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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 유공자 명단 공방, 5,18단체가 해결하라!
    2019년 2월 8일 자유한국당 김진태 의원을 포함한 3명의 국회의원이 주최한 5.18민주화운동 관련 공청회에서 발생한 ‘민주화운동 모독 논란’이 확산되는 가운데 김진태 의원이 연일 ‘유공자 명단공개’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그 속에는 ‘북한군 개입’이라는 듣기도 민망한 의심이 있고, 공개되지 않는 한 이 의심을 거둘 생각이 없고 점점 더 확신시키겠다는 의도를 감추지 않고 있다. 김 의원은 자신의 입장문에서 막대한 혈세가 들어가기에 알 권리 차원에서 5·18유공자 명단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2일 자유한국당 제주도당 간담회에서도 “명단을 공개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며 “명단 공개 거부가 의구심을 키우고 있다”고 주장했다.분명한 것은 김 의원이 정부가 이를 공개하지 못하는 합법적 이유를 알고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공개를 집요하게 요구하는 배경에 대한 합리적 의심과 분석이 필요하다. 서울행정법원은 2018. 12월 채모 씨 등 102명이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낸 정보공개거부처분 취소 소송에서 “5·18 유공자 명단과 공적 사항은 유공자들의 개인정보로서 공개하지 않는 것이 적법하다”며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5·18 유공자, 유족 등 명단과 사망·행방불명 등 경위·원인에 관한사항을 일률적으로 공개할 경우 사생활의 비밀, 자유가 침해될 위험성이 크다”며, “5·18 유공자 외에 국가유공자, 고엽제 후유증 환자 등 다른 유공자의 명단도 공개하고 있지 않다”고 첨언했다.이를 김 의원이 모를 리 없음에도 집요하게 요구하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북한군의 5·18개입설을 기정사실화시키겠다는 위협을 노골적으로 확산시키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5·18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필자도 이 시기에 현역 군인으로 무전기를 들고 상황을 지켜보다 전역한 사람으로서, 이 시대의 역사가 북한군 개입 폭동으로 먹칠되는 것을 그냥 지켜볼 수는 없다.여하튼 정부는 법과 규정에 막혀 공개를 거부하고, 또 공개할 방법을 찾거나 강구하고 있지 않고 있다. 그러면 이 논쟁은 끝이 없을 것이고, 그 와중에서 국론은 분열과 대립을 면치 못할 것이고, 무익한 이념논쟁과 사실논쟁으로 국력의 피폐와 퇴보는 기정사실화될 것이다. 우리가 현대사에서 배운 것은 정부가 못하면 민간이 한다는 것이다. 이 난제도 정부가 풀 수 없으니 민간이 풀자. 현행법으로 안되니 국민적 합의와 당사자의 용기로 풀자.5년 전 국가보안법 철폐운동이 정점에 다다랐을 때, 필자는 당시 여당이던 한나라당을 향하여 그들이 종북좌파라 부르는 이들에게 시달리지 말고, 먼저 앞장서서 국가보안법의 수정을 발의하고 추진하라고 강권한 바 있다. 그 법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떠나서 그 실체에 대한 또 다른 실체의 시비가 계속된다면, 당사자가 먼저 나서서 선제적으로 해당 문제를 다루는 것이 합법과 당위와 현실적 필요를 근거로 버티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하고 빠른 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번 경우에도 같은 것이다.5·18 단체가 나서라. 이 운동이 민족적인 자부심과 명예로운 운동으로 남고, 북한군 개입설 같은 것으로 모독당하지 않도록 스스로 이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 가장 좋다. 모든 국민들이 5.18의 정신과 숭고한 희생을 귀하게 여기는 마당에 그 명단이 공개됨으로 당하는 불명예는 없을 것이고, 일부 고약한 세력들이 또 그 명단을 가지고 또 다른 시비를 걸겠지만 그 때부터는 국민적 나무람에 견디지 못할 것이다.필자는 5·18 단체의 침묵을 이해할 수 없다. 자신들의 공로와 명예가 이상한 것으로 매도당하고 훼손당하고 있고, 또 정부는 합법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데, 5·18 단체마저 그런 요구와 주장을 외면하고 정신나간 사람들의 일방적 시비로만 받아들인다면, 공격하는 분명한 실체가 있는 현실에서 5·18은 그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시비와 도전으로 정신과 가치가 훼손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그래서 5·18 단체들이 이 문제를 정부와 여론에 맡기지 말고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필자가 전역하면서 받은 국난극복기장이 부끄럽다고 느낀 것은 전역한 후 제법 시간이 흐른 뒤였다. 처가인 광주에게 미안하고, 역사의 현장에서 군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 유감이었다. 그렇기에 광주는 스스로 이 역사적 왜곡을 가져오는 거친 올가미를 벗겨 줄 의무가 있다. 광주와 5·18 단체가 해결하라!
    • 칼럼
    • 임성택시사프리즘
    2019-02-14
  • ‘절대와 전적으로’의 수사학
    최근 인구에 회자된 손석희 사장의 불미스러운 이야기가 몰고 온 엄청난 파장은 정말 이 시대의 지도자들에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정신이 번쩍 들만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아직은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고, 수사도 초기 단계이니 그 내막을 언급하는 것은 부당하고, 다만 추정에 추론을 통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의심을 받기에는 충분한 조건을 갖춘 이 일을 보면서 적잖게 실망하는 이들이 작지 않음을 보고 있다.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언론인들의 우상이 되고, 그의 보도에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냈던 사람들은 물론 그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가졌던 사람들은 일제히 그를 향해 날을 세웠다. 손 사장은 모든 소문과 보도를 찌라시로 일축하며 법적 대응에 나섰지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는 것은 그 만큼 이 일이 가진 파괴적 폭발력 때문일 것이다. 이 일이 사실로 밝혀지면 발생하게 될 사회적 파장에 대해 적지 않는 고민이 있는 것이 식자층의 걱정일 것이다.대부분의 유명인이 그러하듯 문제가 터지만 강력하고도 단호한 어조로 대응하고, 이어 법적 대응으로 그 일이 더 이상 확산되어 사회적 문제로 확장되지 않도록 차단하고, 가급적 법적에서 그 시시비비를 가리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래서 그들을 더욱 더 “절대로, 전적으로”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뇌인다. 이번에도 손석히 사장은 여지없이 이런 길로 가고 있다.이보다 앞서 발생한 손혜원 의원 사건에서도 비슷한 길을 가고 있음을 보고 있다. 그는 0.001%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 표현을 쓰는 순간 생각이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일그러졌다. “저 사람도 역시 그렇구나”라며 그의 유죄를 확신한 것이다. 지나친 긍정은 부정이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지 말고 차라리 “부족한 사람이지만 한번 따져 봅시다.”라고만 이야기했다면 기다려라도 보겠는데 그의 단호한 일도양단의 어법이 그 인내초차도 잘라내고 말았다.그런데 어쩌면 목회자들이 가장 쓰는 말이 “절대로, 전적으로, 혹은 0.001%”가 아닌가? 절대주요 창조주인 하나님의 절대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목회자가 당연히 이런 말을 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유일신의 유일구원의 교리가 더욱 더 이런 단호를 선호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목회자들이 설교와 성경공부의 영역을 넘어서서 모든 일상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절대적 신임과 가르침에 대한 전적인 신뢰, 그리고 자신만의 거룩성을 내세워 0.001%의 완벽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어느 글에서 읽은 적이 있다. 한 목사님이 강단에서 하도 자기 자랑만 하기에 장로님들이 노회장에게 가서 대신 좀 말려달라고 부탁했더니, 그 목사님이 우연한 기회에 자기자랑만 일삼던 그 분과 식사를 하면서, “요즈음 목사들 중에서 강단에서 자기 자랑만 늘어놓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라고 에둘러 말했더니, 그 목사님이 무릎을 치며 하시는 말씀,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도대체 왜들 그렇게 겸손하지 못한지 모르겠어. 감히 강단에서...!” 이런 발언에 노회장 목사님은 더 이상 말을 못하고 말았다고 한다.전두환 전 대통령이 연설문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가 “본인은”이었고 히틀러와 무솔리니 역시 “나”라는 주어를 그렇게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이는 이들은 심리적으로 자신들의 힘과 권력을 과시하려는 욕심 때문이라는데, 이런 의식이 우리 교회와 목회자들에게는 없을까? 절대진리, 절대주를 선포하는 우리들이 어느 시점부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절대화하고 있지는 않을까하는 합리적 의심을 지울 수 없다.손석희 사장과 손혜원 의원 사태를 보면서 우리 목회자들이 얼마나 말과 행동에 조심해야 하는 지를 더욱 절박하게 느낀다. 성도와 교회를 위하여 목회자의 입은 더 무거워야 한다. 더 이상 세치 혀로 한국교회와 젊은이들을 힘들게 하는 못난 종은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칼럼
    • 임성택시사프리즘
    2019-01-31
  • 시사프리즘을 다시 열며…!
    2004년 3월 22일자 “검증의 엄중한 책무”을 시작으로 기독 지성인의 시각에서 “임성택 교수의 시사프리즘”이라는 창을 통해 교회와 동역자들을 향하여 이야기하다가, 2010년 9월 9일 “시사프리즘을 닫으며”라는 글을 마지막으로 그 창을 닫았다. 그 이유는 부족한 사람이 소속한 대학의 총장에 선임되었기 때문인데, 이제 그 소임도 다하고 또 그 후의 개인적인 어려움을 해소한 이후, 이제 기독언론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자 새로운 마음으로 이 창을 다시 열었다. 그 동안 수많은 분들의 격려와 도전을 받으면서 기독언론의 소중함을 경험하였으며, 건전한 기독지성의 비판과 대안제시가 한국교회를 새롭게 이끌어 가는 한 축이 되어야 할 것을 다짐하면서이다.“검증의 엄중한 책무”라는 글로 시작한 이 프리즘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각 분야 우리 사회 지도층이 얼마나 신중하게 처신해야 하는 지를 밝히고 싶었고, “Acid Test”라고 불리는 “가장 혹독하고 철저하게 학술적, 사회적, 역사적으로 어떤 대상을 검증하는 것”이 특별히 우리 교회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심정으로 글을 써 왔다.개인이나 집단이 그 사회에서도 최고의 존경과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당대의 “Acid Test”를 통과해야 한다. 미국 의회 정치의 청문회 기본 정신도 여기에 기인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고위층과 사회 지도층에 대한 도덕과 윤리적 평판의 잣대로서는 법률에 의한 재판의 판결보다 더 권위를 가진다. 아무리 동료 의원이라도 비리 혐의에 연루되면 가차없이 체포동의안을 가결시키는 그들의 선진 정치의식의 배경도 바로 시민사회의 “Acid Test”를 의식한 것이다.주 사회의 지도계층의 생명은 능력보다도 도덕성이다. 도덕성에 기초하지 않는 능력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며 그것은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가치일 수밖에 없다. 조선말기 뛰어난 인재들이 그 능력으로 나라를 매국하는 앞장섰던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우리는 새삼 되새겨보아야 한다.이렇게 중요한 검증은 국회 청문회나 청와대 인사라인의 몫만은 아니다. 어쩌면 사회적 검증의 책무는 언론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누가 뭐라고해도 검증의 중심에 언론이 있다. 언론은 집요한 추적과 비평과 여론의 집약으로 썩고 곪고 상하기 쉬운 사람과 구조에 대하여 현미경 같은 정밀함과 수술칼 같은 예리함으로 다가가야 한다. 언론이 이런 일들을 수행할 능력이 있고, 법적으로 그것이 실질적으로 보장될 때 비로소 정치 선진국이라 할 수 있다.하지만 언론이 주의하고 조심하여야 할 일이 있다. 무엇보다도 언론이 권력화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며 실제로 현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특히 신문은 논리의 공교함만으로 멋부리는 글을 버려야 하고, 집단의 이익을 감싸는 필(筆)도 거두어야 하며, 야당이든 여당이든, 정부든 민간이든 가리지 말고, 광명한 미래를 위하여 정론직필(正論直筆)의 기치를 들어야 한다. 나아가 기독교 언론은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이라는 기독교적 책무를 더하여야 한다.그러므로 논리적 허구를 쫓지 말고, 외부의 교활하고 무지한 힘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만 이 검증의 엄중한 책무를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언론은 누구를 감옥에 가둘 권한이 없지만 사회적, 윤리적 감옥에는 가둘 수 있으며 또 석방시킬 수 있다. 비록 법정이 무죄로 석방해도 결코 사회적으로 윤리적으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을 언론은 가두어야 한다. 아무리 실정법이 정죄해도 인간의 인간됨을 위해 투쟁한 사람은 풀어주어야 한다. 이것이 언론의 사회적 책무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Acid Test의 주역들의 새로운 다짐과 결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이제부터 필자는 공허한 논리나 주장으로 글을 채우지는 않을 것이다. 구체적인 현실과 부딪히며 개인과 개교회 그리고 집단자체를 해부하고 논고할 것이다. 여기에서 아픈 이들과 억울하다고 하는 이와 토론하고자 한다. 그리고 결코 누구를 해하거나 폄훼하지 않을 것이며, 격려하고 세워주며, 함께 가는 동반자의 길을 고민할 것이다. 앞선 자가 아닌 동행자이며, 가르치는 자가 아닌 동역자의 길을 찾을 것이다. 이 글로 독자 제위와 다시 만나게 됨이 심히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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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19-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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