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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믿음의 능력’(막 9장23절)
- 성도는 믿음으로 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눈을 들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공적인 삶에 이르는 첩경입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이 지닌 놀라운 능력에 깊은 감명을 받고 또한 힘을 얻게 합니다. 언약궤를 짊어진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물이 잔뜩 불어 있은 요단강에 믿음으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 흘러내리던 강물이 멈추어 섰고 이스라엘 백성은 강바닥에 드러난 길을 지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수 3장). 그뿐이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순종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견고한 여리고 성을 엿새 동안 돌게 한 뒤,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같은 방식으로 일곱 번을 돌며 큰 소리로 외치게 하자 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수 6장). 다윗은 블레셋의 거인 용사 골리앗에 맞서 매끄러운 돌멩이로 그를 제압했습니다(삼상 17장). 열두 해를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자 즉시 고침을 받았습니다(마 9:20-22). 한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귀신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어머니의 믿음으로 딸은 즉시 고침을 받았습니다(마 15:28). 우리의 삶 가운데에도 많은 문제와 역경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답답하고 어려워도 두려워하지 마시고 믿음으로 물리치시고 용기를 가지고 승리하십시다. 어려울 때일수록 담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인간의 생각을 창조적으로 바꾸고, 사회를 변혁하며,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위대한 신앙은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환경과 상황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고백이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할 수 없다는 말은 불신앙인 것입니다. 렘 32:27에서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고 막 9:23에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에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환난이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은 오히려 믿음의 훈련장인 것입니다.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환난은 스스로를 문제로 위장한 채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믿음의 눈으로 그것을 오히려 기회로 포착하시기 바랍니다. 삶을 비관적이거나 절망적으로 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뜻이 있음을 믿읍시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대로 역사하십니다. 믿음은 생명력이 있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있을 때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주님의 능력을 믿고 강하게 매달리는 것이 최고의 방법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일도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전능하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말에는 역사가 나타나고, 확신 있는 기도는 그대로 받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11:23-24). 언제나 믿음으로 살아서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체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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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믿음의 능력’(막 9장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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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반응’(사 6:5-8)
-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을 만났을 때 떨면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우리는 주님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엎드려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 대한 회개 없이 주님의 임재 가운데로 경솔하게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노력으로 청결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주님을 만날 때 경험하는 고백과 회개를 통해 깨끗해집니다. 그럼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는 거룩하신 주님을 뵈었을 때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사 6:5)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사야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죄뿐이었기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때 한 천사가 제단에서 타고 있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이사야의 입에 대며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7절)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입술의 죄는 우리의 죄악 중 대부분이지요. 생각으로 짓는 모든 죄가 입술을 통해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마 15:18) 그래서 “누구든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약 3: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술이 부정한 우리도 이사야처럼 죄를 회개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고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8절)라고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에스라는 주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 너무나도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하나님 앞에서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는, 우리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났고, 우리가 저지른 잘못은 하늘에까지 닿았습니다. 조상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저지른 잘못이 너무나도 큽니다.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왕들과 제사장들까지도, 여러 나라 왕들의 칼에 맞아 죽거나 사로잡혀 가고, 재산도 다 빼앗기고, 온갖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런 일은 오늘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스 9:6-7)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어서 에스라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님은 너그러우셔서 우리를 이렇게 살아 남게 하셨습니다. 진정,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주님께 자백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감히 주님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15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오직 너그러우신 주님의 은혜인 것을 기억하며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하박국은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 소리를 듣고 나의 창자가 뒤틀린다. 그 소리에 나의 입술이 떨린다. 나의 뼈가 속에서부터 썩어 들어간다. 나의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러나 나는, 우리를 침략한 백성이 재난당할 날을 참고 기다리겠다.”(합 3:16)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어서 하박국은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17-18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박국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죄인인 나를 구원하신 그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항상 즐거워하고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4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시몬은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5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히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6-8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엎드렸습니다. 베드로는 죄인으로서 감히 거룩하신 주님 앞에 마주 대할 수 없어서 주님이 떠나 주시기를 간청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낮에 깊은 물 속에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는 것이 비효율적인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베드로는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이처럼 주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주님의 일하심을 놀랍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귀로만 듣던 주님을 눈으로 뵙고 주님을 만난 주인공들이 되어 우리를 통해 많은 사람이 살아 계신 주님을 뜨겁게 만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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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반응’(사 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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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사는 우리”
- 제가 두어 주 동안 설교하고 축도만 했지 바깥에 나가서 일일이 성도들과 악수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수요설교를 부목사님들께 맡겼습니다. 그런데 수요일 저녁예배 때 장로님과 권사님 부부가 저한테 와서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종암중앙교회 장로이고 권사였습니다. 그런데 용인 쪽으로 이사를 와서 한동안 종암중앙교회를 다니다가 너무 멀어서 가까운 교회를 다니게 되었어요. 그런데 새에덴교회가 우리 동네에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장로님 부부는 그걸 알고 나서부터 우리 교회로 오기로 작정을 하고 등록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2주 동안 새가족 영접도 못 했거든요. 그래서 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수요일 저녁에 본인들이 저에게 와서 부부뿐만 아니라 자녀들까지 다 등록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심기도 하시고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네요. 종암중앙교회로 가는 게 맞지만 거리상 거리가 너무 머셔서 어쩐대요. 하나님께서 저에게 큰 선물을 주셨네요. 제가 얼마나 조경대 목사님을 잘 섬긴 줄 아세요? 교회 오실 때마다 축도로 모셨고 평일에 오셨을 때도 한 번도 빈손으로 보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바쁜 중에도 조경대 목사님의 천국환송예배를 제가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조경대 목사님께서 살아생전에 애써 심고 양육하고 훈련시켰던 이런 중직자를 저에게 보내주시네요. 정말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세심하시고 정확하신 분이셔요.” 제 방에 들어가서 생각해 보니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물질과 에너지의 등가원리’라는 글을 읽은 게 기억이 났습니다. 물질과 에너지의 등가원리는 물질과 에너지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질량과 에너지가 서로 동일하다는 원리를 말합니다. 이 법칙에 의하면 질량으로 규정되는 모든 보이는 물질은 그 안에 보이지 않는 일정한 양의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물질은 물질 자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창조주의 은혜, 창조주가 제정해 놓은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심는 대로 거둔다고 했지 않습니까?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해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는 것입니다.(갈6:7-8)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을 잊어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응답하셨다 하더라도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데는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는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나타나지만 하나님에게는 카이로스의 시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어느 누구든지 1개월이나 2개월 만에 태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10개월 동안 마리아의 몸에 계시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창조의 법칙입니다. 사과 씨를 심으면 그것이 싹을 틔우고 자라서 사과 열매를 맺을 때까지 과수원 지기에게는 크로노스적인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주어졌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영적으로 하나님의 결재가 나타난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제원호 교수님에 의하면 이미(already)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현실 가운데 나타나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이걸 아직(not yet)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산다는 것입니다. 그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영적인 강도가 있습니다. 그게 사탄입니다. 사탄이가 자꾸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변형을 시키거나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절대로 낙심하지 말라.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반드시 거둘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갈6:9) 저는 장로님과 권사님 부부를 통해서 심고 거두는 법칙, 물리학적으로는 물질과 에너지의 등가원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정말로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된 것은 저 역시도 이미와 아직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도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살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아직이라고 하는 희망이 있습니다. 함께 이 글을 읽으면서 한번 이렇게 외쳐보면 좋겠습니다. “내게 아직의 축복이 남아 있어. 내게 아직의 은혜가 남아 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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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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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사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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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25만원으로는 결코 민생 회복이 안 된다
- 2016년 스위스에서는 일을 하든, 하지 않든지 간에 정부에서 성인에게는 월 약 300만원, 청소년에게는 약 78만원을 주는 기본소득 지급에 대한 국민 투표를 했다. 그때 스위스 국민들은 유권자의 77%가 정부에서 기본소득금을 주는 것을 반대하였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재정 부담이란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정부가 국민들에게 기본소득금을 무상으로 준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국민들의 주머니를 끌러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공짜인가?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한 소위 ‘민생회복지원금법’이 지난 2일 야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하였다. 그 금액은 소득 수준에 따라 25~35만원 정도이다. 이는 이재명 대표가 대표 발의한 ‘당론 1호’ 법안이다. 이에 대하여 여당이 필리버스터로 맞섰으나, 24시간 만에 힘에 의하여 강제로 종료시키고, 표결로 들어가 야당 중심으로 통과시켰다. 여기에 들어가는 재원(財源)은 13조원이다.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국민들이 낸 피 같은 세금을 이런 식으로 날려도 되는 것인가? 또 과연 국민들에게 25만원씩 준다고 민생이 회복되는 것인가? 마치 우리 국민들을 25만원으로 낚으려는 저질스러움과 또 이러다 전 국민들을 국가에서 배급처럼 받아 먹는 것에 익숙하게 하여,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어 놓고 국가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마저 든다. 위에서 예로 든 스위스와 우리나라는 여러 모로 상황이 다르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이다. 스위스 국민들이 기본소득금액을 받아도 결국은 스위스 국민들의 세금에서 나가야 하는 것이고, 그에 따른 예산을 맞춰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 25만씩을 준다고 하여도, 13조원의 엄청난 재원을 결국은 국민들이 부담해야 하는 부채다. 한 마디로 야당은 25만원으로 국민들의 환심과 표를 사서, 그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드는데 이용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차라리 13조원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마땅한 정책을 마련하여 젊은이들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도록 하라. 우리 국민들은 25만원에 넘어가거나 흔들릴 국민들이 아니다. 마치 국민들의 세금에서 선심은 자기들이 쓰고, 국민들의 마음을 훔쳐 가고, 그 주머니를 털어가겠다는 정책은 결코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이제라도 정치권은 정신 차리기를 바란다. 이런 얄팍한 수준이 당 대표와 제1 공당의 당론 법안이라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이제는 이런 소모적이고, 국민들의 마음을 너무나도 불안하게 하는 입법 독주를 멈추고, 진정으로 국민들을 위한 정당과 정책을 펼쳐 나가기 바란다. 민주당은 이미 여러 번에 걸쳐 수권정당으로 국가를 운영해 왔었다. 그렇다면 이런 꼼수로 국민들이 넘어올 것이라고 함부로 대하는 태도부터 바꿔야 한다. 국민들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신뢰도와 효율성이 뒤떨어지고,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야 할 정치권, 특별히 ‘입법독재’를 일삼는 정치 권력들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걱정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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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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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25만원으로는 결코 민생 회복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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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존엄사인가? 안락사인가? 자살방조인가?
- 정치권에서 2년 전에 폐기된 소위 ‘안락사’를 시행할 수 있는 법률안을 발의하였다. 지난 7월 5일 더불어민주당의 안규백 의원이 발의하고, 같은 당의 정진욱, 문대림, 김준혁, 안도걸, 권칠승, 이건태, 박홍배, 양부남, 문금주 의원과 조국혁신당의 조국 의원이 공동 발의하였다(의안번호: 1412) 이들이 발의한 ‘조력존엄사에 관한 법률안’에 보면, 현재 법률로는 말기 환자들이 극심한 고통 속에서 오랜 시간 보내야 하는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 의사의 조력을 통하여 환자 스스로 삶을 종결할 수 있도록 함으로, 삶의 질을 고려한 존엄한 죽음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상은 본인의 의사(意思)로 담당 의사(醫師)의 조력(助力)을 통해 스스로 삶을 종결하는 것으로 정의한다고 한다. 또 이는 ‘형법’에 따른 ‘자살방조죄’의 적용을 배제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것을 법제화하고 그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이다. 물론 오랫동안 질병으로 말기 환자처럼 고통을 당하는 것을 환자들이 경험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그러나 인간의 수명은 신(神)의 영역인데, 이를 사람들이 법률로 정하여 시행한다는 것은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된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면 ‘살인’이 된다. 비록 의사라 할지라도 죽는 것을 도와주는 것은 일종의 살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18년부터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중단하는 소위 말하는 ‘소극적인 존엄사’는 허용되고 있다. 그러나 환자가 약물 처방을 받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조력 존엄사’나 의사가 환자에게 직접 약을 투여하여 죽게 하는 ‘안락사’는 금지하고 있다. 세계에서는 조력 사망이나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들도 약간 있다. 콜롬비아, 우루과이는 안락사를, 캐나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포르투갈, 스페인, 뉴질랜드, 호주의 일부 주에서는 조력 사망과 안락사를 모두 허용한다. 그리고 조력사망을 허용하는 나라는 미국의 10개 주,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 등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인간의 생명을 인간이 주도적으로 마감하려는 것은 신에 대한 도발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제22대 국회에서도 전에 보다 적극적인 살인의 방법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물론 말기 환자들의 고통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고통까지도 신이 내린 인간의 수명이라면, 그것을 함부로 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것은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22대 국회가 개원한 지 불과 2달밖에 안 되었는데, 법안 발의가 2,353개가 된다. 그중에 탄핵안, 증언 출석안을 뺀, 일반 법안만도 2,289개에 이른다. 의원 1명이 1주일에 한 개의 법안 발의를 양산하고 있다(선진국에서는 불과 몇 십개 정도의 법안만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도대체 그 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이나, 공동 발의한 국회의원들은 그 내용과 후에 나타날 문제점을 알기나 하면서 법률안을 발의하고 제정하고 있을까? 그런 가운데 ‘조력존엄사’에 관한 법률안도 그 속에 들어간 것이라면 끔찍한 일이다. 법률안은 한번 만들어지면 다시 고치기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사람의 생명에 관한 것은 당장에 어떤 분위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법이 악용되거나 남용되었을 때의 부작용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신의 영역을 도발하여 진노를 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전 세계가 다 ‘존엄사’나 ‘안락사’를 허용한다고 하여도, 우리나라만은 그런 법률이 만들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인간의 참된 존엄이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인위적으로 중단시키고,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에 있다는 확증이 어디 있는가? ‘조력존엄사’ 법률이 만들어진다면, 우리나라는 광범위하게 자살과 살인을 방조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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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존엄사인가? 안락사인가? 자살방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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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무엇을 탐구하며 생각하십니까’(골 3장1-4절)
- 우리가 무엇에 마음을 기울이고, 무엇을 찾고 탐구하는가는 우리의 삶의 목표 설정과 함께 우리의 삶에 직접 관계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된 관심과 목표를 땅에 둘 것이 아니라 위엣 것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땅의 것은 현세적이며, 자기중심. 세상 중심. 물질중심의 삶을 뜻하는데 이러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 방해가 되고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기에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해야 합니다(1-2절).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늘 하늘나라를 생각하며 살아야지 이 복잡하고 사악한 세상에 붙들리면 안 됩니다. 위에 것을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관심과 마음과 생각 모두가 하나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 말씀 중심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주님께서 계신 하늘나라에 집중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고 신분적으로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올라가 있는 자들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함께 다시 살아난 새 생명의 소유자이기에 우리의 삶이 영광의 그리스도를 삶의 모든 것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성도에게 있어서 모든 것의 근원이시오 지혜와 능력과 지식과 힘과 진리와 복의 근원이십니다(고전 1:24 ; 골 2:3). 이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소유한 성도의 바람직하고 합당한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마음과 정신은 여전히 세속적인 것들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헌신한 이후에도 이전과 동일한 신념이나 욕망 그리고 태도를 계속 지속하며 개인적인 목적과 계획 그리고 자기 자신의 우선순위에 따라 계속 살아가는 이러한 태도의 근본적인 전환과 가치관의 재정립이 요구되었기에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찾고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땅에서 살지만 우리의 생각과 목적과 뜻이 모두 위에 속한 것들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사랑도, 소망도 소원도 자랑도 기쁨도 다 위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항상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자이지만 현재는 세상에 몸담고 있으므로 세상의 일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하고 그리스도만을 위해 하늘만 바라보면서 마치 구름 위에 떠서 다니는 것처럼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과 마귀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모든 생각과 관심의 초점을 이 세상이 아닌 하늘나라의 일, 즉 보좌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맞추어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들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현재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숨겨져 있는 삶입니다(4절). 숨겨져 있는 삶이 주님 재림하실 때, 모두가 주님의 영광중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된 관심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두며 하나님의 영광과 천국에 두며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집중하여 힘써 나갑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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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무엇을 탐구하며 생각하십니까’(골 3장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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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잠을 자도 주일예배, 일어나도 수련회
- 지난 목요일에는 다건연세내과에 가서 수액을 맞았습니다. 며칠 동안 죽을 먹어도 설사를 해서 몸을 가눌 힘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일 밤예배까지는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신 것 같았습니다. 물론 주일 1부 예배 설교를 2부 예배 때 영상으로 전했지만요. 오죽했으면 그랬겠습니까? 주일에도 설사를 했지만 설교 때는 참을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주일 밤부터 본격적으로 그동안에 쌓였던 긴장과 스트레스를 온몸으로 쏟아낸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자다가도 침대에 설사를 했겠습니까? 그래서 다건연세내과에 가서 영양수액을 맞고 피검사도 해봤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검사 결과가 영양실조 혹은 영양 불균형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데는 다 문제가 없는데 탈수로 인한 영양실조, 영양 부족이라는 것입니다.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하긴 며칠 동안 탈수를 해버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요. 지금까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제 평생 처음입니다. 너무나 기진맥진해서 잠을 잤는지 눈을 감고 있었는지 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비서인 송종호 안수집사가 와서 저를 깨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다짜고짜 물어봤습니다. “지금 몇 시요?” 그랬더니 “1시가 넘었습니다.” “왜 이제 나를 깨워! 주일예배는 어떻게 하고? 주일예배 드려야 되잖아!” 송 집사가 대답을 했습니다. “오늘은 주일이 아니라 목요일입니다.” “그러면 수련회 준비해야지! 왜 이제 깨워요?” 송종호 안수집사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수련회는 지난주에 했잖아요.” “아, 그런가...” “2시에 손님도 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송종호 집사의 말에 약속된 일정이 생각이 났습니다. 비틀거리며 차에 타는 순간 “아, 나는 잠을 자도 주일예배, 일어나도 온통 수련회 생각뿐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제 무의식상에서 주일 2부 예배를 영상으로 설교한 것이 마음의 짐이 된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여름수련회에 대한 긴장감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수련회 기간 동안 말할 순 없지만, 저에게 스트레스를 준 몇 가지 원인이 있었거든요.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려니 악한 영이 저를 흔들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요나처럼 욱할 수도 없고요. 욱할수록 저는 더 사명을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자다가도 주일예배, 일어나도 여름수련회를 외쳤던 것이죠. 그렇습니다. 우리는 욱하는 성질을 이겨내야 합니다. 욱할수록 사명을 붙잡아야 합니다. 내 안에 요나 콤플렉스를 이겨야 합니다. 요나보다 더 큰 분을 만나며 요나서 5장의 사명 감당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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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잠을 자도 주일예배, 일어나도 수련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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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요 14:27)
- 재난의 징조로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 21:10-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마음의 평안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으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모든 근심과 두려움을 뛰어넘는 내적이며 절대적인 평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골 1:21-22)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이웃과도 평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주시는 평강을 확장시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평강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은 영적인 평안입니다. 그 평안을 얻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에게 평안이 없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평안을 주시고,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요 14:26)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영이 건강하고 얼굴에 빛이 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내려올 때 그의 얼굴에는 빛이 났습니다.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기 때문입니다.(출 34:29) 우리가 주 안에서 기뻐하면,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면, 모든 일에 염려 없이 기도로, 감사로 주님께 아뢰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빌 4:4-7) 주님은 백성의 심지가 견고하여 요동함이나 치우침이 없이 그 은혜를 의존할 때에 그들의 보호자가 되셔서 평강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 26장 3절을 보면,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결같이 주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평강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변함이 없으시고, 인간은 불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유다 왕 아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 올바른 일을 하였습니다.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실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라는 조용하였고 주님께서 그 나라와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아사 왕은 백성에게 우리가 주 하나님을 찾았으므로 평안을 주셨다고 말했습니다.(대하 14:1-7) 우리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을 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평안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13)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는 나의 지혜의 설득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는 것이기에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해야 합니다.(고전 2:4) 예레미야 29장 11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평안이요, 미래와 희망을 주시는 것을 기억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갖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저는 『천로역정』 책을 읽었을 때나 <천로역정> 영화를 보았을 때 가장 감동적인 언어가 ‘희망’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간 존 번연은 소망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환경을 넘어 희망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천국으로 가는 여정 속에서 모든 것이 평탄하기만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에 우리도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안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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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요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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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성도님이 얼마나 내게”
- “♪ 성도님이 얼마나 내게 소중한 사람인지 / 헤어져 있다가 보니 이제 알 것 같아요 / 성도님이 얼마나 내게 필요한 사람인지 / 헤어져 있다가 보니 이제 알 것 같아요(중략) 사랑해요 사랑해요 / 주님 은혜 사모한 사람 / 고마워요 행복합니다 / 왜 이리 눈물이 나요” 이는 2024 장년여름수련회 첫 시간에 불렀던 노래입니다. 올해는 최초로 오크밸리와 교회에서 이원화로 수련회를 했습니다. 저로서는 코로나 때보다 더 긴장하고, 애간장에 녹는 순간순간이었습니다. 오크밸리 현장으로 오신 분들도 소중하지만, 개회 예배 때부터 본당과 동탄 지성전에 참석한 분들이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사실 유튜브로도 시청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더구나 첫날 저녁부터 성도들이 본당 1층을 꽉 채우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그냥 울먹했습니다. 어떤 기자는 저에게 “왜 이렇게 목사님답지 않게 긴장하십니까, 여유를 갖고 하세요.”라고 말하며 갔지만, 여유를 가질 수가 없는 게 교회에서 차량을 운행하는 시간이 있잖아요. 제가 그 시간에 맞추어 설교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본당에서 은혜를 사모하며 기대하는 성도들은 과연 얼마나 소통이 되고, 얼마나 은혜가 잘 전달이 될 것인지... 그러면서 동시에 또 현장에 있는 성도들의 눈동자와 마주쳐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긴장을 안 할래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이름없이 빛도 없이 섬기며 봉사하는 준비위원과 봉사 요원들, 또 일일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헌금하는 성도들을 생각하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목요일 저녁이 피크였을지도 모릅니다. 수요일 저녁은 수요저녁예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목요일도 교회당 본당을 거의 다 가득 채웠고, 오크밸리 현장에서는 오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 의자를 다시 더 좁게 깔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목요일 저녁 설교 분량이 가장 많았습니다.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많은 부분을 생략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원고를 줄이고 있는 중에 집사람이 저한테 전화로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성도들이 은혜받고 있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맘 푹 놓고 설교하세요.” 그렇지만 저는 준비한 내용을 대폭 줄이고 생략하기 위해서 살을 베어내는 마음으로 설교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작곡한 노래로 마무리를 하려고 했는데, 원고를 봤더니 그 노래가 아닌 것입니다. 제가 원고를 수없이 보고 또 봤는데 왜 그걸 발견하지를 못했는지... 아차 했지만 이미 때늦은 시간이었습니다. 숙소로 돌아와서 생각해 봤습니다. “문학과 예술이 영원한 미완성인 것처럼 설교도 마찬가지구나. 그렇게 준비하고 그렇게 애를 태웠는데... 하긴 그런 아쉬움이 있어야 다음 시간은 더 잘할 수 있겠지...” 그런데 다음날 새벽시간 뿐만 아니라 폐회예배 설교도 아쉬웠습니다. 설교 준비는 A+였는데 전달은 B+ 정도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물론 이 폭서에도 아무런 사고없이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이 은혜이고 또 은혜였습니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새에덴의 성도님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며 교회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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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성도님이 얼마나 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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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범사에 감사하십니까’(살전 5:18)
-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과 가족과 타인에게 그리고 자신이 속한 직장과 사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입니다. 감사는 고마운 마음을 상대에게 전하는 아름다운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감사를 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자신에게나 상대에게 즐거움을 주고, 서로의 관계를 끈끈하게 맺어주는 아름다운 행위인데 말입니다. 우리는 감사에 인색해서는 안 되며 매사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감사할수록 유대관계가 좋아지고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는 단지 고마움에 대한 마음의 표현이 아니라 서로를 단단하게 동여매주는 수단이고 건강한 삶도 가져다줍니다. 감사의 말 속엔 따뜻한 긍정의 에너지가 들어 있고,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지만 감사를 잘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매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비관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18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사의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범사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불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에서 보면 무엇 하나도 눈물 흘리며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고난도 환란도 유익합니다(욥 23:10; 시 119:67, 71).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지금의 상태가 최고이고 최적의 상태라는 것이지요. 다니엘은 왕의 칙령이 내려졌으므로 자신이 기도하면 사자굴에 들어갈 것을 알면서도 집에 돌아와 모든 문을 열어놓고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크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단 6:10). 다니엘은 상황을 원망하거나 하소연하지 않았습니다. 그 상황을 바꾸어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처해있는 그 상황에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감사는 환경이나 조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생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합 3:17-18에서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보면 감사는 신앙의 문제이지 환경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는 비결은 감사이며, 은혜를 받은 결과도 감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 감사하는 삶이 바로 신앙의 생명이요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생활인 줄로 믿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 믿음은 대단히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가게 된다는 믿음의 확신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말세에는 더욱 감사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감사’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테오’입니다. 이 말의 뜻은 마음 중심에서 가식이나 부담 없이 자원하여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감사는 자원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신앙의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늘 감사로 표현했습니다(시 95:2 ; 100:4). 감사는 단순히 인간의 의지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과 감화의 결실입니다. 이러한 감사는 궁극적으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고후 4:15) 우리의 전 생애를 하나님께 위탁하며 충성하는 적극적인 신앙의 행위와 태도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가 있는 곳에 기적이 있고, 기쁨과 사랑과 믿음이 있습니다. 모든 것, 모든 순간, 모든 사건, 모든 시간을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로 여기며 범사에 감사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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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범사에 감사하십니까’(살전 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