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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이만열 박사(1938-)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창립, 본격적 한국교회사 연구 ‘한국사’전공에서 ‘한국기독교사’연구자로 나선 교회사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4년?간 교수직에서 해직 이만열(李萬烈)은 경상남도 함안군 출신으로 어린 시절은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삼촌 두 분이 마산에서 살고 있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마산에서 다녔다. 총명했던 만열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아, 숙명여자대학교 사학과에서 가르치기 시작해 명예교수로 정년 퇴직하였다. 숙명여자대학교 재직시 당시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1980년 7월부터 1984년 8월까지 4년간 해직 상태로 지냈다. 휴직 기간에 젊었을 때에 하고자 했던 꿈이 이루어졌다. 박윤선 박사가 막 시작한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학교의 요청으로 한국교회사를 가르치면서 동시에 학생으로 등록해 신학을 공부한 것이다. 후에 기독교사상지에 글을 쓰기도 하고, 대한성서공회 100주년을 앞두고 성서공회 100년사 집필 의뢰를 받고 자료정리와 자료수집을 위해 미국성서공회와 대영성서공회를 방문하여 프린스턴신학교와 미국 장로교 역사자료실, 카나다 장로교 선교부와 미국 감리교 본부를 방문하여 선교사들이 기록한 한국 관계 문헌들을 열람하고, 많은 자료들을 마이크로 필림으로 복사해 국내로 가져왔다. 1982년 그 자료들을 국내 한국교회사 관련 연구자들과 함께 '한국기독교역사연구회'를 조직했다. 이를 초교파적으로 운영해 오다가 '사단법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로 개편, 오늘의 한국교회사 연구의 발판을 놓았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창립은 이만열 박사에겐 인생 후반의 전기가 되기도 하였다. 수집된 자료로 UCLA대학 교수로 있는 옥성득 박사와 함께 <대한성서공회 100년사>를 집필했다. 그는 숙명여대 교수로 복직한 이후 도산학회, 함석헌학회, 김교신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복음과상황 공동발행인, 외국인근로자를 위한?희년선교회 대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및 이사장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현재는 사)뉴코리아 대표, 사)남북역사교류협회 이사장, 학교법인 상지학원?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주일학교에서 배운 '성수주일'이 신앙생활에 큰 영향 그는 고백한다. "내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어릴 때 받은 주일학교 교육의 영향이 크다. 고향 함안지역은 1897년에 호주 선교사가 세운 교회가 있고, 1909년에 세워진 군북교회가 있다. 이 교회를 세울 때 우리 할머니, 아버지, 삼촌들이?힘을 많이 썼다. 해방이 되면서부터 그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해방이 되던 해가 초등학교 1학년?때인데, 아침에 일본인 교장 훈시를 듣고 학교 내 신사 앞에서 묵념하는 의례가 없어진 것만 달랐지, 해방의 의미는 몰랐다. 그러나 주일학교에서 모세와 출애굽, 삼손, 다윗, 다니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떻게 식민지 치하에서 투쟁을 통해 해방을 얻게 되었는가를 배웠다"고 하였다. 자신이 역사공부를 하게 된 것도 주일학교 교육의 영향이었다고 고백하면서, 오늘날 피폐해 가고 있는 주일학교 교육 실태를 바라보면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걱정하기도 하였다. 그는 오늘날 한국교회 주일학교가 사라질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요인을 지적한다. "저희 때만 해도 주일성수를 매우 강조했습니다. 어릴 때 주일성수 교육을 받고 집에 와서 머슴들이 일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 저 사람들 오늘 일해서는 안되지 않습니까?"라고 할 정도로 성수주일 교육을 철저히 받았는데, 요즈음 한국교회는 성수주일 교육을 등한히 하고 있음을 질타하며 안타까워 하고 있다. 자신은 대학 4년동안 8번의 학술답사 행사가 있었는데, 그 일정 중에는 꼭 일요일이 끼여 있어서 한 번도 그 답사 행사에 참가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유는 주일학교에서 주일성수에 대한 신앙훈련을 철저히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72년 숙명여대 재직시에 10월 유신이 있었는데, 대학교수로서 사회의식이 많이 생긴 때이라 이 때는 못견디겠습디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완전히 후퇴시키는 유신인데 역사를 공부한다는 젊은 교수가 한 마디 못했으니까. 그래서 1973년에 쓴 글이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정>이란 논문이었는데, 그 논문을 읽은 사람들이 그건 한말 1910년대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이야기라고 생각했던지 그 논문을 읽은 진보적 교회 인사들이 저를 부르기 시작했고, 기장측에 속한 김상근 목사, YMCA 강문규 회장 등이었고, 이게 원인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1980년대에 같이 교수직에서 해직된 이문영, 안병무, 서광선, 현영학, 서남동 교수 등과 동지가 되어 함께 투쟁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서울의 봄이 올 줄 알았는데, 전두환 장군이 이끄는 신군부가 12.12 사태를 일으키게 됨으로 민주화는 커녕 분위기가 확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 5.18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저녁에 요시찰 인사들과 각 대학 학생회장들과 간부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당시 해직된 교수들이 86명이었다. 그 중 30여 명은 해당 학교의 분규로 해직되었고, 50여명은 시국 관련으로 해직된 자들이었다." 해직 기간 신학훈련 마치고 한국기독교사 자료 수집 및 정리 그는 또 해직된 동안 감사한 일이 많았다고 한다. "저는 기독교인이고 전에도 가끔 교회에서 설교도 하고 강연도 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저를 자주 청해주었습니다. 청하는 이유 가운데 물론 강연을 듣겠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해직된 후엔 경제력이 없어지니까 강사료를 주어서 생활에 보탬이 되게 함이었던 것입니다. 그 중 하나는 5.18 만주화 운동 1주년 되는 때에 광주YMCA가 초청하여 3일 간이나 강연을 하게 되었고, 또 하나는 서울 향린교회에서 한 강연인데, 그 때 문익환 목사, 이기탁 교수, 송건호 선생 등과 함께 두 사람씩 짝이 되어 강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청중 속에는 건장한 남자들이 여기저기 섞여 있었는데 알고 보니 당국에서 파견한 형사들이었습니다." 이만열 박사는 젊었을 때 소원이 목사(牧師)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교에 진학하려고 하니, 소속 교단 고려신학교가 부산에 위치하고 있어 당시 이 박사는 어머니와 동생 셋을 부양했던 관계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소원은 뒤늦은 때였지만 해직교수가 된 후, 박윤선 박사의 권유로 합동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강도사 고시에까지 합격했으나 담임목사의 꿈은 접기로 하였다고 고백한다.(기독교사상 2021년 10월호, 최상도 교수와의 대담). 이만열 박사가 한국근현대사 연구에서 <한국기독교사>로 학문 영역이 확대된 계기가 있었다. 1980년 7월 신군부에 의해 교수직을 해직 당했을 때, 해직 기간동안 미국에서 내한 선교사 관련 자료를 수집하면서 자신의 학문 영역이 기독교사로 자연스럽게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전공이 한국사 중심이었는데, 이 때의 자료 수집과 '기독교역사연구회' 설립을 계기로 한국교회사 연구에 더 집중하게 되었고, 논문도 그 쪽으로 더 많이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스스로 평가해 볼 때, 저는 일반 한국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한국교회사를 연구한 최초의 학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전까지는 한국교회사 연구를 대부분 신학 하신 분들이 했습니다. 백낙준 민경배 송길섭 교수도 신학을 하고 교회사를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국사를 공부하고 교회사 연구로 넘어온 셈입니다. 저 다음부터 윤경로 교수나?김흥수 교수를 비롯해서 일반사학이나?종교학을 전공한 이들 중에 한국교회사를 주제로 학위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됐습니다. 사실 백낙준 박사나 민경배 박사의 경우는 자료를 가지고 실증적으로 한국교회사를 연구했지만, 다른 분들은 주로 구전으로 들은 것을 그냥 강의 시간에 얘기해 주는 정도였어요. 엄격한 학문적 검증을?거치지 않은 것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사 연구의 기초를 가지고 한국교회사를 하게 된 사람들은 역사학 방법을 교회사에 도입했습니다. 또 하나는 자료를 공유하면서 공동연구의 계기를 마련한 것입니다. 백낙준 박사나 민경배 박사는 주로 혼자서 자료를 찾고 연구했어요. 그리고 찾은 자료를 공유하지 않고 혼자 소장 하면서 개인 연구로 업적을 내고 그랬어요. 제가 후배 동지들과 함께 1982년에 '한국기독교사연구회'를 만들고, 1990년에 연구소를 함께 설립했는데 그 과정에서 자료 공유를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집체적 연구라 할 수 있지요. 그렇게 자료를 공유하니까 여러 사람이 업적을 많이 내게 됐죠. 한국교회사 연구를 엄격한 자료 검증을 통해서 하게 된 것, 그리고 자료 공유와 공동연구에 제가 조금은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 발전은 스스로 자기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존재의 증가 이만열 박사는 또 "저는 글을 쓸 때 생각의 촛점을 신앙(信仰)과 민족(民族)과 역사(歷史)에 둡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그게 나의 역사관인 것처럼 들릴 수 있겠는데, 그런 의미는 아니고, 제 생활과 사고의 주 영역이 신앙, 민족, 역사라는 말입니다. 민족주의 역사주의가 아니라 제 삶의 바탕이 신앙과 민족 그리고 역사의 영역 안에서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가끔 사관(史觀)에 대한 질문을 받는데 답하기 참 어려워요. 우선 저는 역사는 시간 속에서 어떤 생동감을 파악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심은 시간입니다. 저는 시간의 변화 속에서 인간, 지역 등의 변화를 파악해 내는 것이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항상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변화를 어떻게 파악 하는냐가 역사가의 중요한 역할이지요. 동양 사상에 역학(易學)이 있습니다. 여기서 역은 변할 역(易)자에요. 천태만상 변하는 것을 동양 학문으로 엮어 놓은 것이 역학이에요. 이 역학을 제대로 이해하면 역사 의식이 굉장히 높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역학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변화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변화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발전을 따르죠. 젊은 사람들은 저항을 해야만 사회의 변화가 오고그 변화를 통해 새로움이 올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저항이 역사 발전의 동력이 됩니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도 이런 변화를 확신하기 때문에 저항하고 그 변화를 역사 발전의 동력으로 삼는 인격과 사관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인간이 양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을 역사 발전으로 봅니다. 옛날에는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는 왕이나 권력자 몇 사람 밖에 없었는데, 민주화 이후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가 많아졌습니다. 이렇게 자유로워진 인간이 양적으로 증가할 수록 평등 문제가 대두되는데, 그러므로 역사 발전은 자기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인간이 많아짐과 동시에 주체적인 인간들이 평등한 관계를 유지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만열은 우리가 일제 하에서 차별 받은 것을 경험으로 하여 우리나라 군인들이 월남에서 주민들에게 횡포한 부끄러움도 민주화 된 국가의 일원으로써, 일본인들로부터 차별 받고 고통 받았던 바를 거울 삼아 이 땅에 먹고 살기 위해 찾아온 다민족들, 그들 거류민들에게 선의로 대하고, 오히려 봉사와 섬김으로 이를 극복해야 할 것이라고 역설한다. 일제 때 정신대 문제를 두고 일본에게 사과 배상하라고 요구하는 것 못지 않게 우리가 외국에서 잘못한 것, 특히 월남전에서 잘못한 것을 회개하고 보상하는 차원에서 이 땅에 온 이주민들에게 잘 대할 것을 강조하는 역사학자이다. 저서로는 <삼국시대사 강좌><한국근대역사학의 이해><단재 신채호의 역사학 연구><역사의 중심은 나다><한국기독교의 역사의식><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한국기독교 수용사 연구><대한성서공회사 1,2><한국기독교 의료사><역사의 길 현실의 길>(2021) 등이 있다.
    •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2023-07-28
  • [언론회 논평] 시청률이 낮아도 TV드라마가 미치는 영향은 크다
    지난 6월 말부터 방영한 TV조선(사장 주용중)의 주말드라마 ‘아씨두리안’(작가 김성한)은 동성애적 표현이 노골적으로 나오는 등 시청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이 방송은 첫 회부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연모 한다’ ‘안아드리고 싶다’ ‘어머니께만 느끼는 감정’이다 라는 표현을 통해, 동성애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극 중에서 시어머니가 ‘너 병원 가봐야겠다’고 하는데, 며느리는 ‘병원에 다녀왔는데, 답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5회분에서는 밤중에 며느리가 잠옷 차림으로 시어머니가 잠든 침대로 찾아가 시어머니의 몸을 만지는 장면도 나온다. 이것이 과연 시어머니에 대한 며느리의 사랑일까? 오죽하면 시어머니가 ‘미쳤다’고 한다. TV조선의 이런 방송물 방영에 앞서 기독교계에서 문제를 제기하자, 지난 6월 12일 방송 관계자들과 기독교 단체, 학부모 단체가 만나서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그런데 방송사에서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사랑하는 일은 없다는 것과, 국민 눈높이와 상식에 반하는 비윤리적인 부분은 포함시키지 않는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첫 방송에서부터 그런 약속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드라마를 보면,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서 오갈 대화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은 기독교 단체와 학부모 단체에게 했던 약속은 방송을 강행하기 위한 시간벌기로 보인다. TV조선은 우리나라 오랜 전통의 조선일보에서 출발 한다.(법인은 서로 다름) 조선일보는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고, 언론 중에서도 가장 높은 신뢰와 열독률을 자랑하는 신문이다. 그런데 그 조선일보를 모체로 만들어진 방송이 보여주는 내용은 실망스럽다. 우리나라의 방송들이 민노총과 연결되어 있고 공영방송들도 ‘노영방송’이 되어 온갖 편향된 모습으로 국민들이 크게 실망하고 있던 차에, TV조선은 이를 해소하고 상심한 국민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줄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듯 국민의 기대를 배신하는 듯한 방송물을 내보내는 것은 국민의 여망을 저버리는 것이다. TV조선이 좌파 정권하에서 방송 평가 점수를 하향 조작하여 방송승인을 받기 어렵게 만든 상황에서,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과 국민들이 TV조선을 지지하고 응원했는데, 이제 와서 이런 해괴한 동성애물을 방송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TV조선은 더 이상 국민들을 기망하지 말고, 이런 방송물을 중단하든지, 아니면 대폭적인 내용으로 바꾸어야 한다. 어찌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을 낯 뜨거운 동성애적 고백으로 풀어간단 말인가? 이에 대하여 기독교 단체에서는 조선일보의 불매운동과 TV조선의 시청거부운동을 펼친다고 한다. 왜 방송이 국민들에게 실망과 원성을 사는가? 그것도 조선일보를 근간으로 만들어진 방송이 말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동성애에 의한 ‘성 혁명’ ‘성 정치’로 가정과 윤리와 도덕과 사회질서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이런 때 민족정론지인 조선일보와 TV 조선이 손을 잡고 이를 바로 잡을 생각은 없고, 오히려 동성애를 부추긴단 말인가? 조선일보에서 출발한 TV조선마저 이런 방송으로 시청률이나 높이려고 한다면, 이 땅의 언론들에게서는 더 이상 희망을 찾아보기 어렵다. TV조선은 무책임한 동성애 옹호보다 우리 가정과 사회를 살리고, 건강한 가정을 만들어가는데 앞장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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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7-28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19:1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나 사무엘을 불렀을 때는 단지 “아브라함아” 혹은 “사무엘아”라고 하시며 그들의 이름만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창22:1, 삼상3:4).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삭에 푹 빠져 있는 상태를 알렸고, 사무엘은 자신이 하나님의 전을 가까이하고 있음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시며, 엘리야를 부르실 뿐만 아니라 장소 곧 ‘여기’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들어 영적으로 어두워진 엘리야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란 육신에 갇힌 ‘굴속’을 의미합니다. 이세벨에게서 도망 나온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19:14). 엘리야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는 열심이 특심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하나님을 위하였을까요? 하나님이 엘리야를 위하셨을까요? 아합 때에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세라 우상이 사방에 퍼져 있었습니다. 왕과 왕후가 그러하니 신하들도 자연스럽게 미혹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인데, 백성들도 우상을 섬기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엘리야는 미혹에 빠지지 않고 신앙을 지켜나갔습니다. 자신이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남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극심한 가뭄 중에서도 엘리야에게는 그릿 시냇가를 지정하여 숨게 하셨고, 까마귀에게 명하여 떡과 고기를 가져다주도록 하셨습니다(왕상17:5-6). 또 그릿 시냇가 물이 마르자 시돈 땅 사르밧 과부에게 명하여 그를 공궤하도록 하였습니다(왕상17:9). 엘리야가 까마귀에게 명한 것도 아니고, 사르밧 과부를 스스로 찾아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까마귀와 이방 여인 사르밧을 통하여 그를 섬기도록 한 것입니다. 엘리야 스스로는 통 속의 가루 한 움큼과 병 속에 있는 적은 양의 기름으로 몇 년을 버틸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끊이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만일 엘리야가 백성들을 많이 모아 놓고 바알 선지자와 경쟁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주셔서 단 위의 제물과 단을 태워주시지 않았다면 엘리야는 거기서 살아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야 자신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그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신앙인들은 감사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엘리야처럼 시험 들기 쉽습니다. 아마도 엘리야는 이렇게 시험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나의 열심이 이렇게 특심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바알 선지자들을 없앴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아합과 이세벨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게 하시는 걸까?’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열심 있는 나를 잠시도 쉬지 못하게 여기까지 도망 나오게 하시는 걸까?’ 부언하지만 사람들이 하나님께 시험 드는 이유는 엘리야처럼 자신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렇게 하나님을 위하는데 하나님은 왜 나를 위해 주시지 않지?’ 사람에게 시험 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에게 얼마나 잘했는데 고작 내게 돌아오는 것이 이거야?’ 사랑의 채권자 곧 “나는 사랑을 받아야 하고” “나는 대접을 받아야 하고” “나는 인사도 받아야 하고” “나는 섬김을 받아야 할 사람이야.” 이런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반면 사랑의 채무자는 “나는 사랑에 빚진 자야. 그러니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해” “나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나는 대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해” 이런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상 삶에 있어서 채무자가 된다면 상당히 괴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채권자가 아니라, 채무자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빚진 사랑을 우리는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보답의 표시는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몸을 드리고, 사랑하고, 경외함으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웃을 섬김으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야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똑같이 여러분에게 “K야 어디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로서, 보답하는 자세를 가지고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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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6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때늦게 바친 조시
    “님은 이곳 언덕 어딘가에 싸늘한 시신이 되었고 / 한 줌의 바람이 되어 떠났지만 / 우린 여전히 님을 보내지 못하고 그리워 합니다 / 포시에트 항구에 지쳐 쓰러졌던 소년이 / 우수리스크의 거상이 되어 / 독립운동가들의 차가운 몸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 불의 페치카가 되었으니 / 시베리아의 혹독한 겨울 눈보라도 / 그 푸른 불꽃을 꺼뜨릴 수 없었습니다 / 최재형 선생님이여, 지금도 타오르는 페치카여 / 님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고서야 / 어찌 자유 대한의 역사를 안다고 할 수 있으리오 / 그대처럼 조국의 제단에 모든 걸 던져 타오르지 않고서야 / 어찌 나라를 사랑한다 할 수 있으리오 / 때늦은 조시를 바치는 우리를 용서해 주십시오 / 이제, 당신 가슴에 타오르던 그 푸른 불꽃을 / 우리 가슴의 촛대에 점화시켜 주시고 / 님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별과 들꽃의 이름이 되어 / 더 이상 압제와 굴종이 없는 / 자유와 평화의 세상의 밤하늘을 비춰 주십시오.” 이 시는 제가 고 최재형 선생님이 순국을 한 소베스가야 언덕에서 낭송한 시입니다. 사실 저는 최재형 선생님을 잘 몰랐습니다. 몇 년 전, 블라디보스토크에 선교집회를 하러 가서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함경북도에서 소작농인 아버지와 기생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흙수저 출신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8살 나이에 러시아로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블라디보스토크의 거상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거상이 되었으면 요즘 말로 갑질도 하고 가오도 잡으며 살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거상이 되고 귀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흙수저와 같은 고려인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권익을 신장시켜 주었습니다. 오죽하면 그의 별명을 고려인들이 페치카(벽난로)라고 했지 않겠습니까? 이분은 고려인들의 페치카만 되어 준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대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 거의 대부분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다 쓴 것입니다. 특별히 안중근 의사의 실질적 후원자였고 후견인이 되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만 많이 들었지만 안중근 의사가 위대한 열사가 되기까지는 그분의 후원과 지원이 있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이후에도 최재형 선생님은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을 잘 보호해 주고 뒷바라지를 해 주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던 것은 최재형 선생님을 어린 시절 때부터 키워준 양부모의 독실한 기독교 신앙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연해주에 32개 학교와 32개의 교회를 지은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려면 교육도 받아야 되지만 기독교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정말 당시로서 남자의 향기를 발하신 분이고 미스터 선샤인의 삶을 살았던 분이죠. 저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분에 대해서 빚진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019년 여름에 당시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이었던 안민석 의원님의 도움을 받아 그분의 흉상을 건립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 대한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싶었지만 코로나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코로나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을 받아 이런 일을 시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외주 제작사에서 제가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현장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러시아가 전시 중이라 비행기가 운항이 되지 않습니다. 25시간 배를 타고 가야 되고 올 때는 중국 북경을 거쳐서 돌아와야 됐습니다. 더구나 밤 비행기로 북경에 와서 공항에서 꼬박 밤을 새우고 오전 비행기로 인천공항으로 와야 합니다. 그래야 주일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굴뚝같아서 안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작사에서는 제가 가서 화면에 등장하여 설명도 하고 인터뷰도 해야 빛이 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결단 끝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재형 기념관을 비롯해서 여러 곳에서 촬영을 하고 마침내 주 촬영 장소인 소베스가야 언덕에서 때늦게 바치는 조시를 낭독하였습니다. 조시를 낭독하는데 가슴이 울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베스가야 언덕에서 최재형 선생님이 총살을 당하여 죽으셨거든요. 그러나 그분의 유해조차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 금방 어디에 분명히 묻혀 있을 것입니다. 그걸 생각하며 조시를 낭독하니까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뜨거웠습니다. 조시를 낭독하는 동안 들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바람을 통하여 들꽃들과 들풀들을 흔들리게 하셨고 저는 마치 그 들꽃들의 향기가 최재형 선생님의 정신과 혼처럼 느껴졌습니다. 거침없이 비쳐오는 오후의 태양 열기로 이마에서뿐만 아니라 온몸에 땀이 흘러내렸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들꽃의 모습과 향기는 정말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온몸을 땀으로 목욕하고 얼굴이 까맣게 탔지만 그래도 나름 고생하고 온 보람과 가치가 느껴졌습니다. 욕심 같아서는 연추와 포시에트 항구까지 가고 싶었지만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저는 미리 갑니다. 촬영을 어느 정도 마치고 나니 어서 빨리 교회로 돌아가고 싶네요. 소베스가야 언덕에 그 아름다운 들풀의 모습과 향기를 가슴에 담고 어서 빨리 교회로 돌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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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7-23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교사들을 지키고, 그들을 응원하자’
    인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특수학급을 담당 교사가 6월 23일에 교실에서 학생으로부터 머리채를 잡히고 의자에서 넘어트렸다. 그 교사는 전치 6주 진단을 받았다. 이런 폭행은 지난 2개월간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교사는 학생 신상정보 노출 우려와 교사를 탓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이기지 못해 이를 드러내지 못했다. 지난 6월 30일 양천구 모 초등학교에서도 교사가 학생들이 보는 데서 학생에게 폭행을 당했다. 6월 18일 서초구 모 초등학교에서도 새내기 교사가 원인을 알수 없이 교내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런 사례를 들고자 하면 슬플 정도로 수없이 많다. 나라의 백년지대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 이상의 국난이 무엇이고, 이것 이상의 위기가 무엇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절대로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얼마전 교회에서도 필자는 황당한 경우를 보았다. 교회학교 학생이 여전도사님의 머리채를 잡아채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광경이었다. 한두번도 아니고 거의 대여섯번을 반복했다. 아버지는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본 필자도 그 아이의 기세에, 아버지의 소극적 태도에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하고 물끄러니 바라보는 초라한 처지가 되었다. 그 와중에도 전도사님은 아이를 제압하거나 나무라지 않고 그 수모를 고스란이 당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 전도사님의 인내심이 높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교육이 그리고 심지어 교회조차 이렇게 되었을까? 그 언젠가 교사의 정년을 2년 줄이기 위해 교사들의 자존심과 교권을 잔인하게 짓밟던 일이 생각났다. 소위 “000세대”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아이들은 대담해졌다. 아이들은 걸핏하면 112에 신고하고, 여차하면 학부모들은 선생들에게 폭언과 손찌검을 했다. 여기에 학교 당국과 정부는 여론의 눈치를 살피며 적극적으로 교사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슬픈 일이다. 교육이 무너지면 미래가 무너진다. 자녀가 귀하면 교사를 존중해야 한다. 왜 부모들은 이런 사실을 모를까? 그들의 눈에는 성적표와 대학 간판들만 보이는 것일까? 그렇게 키워낸 아이들이 부모는 물론 이 사회와 구성원들을 귀하게 여길 수 있을까? 그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사람으로 살아갈지 상상이나 하고 있을까? 자기 자녀들의 허물에는 철저하게 눈감고 변명하면서, 자녀들을 향한 교사의 매, 설사 그것이 과하다 하더라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까? 지금 우리나라의 이 정도의 성장은 우리를 매로 때리시던 그 선생님들 덕분이다. 필자의 학생 시절, 우리들은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맞았다고 아버지에게 일러바치면, 오히려 무슨 맞을 짓을 했느냐고 아버지에게 혼이 났던 기억이 있다. 이것이 정상적인 교육이다. 부모는 교사를 신뢰하고, 교사는 소신에 찬 모습을 잃으면 안된다. 학교는 교사의 교권을 지켜주고, 당국은 교육의 질서와 권위를 잃으면 안된다. 적어도 교육만은 여론에 휘둘리면 안된다. 더 이상 불확실하고 조작적인 여론에 의해 우리나라의 백년지대계가 무어지면 안된다. 교회와 성도들은 이 문제에 대해 조금은 공격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지금 이 시대의 정치가들은 모두 여론과 표계산에 온통 집중되어 있어 이런 진지한 고민에 별로 관심이 없다. 이 문제를 본질적으로 다시 살펴보는 진지한 노력이 필요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교회밖에 없다. 목회자들의 대오각성과 결코 방임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필요하다. 지금도 교사들은 교사다움을 위해 출근하고 있다. 그런 교사들에게 “포기하지 말아요. 포기하는 순간에 대한민국의 미래는 무너지고, 돌아서는 순간에 오늘의 현실이 수렁에 빠집니다”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런 교사들을 믿고 응원하고 함께 해야 한다. 조금은 더 적극적으로 지켜주고 보호해야 한다. 왜 이런 당연하고 확실한 이야기를 이처럼 진지하고 감동적으로 해야할까? 이것이 우리의 불행이요, 아픔이다. 이 불행과 아픔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은 교사들의 결의와 우리들의 응답으로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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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3-07-22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엘리야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있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19:11-12). 이 내용은 엘리야가 그를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도망쳤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이시고 듣게 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세미한 음성으로 나타나시기 전에 산을 가르는 크고 강한 바람에도, 지진에도, 불 가운데서도 계시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습을 엘리야에게 보이셨을까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뜻 없는 일이 없습니다. 분명히 엘리야나 후대에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교훈하시기 위함입니다. 산을 가르는 크고 강한 바람, 지진, 불 이러한 표적들에도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이러한 표적 등은 하나님의 웅장함, 엄위, 권능 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적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의 외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그동안 하신 일은 이러한 외적인 표적과 기사 등이었습니다. 3년 6개월 가뭄 기간 중에 한 번도 훈련해보지 않은 까마귀가 그에게 떡과 고기를 가져다 준 일, 통에 가루가 한 움큼밖에 남지 않았고 병에 기름이 조금 밖에 남지 않았었지만 남은 가뭄 기간 동안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와 그의 아들이 먹을 수 있도록 통의 가루와 병에 기름이 다하지 않은 일, 이스라엘 왕과 왕후, 신하들이 지지하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홀로 상대하여 죽인 일 등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나타내신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과 같은 일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맛 본 엘리야는 이세벨이 그를 죽이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그런 기적들을 나타내 주시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큰 이적들을 통하여 엘리야에게 자신을 알리는 차원을 지나, 이제는 인격체이신 하나님 자신을 알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들의 수준이 표적이나 기사 등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려고만 한다면, 종교성은 그에게 있을지 모르지만 인격적으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께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어지고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며 교제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신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엘리야 이전에 이미 이러한 신앙적인 수준에 도달한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에녹은 무려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1-24). 에녹은 육신의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하늘로 오른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특별한 업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하여 세속을 떠나거나 특별한 고행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처럼 자녀를 낳고 길렀으며 보통 사람들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가 달랐다면 보통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점입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제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하였기 때문입니다(암3:3). 자신의 뜻보다 길이요 진리이신 하나님의 뜻을 더 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 또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16:7-8). 다윗은 밤마다 그의 양심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고, 무슨 일을 할 때 항상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그가 흔들릴 때는 하나님의 현존을 감각하며 위로를 받았고 힘을 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시16:9). 주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그 자신이 항상 기뻤으며 육체까지도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가끔씩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나타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고 믿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보지 못하고 믿는 것입니다(요20:29).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은 양심을 통하여 성령께서 하시는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 음성이야말로 지각을 사용해야 들을 수 있는 장성한 자의 몫입니다(히5: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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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0
  • [언론회 논평] 중국인에게 지방선거권을 주지만, 중국은?
    한국에서는 외국인이라도 영주권을 취득한 지 3년이면 지방선거 시에 투표권을 준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18세 이상 영주권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2022년 기준으로 16만 1,359명이 된다. 그중에 중국인이 81%를 차지하는 13만 1,112명이나 된다. 또 선거인 수도 지난해 기준으로 12만 7,623명이 된다. 우리나라가 외국인 영주권자에게 지방 선거에 한하여 투표권을 주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5년으로 노무현 정부 때다. 그러나 외국에서 우리나라 사람에 대하여 투표권을 주는 나라는 없다. 아예 공산권에서는 불가능하며, 미국이나 영국도 시민권자에게만 투표권을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외국인 영주권자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은 ‘상호주의’에도 맞지 않고, 자칫하면 외국인들이 밀집한 곳에서는 그들이 단결하여 특정 후보를 당선시킬 수도 있고, 반대로 낙선시킬 수도 있다. 이에 대하여 여당과 법무부에서는 “공직자 선거법”을 고쳐야 한다는 입장으로 알려진다. 국민의힘 권성동 의원은 지난해 말, 현행 3년 된 영주권자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을 5년 이상으로 늘인다는 법안을 발의했지만, 이것도 면밀히 검토해 봐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없는 것을 왜 우리나라에서 굳이 혼란의 무리수를 두면서 시행할 필요가 있는가? 지방 선거는 기초의원과 광역의원, 기초 단체장을 선출하는 것인데, 특정 국가 사람이나 특정 종교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뭉칠 때에는 어떤 부정적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 그동안 선거 때마다 특정 국가 사람들이 민의를 왜곡하고 선동한다는 말들도 허다했다. 따라서 온전한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데, 그들에게 참정권을 주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외국인 가운데 가장 많은 중국인에 대한 4가지 ‘상호주의’를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중국인들은 한국에서 참정권을 받고 있고(중국에서는 한•중수교 31년이 지났지만 한국인에 대한 참정권은 없다) 또 건강보험의 문제이다. 현재 중국인 직장 가입자는 숫자에 제한 없이 피부양자도 의료 혜택을 받고 있다. 지난 5년간 중국인에 의한 국민건강보험 재정 적자는 3,073억원으로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한국인은 중국에서 직장을 다녀도 가족까지 혜택을 받지 못한다. 이것에 대한 ‘상호주의’도 적용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에게는 부동산 소유나 이에 따른 금융대출이 매우 제한적이지만, 중국인에게는 대폭 완화하고, 혜택을 주고 있다. 이것도 ‘상호주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어찌 내국인에게는 엄격한 것을 외국인에게는 관대한 것인가? 만약 한국인이 중국에 가서 부동산을 취득하고, 그에 따른 은행 대출을 받으려고 할 때 중국인들이 한국에서 받는 만큼 혜택을 받을 수 있는가? 이것도 전 정권이 열어 놓은 ‘잘못된 혜택의 문’인데, 바로잡아야 한다. 국제 사회에서 ‘상호주의’없이 일방적 혜택을 외국인에게 주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이런 제도로 인하여 자국민이 손해를 보고 피해를 당하는 것이다. 또 국민들이 낸 세금이 엉뚱하게 새나가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이런 부분도 세밀히 검토하여 하루 속히 시정해 나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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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7-19
  • [언론회 논평] 잘못된 권력으로 비틀지 않으면 역사는 바로 간다
    오늘의 한국이 있기까지 우리 선진들의 피와 땀과 눈물과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중에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 자유대한민국 국가 체제를 세우신 분이다. 그분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해방 후에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당시 강력한 공산주의에 의하여 건국도 제대로 못해 보고 혼란 중에 망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역대 정권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제대로 평가하거나 그분의 업적을 정당하게 대접하지 않았다. 오히려 ‘친일’과 ‘독재’의 프레임을 씌워 짓밟는데 혈안이 되었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면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그에 따른 기념관을 지어 올바른 역사를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높아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최근에는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조직되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위원회에서는 국가 지원보다 민간 주도의 모금을 통하여 기념관을 건립한다는 소식이다. 참 다행스런 일이다. 그리고 여기에 참여한 원로 영화배우이자 한주홀딩스코리아 명예 회장인 신영균 씨가 기념관 건립을 위한 4,000평 부지(敷地)를 기부한다고 하여 화재이다. 신 회장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10여 년 전에도 500억원 규모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여 우리 사회를 놀라게 했었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건강한 생각과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사시(斜視)와 같은 시각을 가진 권력자들이 역사를 비틀고, 국가의 영웅과 같은 분들의 공과(功過)를 정확하게 평가하지 않고, 과(過)만 강조하여 침소봉대(針小棒大)하고, 아예 역사에서 지우려고 획책해 왔다. 또 한 가지 다행스런 일이 있다.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를 건곤일척(乾坤一擲)에서 구한 백선엽 장군의 동상 제막식이 당시 다부동 전투의 격전지인 경북 칠곡에서 있었다고 한다. 이때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국군 1사단이 북한군 3개 사단을 물리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에서의 인천상륙작전이나 북진(北進)은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2020년 7월 10일 백선엽 장군이 돌아가셨을 때, 대한민국 창군(創軍)의 주역이자 나라를 살린 국가의 영웅인 백 장군 조문소에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조문도 가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2021년 2월 진보좌파 정치인 백 모 씨가 작고했을 때는 문 대통령이 직접 조문을 갔다. 그뿐만 아니라, 동작동 국가현충원을 만들었던 백 장군의 유해를 서울현충원에 안치하지 못하게 하여, 결국 대전현충원으로 내쫓기는 형상이었다. 이념의 가림막으로 영웅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거기에다 당시 국가보훈처장은 돌아가신 백 장군 안장 정보에다 ‘친일파’라는 문구를 넣기도 하였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국가가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 놓여 있을 때, 몸을 던져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모범을 보인 영웅에게 요상스럽게 불명예의 굴레를 씌운 것이다. 묘지에다 빨간 줄을 긋는 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우리나라 좌파 정부만이 할 수 있는 기발한(?) 발상이었다. 우리 국민들은 가만히 두면 저절로 바른길로 가려고 한다. 그런데 잘못된 권력자들이 역사를 비틀고, 국민들을 호도하면 잠시 정도(正度)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정도(正道)로 돌아가려는 탄성(彈性)까지 꺾을 수는 없다. 이제는 국민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져야 한다. 모든 국민들의 뜻과 정성으로 역사의 진실을 살려내고, 또 국가의 영웅을 홀대할 마음이 없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윤석열 정권에서도 이런 국민들의 마음을 결집 시켜 주고 역사를 바로 세우고, 국가를 위해 보국충성(保國忠誠)한 일들을 널리 기리는데 국가의 책무를 다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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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7-1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김원중 목사의 ‘교회사로 보는 박조준 목사의 설교와 목회신학’
    본고는 지난 5월 22일 열린 '제2회 웨이크신학포럼-교회사로 보는 박조준 목사의 설교와 목회신학'를 참관한 김원중 목사의 소감 전문이다. <편집자 주> 정일웅 목사는 ‘교회사로 보는 박조준 목사의 설교와 목회신학’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사회변화와 한국교회의 역할을 대비하며 한국교회가 시대적부름에 부응하여 나라와 민족의 발전에 이바지해왔음을 적시하고, 다만 제5공화국 들어 군사쿠데타의 시기에 교회가 침묵함으로써 선지자적 역할을 도외시한 것이 흠이었음을 지적한다. 이 시기에 박조준 목사는 교회의 개혁을 설교하고 행동하는 목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신군부의 요구를 거절하여 교회의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였다고 분석한다. 또한 박조준 목사가 교회공동체의 책임을 일깨우고 교회 연합의 정신을 고취한 것들이 마치 17C 코메니우스가 동유럽 보헤미아에서 형제연합교회의 목사와 감독으로서 유럽의 교회를 새롭게 세우려 한 것에 비견하며 개혁과 연합의 선구자로서의 모습을 부각시켰다. 코메니우스가 사회, 교육, 정치영역까지 망라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완전한 개혁을 추구한 것처럼 박조준 목사도 교회개혁이 사회, 정치, 현 시대를 망라해야 한다는 정신이 같다고 보았다. 임승안 나사렛대 전 총장은 박조준 목사의 삶을 세 편의 이야기로 나눠서 풀어갔는데, 전기적이고 교회역사적인 것으로서 이북의 선조들의 삶과 박조준 목사의 청소년기, 학교와 교회 생활 그리고 담임목회 기간이 그것들이다. 한국 교회의 현실에 대한 박조준 목사의 진단과 처방을 요약하면, 나라가 살려면 교회가 살아야 하고 교회가 살려면 목회자가 살아야 하고 목회자가 살려면 회개해야 한다. 결국 하나님과 목회자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아신대 신대원장 박응규 교수는 ‘박조준 목사의 목회 사역과 한국 교회사’를 논하였다. 국가적 혼란기에 하나님의 종으로서 최선을 다하셨으며, 인간의 내면변화에 주력하고 사회 참여와 변화에 적극적이셨으며, 박정희 정권과 신군부 앞에서 강직하고 예언자적 설교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복음적이고 예언자적인 설교를 통해 한국교회의 귀감이 되신 것이다. 박조준 목사의 한국교회사적 공헌을 살펴보면, 첫째 복음전도의 우선성을 기반으로 사회적 기여를 하였으며, 둘째 복음적 예언자적 설교를 통해 한국교회의 귀감이 되었으며(타협하지 않고 권력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정의와 개혁을 외침), 셋째 교회개혁과 교권적 장로교의 개혁과 연합운동에 대한 기여를 했으며, 넷째 목회자와 설교자의 교육과 갱신을 위해 헌신하였고, 다섯째 목회자로서의 자세와 취해야 할 태도를 분명히 하여 후대에 귀감이 되어 준 바른 목회자상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박종구 목사는 월간목회와 박조준 목사의 관계를 소개하며, 2016년 9월호에 실렸던 박조준 목사의 설교의 핵심을 ‘1)쉽다 2)대중적이다 3)본문에 충실하다 4)위로와 새 힘을 준다 5)전달이 역동적이다’의 다섯 가지로 요약했다. 그리고 더불어 박종구 목사는 웨이크 포럼의 의의를 ‘1)설교연구의 인프라가 구축되었다 2)비평문화가 성숙되면 좋겠다 3)목회쟝르별 접근이 필요하고 다각적인 방면으로 조명되어야 한다 4)개혁의 지평을 확대하자 예컨대, 신학윤리, 실천윤리, 선교전략 정책, 문화예술 개혁 등‘으로 요약하고 설명했다. 이러한 신학적 포럼을 통해 AI시대에 과거의 공부를 통해 어떻게 미래를 열어갈지를 고민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위와 같은 여러 분들의 발제와 정리를 통해 박조준 목사님의 목회와 한국 교회에 기여하신 역할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으며, 근현대사를 사시며 행동으로 우리에게 훌륭한 귀감이 되신 모습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런 훌륭하신 목사님과 같은 시대를 사는 것이 큰 영광이다. 그리고 목회자의 한 순간의 선택이 한국 교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 깨닫게 되는 계기였다. 교회들이 신군부의 서슬퍼런 권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바른 자세를 취했더라면 작금의 한국 교회의 위상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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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8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그루터기’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6:13). 작년 늦가을 교회 건물 옥상에 방수를 하였습니다. 준비단계에서 그곳 화분에 있는 식물들을 모두 처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화초들은 대부분 시들거나 그 생명이 다하여 가고 있었지만, 맨드라미는 그 때에도 수명이 한 달은 남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남겨 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모두 없애고 단 한 그루만 씨받이로 남겨 두었습니다. 방수를 모두 한 후 겨울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한 그루도 처리하였습니다. 방수를 깨끗하게 페인트칠을 해놓고 보니 더 이상 식물로 옥상을 더럽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올 해는 화분들에게 안식을 주기로 했습니다. 어떤 식물도 뿌리거나 심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과 다르게 봄이 되니 식물들이 쏙쏙 올라왔습니다. 작년에 자랐던 식물들의 씨들이 떨어져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맨드라미 싹은 화분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비교적 다른 씨앗들에 비하여 늦게 발아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였지만 오랜 시간에도 나오지 않자 더 이상 기대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옥상에 있는 화분을 보니 맨드라미가 화분 여기저기에 모종 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기대를 포기하고 있었을 때 한 포기 남아있던 맨드라미에서 씨가 떨어져 한 화분 가득 싹이 돋아 자랐는데 그것을 자매 한 분이 모종한 것입니다. 한 그루의 맨드라미가 이곳에서 그들의 역사를 계속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그루터기가 나옵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6:13). 남유다가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겨두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거룩한 삶은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거룩’이란 성스럽고 위대함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하여 속 된 것을 멀리하도록 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레11:44). ‘거룩’이란 몸을 구별하여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속 된 것으로부터 구별하는 것, 사치 세력, 음란 세력으로부터 구별하는 것 등을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신앙인들이 불신자들처럼 속되게 살아가지 아니하고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 된 생활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18:4). 이와 같이 성도들은 거기서 나와야 합니다. 거기는 바로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곳, 사치의 세력이 있는 곳, 자신을 여황이라고 하고, 과부가 아니라고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서 부터 나와 따로 있는 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모두 세상 사람들과 어울러서는 안 되고 산속이나 숲속이나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곳에서 살아야 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 속에서의 구별입니다. 고기가 바다 속에 살지만 짠물이 들여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기름이 비록 물속에 있지만 물과 섞이지 아니하고 구별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거룩한 생활을 적극적으로 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거룩한 생활의 소극적인 면은 육체의 정과 욕심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으면 속 사람이 나옵니다. 속 사람 따라 살아가는 것이 거룩한 생활입니다. 자기 생각을 좇아 살아가는 것은 속된 생활입니다. 만물보다 거짓 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렘17:9). 자기 생각을 따라 살아가지 않는 생활이 순종하고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4-15). 순종하는 것이 거룩한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 이스라엘 민족 모두를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19:5-6). 하지만 그들이 타락하여 금송아지를 섬기자 레위 지파만 제사장 지파로 삼았습니다(출32:28-29). 그러다가 이스라엘 족속들이 발람에게 속아 모압의 신들에게 제사하고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는 사건이 생겼습니다(민25:12). 그 때에 제사장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미디안 여인과 그와 함께 온 시므온 지파의 족장을 창으로 찔러 죽게 하였습니다. 그 일로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 족속을 영원한 제사장 지파로 삼을 것을 약속하였습니다(민25:11-13). 나중에 비느하스 족속도 타락하자 사독의 후손이 남습니다.솔로몬 왕 때부터 사독의 후손이 제사장 집안이 됩니다(겔44:15).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타락하면 거기서 솎아내고 또 타락하면 계속 솎아내어 거룩한 백성들을 그루터기로 삼습니다. 거룩한 생활은 순종하는 생활이며 거룩한 생활은 성령의 열매 맺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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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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