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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골목 친분이 어떤 대세도 이긴다”
    제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떤 정치인이나 정당을 미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한 국민이요, 종교 지도자로서 관전평을 하면서 우리 앞에 몇 가지 알고리즘을 던져보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흔히 선거는 인물, 조직, 바람이라고 합니다. 이 세 요소가 여론을 뒤집어 엎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것만 믿고 뛰는 사람은 무조건 사람을 모이게 하고 동원하여 길거리에서 화려한 유세를 합니다. 물론 유세 차량을 멋지게 장식해서 아파트 인근이나 건물 사이를 가로지르면서 유세를 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너무 뻔한 유세와 연설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제가 보기에, 이번 22대 총선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골목골목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고 악수를 하며 관계 조성을 하고 자기 확신과 비전을 심어주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니 어떤 때는 상대방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공감하는 일이었습니다. 유모차를 끌고 가는 아줌마 앞에서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아이를 축복해 주고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지역 발전과 정치 발전을 위한 진심 어린 약속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감동을 받으면 열 사람에게 전달이 되고, 그 열 사람은 100명에게 확대를 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당선된 사례가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준석 당선자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대세에 밀렸습니다. 그러나 눈썰미가 있는 사람은 그에게 낙점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선거 공보물에 직접 아파트 그림까지 그리면서 다녔으며, 선거공보물에 친필로 일일이 공약을 쓴 것입니다. 지역 모든 아파트를 직접 발로 뛰며 맞춤형 공약을 발표하고 선거일이 다가왔을 때는 무박 2일 유세를 이어간 것입니다. 게다가 어머니의 눈물의 연설은 또 한 번의 감동을 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예측 불허의 역전을 이룬 것입니다. 그는 한국 정치사에 정말 경이로운 기록을 세운 것입니다. 또한 이번 22대 국회의장 선거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히 한 정치인이 당선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언론도 다 그렇게 예측했습니다. 저는 그분과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없습니다. 그래도 정치적 역학 구도나 언론 보도를 볼 때 당연히 그분이 당선되리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국회의장 선거에서도 뜻밖의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우원식 의원께서 예상외로 국회의장에 당선이 된 것입니다. 왜 이런 이변이 벌어졌을까요? 내막을 들여다보니 상대 후보가 대세였다는 것은 정말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원식 의원께서는 그 대세를 며칠 만에 꺾어버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쭉 국회의원을 함께해 오던 동료 의원들, 그리고 당선자들과의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무조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무리수를 두는 스타일보다는 사람들과의 따뜻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왔거든요. 그 따뜻한 이미지와 온화한 관계성이 며칠 만에 역전 승리로 이어지게 한 것입니다. 우원식 국회의장 당선자 역시 자기만의 골목 친분으로 대세를 꺾게 된 것입니다. 이런 걸 보면 우리는 대세보다 중요한 것이 골목 친분이나 인간관계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소통과 관계, 합리적이고 온화한 이미지, 원칙적 리더십이 극단적 대세를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가 한국교회의 대안이고 대세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 내부의 골목 친분과 소그룹 활성화, 교인들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목사와 성도, 성도와 성도와의 신뢰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연합이라고 하는 것은 대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연합을 이루려고 해도 자기중심을 앞세운 연합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저는 모든 걸 내려놓고 연합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연합의 때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그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흐르는 강물에서 세월이라고 하는 대어를 낚으려고 낚시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낚시질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대세보다 중요한 것이 ‘골목 친분’이라는 것입니다. 온화하고 합리적인 소통과 더불어서 자기를 내려놓고 공동의 이익을 창출하는 리더십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전히 강태공처럼 카이로스라고 하는 강물에서 세월을 낚는 낚시질을 하고 있으니 곧 때가 이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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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5-19
  • [언론회 논평] 학생인권조례는 폐지하는 것이 마땅하다
    최근 “충남학생인권조례”가 충남도 의회에서 폐지가 결정되었다. 주로 진보•좌파 교육감들에 의하여 제정된 “학생인권조례”는 그동안 10여 년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는 평가이다. 우선은 학생의 인권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교권이 추락하였고, 학습권도 현저히 떨어졌다는 분석이다. 그런 가운데 “서울학생인권조례”도 폐지해야 할 상황에 왔다. 지난 4월 26일 서울시 의회에서는 “서울시교육청 학교구성원의 권리와 책임에 관한 조례안”이 통과되었는데, 여기에는 학생들을 위한 권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 교직원, 학부모(보호자)에 대한 각각의 권리와 책임을 명시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서울시 의회는 ‘학생, 교직원, 보호자의 교육 3주체가 조화롭게 권리를 행사하고 서로에 대한 책임을 지는 공교육이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교육의 주체이거나 혹은 참여자 모두가 권리를 갖고 책임을 갖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서울시 교육감이나 정치권 야당 쪽에서는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잘못된 규정이라면 바꾸고 폐지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잘못된 법으로 교육 현장이 무너지고, 한쪽의 과도한 권리 주장으로 오히려 보편적인 인권이 적용되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이다. 뿐만이 아니라 인권을 자의적 적용으로 학교공동체를 황폐케 해서는 안된다. 현행 여러 지방자치단체의 교육 현장에서 실행되고 있는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되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천부적, 보편적 상호 존중의 인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권의 유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중요한 천부적 인권이 있다. 이것은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권리를 말하는 것으로, 1948년 제정된 <세계인권선언>의 전문에도 나와 있다. 전문에는 ‘모든 인류 구성원의 천부적 존엄성과 동등하고 양보할 수 없는 권리’라고 규정한다. 또 제1조에도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부여 받았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현재의 학생인권조례는 이런 천부적 인권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보편 타당하게 적용시켜야 할 인권의 범위에서 벗어나고 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현행 진보•좌파 교육감들에 의해 만들어진 학생인권조례는 상대적이고 자의적 인권이라고 한다. 상대적 인권에 관한 것은 2018년 8월 서울시 교육청이 주관한 교사 연수교육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인권은 천부인권도 아니고 국가가 허용한 실정법의 권리도 아니다. 인권은 시간, 장소에 따라 내용이 다르게 발달한다. 인권은 본래 주어져 있던 것이 아니다. 인류의 투쟁에서 얻어낸 산물이다’라는 것이다. 상대적 인권의 기원은 칼 마르크스(Karl Marx) 주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상대적 인권의 핵심이 ‘소수자’이고, 학생인권조례의 핵심도 ‘소수자’가 아닌가. 둘째, 학생들에게 자의적인 인권을 부여하는 것은 잘못이다. 현행 학생인권조례에 들어 있는 여러 조항 가운데, ‘성적지향’과 ‘성정체성’은 자의적인 인권으로 동성애를 적극 지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인권선언>이나 <UN아동권리협약>에는 성적지향이나 성정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UN아동권리협약에서는 ‘18세 미만 아동은 미성숙하므로 특별한 보호와 돌봄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런 과도하고 자의적인 인권을 쥐어줌으로 교육 현장에 혼란을 일으키는가? 셋째, 정치가 학교 교육에 끼어들고 있다. 학교에는 학교 구성원 사이에 이미 규약이 있다. 즉 학칙이다. 그 학칙에는 학교와 학생,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부모의 역할이 들어가 있다. 각 학교는 자유롭게 그런 분위기 속에서 면학(勉學)을 지켜나가면 된다. 그런데 진보•좌파 교육감들이 주도하여 만든 “학생인권조례”는 정치적 이념을 대입시켜 교육 현장을 혼란케 하고, 심지어 피폐(疲弊)하도록 만들어 가고 있다. 학교 현장의 교육을 사랑하고, 자라나는 세대들을 통하여 국가의 밝은 미래를 보기 위해서는 이런 전체주의, 공포주의, 혼란주의, 사회주의, 일방주의, 성정치주의, 규례만능주의를 담은 “학생인권조례”를 계속 유지시켜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당장 폐지해야 한다. 자라나는 우리 자녀들을 경도(傾倒)된 정치와 이념의 희생물이 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 이제라도 뒤늦게 각 지방자치단체 의회에서 잘못된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참으로 다행으로 생각한다. 다른 지자체들도 뜻을 같이 하기를 바란다. 이제 ‘학생인권조례’가 학생 인권 신장의 좋은 처방전이 아님이 증명되었다. 이런 악법적 조례가 없던 시대에도, 현재 없는 지역에서도 얼마든지 바른 교육이 이뤄지고 있음이 증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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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8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자’(골 2:6-7)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에 예수님을 닮기 위한 열망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 역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고 권면하였습니다. 그것이 사는 길이고, 생명의 길이고, 축복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성숙의 열매를 맺기 위한 비결로서 “예수님 안에서 행하라”(6절)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 사랑,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과의 동행과 친밀한 연합을 말합니다. 깊숙한 친밀함은 가까이 있을 때 이루어집니다. 연합은 하나가 되고 주님이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하고, 계획하며, 시작되고, 진행되고, 끝이 나고, 평가되며, 변화되고 생명을 이루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각과 지혜와 뜻을 따르고 철저히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삶이 우리를 달라지게 학고 변화시키며 인생을 역전시켜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장소와 시간에 상관없이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모습과 방법을 따라 삽시다. 이러한 의식 속에서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할 때 모든 것을 감당할 힘을 얻게 되는 것임. 바울 사도는 빌 4:4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 위기에 처할 수도 있는 현실임에도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한 것입니다. 몸은 비록 로마 감옥에 갇혀 있지만, 바울은 ‘주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때 그러한 삶의 능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일하고, 사랑하고 베풀고 섬기는 삶, 이것이 우리이 사명이요, 책임인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아 인생의 기초로 삼아야 하겠습니다(7절).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여러 세대에 나타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엡 2:7).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그 사실, 십자가와 부활 그 사실이 오는 세대에 계속해서 복음이 되어 그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지만, 오늘 구원받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때 그러한 삶의 능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서 사실 때 주님 자신이 우리의 부요가 되시며, “능치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막 9:23). 주 안에서 살아가는 자는 세상 영광, 사람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가 아니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주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구원, 사랑, 평강, 은혜, 능력, 인내, 지혜, 기쁨과 만족을 주시지만, 주님 자신이 복 그 자체이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과 연합하여 주님을 모시고 살아감으로서 복 되신 주님 안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인생을 이루어 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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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언론회 논평] 국제 사회에서 문제가 된 한국의 「검수완박」 검찰을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범죄자들뿐이다
    한국에서는 지난 2022년 5월 3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문재인 정부 하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하여 만든, 소위 ‘검수완박법’이 국무회의를 통과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5월 9일 공포되었다. 이로 인하여 검찰의 수사 범위는 2021년 1월 6대 범죄(공직자, 선거, 방위사업, 대형참사, 부패, 경제)에서 2022년 9월부터는 2대 범죄(부패, 경제)로 오그라들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한국에서는 지난 2021년 1월 더불어민주당의 강성 지지자들이 검찰을 개혁해야 된다며 ‘검수완박’이란 용어를 쓰기 시작하였다. 이 말은 용어 그대로 검찰의 수사권을 완전히 박탈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은 ‘검수완박은 부패완판(부패가 완전히 판치게 됨)이라’며 검찰총장직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2022년 4월 15일 더불어민주당의 박홍근 원내 대표가 ‘검찰청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여 172명이 이에 동조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이 법안은 4월 3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또 퇴임이 며칠 남지 않은 문재인 대통령이 5월 3일 ‘검찰청법 개정’과 ‘형사소송법 개정’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그리고 이 법은 5월 9일 공포하여 효력을 발생하기에 이른다. 결국 ‘검수완박’이라는 것은 더불어민주당이 줄기차게 주장하는 검찰의 권한을 축소 시키고 무력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4월의 제22대 총선에서도 ‘검찰 권력’을 심판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대신 경찰에게 검찰의 권한을 상당수 이양하는 형식이었다. 사실 검찰을 두려워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일반 국민들이 아니다. 큰 권력을 가진 가운데 범죄를 저지르거나, 무한한 권력을 더 가지려는 사람들이다. 아니면 범죄자들뿐이다. 그런데 이런 한국 정치의 검찰 축소와 힘 빼기에 대하여 국제 사회가 우려하고 나섰다. 최근 OECD(경제개발협력기구) 산하에 있는 뇌물방지작업반(WGB)이 올해 상반기에 한국에 실사단을 보내 한국의 부패 수사 시스템을 평가한다는 것이다. 여기 회원국들은 한국의 ‘검찰청법’과 ‘형사소송법’이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에 의하여 개정되면서, 부패 대응 역량 약화, 수사 지연 가능성을 우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이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가? 참 부끄러운 일이다. 한국의 검찰은 헌법에도 나타난 수사와 기소의 주체인 국가 기관이다. 그런데 다수의 정치 권력에 의하여 ‘검수완박’이 이뤄진 한국 상황을 국제 사회가 오히려 염려하고 있다. 우리나라 검찰이 역사상 모든 일에 잘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지금은 자유민주주의를 누리는 시대이고, 수사기관의 역량으로 범죄 없는 나라, 특히 권력자들의 범죄를 막는 역할은 검찰이 아니고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2022년 ‘검수완박’ 논의가 한창일 때, 드리고 코스 OECD 뇌물방지 워킹그룹 의장은 법무부에 서신을 보내 ‘한국의 반부패와 해외 뇌물 수사 및 기소 역량을 오히려 약화시키는 일은 결코 없어야 된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한국의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검찰의 직접 수사권을 박탈하는 법안에 설득력 있는 근거가 없다. 누군가 한국 검찰의 엄정하고 체계적인 수사를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통은 고위층이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지난 3월에 현직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낸 책에서, ‘검경수사권 조정’과 ‘검수완박’ 등 정치권이 추진했던 국가 수사 시스템의 변경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현재 국내에서는 조직적 사기 범죄가 역병처럼 창궐하고 있는데, 국회가 수사와 재판을 어렵게 만들어 사기 범죄의 천국이 도래 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국회가 국가의 수사 권한을 토막 내면서 국제적 사기 범죄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국내 범죄 조직들도 국제적으로 악명을 떨친 범죄 조직들과 견줄 수 있는 규모에 이르게 되었다’고 개탄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지난 2022년에만 발생한 사기 피해액은 무려 29조 2,000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정치권이야 자신들이 두려워하고, 그들의 입맛에 맞게 권력을 남용하는지 몰라도, 도둑을 잡고, 범죄 조직을 일망타진하고, 범죄 없는 나라를 만들어 국민들이 안심하고 살도록 해야 할 국가 최고 수사기관을 절단(切斷)내야 되겠는가? 옛 속담처럼 ‘빈대 잡는다(검수완박)고 초가삼간(멀쩡한 자유대한민국의 수사 체계)을 다 태울 것인가?’ 대한민국은 범죄자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고, 치안과 경비가 안정된 나라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불어닥친 ‘검수완박’의 어두운 그림자는 언제까지 국가와 국민들에게 불안의 근원이 될 것인가? 제발 한국의 정치가들이 국가의 발전과 장래를 생각하여, 보다 멀리 바라보아야 한다. 무지막지한 ‘정글의 법칙’으로 죽이고 짓밟는 정치가 아니라, 상생(相牲)으로 수준 높은 정치를 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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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4
  • [언론회 논평] 인천에 이슬람 사원을 또 짓는다고?
    최근에 이슬람을 믿는 한 유튜버가 토지 매매계약서를 공개하며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 자신이 인천 지역에다 이슬람 사원을 짓고, 무슬림들을 위한 기도처와 팟캐스트 스튜디오를 지을 계획이라고 하여, 지역 주민들이 불안해하며 국민들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다. 이 사람은 구독자가 500만 명이 넘을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유튜버인데, 인천 공항이 있는 영종도에 땅을 매입했다는 계약서와 토지 사용 목적과 계획을 밝혔으며, 여기에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후원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지난 2020년 외국인 여성을 강간하려는 시도를 해서 물의를 빚은 바 있고, 평소에도 유흥과 술을 먹는 모습이 인스타그램 등을 통하여 알려지고 있어, 과연 진짜인가 하는 의혹도 든다. 어찌 되었든 근처에 여러 초•중•고교 학교가 있고 전철역이 가까운 곳에 있는데, 이슬람 사원을 짓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슬람은 전 세계에서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데, 그들은 종교 간 상호주의나 타종교의 선교나 포교를 허락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 세계 여러 나라에서 분쟁으로 혼란과 불안을 보이는 종교가 주로 이슬람이다. 지금 한국의 대구지역에서도 지역 주민들이 반대하는 이슬람 사원 신축문제로 시끄럽고, 주민들은 매우 불안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슬람의 사원은 단순히 종교적 모임뿐만 아니라, 다양한 용도로 쓰인다고 한다. 교회나 성당과 같은 종교 목적을 위한 시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한다. 즉 원리주의자들의 근거지로 사용할 수도 있게 된다. 이를 관할하는 지자체에서도 분명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함부로 이슬람 사원 건축 허가를 내주었다가는 많은 문제가 야기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이슬람의 종교시설이 꽤 있다. 이슬람대책위원회 자료에 보면, 사원(모스크) 기도실(무살라) 등 총 200여 개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따라서 무분별한 모스크(이슬람 사원) 확장은 그만큼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슬람에는 무함마드가 22년 동안 계시받았다고 하여 후세 사람들이 모아 놓은 꾸란(코란)이 있고, 무함마드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하디스가 있는데, 그 내용에는 이교도(기독교, 유대교 등)를 정복하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자기들(무함마드)의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한 명령이 나오고 있다. 이런 자랑은 단순히 한 젊은 무슬림의 보여주기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 세계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려는 목적과 방법으로 홍보되고 있지 않나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이 모스크 건축 실행 목적이라면 우리 국민들의 안전과 주변에 있는 학교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철저하게 막아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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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지금까지 이런 청년들은 없었다”
    지난주 월요일에 한탁훈 목사님 결혼 주례를 마치고 주일설교, 수요예배 설교까지 다 준비한 후, 야간 산행을 하려고 나갔습니다. 선광현 목사님을 비롯한 몇 명의 동행인들과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보니까 청년부 형제자매들로 꽉 차 있는 것입니다. 저는 먼저 내려가라고 걸어가겠다고 했더니 “목사님, 함께 타고 가시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빈틈에 끼어 함께 내려왔는데 그들이 뒤에서 따라오더니 “목사님, 산에 가시는 건가요? 저희들은 전도하러 갑니다. 기도 좀 해주세요”하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 밤 9시가 다 돼가는데, 이 늦은 시간에 어디로 전도를 간단 말인가”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지금 보정동 카페 거리에 가면 젊은이들이 많이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야행성 젊은이들을 전도하러 가는 구나” 생각하면서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 이런 청년들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오랜만에 보는 야간 젊은 전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청년들이 뜨거운 가슴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담아 전달할 텐데 저 가로등과 네온사인 아래 방황하며 번뇌하는 젊은이들에게 적시적소에 할 말을 하게 하시고 또 하나님의 복음이 그 사람에 맞게 전달되게 하옵소서. 가슴의 뜨거운 열정뿐만 아니라 지혜를 주셔서 그 사람에게 딱 맞는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이번 주에 꼭 그 영혼들을 교회로 데려올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만날 자를 만나게 하시고 건질 자를 건지게 하옵소서. 이 저녁에 한 번 밖에 없는 청춘을 바쳐 야간전도를 하러 가는 우리 형제자매들을 축복하시고 격려하시고 위로하여 주옵소서.” 기도를 마친 후, “나는 이제 하루 동안 마음에 묵은 스트레스를 풀려고 산행을 합니다. 여러분, 전도 많이 할 수 있도록 산에 가서도 기도하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산으로 향했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종일 내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군중 속에 사시다가 때로는 한적한 산으로 가셔서 기도를 하셨지 않습니까? 저도 건강관리 겸 마음을 정화하고 주님과 깊은 교제를 하기 위하여 야간산행을 할 때가 많습니다. 땀을 흘리며 산행을 하면서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생각해 보니 이런 청년들은 없었습니다. 이런 전도는 없었습니다. 요즘 플로팅 스프레이드(Floating Sprayed, 유령 신자)들이 많이 떠도는데 어떻게 하면 그런 사람들을 잡을까 하고 전략을 짜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받으면 좋죠.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정말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살아있는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 교회는 정지된 교회, 정체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사도행전적 원형교회는 모이면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흩어지면 전도를 하였습니다. 저녁 늦은 시간에 카페거리로 전도하러 다니는 청년들이 너무나 멋있게 보였습니다. 마치 저의 젊은 시절을 회고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다시 한번 저의 젊음의 시절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화순 백암교회를 개척하던 시절, 낮에는 광주신학교를 다니며 저녁에는 마을 구석구석을 누비며 전도를 하고 다녔거든요. 그래서 그 시절을 생각하며 산 정상에 올라가 다시 한번 기도했습니다. “주여, 오늘 저녁에도 그들이 반드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고 영혼을 추수하는 거룩한 전도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과연 지금까지 이런 청년들은 없었습니다. 이런 전도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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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5-12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믿음 저축’
    “이 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그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니,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세겔이요, 합분태 사분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왕하6:24,25). 이 말씀은 아람 왕 벤하닷이 북왕국 이스라엘 왕을 포위한 내용입니다. 사마리아는 왕궁이 있는 성이었습니다. 성이 포위되었으니, 사마리아는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습니다. 굶주림이 심하여 자신이 낳은 아이까지 먹는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은 성경에 이미 예고 된 일이었습니다. “너희 중에 유순하고 연약한 남자라도 그 형제와 그 품의 아내와 그 남은 자녀를 질시하여 자기의 먹는 그 자녀의 고기를 그중 누구에게든지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 대적이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맹렬히 너를 쳐서 곤란케 하므로 아무것도 그에게 없는 연고일 것이며”(신28:54-55). 그러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서 필경 너를 멸할 것이라.”(신28:47). 이유는 풍족할 때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앞 사건에서 이스라엘 왕은 그가 하나님 앞에 선한 왕이 아니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한없는 자비를 베풀어 주신 내용이 나옵니다. 아람 왕이 신하들과 의논하여 이스라엘 어느 한 곳에 진을 치고 그들을 치려 하면, 엘리사는 왕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왕은 그곳에 사람을 보내 방어하도록 하여 화를 면하게 하였습니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 매번 그런 일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아람 왕은 그들 가운데 이스라엘의 첩자가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왕하6:8-11). 이러한 일들을 몸소 겪으면서도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아니하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아니하였으며, 기쁨과 즐거움으로 섬기지도 아니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벤하닷으로 사마리아를 포위하게 만든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자비하심을 무시하고 주님의 자비하심을 이용하여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간다면, 은혜가 뚝 끊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고삐풀린 송아지가 울타리 밖을 벗어나 마음대로 다니는 것처럼 도저히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악에 빠지게 되어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땅, 건건한 땅에 거하게 됩니다(렘17:6). 요셉은 아버지의 편애와 그의 꿈 자랑으로 형님들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형님들의 질시로 애굽에 팔려나갔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바로의 꿈을 해석하여 애굽의 총리대신까지 될 수 있었습니다. 과연 그가 해석한 대로 7년 풍년과 7년 흉년이 차례로 임하였습니다. 당시 주변 나라들이 굶주림에 허덕였지만, 애굽은 요셉의 지혜로 말미암아 7년 풍년 때 모아 두었던 곡식으로 7년 흉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풍년과 흉년은 요셉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사는 가나안 땅에도 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누구도 7년 풍년 뒤 7년 흉년이 임할 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알았다면 절제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절제하지 않고 곡식을 거두는 족족 다 소비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7년 흉년이 왔을 때 그들은 애굽으로 식량을 구하러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으로 말하면 7년 풍년은 엘리사가 아람 왕의 침입 계획을 미리 알려준 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으며, 하나님이 맡겨주신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다스리려고 애를 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몽둥이를 든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힘써야 할 것은 평화로울 때의 신앙 저축입니다. 이때 힘써서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보답하는 마음으로 성경 읽기와 기도 생활과 예배드리기에 힘써야 합니다. 이런 생활이 지속될 때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환난을 감하십니다. 설령 극심한 환난이 임한다고 할지라도 평소에 쌓아 두었던 신앙이 그를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게 합니다. 환난 앞에 이스라엘 왕은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왕좌왕하며 심지어 엘리사를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왕하6:31). 그것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을 때 믿음을 충분히 쌓아 두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쌓아 두는 신앙생활이 장차 올 시험의 때를 자신도 모르게 지나가게 하거나, 그 시험을 넉넉히 이기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 두시기를 바랍니다(롬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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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6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허공 속에 떠도는 홀씨일까요?”
    지지난 주 목요일에는 국회의장 공관에 가서 식사를 했습니다. ‘글로벌 투게더’ 임원진과 ‘글로벌 에듀’ 대표 몇 사람이 참석하는 자리였습니다. ‘글로벌 투게더’는 지구촌 후진국가에 주로 의료와 보건시설을 후원하는 단체이고, ‘글로벌 에듀’는 아프리카를 비롯해서 후진국들에게 학교를 지어주고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해 주는 기관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글로벌 에듀의 이사장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갔더니 저명한 사회 인사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저에 대한 예우와 의전이 깍듯했습니다. 특히 김진표 국회의장님의 모두 발언에서 거의 절반 가까이가 새에덴교회와 소강석 목사의 섬김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부산 엑스포 유치 경쟁은 원래부터가 힘든 출발이었습니다. 1년 반이나 늦게 출발을 했고 또 사우디와의 애매한 경제적 관계 때문에 정부가 직접 나서서 경쟁하는 건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봉사기관인 글로벌 투게더와 글로벌 에듀가 나서서 아프리카의 표를 얻기 위한 러브 아프리카 운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국회의장인 저와 소 목사님이 스피커로 나서게 되고 각국의 장관들을 일일이 다 팀별로 만나서 유치 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정말 감명 깊었던 것은 소강석 목사님이 최신 삼성 스마트 폴드폰을 사서 31개국 장관들에게 다 나눠준 것입니다. 거기다가 ‘한국을 사랑해 주세요’ ‘부산 엑스포를 유치해 주세요’라는 글씨까지 써서 준 것입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선교사들을 100여 명이나 초청해서 모든 숙박비를 대주고 1인당 500불씩 선교비로 전달해주는 걸 보고 다시 한번 새에덴교회와 소강석 목사님의 섬김의 본에 놀랐습니다. 비록 부산 엑스포 유치에 성공은 못했지만 새에덴교회의 섬김과 소강석 목사님의 헌신은 절대로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프리카 장관들과 선교사들의 가슴 속에 아름다운 꽃씨로 뿌려져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헌신과 수고는 언젠가 다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소 목사님과 새에덴교회의 헌신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이고, 나라 사랑이고 인류애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저도 선교사들에게 아침 식사를 대접하고 왔습니다마는, 다시 한번 소강석 목사님과 새에덴교회에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알기로 소강석 목사님은 이 시대 최고의 감성 설교자이십니다. 저는 평생 교회를 다녔지만, 소 목사님의 아가서 설교는 정말 듣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설교였습니다. 여러분도 새에덴교회에 한 번씩 다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김진표 의장님도 존경하고 또 김진표 의장님께서도 저를 하나님의 종이자 동생처럼 친근하게 대해주십니다. 여러 저명인사들 앞에 그런 치하의 말씀을 해주니까 너무 감사했습니다. “내가 안 왔으면 너무 미안했겠구나. 오기를 잘했구나.” 김진표 의장님은 저하고 떼려야 뗄 수 없는 분입니다. 반기독교 악법을 막아내는 데 제가 앞장서 일을 할 때 저를 도와주셨고 특별히 종교인과세 대처를 할 때 제일 앞장서서 수고하신 분입니다. 그 일 때문에 김진표 의장님이 한동안 일부 극단적인 진보 진영으로부터 엄청나게 공격받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진실과 진심이 왜곡된 오해를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국회의장이 되었고 앞으로도 더 이 시대와 사회의 섬김이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솔직히 제가 아프리카를 다녀온 후 허전함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국가정보기관이나 관련 기관에서도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예측했고 국무총리까지 나서서 가능성을 가늠했잖아요. 그래서 작지만 애국의 일환으로서 아프리카를 갔습니다. 그곳에 김철수 장로님의 헌신으로 학교도 지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선교사님들의 숙박비, 여비를 제공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아프리카의 31개국 장관들을 움직이고 부산 엑스포를 유치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결국 결과는 너무 허전하고 허탈하게 끝났습니다. 교인들 보기에 너무 죄송하고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만 생각하면 풀이 죽고 기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국회의장 공관에서 김진표 의장님이 치하와 격려의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을 보고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그래 맞아, 내가 아프리카에 뿌리고 온 씨는 허공 속에 떠돌아다니는 홀씨는 아닐 거야. 분명히 그들의 가슴속에 꽃씨로 떨어졌을 것이고 이번에는 안 됐지만 다음에라도 싹이 나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게 될 거야. 특별히 아프리카에 학교를 짓고 선교사들을 섬겼던 꽃씨는 반드시 그들의 가슴속에 싹이 나서 줄기가 자라고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날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심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심고 결코 낙심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러 반드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6:7-8) 러브 아프리카의 꽃씨는 허공에 떠도는 홀씨가 아니라 아름다운 꽃씨로 뿌려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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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5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유혹을 이기려면’(엡 4:22-24)
    인생에서 유혹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어떻게 보면 인생 전체가 유혹과 싸워야 하는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각 연령기에 따라 각종 유혹이 끊임없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유혹은 인류가 시작되면서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가 뱀에게 유혹을 받았습니다. 뱀이 시험을 할 때에도 사람의 내면에 있는 유혹의 욕심을 이용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하는 뱀의 유혹은 하나님처럼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이며, 명예 영광심에 대한 유혹입니다. 그들은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죄를 범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욕심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시험에 잘 빠집니다. 시험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약 1:14).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앞세우는 것은 마귀의 미혹이요, 명예를 진리보다 더 앞세우는 것도 마귀의 미혹이요, 세상 권세를 하나님의 권세보다 앞세우는 것도 마귀의 미혹입니다. 솔로몬 역시 세상 유혹에 이끌려 살다가 나라가 두 동강이 나고 말았고, 삼손은 이방 여자 들릴라의 유혹에 빠져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고, 다윗 같은 성군도 밧세바의 유혹에 무너져 인생에서 큰 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온갖 유혹을 이기고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욕심을 버리고 각종의 유혹을 이겨야만 인생에서 축복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은 유혹과의 싸움입니다. 깨어 있어 각종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유혹은 항상 있으며 유혹은 욕심에서 옵니다. 욕심 때문에 유혹에 이끌리게 되고, 유혹에 끌리게 되면 죄를 낳고, 죄는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이처럼 육신의 소욕대로 살면 썩어질 생활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해야 유혹을 이길 수 있을까요? 엡 4:22-24에서 대답해줍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서는 옛 사람, 곧 욕심으로 가득 찬 구습에 젖어버린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믿음으로 심령이 새로워진 새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속사람이 은혜가 충만해지면 저절로 벗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롭게 되었고,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룩하게 되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새사람이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사람에서 성령의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새사람은 마음과 뜻과 생각과 말과 행실이 모두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새사람은 전인격과 삶 전체가 하나님을 따르는 자이므로 이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세상을 유혹을 물리치고 살아가며, 시대의 유행에 휩쓸리는 자가 아니라 시대의 표적을 읽어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 안에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능력에 인생을 맡겨야 하겠습니다. 유혹을 이기고 승리함으로 아름다운 생을 살아갑시다. 시험이 오면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새사람을 교회로 불러 모으시고 말씀의 생수를 흘려보내 주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우리의 심령이 늘 새롭게 되어 유혹에 빠지지 않고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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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30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시간 앞에 서글프지 않은 것은 없다구요?
    지난 화요일 오전에는 총회 은급부에서 주최하는 은퇴목회자 위로회 모임을 저희 교회에서 가졌습니다. 그런데 시작이 10시 반인데 한 8시 반부터 오신 분들이 계시고 9시가 되니까 비서들이 출근하기도 전인데 제 방에 찾아오는 어르신들이 계셨습니다. 저와 정말 관계를 끊을 수 없는 분들이 오셨기 때문에 거절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몇 분들을 만나고 교통비나 격려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10시 반이 되어서 본당에 가보니까 정말 천 수백 명이 앉아 계신 것입니다. 그것도 저 멀리 부산, 대구, 광주 등지에서 새벽차를 타고 오신 것입니다. 대부분 백발의 면류관을 쓰시고 얼굴도 쭈글쭈글한 분들이셨습니다. 심지어는 90이 넘는 분들도 오셔서 하마터면 큰일 날 뻔도 했다는 것입니다. 코피가 터지고 어떤 분은 쓰러지기도 하구요. 메디컬 처치에서 응급처치를 안 했더라면 큰일 날 뻔 했다는 것입니다. “아, 이런 모임을 우리 교회에서 다시는 안 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까지 해봤습니다. 왜 그분들이 왔을까요? 저희 교회에서 대접하는 점심 식사와 총회에서 주는 몇 푼 안 되는 위로비 때문에 오셨을까요? 물론 그런 부분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아마 외로웠기 때문에 동기들을 만나보고 싶어서 오셨을 것입니다. 제가 설교를 하기 전에 앞에서 보니까 꽃으로 말하자면 지는 꽃이고, 나무로 말하자면 낙엽이 되어 곧 떨어질 잎사귀처럼 보였습니다. 저분들에게도 왕년에 한가락 했던 젊은 청춘의 시절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힘깨나 쓰고 혈기도 부리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설교를 했던 시절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혈기도, 패기도 잃어버리고 겨우 지친 몸을 이끌고 오신 것 같았습니다. 제가 강단에 섰을 때 조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멀리서 오셨는데도 조는 사람 한 명도 없이 그렇게 설교를 뚫어져라 듣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씀은 안 하시지만 제 젊음이 부러운 것 같았습니다. 저는 젊은 나이에 총회장도 했고, 한교총 대표회장도 했거든요. 그리고 지금도 젊은 패기로 설교하는 걸 보면서 저의 젊음이 부러운 듯한 눈동자로 저를 보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하기 전에 잠시 그분들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늙는다. 잔인한 시간은 쓰러져 가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다. 한때 벌어진 일들은 시간과 싸우지 못한다. 일일이 흔적을 남기기엔 너무 빨리 스쳐 지나간다.” 이는 윤광준의 ‘심미안 수업’ 중에서 나오는 말인데요. 육신적으로만 볼 때는 시간 앞에 서글프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저도 20년이 지나면 백발의 면류관을 쓰고 은퇴 목회자가 되어 은퇴 목회자 모임에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서글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 설교의 주제처럼 저는 전제와 같이 부어진 삶이 아닙니까? 전제는 한마디로 “부어드리는 제사”입니다. 제물이 거의 타갈 무렵에, 제단 위에 제사장이 포도주를 붓고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뿌리는데, 그것을 “전제”라고 합니다. 제사가 끝나갈 무렵, 너무나 행복하고 즐겁게 제사를 드렸다는 의미에서, 포도주를 붓고 제물 위에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뿌립니다. 그러면 마지막 타는 향기가 얼마나 진동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죽음의 날이 임박하여 순교적 사명 앞에 자신이 전제와 같이 부어졌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어차피 모든 살아있는 것은 늙어갑니다. 꽃도 시들고 나무도 메말라갑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여인도 시들고 건강한 청년도 늙어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늙어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전제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시간 앞에 서글퍼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시간이 깃든 모든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시간은 기억일 뿐만 아니라 미래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죠.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미래를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영원한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죽음은 천국으로 가는 한 과정이고 방법일 뿐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설교를 하니까 저도 은혜가 되고 은퇴 목사님들도 고개를 끄떡끄떡하며 은혜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제한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100세를 살건, 120세를 살건 그 역시 제한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 자체만 생각하면 시간 앞에서 서글프지 않은 것은 없겠죠. 그러나 우리는 결코 서글플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미래가 있고 영원한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의 또 다른 삶, 영원한 부활의 삶, 영생의 삶이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도 시간 앞에서는 모든 게 서글프다고요? 아닙니다. 시간 앞에서 오히려 우리는 소망이 있고 희망만 있을 뿐입니다. 행사가 끝나자 역시 어른들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우리가 천국에서 만날 줄 알았는데 여기서 다시 만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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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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