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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집어등 교회를 꿈꾸다”
    지난주에는 제주도에서 저희 교회 전반기 교역자 정책수련회를 하였습니다. 제주도에 갈 때마다 밤이 되면 바다에 현란하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어두운 바다를 비추는 찬란한 불빛이죠. 그 빛은 오징어를 잡기 위한 ‘집어등’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엔 그 집어등이 얼마나 찬란하고 눈부시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징어로서는 가장 슬프고 비극적인 불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징어는 다른 물고기와는 다르게 시각이 발달해 있죠. 그 시각은 눈부시고 찬란한 불빛을 좋아합니다. 그 불빛을 보는 순간 오징어는 사족을 못 씁니다. 사랑하는 어머니도 등 뒤로 하고, 죽고 못 사는 짝도 버려버린 채 불빛을 향하여 질주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그만 어부가 쳐놓은 그물에 걸려버리고 맙니다. 오징어에게는 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 되어 버리는 셈이지요. 만일 오징어에게 생각이 있다면 아마 이렇게 후회할 것입니다. “아차 속았구나! 저 불빛의 유혹에 내가 걸려들었구나” 그러나 가슴을 치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유하 시인은 이런 시를 썼습니다. “눈앞의 저 빛 / 찬란한 저 빛 /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 의심하라 모든 광명을” 이 시적 의미는 오징어의 생으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이 시뿐만 아니라 모든 시에서의 은유의 본질이란 인간의 삶을 관찰하고 탐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는 문장과 문맥을 초월하여 인간의 삶의 차원으로 확산이 되죠. 그러므로 이 시는 인간에게도 가장 아름다운 것이 죽음이 될 수 있고,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유혹의 미끼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줍니다. 그러나 저는 집어등을 보며 이런 생각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사고의 대전환을 해보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집어등 교회가 될 수는 없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징어를 유혹하는 집어등은 죽음의 미끼가 되지만, 교회가 집어등을 켜놓으면 죽을 영혼, 영원히 멸망할 영혼이 새 생명을 얻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아무리 세상이 어둡고 혼탁하다 할지라도 우리 교회가 제대로 집어등을 켜고 비추기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을 영혼을 영원히 구원하고 수많은 영혼들을 거룩하게 납치할 수 있습니다. 산란한 집어등을 통해 교회는 거룩한 영혼의 포로수용소가 되고, 새 생명의 어장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신앙의 본질 회복과 초대교회적 원형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현대인의 안목과 생각에 호기심을 당겨주는 매력을 보이고, 거룩한 유혹의 빛을 발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게는 지역 주민에게 매력 있는 교회로 비추어져야 하고, 넓게는 이 시대와 사회에 신비스러운 유혹의 빛을 비추어주어야 합니다. 과거 선교사들은 암흑한 우리 민족사회에 집어등의 빛을 비추어주었습니다.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초대교회는 암울한 우리 민족의 명든 가슴을 어루만져주고 시대의 아픔을 치유해주었습니다. 한마디로 시대적 집어등 교회가 되어 준 것이지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한국교회는 시대적 부담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오히려 사회가 교회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저는 수련회를 하는 동안 내내 집어등 교회를 꿈꿨습니다. 후반기에는 더 생명의 말씀과 복음의 능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더 눈부신 복음의 빛과 더 거룩한 유혹의 이미지의 광채를 비출 것인가를 고민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교역자들에게 우리 모두 함께 집어등 교회를 꿈꾸자고 하였습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창문 밖으로 현란하게 집어등 불빛이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집어등 교회를 꿈꿔야 할 때입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7-16
  • [언론회 논평]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은 반드시 세워져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역대 대통령이 12분이 있다. 그분들 가운데에서는 긍정적 평가를 받는 분도 있고, 반대로 부정적 평가를 받는 분도 있다. 그리고 역대 대통령 가운데 기념관이 있는 분은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다. 그런데 유독 초대•건국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의 기념관은 없다. 세계 어느 나라치고 자기 나라의 초대 대통령의 기념관이 없는 나라가 있는가? 우리나라에서만도 김구, 안중근 등의 기념관이 있는데, 유독 이승만 대통령의 기념관이 없다는 것이 정상이란 말인가? 왜 그렇게 되어져 왔는가? 이승만 대통령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그에 따른 기념관이나 기념물을 세우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독재자’와 ‘친일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대한민국의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세운 분을 독재자의 굴레로 씌운다고 그 공로를 덮을 수 있는가? 또 친일 운운하는데, 평생을 독립운동한 분을 친일로 몰아가기에는 공(功)보다 과(過)를 강조하려는 뒤틀린 억지스러움이 돋보이지 않는가?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은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강점을 알고 오랜 동안 전제•왕정 국가로 살아오던 나라에서, 국민이 주인 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만들었다. 전에는 백성들을 양반과 상놈으로 구별하여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은 평생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이 국가의 정체성으로 세운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누구라도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또 시장경제 체제를 통하여 자본주의 국가로 만들어 부강한 국가로의 발돋움을 하게 만들었다. 뿐만이 아니라 ‘농지개혁’을 통하여, 소작민들은 평생에 자기 농토를 가지고 농사를 지을 수 없었는데, 농민들에게 땅을 나눠주어 자기 땅을 갖고 농사를 짓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이었던 6•25전쟁에서 나라를 지켜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미국과의 <한미상호보호조약>을 통하여 오늘날까지도 우리나라의 안보와 국방을 튼튼히 하는데 선지자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뿐만이 아니라 당시 문맹률 90%에 달하는 것을 학교를 세워 의무교육으로 만들어서 문맹률을 20%로 낮추는 획기적인 역할도 하였다. 나라는 세워졌으나 국민소득 몇십 불에 불과한 나라에서 자유와 민주, 국가 번영의 기틀을 마련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벗어야 한다. 부정적 호사가(好事家)들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하여 이것저것 트집을 잡으면서, 그분을 기념하고 추앙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지만 이제는 국민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는 초대 대통령이며, 대한민국의 새로운 국가를 세운 분에 대한 지나친 냉소(冷笑)를 버려야 한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일수록 평소에는 ‘국민통합’이니 ‘국가발전’을 운운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정작 자기들의 비뚤어진 사고의 잣대를 가지고 역사적 팩트마저 덧칠하여 부정하려는 속셈을 드러내는 것이 안타깝다. 이런 식의 반대가 명분(名分)에 맞는 것인가? 윤석열 정부는 역대 정부들과 달라야 한다. 지금까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하여 홀대했던 과거를 뛰어넘어, 하루속히 초대 대통령이며, 건국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바로 하는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진행해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과 공을 기념하는 장을 만들게 되므로, 역사는 새롭게 평가될 것이며, 제대로 된 역사관이 세워질 것이다. 또 선동에 의하여 갈라진 국민들의 의식도 바르게 수정되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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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7-10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목회자 이중직, 이렇게 본다
    최근 이재철 목사님의 목회자 이중직 발언을 놓고 논란이 뜨겁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께서 한 목회자 세미나에서 ‘어떤 목사가 끝까지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면서 이중직과 관련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신 것입니다. 이 목사님 이야기의 요지는 이런 것입니다. “목회자는 교인과 다르게 신앙생활에서 프로 정신을 가져야 한다. 대통령, 의사와 더불어 수습 기간이 없어야 할 직종이다. 최근 젊은 목회자들이 ‘이중직을 가져도 좋지 않겠느냐’고 질문을 많이 하는데, 추신수 선수가 미국에 건너가 7-8년 동안 2군, 3군으로 활동을 할 때는 햄버거만 먹고 살았다고 한다. 그가 이중직을 가져도 된다고 생각하고 나흘은 야구장 가서 야구하고 사흘은 아르바이트를 했더라면 오늘날의 추신수가 존재하겠는가. 자기 기량을 더 높이기 위해 프로야구 선수도 그렇게 치열하게 미래를 위해 자기를 가꾸는데, 목사는 프로야구 선수보다 더 프로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더 몰입한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는 세속직을 가지라고 권한다. 목사에게 있어서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이 자립이다. 세상에서는 내가 살아가는데, 내가 처자식하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얼마만큼의 돈을 벌어들이는 능력을 경제적 자립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경제적인 자립은 내게 얼마가 주어지던 내게 주어진 경제적인 여건에 나를 맞추는 것이다. 목회자가 이 경제적인 자립을 이루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목회자의 마음을 담아서 설교할 수가 없다.” 이러한 발언을 놓고 유튜브와 SNS 상에서 찬반 논란이 뜨거워진 것입니다. 이 목사님의 발언에 대해서 이해하고 동의하는 쪽보다는 무차별적인 비난의 목소리를 내는 것도 보았습니다. 과거와 달라진 목회 환경과 각자가 처해진 상황을 간과한 채 이중직을 오로지 돈을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폄훼하거나 작은 개척교회의 현실을 모르면서 부정적으로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중직 목회자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저는 이재철 목사님이 말씀하신 “목사는 프로가 되어야지 아마추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이해하고 맞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라면 당연히 목회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목회자의 이중직이 무조건 잘못 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바울도 천막을 만들며 선교를 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중직은 본질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선교적 방법론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목회자들의 이중직 문제를 생각할 때, 과거에 정말 일반 회사 직원들보다 더 열심히, 아니 굶어 죽을 각오로 전도하고 목회를 해 본 적이 있는가, 묻고 싶습니다. 정말 아침 일찍부터 온 종일 사람들을 만나며 전도하고 심방하고 목회에 인생 전부를 걸고 투혼을 발휘해 본 적이 있는가하고 말입니다. 저 역시 가락동 지하상가 23평에서 개척 맴버 한 명 없이 개척을 한 개척목회자였습니다. 당시 저는 아파트 전도를 하기 위해서 새벽에 신문 배달을 하며 전도지를 돌리며 뛰었습니다. 그때 신문 배달을 한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신문에 교회 전도지를 끼워 놓을 뿐 아니라 모든 아파트 문 앞에 교회 전도지를 놓는 전제로 신문 배달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살기 위한 이중직을 하는 것보다 선교 방법론적인 차원에서 접근을 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아무리 시대가 달라졌다고 해도 방법의 차이가 날 수는 있지만 선교의 본질은 똑같습니다. 저는 정말 목회에 목숨을 걸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도를 하고, 말로 안되면 손을 잡고 뜨겁게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어느 새부터인가 영혼이 달라붙고 납치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저와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와 비슷한 방법을 실천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정말 굶어 죽을 각오를 가지고 뛰었습니다. 집사람이 우리 딸을 임신했을 때 먹을 것이 없어서 거의 유산 직전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때그때마다 까마귀를 보내주시고, 애를 낳은 다음에도 우유를 대주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굶어 죽을 각오로 전도하고 목회를 했을 때, 어느 순간부터 교회가 부흥이 되는 걸 봤습니다. 저는 이중직에 대해서 왈가불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개인의 환경과 상황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중직이 새로운 목회 대안이나 출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이중직을 하지 말라는 건 아니지만 이것이 새로운 대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중직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더한 열심을 가지고 목회에 모든 것을 투신한 후에야 환경과 상황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안 된다고 생각하고 바로 이중직을 선택하는 것은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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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7-09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무엇을 바라볼까?’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왕상19:3). 18장에서는 엘리야 홀로 바알 선지자 450명을 상대하여 승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살아계셔서 능력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굳세게 붙들었습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답은 뻔합니다. 혼자서 450명을 상대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였기 때문에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없앨 수 있었습니다. 바알 선지자는 여러 가지를 의미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죄의 세력을 뜻하기도 합니다. 죄는 세력입니다. 힘입니다. 엘리야가 자신의 힘으로 450명을 이길 수 없었듯이 신앙인들이 죄의 세력을 이기려 하는 것은 홀로 450명을 이기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번번이 실패하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있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만일 하나님께 “하나님, 저를 도와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 혼자의 무술로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해치울 수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말리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라. 너 혼자 한 번 해봐라.” 신앙인들이 자기 힘으로 죄와 싸우려 하는 것은 거대한 군대와 홀로 싸우려는 것과 같습니다. 술이나 담배 게임 등에 빠진 사람이 종종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술, 이것 내가 끊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끊을 수 있어” “담배, 언제든지 끊을 수 있어. 하지만 지금은 필요성을 못 느낄 뿐이야.” 그 말은 곧 “나는 홀로 18만 5.000명의 군대를 이길 수 있어.”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이길 수 있어.”라고 자신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 년 전에도 패하고, 한 달 전에도 패하고, 어제도 패했으면 자신은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어떻게 바알 선지자를 물리칠 수 있었을까요? 그는 먼저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셨다는 증거로 불을 내리셨습니다(왕상18:30-38). 그 후에 그는 바알 선지자 450명을 해치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죄와 싸우고 습관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자신에게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처럼 전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순종을 의미합니다(롬6:13).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증거로 불을 내리십니다. 그 불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성령의 불을 받는 것 사이에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는 비교적 빨리 응답을 받았지만 우리는 늦게 내릴 수도 있습니다. 불은 뜨겁게 달아오르는 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태우는 불입니다. 자신을 모두 태우는 불, 자기가 조금도 남지 않고 오로지 구속한 주만 보이게 하는 불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기도드리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왕상18:36-38). 그 때 비로소 불이 임하게 됩니다. 엘리야는 그렇게 능력을 받아 바알 선지자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용감했던 엘리야가 이세벨로부터 그를 죽이겠다는 통보를 받은 후에는 마음이 물처럼 녹았습니다. 그 형편을 보고 도망을 갔습니다. 이전까지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그가 형편을 보자, 환경을 보자, 상황을 보자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없이 나약해졌습니다.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환경을 바라보면, 형편을 바라보면 한없이 나약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지금 환경을 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바라봅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새 힘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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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03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말씀으로 영혼을 납치하다
    ‘남자 셋 여자 셋’이라는 시트콤을 아십니까? 당시 최고의 시청률을 올리며 초히트를 친 대한민국 최고의 시트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트콤을 쓴 박보영 작가님을 우리 교회 권부용 권사님이 전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분께서 우리 교회 신문에 ‘나는 왜 일요일 10시 48분 차를 기다리는가!’라는 글을 쓰신 것입니다. “...(상략) 나는 타고난 성격으로 나르시즘과 낙천적이다. 유달리 연휴를 좋아하고 징검다리 연휴라도 끼어 있으면 미리부터 가슴이 설렌다...(중략) 6월 2일부터 6일까지의 5일간의 일정 여행이 나를 유혹했다. 아!! 한가운데 끼어 있는 일요일! 교회! 나는 “주님이 도와주셔야 됩니다.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저와 함께 계셔야 합니다!!라는 목사님의 열창이 자꾸만 귀에 쟁쟁하게 맴돌았다. 목사님은 풍부하신 감정으로 그렇게도 노래를 잘 부르시는데 가수가 되셨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생산적이지 않거나 건져 올릴 대화가 없는 자리는 피하는 편인데 더구나 교회와 설교는 나에겐 거리가 먼 곳이었다. ‘작가님은 교회랑 어울리지 않아요.’, ‘산새 좋고 공기 · 경치가 얼마나 좋은데요.’ 하며 모두들 나와 같이 여행 가기를 갈망했으나 나는 단호히 거절할 수 있었다. 왜일까? 나 스스로 나의 변화에 놀랍다. 인간은 나이를 먹으며 내려놓고, 욕심을 버리고 베풀며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해서일까? 아님_ 공감과 유머와 열창(?)하시는 목사님의 설교 시간일까? 나는 어떤 것으로 환산할 수 없는 설교 시간을 오롯이 혼자가 되어 느끼며, 반성하며 마음속의 고뇌를 정리한다. 그 시간은 나에게 참으로 가치 있는 시간이기에 내가 나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분명한 것은_ 설거지를 깨끗이 하고 난 후 혹은 이불 호청을 햇볕이 쨍쨍한 마당에 하얗게 널고 난 후의 개운함 같은 것은 가치 있는 변화임에 틀림없기에 나는 일요일 오전 10시 48분 차(교회 셔틀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역시 대작가답게 한 줄, 한 줄이 저의 심금을 파고드는 명문들이었습니다. 이 글을 제가 먼저 읽고 그분께 직접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정말 교회는 질색이고 기독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에덴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소 목사님의 설교에 매료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도중에 부르는 찬양이 너무너무 매료가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어쩌면 가수가 되셨으면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노래로 심화를 시키고 정서적 환기를 시켜주셨을 거란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저는 앞으로 작가님께서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을 담은 드라마 대본을 써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전화를 끊고 보니까 류시화 시인이 쓴 ‘시로 납치하다’라는 책이 떠올랐습니다. 이 책은 전 세계의 유명한 시인의 시를 해설하면서 제목대로 시로 사람들을 납치하는 아름다운 글을 쓴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좋은 시를 쓰는 시인들도 있고 또 무덤덤한 시를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천의무봉과 같은 아름다운 시를 쓰는 사람도 있고, 지나치게 낯설게 하는 시를 써서 정말 이해하기 힘든 시를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바람직한 시는 그 시를 통해서 사람의 마음을 납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키 지오바니라는 시인은 ‘납치의 시’라는 시를 썼습니다. “시인에게 납치된 적이 있는가. 만약 내가 시인이라면 당신을 납치할 거야. 나의 시구와 운율 속에 당신을 집어넣고 롱아일랜드의 존스 해변이나 혹은 어쩌면 코니아일랜드로 혹은 어쩌면 곧바로 우리 집으로 데려갈 거야. 라일락 꽃으로 당신을 노래하고 당신에게 흠뻑 비를 맞히고 내 시야를 완성시키기 위해 당신을 해변과 뒤섞을 거야....”(하략) 이 시를 보는 순간 다시 박보영 성도가 떠올랐습니다. 그분이 어떤 분입니까? 정말 시트콤의 원조라고 할 있는 ‘남자 셋 여자 셋’을 쓴 대작가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분이 제가 전하는 말씀으로 매혹이 되고 납치가 되어 5일간의 여행의 유혹을 뿌리치고 교회로 오다니요. 그래서 저도 그 시를 변형해 보았습니다. “설교에 납치된 적이 있는가. 만약 내가 목사라면 당신을 말씀으로 납치할 거야. 나의 설교와 찬양 속에 당신을 집어넣고 성전문을 지나 성소로 데려가고 은혜의 지성소로 당신을 데려갈 거야. CCM으로 당신에게 노래하면서 당신의 영혼을 흠뻑 젖게 하기 위해 당신과 눈물을 뒤섞을 거야..." 그런 위대한 작가가, 그것도 안티크리스천이었던 분이 우리 교회 예배와 제가 전하는 말씀에 매료가 되고 납치가 되어 이번 주에도 교회에 오실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더 설레였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그 어떤 AI시대, 챗GPT 시대가 온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의 마음을 매료하고 영혼을 납치하는 목사가 되겠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7-02
  • [국독연 칼럼] 이상길 목사의 ‘두려움은 금물’(시 27:1-2)
    성도라고 고난과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인생살이가 너무나 힘들고 고달플 때가 있습니다. 이유 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못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업하시는 분들은 사업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늘 있습니다. 건강한데도 몸에 병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분명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세상에 대해서, 미래에 대해서, 물질에 대해서, 성공에 대해서, 자녀에 대해서 염려하고 근심하며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무엇도 우리에게는 두려움이나 고통,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는 이상,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하나님께서는 빛이시오, 구원이시오, 능력이시므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는 고난 중에서도, 두려움 중에서도 모든 고통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찬송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담대한 신앙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지키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고난 중에 찬양으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나는 것이 시 27편의 내용의 흐름입니다. 고난 중에 드리는 찬양처럼 향기로운 찬양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빛이시고, 구원의 산성이시며, 사랑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면 모든 고난을 극복하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을 갖고, 올바른 신앙고백을 한 성도라면 슬픔의 밤이 아주 깊을 수 없고, 죄악의 세력이 공포의 대상이 되어, 우리를 파멸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곧 아주 급박한 위기 상황에 처하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어떤 어려움이 와도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사모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면 우리에게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급박한 위기 상황에 처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극복할 방안이 있으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윗에게 방안이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닌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절제)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딤후 1: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 때 염려하며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담대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험한 세상이지만 믿음을 가지고 기쁨과 평안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 무서워하지 말라,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캄캄할지라도 내가 너의 구원이요, 능력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캄캄해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환경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눈동자처럼 보호하시며 지켜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난의 문제, 자녀의 문제, 질병의 문제, 사업실패의 문제를 다 물러가게 하시므로, 새로운 축복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큰 시련과 환란이 있다고 할지라도 여호와께서 우리의 구원이 되시기에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여 하나님 한분의 도움을 받아 날마다 승리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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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01
  • [언론회 논평] 6.25전쟁 73주년을 맞이하며
    1950년 6월 25일은 우리 국민들이 잊을 수 없는 날이다. 한반도에 국가가 세워진 이후 수천 년에 그날과 같은 슬픔의 날이 또 있었던가? 잊지 말아야 한다. 성경 말씀에 이르기를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신명기 32:7)고 하셨다. 1. 비극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전쟁에 낭만이 있으랴마는 김일성 북한 공산당의 천인공로 할 6.25 전쟁은 이 땅에 벌어진 전쟁 중에서 가장 큰 비극을 만들어낸 전쟁이다. 피해의 규모는 피아(彼我)간의 인명피해 사망자와 부상자가 400만 명이 넘으며, 전국국토는 그야말로 초토화 되어, 그 처참함은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의 “이 땅이 다시 회복되기에는 100년의 시간도 모자랄 것이다” 라는 평가로 짐작이 된다. 전쟁 3년에 온전히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 전세계에서도 이 같은 비극적 상황은 쉽지 않다. 이 비극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가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 “역사를 잊는 민족의 미래는 없다”이다. 2. 희생하신 분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전쟁 당사자인 한국군의 희생이 가장 컸음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군 전사자 부상자 62만 명이 넘으며,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의 인명피해는 전사자 37,900명 부상자 10만 3천 명 외 실종자 등 합계가 151,129명의 인명피해가 났다. 73년 전의 부상의 고통을 지니고 지금도 고통하는 유엔군 참전 용사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고 힘을 다하여 도와야 한다. 3. 우방국가들의 도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 6.25 전쟁에서 한국을 돕기 위하여 전세계 22개국에서 군대를 파견하여 큰 희생을 치루었다. 물자, 의료지원과 전후에 복구를 위하여 많은 지원이 있음으로 인하여 대한민국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전쟁으로 유익한 곤충들까지 사라짐으로 농업에 큰 지장이 있음을 알고 꿀벌 수 백만마리를 보내준 배려까지를 생각하면 지난 날 우방국들의 도움을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4. 우리도 이제 강도 만난 이웃나라들을 도와야 한다. 러시아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은 우크라이나를 도와야 한다. 우리나라는 이제 선진국이 되었으며, 경제적, 군사적으로 강대국이 되었으니, 이제 국제사회에서 책임있는 국가로서의 감당해야 할 부분을 힘써 감당해야 할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는 6.25 전쟁과 같은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교회들은 국가를 위한 제사장처럼 국가의 문제를 안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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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7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었습니다.”
    수요일 오전 전쟁기념관 방문은 정말 가슴 뜨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곳에 적힌 전사자들의 이름들은 이 세상 어떤 꽃보다 아름다운 이름이었고 포탄의 화염보다 더 뜨겁게 타오른 불꽃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검은 잿더미 위에 낙화하였지만, 그 향기는 코끝을 진동하고 가슴을 뭉클하게 해 주고도 남았습니다. 그들이 흘린 눈물은 촛농보다 더 뜨겁게 떨어졌고 검은 재 위에 하얀 꽃잎으로 다시 피어났습니다. 거기에 적힌 이름들은 모두가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잎의 이름들이었고 사무치는 이름들이었습니다. 참전용사들은 그런 전우들의 이름을 만지며 오열하였습니다. 특히 ‘조지 수사’(George Sousa)라는 참전용사가 계셨는데 이분은 6.25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분입니다. 중상을 입으면 대부분 본국으로 귀환 조치가 내려지는데 이분은 중상을 치료받고 또다시 전선에 투입될 것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전선에 투입되어 전투를 하셨는데 함께 싸우던 친구들은 대부분 죽고 자기만 살아남는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오열을 하고 또 오열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전사자 유가족들은 그 이름에 탁본을 뜨며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탁본이 떠지는 그 이름들이 제 가슴 속에서는 향기가 그윽한 꽃송이처럼 느껴졌습니다. 얼마나 많은 기자들이 와서 취재를 하는지 카메라에서 터지는 플래시의 그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튀기는 번갯불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들은 앞을 다투어 기사를 쓰고 보도를 하였습니다. 저를 만날 때마다 참전용사와 유가족들은 “세상에 이런 교회는 없다고, 지상에 새에덴교회 같은 곳은 없다”고 계속 말을 하는 것입니다. 기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직까지 이런 교회는 없었다”고 말입니다. 보은이 한 개인의 인격이라면 보훈은 국가의 품격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는 지난 한 주간 세상에 보은의 교회로, 보훈 정신을 마음껏 함양하는 교회로 인각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험한 세상 다리가 되는 교회가 되었죠. 마음껏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로 알려졌습니다. 물론 힘들었습니다. 이 일은 어느 단체나 기관의 후원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순수한 헌신으로만 가능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올해뿐만 아니라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앞두고 매년 고심을 합니다. “이 일은 반드시 우리 교회가 해야 되는데, 누가 한꺼번에 큰 헌신을 하는 일은 없을까. 하늘에서 횡재처럼 뚝 떨어지는 헌신은 없을까.” 그러나 올해도 그런 헌신은 없었습니다. 그저 성도들이 개미군단이 되어서 십시일반으로 헌신하여 이런 일을 너끈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수요일 저녁 잠실 롯데호텔에서 환영 만찬을 하는데 가서 보니까 안내자들까지 방을 40여개 이상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매일매일 식사를 대접하는 돈, 또 환송 만찬의 비용이 모두가 성도들의 헌신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니 미안하고 송구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넘쳤습니다. 목이 메였습니다. 그러나 한 주간 동안 우리 교회는 마음껏 험한 세상 다리가 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여, 성도들에게 복을 주옵소서. 어려운 가운데 헌신한 성도들에게 적어도 30배 60배 100배의 복을 주옵소서. 그리고 우리 교회는 앞으로도 험한 세상 다리가 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김종대 장로님을 비롯해서 참전용사와 그 가족들을 가족처럼 섬겨주신 준비위원들, 안내위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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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6-25
  • [언론회 논평] 6.25전쟁 73주년을 맞이하며
    1950년 6월 25일은 우리 국민들이 잊을 수 없는 날이다. 한반도에 국가가 세워진 이후 수천 년에 그날과 같은 슬픔의 날이 또 있었던가? 잊지 말아야 한다. 성경 말씀에 이르기를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신명기 32:7)고 하셨다. 1. 비극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전쟁에 낭만이 있으랴마는 김일성 북한 공산당의 천인공로 할 6.25 전쟁은 이 땅에 벌어진 전쟁 중에서 가장 큰 비극을 만들어낸 전쟁이다. 피해의 규모는 피아(彼我)간의 인명피해 사망자와 부상자가 400만 명이 넘으며, 전국국토는 그야말로 초토화 되어, 그 처참함은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의 “이 땅이 다시 회복되기에는 100년의 시간도 모자랄 것이다” 라는 평가로 짐작이 된다. 전쟁 3년에 온전히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 전세계에서도 이 같은 비극적 상황은 쉽지 않다. 이 비극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가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 “역사를 잊는 민족의 미래는 없다”이다. 2. 희생하신 분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전쟁 당사자인 한국군의 희생이 가장 컸음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군 전사자 부상자 62만 명이 넘으며,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의 인명피해는 전사자 37,900명 부상자 10만 3천 명 외 실종자 등 합계가 151,129명의 인명피해가 났다. 73년 전의 부상의 고통을 지니고 지금도 고통하는 유엔군 참전 용사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고 힘을 다하여 도와야 한다. 3. 우방국가들의 도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 6.25 전쟁에서 한국을 돕기 위하여 전세계 22개국에서 군대를 파견하여 큰 희생을 치루었다. 물자, 의료지원과 전후에 복구를 위하여 많은 지원이 있음으로 인하여 대한민국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전쟁으로 유익한 곤충들까지 사라짐으로 농업에 큰 지장이 있음을 알고 꿀벌 수 백만마리를 보내준 배려까지를 생각하면 지난 날 우방국들의 도움을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4. 우리도 이제 강도 만난 이웃나라들을 도와야 한다. 러시아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은 우크라이나를 도와야 한다. 우리나라는 이제 선진국이 되었으며, 경제적, 군사적으로 강대국이 되었으니, 이제 국제사회에서 책임있는 국가로서의 감당해야 할 부분을 힘써 감당해야 할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는 6.25 전쟁과 같은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교회들은 국가를 위한 제사장처럼 국가의 문제를 안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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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6-24
  • [언론회 논평] 소득경제활동 영역에서 차별금지법을 실현하려는가?
    정의당(이은주-대표 발의, 장혜영, 배진교, 강은미, 류호정, 심상정) 더불어민주당(강민정, 박용진, 장철민) 무소속(양정숙) 의원들이 ‘일하는사람기본법’을 만들어, 노동 현장에서 동성애를 포함한 소위 ‘차별금지법’을 실현하려는 법안을 발의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이들은 지난 6월 8일 이 법안을 발의했는데(의안번호:22540) 이 법안은 ‘일하는 사람의 권리를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모든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고 인간다운 생활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고용주를 압박하고, 자신들이 노리는 ‘성적 결정권’과 동성애를 포함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실현하자는 목적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요 내용은 ‘성, 국적, 신앙, 혼인상 지위, 임신 또는 출산, 장애, 사회적 신분, 일의 종류나 형태, 계약 유형 등을 이유로 차별을 받지 아니할 권리를 갖는다’(제10조)고 한다. 또 ‘사업자는 정당한 이유 없이 일하는 사람에게 계약을 해지, 변경하거나 불이익한 조치를 해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노동부장관은 이를 위해서 표준계약서를 만들고 이를 보급해야 하며(제22조) 사업자가 이를 위반할 시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리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제26조) 이 법안의 특징은 플랫폼 노동자(배달, 배송, 가사, 청소, 통•번역, 프리랜서 등)들에게 근로기준법, 노동법상 근로자 범주를 벗어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이 차별받지 않으며, 성적 자기 결정권을 보장하자는 취지인 것이다. 이는 소득경제활동 영역에서의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는 것으로, 현행 ‘남녀고용평등과일가정양립지원에관한법률’에서 성별, 혼인, 가족 안에서의 지위, 임신 또는 출산 등의 사유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개념을 ‘성’개념으로 바꾼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직장과 일터에서 동성애를 보호하고 이를 반대할 경우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민들의 반대로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않자, 우회적으로 차별금지법 조항을 넣어서 운용하려는 획책으로 보인다. 물론 직장인, 프리랜서 등 다양한 직군(職群)을 차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보장해 준다면서 은근슬쩍 동성애가 들어간 차별금지 조항을 넣어 이를 실현하려는 것은, 또 다른 심각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한편 비슷한 내용으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수진, 강민정, 양경숙, 송옥주, 박상혁, 이소영, 윤미향, 임종성, 김영주, 김정호, 박영순 의원)들이 지난해 11월에 발의한 ‘일하는사람의권리보장에관한법률안’도 발의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위반하는 사업자에게 2,000만 원의 과태료를 물리도록 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이는 노동자들을 보편적 입장에서 차별 없이 보호한다기보다는 차별금지법 요소를 경제, 노동 활동을 하는 영역에 슬그머니 집어넣고,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크지 않을 것을 감안하고 그 예봉을 비껴갈 수 있다는 계산까지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일하는 사람들의 일자리 확보와 소외된 플랫폼 근로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이야 좋지만, 근로 현장에다 동성애 확산과 동성애 보호를 위한 위장된 법률안이라면 이는 다른 차원의 문제로 당연히 막아야 한다. 우리 사회는 양성평등이나, 남녀평등은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일하는 사람’ 운운하면서 ‘성적 지향’ ‘성적 정체성’ ‘동성애 우대’와 동성애로 인한 ‘역차별’을 감행하려는 시도는 옳지 못하며, 국민들의 반대로 성공하지도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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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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