅니다. 아무리 정부가 노력을 해도 정부와 정부끼리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한국교회를 소통의 수단과 도구로 잘 사용했으면 합니다. 또 하나, 현 정부는 NAP(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를 속도를 내서 통과시켰는데 우려가 큽니다. 물론 NAP 자체는 우리 대한민국에 필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성평등을 비롯하여 독소 조항으로 발전할 요소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대로 간다면 언젠가 남북이 평화공존 상태에서 더 깊은 교류를 하게 될 텐데 과연 북한 주민들이 NAP를 금방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진정한 남북평화와 교류를 생각한다면 이런 부분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제가 봐도 논리적이고도 일목요연하게 발언을 한 것 같았습니다. 같이 동석했던 목사님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소 목사님, 속이 시원했어요. 역시 소 목사님이예요.” 그런데 며칠 후 통일부장관을 만나고 온 목사들을 좌파목사라며 문재인 정권의 하수인들인 것처럼 온라인상에서 공개적으로 비난을 한 것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민주평통 수석부의장님과 통일부장관을 만나고 왔다고 그렇게 평가를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지금까지 성경적인 진리와 기독교적인 가치를 지키려는 측면에서는 보수주의 목사입니다. 예컨대, 동성애, 이슬람, 종교인 과세 등 건강한 목회생태계를 지키는 일에는 누구보다 앞장섰습니다. 그래서 저는 광장에서 싸우는 검투사처럼 전면에 나서서 일을 했습니다. 사실 대형교회 목사가 그런 광장 집회에 가면 얼마나 체면이 구겨지고 위신이 상합니까? 그러니까 그럴 땐 진보진영으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남북대화와 한반도 평화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히 열려 있어서 온전한 진보적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평양을 예닐곱 번을 다녀왔지요. 그런데 이럴 땐 보수진영으로부터 변질된 목사라고 공격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저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지키고 국방이나 안보문제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보수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전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12년째나 해오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그것도 북과 전쟁을 하자는 취지가 아니라 다시는 한반도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없고 이 땅에 자유와 평화를 지켜내자는 취지로 해 온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극우와 극좌가 심하게 충돌하고 있습니다. 서로간에 진심과 진정성을 알려고 하지 않고 무조건 공격부터 하고 갈등을 부추깁니다. 이런 때 일수록 교계가 어느 한 정파에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여든 야든 항상 진심으로 대해왔고 진정성을 가지고 소통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진심과 진정성 위에서 중심의 균형을 지켜온 것입니다. 이런 중심이 있기 때문에 저는 정권이 바뀌어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이지요. 그리고 중심을 가지고 있으니 그 안에서 깊은 진심과 진정성이 아름답게 발휘되는 것이죠. 지금 이 시대에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양극단이 아닌, 진심 그리고 중심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8-12-23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꿈 너머 꿈’
    요즘 저는 고도원 아침편지문화재단 이사장님의 책들을 틈틈히 읽고 있습니다. 전에도 고도원 이사장님의 책을 대부분 다 읽었지만, 최근에 ‘깊은 산속 옹달샘’을 다녀와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정독을 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저서 중에 ‘꿈 너머 꿈’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그 분의 전기가 아니라 별빛처럼 빛나는 꿈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춤추는 꿈의 생명력, 꿈을 가진 사람들의 아름다운 일화, 꿈 너머 꿈으로 가는 길, 태초의 소리를 듣는 꿈의 신비, 그리고 고도원 이사장님의 기적 같은 꿈의 이야기... 무엇보다 꿈을 가진 사람은 서로 만난다는 것입니다. 햇볕 잘 드는 언덕의 마로니에 나무 한 그루 이야기로 시작된 깊은 산속 옹달샘의 스토리는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꿈은 또 다른 꿈을 잉태하고 새롭게 태어난 꿈들은 반드시 서로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의 삶을 뒤돌아보아도 꿈은 제가 억지로 꾸려고 해서 꾸는 것이 아니라 그 꿈이 내 가슴에 별이 되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그 꿈이 나의 어두운 삶을 밝혀주고 길을 보여주며 지칠 때면 어깨위에 깃들어 다독여 주고 다시 일으켜 주었습니다. 저에게 그렇게 꿈이 찾아오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꿈을 주시니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새로운 것이 보였습니다. 광주신학교를 다닐 때 120원짜리 식권 살 돈이 없어서 수돗물로 배를 채우며 공부해야 했던 가난하고 외로운 신학생이었지만, 제 가슴엔 하나님께서 반드시 저를 쓰시리라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 꺼진 예배실에서 혼자 고장 난 마이크를 들고 설교 연습을 하고, 무등산에 올라가 나무막대기를 잡고 주변의 수많은 나무들을 미래의 성도들이라고 생각하며 설교연습, 찬양 연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꿈 이야기를 참 많이 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허황된 꿈이라고 말하며 비웃기도 했지만 오직 하나님이 주신 꿈을 향해 달려온 것입니다. 고도원 이사장님 역시 꿈을 향해 달려오신 분입니다. 젊은 시절 사모님과 함께 자그마한 문구점을 시작하려다가 부동산 업자가 계약금을 들고 사라지는 바람에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주저앉은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모님도 너무 실망한 나머지 극심한 부부 싸움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쌓여온 온갖 미움과 한과 상처들을 서로 쏟아내며 싸움을 한 것입니다. 이제 손에 가진 것도 없고 아무 희망도 없는 절대절망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고도원 이사장님께서 사모님께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어 마지막에 눈물을 흘리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여보, 우리 모든 걸 다 잃고 아무 것도 없으니 이제 꿈이라도 먹고 살자.” 그때부터 고도원 이사장님과 사모님은 원망과 불평을 내려놓고 대신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꿈을 꾸고 말하고 실행하기 시작하자 말하는 대로 꿈이 하나 둘씩 이뤄져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 역시 지금까지 삶과 목회의 여정 속에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도 깊은 것처럼, 큰 꿈을 꾸는 사람일수록 고통과 상처의 골짜기도 깊은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모든 상처와 아픔의 골짜기를 지나 꿈의 언덕을 오르고 다시 또 다른 꿈의 정상을 향하여 오르고 올랐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 몇 안되는 대형교회로 부흥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꿈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고도원 이사장님이 말씀하신 꿈 너머 꿈을 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만의 성장을 넘어서 한국교회 공익과 목회 생태계를 지키는 킹덤빌더가 되는 꿈을 꾸며 달려온 것입니다. 개교회 사역을 넘어서 반기독교 세력으로부터 한국교회를 지키는 다양한 공적사역을 하다 보니까 얼마나 많은 공격을 받고 상처도 많이 받았는지 모릅니다. 요즘 보면 전혀 예기치 않는 데서 상처의 화살이 가슴에 꽂힐 때도 있습니다. 고도원 이사장님도 385만 명이 받아본다는 ‘아침편지’를 비롯하여 충주의 ‘깊은 산속 옹달샘’을 통하여 누구도 감히 꿈꿔보지 못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꿈을 이뤘습니다. 그런데 그 분 역시 산 넘어 또 넘어가야 할 산이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거산으로 존재하되, 또 넘어가야 할 고지가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제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꿈은 눈부실 뿐만 아니라 반드시 상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꿈은 길 위에서 잠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꽃이 폐허 위에서 피듯이, 꿈은 상처를 먹고 자라고 상처 속에서 피어나며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비난의 화살을 맞으며 더 눈부시게 빛나고, 메마른 황무지의 선인장처럼 가시 끝에서 피어나는 꽃과 같습니다. 요즘 고도원 이사장님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저 역시 지금도 단 하루도 꿈 없이 잠들지 않고 꿈 없이 깨어난 적이 없습니다. 왜냐면 제가 꾸는 꿈도 고도원 이사장님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있는 꿈 너머 꿈이기 때문입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8-12-16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고도원과 소강석’
    고도원 하면 ‘아침편지’가 생각나지요. ‘아침편지’ 하면 ‘깊은 산속 옹달샘’이 생각나고요. 그런데 고도원 하면 이름부터 높게 느껴집니다. 저에게 있어서 그분은 이미 대기권 밖의 존재입니다. 이어령의 글은 천의무봉같고 끝없는 지식을 글로 풀어서 거대한 산맥처럼 이어가는 것을 보면 혀를 내두르곤 합니다. 과거에 썼던 수필은 저의 마음을 저 흙속에, 바람 속으로 이끌어가는 것 같지만 최근에 저술한 ‘디지로그’ ‘젊음의 탄생’ ‘생명이 자본이다’ 등은 고정관념의 틀을 깨뜨리는 창조적 신지식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반면에 고도원의 글은 단아하면서 청아합니다. 그의 글은 깊은 산속의 사상과 신비를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고 저 높은 별들의 세계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그 역시 다독으로 인한 깊은 사상을 자신만의 언어로 단아하고 순백하게 풀어냅니다. 그래서 그의 글은 촌철살인과 같습니다. 저는 이 분을 어떻게 만나볼 수 있을까 염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재일 장로님을 통해서 우리 교회 예배에서 영화처럼, 소설처럼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저는 지난주에 부교역자들 100여명과 함께 깊은 산속 옹달샘 프로그램까지 다녀왔습니다. 길지 않은 짧은 만남이었지만 큰 가르침을 받고 깊은 마음의 교제를 나누고 왔습니다. 사실 그 분과 저를 비교하는 것은 그 자체가 실례입니다. 그 분은 저와 뇌구조부터 다르고 내장까지도 다릅니다. 저는 대기권 안에서 활약하는 사람이지만 이미 그 분은 대기권 밖의 글과 정신과 사상의 내공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 분은 저보다 더 불우한 삶을 살았고 고난과 고통의 광야에서 절대고독을 경험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그릿(GRIT)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활동영역이 다르고 공간이 달랐지만 저 역시 거친 광야에서 절대고독을 경험하고 그릿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 분의 필력과 깊은 명상 속에서 우러나오는 정신은 제가 따라갈래야 따라갈 수가 없지요. 다행히 그 분은 장로님이고 저는 영혼을 다루고 섬기는 목사이기 때문에 감히 그 분과 가까이하고 교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깊은 산속 옹달샘’에 가서 보니까 그 분은 정말 살아온 삶 자체가 너무나 바보스럽고 역설적이었습니다. 그 바보스러움과 역설이 충주의 산골짜기에 위대한 명상 벨리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는 광장에서 싸우는 검투사가 아니라 위대한 산으로 존재하며 혼탁한 세상에 청명한 공기를 보내주고 맑은 샘물을 흘려보내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4차 산업의 위대한 변혁을 이루었고 그 변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그러한 삶을 살고 있고 여전히 ‘꿈 너머의꿈’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서 지치고 힘들어하는 젊은이들에게 삶의 정체성을 확립해주고 꿈을 심어주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곳의 감동과 꿈, 설레임과 두근거림을 경험하고 왔습니다. 무엇보다도 잠시 멈춤과 고요한 명상의 시간도 배우고 왔습니다. 저는 명상형 보다는 활동형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광장에서 함성을 내지르고 검투사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를 지금까지 광야 한 가운데 붉은 고원의 땅으로 인도 하셨습니다.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물 한 모금 없는 극지에서 살인광선과 싸우며 절대 고독을 느끼게 하신 것입니다. 그 황야에서 맨손으로 땅을 파서 나오는 물 한 모금을 목에 적시면서 절대 희망을 갖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를 돌아보게 하고 겸손 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또 교회가 하루아침에 부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저의 브레이크가 되셔서 교회의 부흥을 지연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도 절대 고독을 느끼게 하시고 잠깐 멈춤을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저에게 이런 것이 없었으면 진작 쓰러져 죽거나 아니면 벼락 맞은 나무가 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고 ‘깊은 산속 옹달샘’에 가서 잠깐 멈추고 명상을 통하여 다시금 나 자신을 돌아보는 훈련을 터득하게 하셨습니다. 여전히 고도원은 이 세상의 광장에 나와 소리치거나 격문을 쓰지는 않지만, 그 어떤 웅변보다도, 그 어떤 활자보다도 더 가슴 시린 울림을 주는 청정한 공기와 맑은 샘물을 주는 거산으로 존재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저는 광장에서 소리를 내지르는 웅변의 삶을 살아갑니다. 때론 시대와 역사를 향하여 격문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제 가슴의 샘이 메마르고 상념의 대기가 탁해질 때마다 저는 ‘깊은 산속 옹달샘’을 생각하며 고도원 장로님께 달려갈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사는 길이고 저의 사역을 더 깊고 푸르게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8-12-09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황무지에서도 행복을 누린다면’
    지난 화요일 저는 또 화순 백암교회를 향해 갔습니다. 어느 메이저 일간지 기자께서 특별히 그곳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했기 때문입니다. 기자는 아마도 저의 처녀 목회지 시절의 모습을 보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의 초심과 오늘의 소 목사의 모습을 오버랩 시키는 인터뷰를 하려고 말입니다. 백암교회에 도착하니까 손병회 안수집사님을 비롯해서 성도 열대여섯 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기자가 자연스럽게 대화의 장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자 플러스 기질이 많으신 손병회 안수집사님께서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로 옛날이야기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소강석 목사님이 여기 왔을 때 말은 스물여덟이라고 했는디, 스물 두 세 살 밖에 안 먹게 보이더라고. 나중에 알았는디 스물 한 살이었어. 그때 스물한 살 전도사님이 얼마나 당차버렸는지, 교회 나가면 벌금 만원을 내도록 하는 부락 자치법을 만들었는데도 하나도 기죽지 않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전도를 하고 다녀브렀제. 어쩔 때는 동네 사람들이 술을 먹고 와서 전도사님 멱살을 잡고 얼굴에 침을 뱉어도 같이 천국가자고 웃어 버립디다. 사실 그 야성과 패기를 누가 멈추게 했것소.” 그러자 당시 그 지역의 최고 유지였던 손윤기 선생님의 사모님이 오셔서 거드는 것입니다. “그때 동네 사람들이 소 전사님을 얼마나 교만하게 본지 아신다요? 그렇게 핍박을 하고 쫓아내려고 해도 약한 모습을 한 번을 안 보이는 거요. 오히려 더 패기가 있고 꿀리지 않는 모습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교회와서 예수 믿으라고 전도를 하니 사람들이 얼마나 미워했것소. 그때는 우리가 모르고 오해를 했지만 지금 생각하니까 그 패기와 담대함이 대단했어라. 그런디 그렇게 마을사람들이 핍박을 하고 괴롭혔어도 전도사님은 이 세상에 최고로 행복한 사람처럼 보였지라우.” 사실은 제가 마을 사람들이 술 먹고 150명 200명이 와서 멱살을 잡고 행패를 부려도 껄껄 웃으며 최고로 행복한 모습을 보였거든요. 저는 그런 황무지에서도 진정한 행복을 누렸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가 제일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기자가 저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오늘의 소강석 목사에게 있어서 백암리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예,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가 우는 것처럼 오늘의 소 목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난 날 백암리라는 용광로가 필요했습니다. 오늘날 제가 한국교회 생태계와 건강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여러 면에서 활동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절대로 비겁한 모습이 아니라 담대하게 전면에서 일하고 있지요. 그런데 제가 온실 속에서만 자랐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저는 고통의 극지와 고난의 광야를 지나고 절망의 강을 건넜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저 붉은 고원의 언덕에서 유사 희망이 아닌 오직 하나님을 향한 절대 희망 밖에 없는 극지에서 훈련을 받고 오늘의 소목사가 된 것입니다.” 기자와의 대화를 마치고 저의 청춘 시절을 뒤돌아보니 더 아련한 추억이 밀려왔습니다. 정말 한 마리 야생마처럼 거친 황야를 질주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36~37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그곳에 내려갈 때마다 내 안에 감추어져 있는 과거가 들여다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빨리 지나가 버린 삶에 대한 아쉬움도 많이 느껴집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다는 걸 생각하면 제 삶이 더 소중해지고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때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아폴로 신전에서 일하던 여사제 시빌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여사제가 아폴로 신에게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 간청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젊음과 함께 오래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늙어서 오그라든 모습으로 새처럼 조롱 속에 갇혀 매달린 채 아이들의 구경거리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 그녀의 유일한 소원은 죽는 것뿐이었습니다. 삶의 양적인면만 생각했지 질을 간과한 그녀의 삶은 시인 엘리엇의 말대로 황무지 같은 삶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천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는 인생은 헛되고 무의미하다고 하였습니다.(전6:6) 삶은 양이나 길이보다는 질이 중요한데 말이죠. 저는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까지도 행복했고 앞으로도 행복할 것입니다. 물론 저도 순간순간 괴로움이 있고 고통이 있고 아픔이 있을 수 있겠죠. 그러나 그것은 제 자신으로 인한 아픔이 아니라 성도들과 교회로 인한 아픔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백암리’라는 황무지에서도 행복하게 살았던 것처럼 앞으로 어떤 고난이 온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낙을 누리며 살 것입니다. 이런 낙과 행복을 주 안에서 사랑하는 우리 성도들과 함께 깊이 공유하며 누리고 싶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8-12-02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뒤늦게 바친 조사(弔詞)
    아, 박정하 장로님, 러시아로 가는 비행기의 하늘은 이토록 눈이 부시게 청명하고 푸르른데 장로님께서는 하늘 위 어드메쯤 계신가요. 지금은 하나님의 품에 안겨 이 땅에서 맛볼 수 없는 평화와 안식을 누리고 계시겠지요. 장로님을 알고 지낸지가 벌써 14년째였네요. 저와 장로님의 만남은 팔레스호텔 커피숍이었죠. 장로님은 제가 어떤 사람인지 간파하기 위해 만나셨습니다. 당시 지금의 교회당 입당 순서지에 장로, 안수집사들의 담임목사를 향한 서약서가 게재되었는데, 저는 그 순서지가 총회 목사, 장로님들께 보내졌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때 장로님께서 그 서약서를 보고 오해를 하셨지요. 소 목사는 장로님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너무 휘어잡는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죄송하지만 그것이 수록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제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시킨 것이 아니라 임직자들이 스스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장로님께서는 저를 오해하고 따지려고 만나자고 하였지만, 만나서 대화를 해보니 저의 솔직함과 순수함에 당장 감동하셨다 하셨죠. 그 이후로 장로님은 어떻게든지 저를 총회 안에서 뿌리를 잘 내리고 적응을 하도록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주셨습니다. 전국장로회수련회 주강사를 비롯해서 남전도회와 CE면려회, 그리고 목사장로기도회 강사로 세우려고 앞장서 주셨습니다. 또한 앞으로 총회와 한국교회를 위해 일하려면 총회 모든 협의회에도 많이 후원을 하며 심어야 한다고 이리 소개하고 저리 소개하셨습니다. 정말 장로님은 저의 친 형님보다 더 저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저에게 한 번도 반말을 한 적도 없고 언제나 깍듯하게 대해 주셨고 때로는 기분 나쁘지 않게 충고해 주셨습니다. 이영수 목사님과 정규오 목사님을 비교하면서 정치에 대한 수업도 많이 시켜주셨지요. 아무리 목회자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정치를 해야 할 때가 있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도 사람을 죽이는 정치를 해서는 안된다고 하셨지요. 장로님, 저하고 비행기를 타고 해외도 얼마나 많이 나갔습니까? 저희 교회 행사 때마다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오셨고 저를 위해서라면 총회와 한국교회에 나가서 뭐든지 하겠다고 하셨죠. 물론 저는 장로님께 이런 말씀을 드렸지요. 장로님부터도 백남조 장로님 같은 마인드를 가진 후배들을 많이 키워주시라고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장로님께서 심장질환으로 인해 얼굴이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공진단을 비롯하여 산삼 등 좋은 약을 몇 번이나 해 드렸죠. 그리고 종종 약값도 드린 것 기억하시죠. 그런데 지난 목요일 쓰러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병원에서 뇌사상태가 아니라는 말을 듣고 안도감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토요일 저녁 늦게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토요일 어떻게 밤을 지새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주일 오후에 장로님 빈소를 먼저 들리려고 했지만 저녁엔 여수제일교회 집회를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일저녁집회와 월요일 새벽집회를 마치고 목사님께 양해를 구한 뒤 장로님 빈소를 방문하였지요. 그리고 우리교회 부교역자와 성도들을 내려오게 해서 함께 위로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아마 조의금도 그 어느 누구보다 제가 제일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월요일 오전 11시부터 저녁 7시 반까지 장로님의 빈소를 지켰습니다. 그러다가 하태초 장로님의 배려로 5시에 전국장로회에서 주관하는 예배에서도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7시 반까지 빈소를 지키는 동안 갈등에 빠졌습니다. 다음 날 발인예배 때 조시를 낭독하고 싶은데, 제가 다음날 지상파의 성탄특집 다큐 촬영 때문에 러시아를 가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눈물을 머금고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주일부터 우리 교회 장로님 몇 분과 부목사 한 분이 끝까지 그 빈소를 지킨 것 아시죠? 그러나 장로님, 나중에 러시아를 다녀온 후에 꼭 장로님 납골묘를 찾아뵈려고 합니다. 제가 찾아가든 안 찾아가든 천국에 계신 장로님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마는, 이것은 형님 장로님에 대한 저의 예의고 애정이라고 여겨주십시오. 그리고 한 번도 형수님이라고 불러 본 적은 없지만 김봉선 권사님을 잘 모시겠습니다. 장로님이 가셨다고 의리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참, 저희 장모님이신 정금성 권사님은 천국에 가신 장로님이 너무너무 부럽고 행복하게 보이신 다네요. 장로님, 러시아 영공의 하늘도 이토록 눈부신데 장로님 계신 천국은 얼마나 더 찬란하고 눈부신가요? 장로님, 하나님 품에서 내내 영생하시고 안식을 누리소서.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8-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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