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6-18(목)

칼럼
Home >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칼럼 기사

  • [이승현 목사의 구속사 만나] ㊶ 가인의 편에 선 죄악의 후예들 - 3: 바벨탑 건축의 후예들(2)
    (창 11: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지난 시간에 이어 가인의 편에 선 죄악의 후예들이 바벨탑을 쌓은 사건에 대해 계속해서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바벨탑을 쌓은 불순한 목적들 (1) 성과 대를 쌓아 그 꼭대기를 하늘에까지 닿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바벨탑을 쌓은 목적 중 첫 번째는 ‘성과 대를 쌓아 그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본주의적 성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와 세 번째 목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2) 사람들의 이름을 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벨탑을 쌓은 목적은 사람들의 이름을 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창세기 11장 4절 말씀 보니까, “우리 이름을 내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가인의 후예들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은 내세우지 않고 자신들의 명예와 이름만을 높이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 속에는 하나님의 권위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떤 분의 이름으로 명령이 내렸는데 그걸 거부하는 것은 그분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이름을 내고자 한 것은 인간의 교만함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이사야 14장 12절부터 14절은 사단(Satan)의 기원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사 14:12). 계명성이 왜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습니까? 이유가 13절에 나옵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또한 14절에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계명성은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려고 했다가 타락한 것으로서, 인간의 교만의 극치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의 교만함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마음을 에덴동산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3장 5절을 보면 에덴동산에서 뱀이 여자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라고 할 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라고 유혹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인간의 교만함이 타락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6절 말씀에,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교만한 자리에 서지 말고 늘 겸손한 자리에 엎드려야 합니다. (3) 흩어짐을 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벨탑을 쌓은 세 번째 목적은 창세기 11장 4절을 볼 때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명령을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장 28절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에 충만하라’는 것은 땅에 가득 차게 퍼지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9장 1절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9장 7절에도 “땅에 편만하여 그중에서 번성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벨탑을 쌓은 무리들은 하나님의 창조 명령을 거스르고, 자기들끼리 뭉쳐서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려 했습니다. 2. 하나님의 심판: 언어의 혼잡과 흩으심 (1) 하나님의 조치는 반대로 온 지면에 흩어버리시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11장 8절 9절에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창세기 11장 9절에도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언어를 혼잡케 하여 바벨탑 공사를 중단시키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흩으셨습니까? 본래 온 땅의 구음과 언어가 하나였으나, 하나님께서 이 언어를 혼잡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서로 말이 안 통하니 결국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11장 9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어의 통일성은 사상과 생활 방식의 일치를 의미하지만, 언어가 혼잡해지면 사상의 불일치는 물론 모든 생활 방식에 혼란이 초래됩니다. 벽돌을 달라고 하는데 역청을 가져오고, 흙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가져오는 식의 불통이 이어지자 바벨탑 공사는 즉시 중단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3)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8장 13절에 “내가 부르면 천지가 일제히 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온 우주 만물의 운행도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장 10절에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산산이 깨어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결론 휘선 박아브라함 목사님께서는 「창세기의 족보」(112페이지)에서 이렇게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악을 도모하는 일에는 재빠르게 하나가 되고, 그 추진력이 강하며, 그 꿈도 거창합니다. 과연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인간을 중심하여 인간의 능력을 우선시하는 바벨과 같은 계획, 바벨과 같은 수단, 바벨과 같은 목표는 없습니까?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속에서 선하신 목적을 위해 부르심 받은 자들입니다. 위에서 부르신 그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시기 바랍니다(엡 4: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해 살아서는 안 됩니다. 빌립보서 1장 27절의 권면처럼 “오직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합니다. 나의 명예와 안락을 위해 인간적으로 뭉치는 삶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묻은 복음을 들고 전 세계 열방으로 흩어져 나가는 거룩한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인본주의(人本主義)의 바벨탑을 허물고, 신본주의(神本主義)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이루어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저희가 바벨과 같은 계획, 바벨과 같은 수단, 바벨과 같은 목표로 살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게 하시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남은 생애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들고 전 세계 열방을 향해 편만하게 나아가는 복된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옵고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영상 링크 https://youtu.be/coSBZJ6WcHc?si=JbP4vDxMFAt-ot-4 본 기고는 구속사시리즈 제1권 창세기의 족보(저자 박윤식 목사)를 토대로 구속사 말씀 전파와 그리스도인의 묵상을 위해 구성한 큐티입니다. 이승현 목사는 서울대학교 경영학과(B.A.)를 졸업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M.Div.), 미국 Knox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D.Min.)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IVY College 부총장과 (사)세계구속사말씀본부 이사장을 맡고 있다.
    • 칼럼
    • 구속사 만나
    2026-06-17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안식은 은혜’(창 2:1-3)
    안식은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창조 때부터 약속하신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죄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는 죄악 때문에 안식을 잃어버렸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에 안식이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의식주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면 안식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창조를 마치셨기 때문에 안식하실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어 안식(누아흐, 샤바트)은 어느 특정한 장소에 ‘정착하여 안주하다’, ‘하던 일을 마치고(끝내고) 쉬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안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곱째 날에 ‘창조사역을 마쳤다’라는 의미에서 그날을 안식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은 일주일 중 하루를 쉰다는 단순한 휴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계획하신 일을 다 마치시고 쉬시는 완성의 뜻입니다. 안식은 창조의 완성과 끝이라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의 목적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안식할 수 있을까요? 안식은 창조 때부터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체에 값없이 주신 은혜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노력이나 계획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을 잃어버리게 된 원인을 극복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사람의 욕심에서 비롯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 때문에 창조의 안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약 1:15)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안식을 얻으려면, 첫째, 내가 삶을 주관하는 의지를 버리고 모든 삶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둘째, 세상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셋째, 마귀를 대적할 하나님이 주시는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끝까지 안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에 대한 믿음입니다. 참된 안식은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영원히 안식이 없습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4: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들어가는도다”는 현재형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서 안식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의 안식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참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곳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곳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지상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안식처는 시-공간적으로 어느 특정한 한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령님 안에 있을 때 안식할 수 있습니다. 안식은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은 거저 받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안식은 모든 생명체를 위한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은 예수께서 사람의 새 생명을 위하여 죽음을 멸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얻어진 결과로서 사망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이 은혜의 안식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졌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에게는 안식이 없습니다.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히 3: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순종의 죄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에게는 안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참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까?
    • 칼럼
    • WAIC 칼럼
    2026-06-15
  • [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⑨ 십자가의 복음과 죄의 용서 : 인생의 가장 큰 복, 죄 사함의 은총
    1. 인생의 진정한 복은 어디에 있는가 현대인들은 건강, 재물, 명예를 복이라 부르며 그것을 얻기 위해 평생을 분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생의 가장 본질적이고도 중대한 복을 다르게 정의합니다. 로마서 4장 7절과 8절은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언젠가 영원한 심판주이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가장 큰 비극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서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구원은 선택이 아닌, 죽음 이후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가장 시급한 과제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만세’를 부를 수 있습니다. 2. 죄의 실체: 관역을 벗어난 삶과 거룩한 권위에 대한 반역 죄를 단순히 도덕적인 실수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첫 번째 의미인 ‘하마르티아’는 ‘과녁을 빗나가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과 방향에서 이탈해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 자체가 죄의 본질입니다. 두 번째 의미인 ‘아노미아’는 하나님의 법과 권위에 대한 ‘반역’을 뜻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네가 원하는 대로 살라”고 속삭이며 우리를 유혹하지만, 그 뿌리에는 창조주를 밀어내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무서운 교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죄의 실체를 직시하고 인정할 때 비로소 구원자의 손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3. 양심의 고발과 하나님의 심판대 죄는 우리 내면에서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깁니다. 하나님이 주신 ‘양심’이라는 기능은 우리 안의 검사가 되어 우리가 행한 은밀한 죄들을 끊임없이 고발합니다. 요셉의 형들이 동생을 판 지 22년이 지난 후에도 위기 앞에서 과거의 죄를 떠올리며 괴로워했던 것처럼, 죄는 인간의 영혼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입니다. 더욱 두려운 사실은 우리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얼굴빛 아래 낱낱이 기록(Recording)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수단과 노력으로는 이 영적인 장부에서 죄의 기록을 단 한 줄도 지울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4.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위대한 교환’ 하나님은 죄인을 심판하기보다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해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그냥 넘기실 수 없었기에, 죄를 전혀 모르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모든 추악한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정수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전가(Imputation)받으시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의’라는 새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 죄를 장부에서 삭제하시고(Delete), 예수의 보혈로 덮어(Cover)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고 선포하십니다. 5. 회복된 구원의 즐거움과 제자의 삶 죄 사함을 받은 자는 말할 수 없는 해방감과 기쁨을 누립니다. 사망의 권세에서 옮겨져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자는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단순히 과거에 구원받았다는 지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자신의 세마포를 빠는 거룩한 싸움을 이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다시 넘어질 때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요일 1:9)”이라는 약속을 붙잡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때로 좁은 길처럼 보이지만, 그 길 끝에는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수지선한목자교회(담임목사 강대형)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위치한 신앙 공동체로, ‘오직 복음’과 ‘성령의 임재’를 사역의 핵심 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선포:관념적인 종교를 넘어 삶의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죄 사함의 확신과 부활의 소망 안에서 성도들이 구원의 기쁨을 누리도록 돕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예배: 성령의 강력한 운행하심을 구하며, 치유와 회복, 돌파가 일어나는 뜨거운 예배를 지향합니다. 특히 매주 금요일 ‘거룩한 불꽃 집회’를 통해 영적 갱신과 기도의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와 교육 사역: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자녀들이 말씀 위에 바로 설 수 있도록 체계적인 신앙 교육을 실시하며, 세상을 변화시킬 다니엘과 같은 영적 리더들을 양성하는 데 주력합니다. 치유와 상담 (HMSS):내적 치유와 상담 프로그램을 통해 현대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보듬고, 복음 안에서 온전한 인격적 회복을 경험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모든 성도가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내며, 지역사회와 열방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건강한 선교적 공동체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6-06-14
  • [이승현 목사의 구속사 만나] ㊵ 가인의 편에 선 죄악의 후예들 - 2: 바벨탑 건축의 후예들(1)
    (창 11: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니므롯을 중심으로 한 인본주의 세력은 시날 평지에 모여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건축 공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조직적인 반역이었습니다. 오늘은 그들이 바벨탑을 쌓았던 세 가지 목적을 살펴보겠습니다. 1. 바벨탑을 쌓은 목적 (1) 성과 대를 쌓아 그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의 첫 번째 목적은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창 11:4). 첫째, 여기서 '대(臺)'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신전 탑인 ‘지구라트(Ziggurat)’를 의미합니다. 지구라트는 피라미드처럼 사면이 삼각형 모양의 경사면을 이루고 있으며, 중앙에는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는 계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는 자신들이 숭배하는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거대한 탑을 쌓아 하늘에까지 닿으려 했습니다. (2) 인본주의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높은 탑을 쌓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세계를 통일하여 하나를 이루려는 강력한 ‘인본주의(人本主義)’의 표현이었습니다. 사람들의 힘을 하나로 규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본주의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11장 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들의 도전이 얼마나 거세었는지를 보여줍니다. (3)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불만과 불신앙의 표출이었습니다. 바벨탑 사건은 노아의 홍수 심판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므로 바벨탑을 쌓은 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인간들의 극도의 불안과 불만을 표출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무지개 언약(창 9:8-17)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9장 15절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라는 약속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교만한 시도가 바벨탑 건축 속에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을 떠난 인본주의의 결말 (1) 하나님 앞을 떠날 때 인본주의 성을 쌓기 시작합니다. 이는 마치 가인이 하나님께서 주신 보호의 표를 무시하고 여호와 앞을 떠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고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 성’이라 불렀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창 4:17). 바벨탑을 쌓은 무리들 역시 하나님의 보호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우리 이름’을 내기 위해 성과 대를 쌓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을 떠나는 순간부터 인간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인본주의의 성을 쌓기 시작합니다. (2) 말씀 없는 연합은 구속사를 무너뜨리는 행위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적인 연합은 결국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무너뜨리는 무서운 불법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을 떠나지 말고, 늘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며 엎드리고 말씀을 묵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명기 4장 7절은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해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결론 휘선 박아브라함 목사님은 「창세기의 족보」(110페이지)에서 바벨탑 사건을 통해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단 세상에서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성경을 중심하지 않고 한 마음, 한 뜻을 강조하며 어둠의 무리가 하나로 뭉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일치단결,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모임, 그 뒤에 남는 것은 피차간의 분쟁과 상처, 허무와 후회뿐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빠진 세력의 연합, 인간의 안락과 편리를 우선한 모임, 그것은 그 시작부터 불법, 불의, 불선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 계획을 무너뜨리고 거역하는 행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하나됨, 이것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 계획을 무너뜨리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무너뜨리는 인간적인 모임으로 하나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살고 있지 않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돈과 권력, 인간적인 친목으로 뭉쳐진 모임이 아니라, 오직 구속사의 말씀으로 하나 되어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이루어 드리는 거룩한 모임에 소속되어, 하나님의 뜻과 구속 경륜을 성취해 드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인생들이 시날 평지에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보호를 거절하고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겠다는 인본주의의 거대한 표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인간들끼리의 하나됨과 그 모임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거대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무너뜨리는 행위라는 것을 깨달았사오니, 오늘날 저희들도 말씀 없는 인간적인 연합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무너뜨리는 어리석은 자리에 서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저희의 남은 생애는 인간의 생각이나 세상의 이익으로 뭉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말씀, 구속사의 말씀으로 하나 되는 믿음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옵고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영상 링크 https://youtu.be/fCJof2Rp4p0?si=mdeHvHHQRtblvhyy 본 기고는 구속사시리즈 제1권 창세기의 족보(저자 박윤식 목사)를 토대로 구속사 말씀 전파와 그리스도인의 묵상을 위해 구성한 큐티입니다. 이승현 목사는 서울대학교 경영학과(B.A.)를 졸업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M.Div.), 미국 Knox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D.Min.)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IVY College 부총장과 사)세계구속사말씀본부 이사장을 맡고 있다.
    • 칼럼
    • 구속사 만나
    2026-06-1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오해를 풀고 참 소통을 하다.”
    저는 방미를 앞두고 너무나 큰 부담을 가졌습니다. 3년 전 참전용사 행사를 하러 갔을 때 정말 3일 밤을 꽉 새웠거든요. 이번에도 그럴까봐 정말 가슴이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래서 방도 혼자 쓰고 어떻든지 잠을 자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저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시작되는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섬겼거든요. 3시간이 넘는 행사는 저뿐만 아니라 구순을 훌쩍 넘긴 한국전 참전용사들에게도 적지 않는 피로감을 느끼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웬일인가요? 그분들은 시차가 없어서 그런지 끝까지 꼿꼿한 자세로 앉아서 경청하고 박수하며 감탄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튿날 추모의 벽에 가서 헌화식을 한 후 주일에는 워싱턴 한인장로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이 행사에 축사를 하기 위하여 동행하신 이언주 의원님은 오후에도 북한 주민의 인권과 한국과 관계되는 분들을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건강을 생각해서 저 대신 박요셉 목사님과 만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과 대화의 요지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다음 날은 공항으로 가는 귀국길에 올라야 했지만 이언주 의원님께서 대한민국과 동아시아 전략가요 담당관인 존 제이 리안(John Jay Ryan) 담당관을 만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자리는 목사님이 꼭 같이 가야 한다”고 해서 가게 되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미 국무부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이언주 의원님과 존 제이 리안 담당관과의 대화만 듣고 있었습니다. 제가 가만히 들어보니까 대화의 요지는 대미 투자, 조선소 설립 문제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미 미국은 조선소를 폐기한 거나 다름이 없대요. 그래서 대한민국이 도와줘야 새로운 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거기에 전문가가 아니니까 듣고만 있었습니다. 이언주 의원님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면서 한국의 입장에서 전략적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한 40여 분을 그런 얘기를 하다가 한국 주무 담당관이 갑자기 저에게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소 목사님께서는 한국교회 주요 지도자인 줄로 알고 있는데 왜 정부가 나서서 교회를 박해하고 국회에서는 종교단체 해산법을 추진하고 있는 것입니까? 왜 가만히 지켜보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여러 가지 극단적 예를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 국장님, 저도 그런 몇몇 사례에 대해서는 굉장히 깊은 유감을 표현하였고 도가 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국장님께서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종교단체 해산법이 교회폐쇄법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누가 그런 정보를 갖다주고 그런 오해를 심어줬는지는 몰라도 그건 완전히 사실과 다릅니다. 종교단체 해산법은 신천지나 통일교의 영업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기성교회, 정통교회를 폐쇄하기 위한 법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자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성교회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국장님, 미국에도 수많은 이단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이단들은 사회적, 문화적 병리현상을 일으키는 컬트 집단이지요. 통일교와 신천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컬트 집단을 해산하기 위하여 법을 제정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교회와 목회자들이 그걸 교회폐쇄법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서서 그 법을 발의했던 몇몇 의원님께 전화해서 ‘이렇게 한국교회가 많은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목적이 좋아도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서로 간에 오해와 충돌 관계를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그 법을 발의하기 위해서는 기존 교회 혹은 정통 교회에 대한 예외조항을 만들어야지, 아무리 선한 목적을 가지고 법을 만들어도 그 법이 정통 교회까지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랬더니 ‘그럴 수가 있겠네요. 우리는 정통 교회를 보호하고 컬트 집단의 비즈니스를 막기 위해서 발의를 했는데 목사님 말씀을 듣고 보니 오해의 소지가 있네요. 당장 이 법을 발의하지 않겠습니다. 이 법안은 폐기하겠습니다. 그리고 정통교회가 동의할 만한 법안을 만들겠습니다. 목사님께서 큰일을 하셨군요. 귀한 정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아주 화해로운 분위기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때 제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과 팩트를 트럼프 대통령께도 잘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그분이 “폴라 화이트 목사를 아십니까?”하는 것입니다. “저는 모릅니다. 국장님께서 소개시켜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제가 트럼프 대통령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립서비스였는지 진정성의 말씀인지는 몰라도 듣기에 어색하지는 않았습니다. 거의 1시간 반 가까이 걸친 대화였지만 거침없는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았습니다. 어쩌면 그분들은 미국의 조선업보다도 한국교회를 더 염려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염려가 긍정적 염려라기보다는 오해가 섞인 염려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오해와 염려를 풀어주고 왔지만 공항으로 오는 길에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자정능력을 가지고 정화하고 각성하며 부흥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한국교회마저도 이념에 갇혀 대국 사상을 가져야 한단 말입니까? 누군가가 그런 오해를 하도록 잘못된 정보를 가져다 주었을 텐데요. 꼭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요? 조금이나마 대한민국을 오해하고 있었던 부분을 풀어주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볍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기회가 될 때마다 이런 소통과 화해 사역을 잘 해내겠습니다. 방미 일정 동안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신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6-06-14
  • [이승현 목사의 구속사 만나] ㊴ 가인의 편에 선 죄악의 후예들 - 1 : 니므롯
    (창 10: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우리는 가인 계열의 족보가 라멕에 이르러 그 죄악이 관영하고 인간 문명이 화려하게 꽃피웠으나, 결국 허무하게 끝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휘선 박아브라함 목사님께서는 「창세기의 족보」 106페이지에서 가인 계열의 족보는 영적으로 볼 때, 니므롯, 이스마엘, 그리고 에서에게 연결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가인의 육적인 족보가 라멕에게서 중단된 것으로 끝나지 않고, 가인의 죄악된 속성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통해 종말의 때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바벨탑을 쌓았던 노아의 세 아들 중 함의 자손 니므롯이나,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스마엘, 그리고 이삭의 아들 에서에게로 이어지는 족보입니다.” 오늘은 그 대표적인 인물로서, 노아의 세 아들 중 함의 자손인 ‘니므롯’에 대하여 구속사적인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1. 니므롯: 세상의 영걸 니므롯은 함의 아들인 구스가 낳은 아들로, 성경은 그를 가리켜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고 소개합니다(창 10:8). (1) ‘영걸’의 의미 ‘영걸(英傑)’은 한자로 ‘꽃부리 영(英)’과 ‘뛰어날 걸(傑)’을 씁니다. 이는 영웅과 호걸로 뛰어난 인물, 또는 큰일을 이룰 수 있을 만큼 용기와 재능, 지혜가 탁월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세상의 영걸’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세상의 영걸’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영웅입니다. ②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데 재능이 있는 자입니다. 그 비상한 재주를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데 사용합니다. ③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 담대한 자입니다. 결국, ‘세상의 영걸’은 온갖 거짓으로 영혼을 노략하는 일에 지혜가 탁월한 자입니다. 사람들을 미혹하여 넘어지게 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자입니다. (2) 폭력으로 통치하는 폭군 히브리어 원어로 ‘영걸’은 ‘깁보르(גִּבּוֹר)’입니다. 이 단어는 ‘폭력으로 통치하는 자’, 즉 ‘폭군’을 의미합니다. 니므롯은 자신의 막강한 힘과 권력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압제하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데 앞장선 폭군이었습니다. 2. 니므롯: 특이한 사냥꾼 창세기 10장 9절은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특이한’이라는 단어 역시 앞서 ‘영걸’에 사용된 히브리어 ‘깁보르(גִּבּוֹר)’가 그대로 사용되었습니다. (1) 사람들의 마음을 훔친 사냥꾼 니므롯은 다른 사람들보다 힘이 세고 훨씬 탁월한 실력을 갖춘 사냥꾼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을 위협하고 해치던 사나운 들짐승들을 그가 물리쳐 주고 보호해 주자, 그를 추종하는 거대한 무리가 생겨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며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2) 영혼을 도둑질하는 적그리스도의 표상 문제는 그가 자신을 따르는 거대한 무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도리어 그는 사람들의 영혼을 하나님에게서 돌이키게 만들고, 자신을 따르게 했습니다. 니므롯은 영혼의 사냥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백성들의 영혼을 도둑질하여 하나님에게서 돌이키게 하고 멸망으로 이끄는 적그리스도적 인물의 전형적인 표상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창세기 10장 8절 9절을 “구스는 또 니므롯이라는 아들 낳았는데 그는 세상에서 최초의 정복자였다 그는 여호와를 무시하는 힘센 사냥꾼이었으므로 여호와를 무시하는 힘센 사냥꾼이라는 유행어까지 생기게 되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3. 바벨을 건국한 시조 니므롯 니므롯은 단순한 사냥꾼에 그치지 않고 나라를 건설했습니다. 창세기 10장 10절은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라고 증거합니다. (1) 하나님을 대적하는 도시 바벨 첫째, 니므롯은 ‘바벨’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나라를 건설했습니다. 둘째, ‘바벨’의 뜻은 ‘혼란’입니다. 이 도시는 기본적으로 반신론적이며,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대적하는 도시였습니다. 셋째, 바벨은 하나님의 이름은 전혀 없고, 오직 사람의 이름만 높이 내세우는 인본주의의 극치를 달리는 도시였습니다. (2) 바벨탑을 쌓은 목적 니므롯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바벨의 시날 평지에 바벨탑을 쌓으려 했습니다. 창세기 11장 4절에서 그들은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하나님 없이 인간의 힘으로 뭉쳐 스스로의 이름을 내고 하나님께 도전하려는 교만한 시도였습니다. 창세기 11장 9절에는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론 휘선 박아브라함 목사님께서는 저서 「창세기의 족보」 109페이지에서 니므롯이 주동한 바벨탑 사건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꿰뚫어 보셨습니다. “니므롯의 인도 하에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으려 했던 목적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니므롯의 길은 철저한 ‘인본주의(人本主義)’의 길입니다.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외치며 인간의 힘과 이름을 높이는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본주의(神本主義)’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의 힘과 능력을 과시하는 세상의 영걸이 되기보다, 오직 하나님을 최고로 높이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겸손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본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며 구속사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만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니므롯이 세상의 영걸이자 특이한 사냥꾼으로서 엄청난 힘과 능력을 가졌으나,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였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영혼을 도둑질해서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드는 영혼의 사냥꾼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는 결단코 니므롯의 길을 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인본주의를 배격하고, 철저한 신본주의에 입각하여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높이며 영광 돌리는 남은 생애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감사드리옵고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영상 링크 https://youtu.be/DxfQaQcLP94?si=dUbTDNPt122l0Tpi 본 기고는 구속사시리즈 제1권 창세기의 족보(저자 박윤식 목사)를 토대로 구속사 말씀 전파와 그리스도인의 묵상을 위해 구성한 큐티입니다. 이승현 목사는 서울대학교 경영학과(B.A.)를 졸업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M.Div.), 미국 Knox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D.Min.)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IVY College 부총장과 사)세계구속사말씀본부 이사장을 맡고 있다.
    • 칼럼
    • 구속사 만나
    2026-06-10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분별되고 참된 은사를 사모함’ (고전 14: 12~25)
    예언은 미래를 맞히는 기술이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이 지금 교회와 성도에게 바르게 전달되도록 하는 사역입니다. “나의 영이 기도하지만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은, 영적으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지만, 그 뜻을 이성적으로 깨닫지 못해서 자신과 공동체가 충분히 유익을 얻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말씀의 뜻을 알고, 믿음이 자라나며, 그에 따라 삶의 순종으로 이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영으로도 기도하고 마음으로도 기도하겠다고 말합니다. 찬송도 마찬가지입니다. 감동만 있고 뜻이 없으면 함께 진정한 아멘을 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예배는 혼자 은혜받는 시간이 아니라, 함께 알아듣고 함께 세워지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자신은 방언의 은사를 풍성히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 안에서 자신의 은사를 드러내기보다 성도들을 가르치고 세우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보다 낫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많이 가졌느냐보다는 그것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숙한 신앙은 자기 만족에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의 믿음을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 말씀에 깨어있지 않게 되면 자칫 은사를 받고도 그 능력을 자신과 타인이 ‘혹하는’ 방향으로 이끌려질 수 있습니다. ‘혹한다’라는 의미는 겉으로 좋아 보이는 것에 관심이 쏠리고, 판단이 흐리게 되어 마음이 끌려 흔들리거나 넘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미혹에 해당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문제점 중 하나이며 이러한 상태로 목회를 하거나 목양을 받아 그러한 방식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습니다. 이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교회와 성도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자기 자신이 이익을 얻으려는 빗나간 자세와 행실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혹을 받는 것 자체가 그것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며, 사탄과 가까워진 것입니다. 미혹은 사탄이 행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창 3:13, 고후 11:14). 이러한 미혹이 사람에게 들어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자기가 처한 가정과 교회와 일터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일에 사실상 동참할 수 없게 됩니다. 모양은 동참하는 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자기를 미혹한 영으로 그 마음의 본질이 향해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찾기 어려운 부분이어서 많은 가정과 교회가 넘어지거나 시달리고 있습니다. 미혹의 영이 있게 되면 그 가정도, 자녀도, 교회도 부흥하지 못합니다. 미혹의 영이 부르면 언제든지 마음이 거기로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전도받은 사람이 전도인을 따르는 것처럼, 미혹의 영을 가진 사람은 그 영을 뿌리내리게 한 사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25절은 예언 사역의 은혜에 대해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해질 때 사람의 숨은 마음이 드러납니다. 죄가 책망받고, 상처가 만져지며, 교만이 꺾이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예언은 사람을 혹하게 하거나 놀라게 해서 예언한 사람을 경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의 예언 사역은 성경의 진리에 맞아야 하고, 교회를 세우신 분의 질서 아래 있어야 하며, 사랑과 겸손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공동체의 분별과 질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받은 은혜는 혼란이 아니라 질서를 낳고, 자랑이나 교만함이 아니라 하나님 임재의 고백을 낳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자신을 높이는 도구가 아니라, 교회를 살리고 하나님이 그 가운데 계심을 드러내는 거룩한 통로입니다. 이와 같은 분별을 위해 자신이 바라보는 사람과 자신의 목적과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을 살리는 은사를 잘 분별하여 활용케 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6-06-10
  • [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⑧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나 :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부활의 신앙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이신득의의 진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점검해야 할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내가 가진 믿음이 성경이 말하는 진짜 구원 얻는 믿음인가 하는 점입니다. 로마서 4장 3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고 선언합니다. 믿음은 관념이나 지식적 동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늘 문을 여는 열쇠이며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 삶 속에 실제적으로 작동시키는 강력한 동력입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통치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원형은 아브라함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나아갔습니다. 75세에 부름받아 자녀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현실은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갔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아브라함의 몸은 이미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 역시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 여기셨으며 그 믿음의 통로를 통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졌던 이 믿음은 결과가 보이지 않는 막막한 현실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실상으로 붙잡는 역동적인 신뢰였습니다. 진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그것은 단순히 생각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발걸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던 것처럼 믿음은 삶의 전체적인 방향을 바꿉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수용할 때 그 말씀은 생명의 씨앗이 되어 우리 내면에서 폭발적인 영적 에너지를 일으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흥분하시며 네 믿음이 크도다 선포하시며 응답의 근거로 삼으십니다. 이처럼 믿음은 하나님을 움직이시게 하는 유일한 통로이며 성도가 소유한 가장 강력한 자산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역사는 특히 고난과 위기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평안할 때는 믿음이 있는 것 같다가도 문제가 생기면 금세 원망과 불신앙의 늪으로 빠져들곤 합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환경을 바라보는 눈을 들어 환경 너머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제가 개척 초기에 설교에 대한 극심한 압박과 두려움으로 온몸이 떨리는 고통을 겪었을 때 저를 살린 것은 하나님께 모든 짐을 맡기는 믿음의 작동이었습니다. 내 실력과 노력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세우셨으니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확신을 가질 때 비로소 영혼의 자유와 평안이 임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이 가졌던 그 믿음의 실체인 부활의 신앙을 소유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것 같은 자기 몸에서 생명이 태어날 것을 믿었듯이 우리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부활은 인간의 이성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신비이지만 하나님은 이 바랄 수 없는 중의 믿음을 통해 우리 영혼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내 안에 살아 계심을 믿을 때 성령의 강력한 능력이 우리를 통치하기 시작하며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을 새롭게 변화시킵니다. 구원 얻는 믿음은 일시적인 감정이나 종교적 위안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전적인 무능함을 깨닫는 철저한 회개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드는 생명 건 결단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마음의 중심에 회개가 결여되어 있고 십자가와 부활의 감격이 희미하다면 그 믿음은 생명력이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나의 모든 죄를 사하셨고 지금도 내 삶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철석같이 믿고 반응할 때 우리 인생의 거친 풍랑은 잔잔해지며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승리를 맛보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일상의 작은 선택들 속에서 끊임없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 원망과 불평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믿음을 작동시키십시오. 사망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주님이 내 안에 계시기에 우리는 어떤 시험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믿음은 단순히 죽어서 가는 천국 입장권이 아니라 오늘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누리게 하는 실재입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매 순간 그분의 인도하심에 나를 내어드릴 때 우리는 비로소 종교인의 굴레를 벗고 참된 제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관념의 종교를 넘어 실제적인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는 삶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믿음의 완성입니다. 아브라함이 별을 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했듯이 우리도 기록된 말씀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신뢰해야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으로 서서 우리 가족과 이웃에게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서서 영원한 소망을 향해 나아가는 복된 신앙의 여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수지선한목자교회(담임 강대형 목사)는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치유하고 제자 삼는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삶의 실제적인 능력으로 선포하며,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있는 예배를 통해 영적 회복과 돌파를 돕고 있습니다. 특히 다음 세대를 말씀으로 세우는 교육과 체계적인 선교 훈련에 집중하며,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이끄는 건강하고 역동적인 신앙 공동체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6-06-07
  • [이승현 목사의 구속사 만나] ㊳ 가인 계열의 라멕 - 2: 인간 문명의 전수자 라멕
    (창 4:20-21)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지난 시간에는 가인 계열의 라멕의 잔인한 폭력성과 교만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라멕의 자녀들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라멕은 두 아내 아다와 씰라를 통해 야발, 유발, 두발가인, 그리고 딸 나아마를 낳았습니다. 이들은 각기 다른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며 화려한 인간 문명을 꽃피운 주역들이 되었습니다. 1. 야발: 상업적 목축업의 조상 라멕이 첫째 아내 아다에게서 낳은 큰아들은 ‘야발’입니다. (1) 이름의 의미 ‘야발(יָבָל)’은 ‘이끌다, 옮기다’ 또는 ‘축축한 데를 찾아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이름의 뜻대로 물과 풀이 있는 곳으로 육축을 이끌고 다니며 기르는 목축업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2) 육축 치는 자의 조상 창세기 4장 20절은 그가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육축’은 히브리어 ‘미크네(מִקְנֶה)’로, ‘사고팔 수 있는 가축’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을 낳았는데 가인은 농사하는 자로서 땅의 소산을 하나님께 바쳤고, 아벨은 양 치는 자로서 양의 첫 새끼를 바쳤습니다(창 4:1-2). 이러한 기록을 볼 때 아벨도 가축을 기르는 자였지만 그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양을 길렀습니다. 그러나 야발은 최초로 가축을 대량으로 사육하여 사고파는 상거래를 할 정도로 크게 목축업을 시작한 인물입니다. 2. 유발: 타락한 음악의 시조 라멕이 첫째 아내 아다에게서 낳은 둘째 아들은 ‘유발’입니다. (1) 이름의 의미 ‘유발(יוּבָל)’은 ‘소리, 음악’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창 4:21). (2) 쾌락과 향락을 위한 음악 유발은 음악의 시조가 되었으나, 그의 음악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바르고 거룩한 음악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음악은 인간의 육체적인 쾌락과 향락을 돋우는 방탕한 소리에 불과했습니다. 특히 그가 불었던 ‘퉁소’의 히브리어 어원에는 ‘(관능적인) 사랑에 빠지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당시의 음악이 사람들의 감각을 자극하여 타락한 사랑과 정욕에 빠지게 만드는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시사합니다. 3. 두발가인: 살인 무기의 제작자 라멕이 둘째 아내 씰라에게서 낳은 아들은 ‘두발가인’입니다. (1) 이름의 의미 ‘두발가인(תּוּבַל־קַיִן)’에서 ‘두발(תּוּבַל)’은 ‘넘쳐흐르다, 번식하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가인(קַיִן)’이라는 이름이 합쳐져, 가인 계열의 흐르는 죄성이 두발가인 때에 이르러 가장 탁월하게 넘쳐흘렀음을 암시합니다. (2) 날카로운 기계의 창시자 창세기 4장 22절은 그를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그가 만든 기계는 건전한 농기구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고 해치는 살인 도구였습니다. 4. 나아마: 쾌락과 유혹의 여인 라멕이 둘째 아내 씰라에게서 낳은 딸은 ‘나아마’입니다(창 4:22). (1) 이름의 의미 ‘나아마(נַעֲמָה)’는 ‘유쾌하다, 달콤하다, (유난히) 아름답다’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의 뜻을 볼 때 나아마는 세상적인 성적 유혹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여자로 추정됩니다. (2) 죄악된 족보에 기록된 여인 고대 유대 사회의 족보에 여자의 이름이 기록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나아마가 족보에 굳이 기록된 것은 경건과는 전혀 상관 없이, 미모와 쾌락, 정욕적인 면에서 당시에 매우 특출했던 인물이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용하여 세상적인 성적 유혹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타락의 길로 이끄는 데 앞장선 여인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결론 야발, 유발, 두발가인, 나아마는 각기 목축, 예술, 기술, 미(美)의 영역에서 인류 문명을 화려하게 발전시킨 주역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아무 상관이 없는 그들의 문명은 결국 죄악의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휘선 박아브라함 목사님께서는 저서 「창세기의 족보」 106페이지에서 가인 계열의 종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습니다. “가인의 족보는 아담의 7대손 라멕에 이르러 그 문명의 화려함을 뽐내고는 순식간에 멈춰 서고 맙니다. 셋 계열의 족보가 노아와 아브라함을 넘어 다윗에서 메시아까지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반면에, 가인의 후예에 대한 기록은 사실상 7대손 라멕에서 끝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번창해 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떠난 문명, 하나님의 이름이 없는 삶은 최고의 절정기에서 순식간에 무너지고 만다는 사실을 경고해 주고자 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인의 후예들은 세상적으로 볼 때 부유하고, 재능이 넘치고, 강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족보는 라멕에서 끝이 나고 맙니다. 반면 셋 계열의 족보는 노아와 아브라함, 다윗을 거쳐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우리는 화려하지만 멸망으로 치닫는 가인의 문명에 속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생명의 계보를 이어가는 셋 계열의 축복에 동참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누웠던 자리가 무덤이 되지 않고 입었던 옷이 수의가 되지 않고 이렇게 건강한 몸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 물질문명만을 발전시키며 살아가는 가인 계열에 속하지 않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드리는 셋 계열의 족보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은혜 가운데 승리할 줄로 믿고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영상 링크 https://youtu.be/5gb33qrdlC0?si=Sr_PD4AhoN7Vuqx4 본 기고는 구속사시리즈 제1권 창세기의 족보(저자 박윤식 목사)를 토대로 구속사 말씀 전파와 그리스도인의 묵상을 위해 구성한 큐티입니다. 이승현 목사는 서울대학교 경영학과(B.A.)를 졸업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M.Div.), 미국 Knox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D.Min.)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IVY College 부총장과 (사)세계구속사말씀본부 이사장을 맡고 있다.
    • 칼럼
    • 구속사 만나
    2026-06-07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이렇게 탈진을 극복했습니다.”
    얼마 전부터 제 몸에 이상 신호가 왔습니다. 탈진의 전조 증상이라고 할 수 있죠. 작년에도 그랬지만, 2014년도에도 탈진을 경험한 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거든요. 그때 저는 레위기를 중심으로 한 ‘거룩의 재발견’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성경 중에서 가장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지는 성경이 레위기이거든요. 물론 그 이전에 제가 ‘레위기의 산을 정복하라’는 책을 낸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거룩과 정결이라고 하는 주제로 레위기를 써 갔습니다. 그때 곤지암기도원에서 원고 정리를 하는데 너무 거기에 정신을 쏟아부으니까 메스꺼운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원고를 책상에 두고 계곡 위에 만들어 놓은 정자에 누워 있거나 산행을 하면 그런 현상이 없어지는데 그 원고만 붙들고 씨름하면 메스꺼운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혹독한 탈진의 대가를 치르면서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는 책을 펴내는 보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른 차원의 탈진을 경험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특이한 문화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관계를 돈독히 하며 그냥 믿음으로 강단에 헌금을 하면 좋은데, 담임목사에게 기도를 받고 싶어 하는 문화가 굳어져 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담임목사에게 기도를 받으면 대부분 응답을 받고, 또 담임목사는 만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한꺼번에 집중이 되어 버리면 피로감이 극도로 쌓이게 됩니다. 그냥 앉아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한다든지 하면 찐이 빠질 이유가 없죠. 그러나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순간 저는 영적 전쟁을 해야 합니다. 큰 소리로 기도하지 않아도 기도를 하는 순간 기도 받는 분의 가정의 영적 상태 또 마음 상태를 읽으면서 찐을 빼는 기도를 하게 되거든요. 이걸 한두 번도 아니고 하루에도 수십 건의 기도를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와중에 장충식 장로님의 장례식을 섬겼죠, 그러고 나서 연거푸 이루어지는 심방과 기도로 저는 그만 영혼의 진액이 점점 빠져나갔습니다. 다건연세내과에서 피검사를 했지만 별 이상이 없었습니다. 김용선 장로님은 잘 먹고 잘 쉬는 게 답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주일 저녁예배가 끝나고 본당에 가서 하나님께 간곡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이러다가 완전 탈진을 해버리면 미국에서 열리는 제20차 한국전 참전용사 행사해도 갈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연약하고 초라한 종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때 하나님의 조용한 음성이 제 마음을 어루만졌습니다. “너는 기도를 할 만큼 했으니 일단 쉴 수 있을 만큼 쉬어봐라. 좋은 수액도 맞아라. 그리고 맑은 공기를 쐬며 운동을 하거라. 너의 마음에 툭 터지는 느낌을 얻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일설교를 준비해 놓고 월요일과 화요일에 야간 골프를 하였습니다. 골프만 하는 게 아니라 라운드를 돌면서 빵도 먹고 과일도 먹으며 계속 체력을 보충해 갔습니다. 야간 골프를 하고 오니 어느새 가슴이 조금씩 조금씩 터지기 시작한 것 같고 잠도 잘 잘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저는 운동을 하는 순간순간에도 주님을 놓치지 않으며 공을 쳤습니다. 그래서 수요일 오후에는 주일설교 영상을 녹화하였고 좀 더 많이 회복된 상태로 미국을 갈 것 같습니다. 글을 쓰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도를 할 때는 메스꺼운 증상이 나타나지만 그 메스꺼움이 오히려 저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고 약할 때 강하게 하신 주님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헌신한 성도들을 생각할 때 그들의 헌신이 저로 하여금 오히려 역설적인 새로운 힘과 마음에 든든한 터전이 되어줌을 느꼈습니다. 성경을 보면 모세도 탈진을 하였고 엘리야도 탈진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탈진을 하나님께서 하루 아침에 회복시켜 주실 수도 있지만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을 동시에 주시면서 서서히 회복하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 역시 하나님의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탈진을 회복하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이제 저는 어느 정도 편한 마음을 가지고 출국을 할 것입니다. 거기서도 시차를 잘 적응하고 행사도 잘 마무리하며 돌아오도록 기도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특별은총, 때로는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새 힘을 주시고 반전을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죠. 성도 여러분들께서 저와 6.25 참전용사 행사를 잘 마무리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6-06-07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