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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 북한 노동당 당비서에서 목사로 거듭난 복음 역경
- 다음은 지난 4월 7일,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제23회 목사안수식에서 안수자 대표로 인사를 건넨 노희창 목사의 메시지 전문이다. <편집자 주> 존경하는 사단법인 국제독립교회연합안의 목사님들과 함께하시는 모든 참가자 여러분, 그리고 오늘 함께 안수를 받는 동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먼저 이런 귀한자리를 마련해주신 명예회장이신 박조준 목사님, 총회장이신 림택권 목사님, 사무총장이신 임우성 목사님, 그리고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모든 목사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 귀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며, 북한 복음통일을 준비하는 종으로서 저의 다짐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북한의 ‘정치적 난’으로 치부되었던 장성택사건의 측근으로 낙인되어 해외출장시에 북한을 이탈하여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전 북한노동당 중앙당 행정부 대외건설지도국의 당비서 였습니다. 북한에서 노동당은 종교를 탄압하는 최고의 정치기구이며 저는 바로 그 기구에서 일하면서 종교박해와 탄압을 일삼으며 많은 죄를 지은 자 였습니다. 그랬던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에는 저를 이끄신 주님의 크신 뜻과 크신 노력과 은혜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 시대마다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종들을 세우셨고, 오늘 이 시간 저희를 주님의 일꾼으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직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을 각오로 임해야 할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특히, 우리가 서 있는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한반도의 복음 통일을 위해 일하시는 중요한 시기이며, 북한 땅에 갇힌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때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이 소명을 깊이 새깁시다. 이 자리에서 제가 맡은 소명은 북한에로의 복음전파이며 이루어내야 할 결과는 복음통일입니다. 저는 현재 북한선교실천연합 회장으로서 북한선교를 실천함에 있어서 북한선교의 기본을 올바로 이해하고 북한선교에 대한 중심을 올바로 세우고, 북한선교에 대한 방향을 올바로 선택하고 북한선교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북한선교의 중심은 요한복음 8장32절··· 진리를 너희가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의 말씀을 북한에 그대로 알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반대쪽 땅에서 사는 북한주민들은 세상속의 순리와 진리가 모두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 땅과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오직 복음으로 이 민족을 하나 되게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철저히 기도하며, 말씀으로 무장하며,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과 동역자들앞에서 다짐합니다. - 어떤 환경에서도 복음의 진리를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 오직 주님의 뜻을 따라 한반도의 영적 회복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 북한과 열방의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며, 복음이 전파되는 그날까지 달려가겠습니다. 이 길이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 하신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두려움 없이 나아가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저희를 위해 노력해 오신 사단법인 국제독립교회연합안의 모든 목회자분들과 함께 안수를 받는 동역자 여러분, 그리고 기도로 함께하는 모든 참가자분들께 부탁드립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 되어 주님의 뜻을 이루는 길에 끝까지 함께 서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를 세우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 드리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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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 북한 노동당 당비서에서 목사로 거듭난 복음 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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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논평] 하미자 목사의 ‘보혈의 능력’(벧전 1:18-19)
- 우리 신앙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한평생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히 2:14-1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주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바치셨습니다.”(갈 1:4) 그 보혈로 예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의 멍에를 다시는 메지 않도록 믿음으로 굳게 서서 보혈의 능력을 전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지배하에 있던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보배로운 피를 값으로 지불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대속하셨습니다. 예수의 보혈로 말미암은 구원은 영원하며 사람의 영혼육 전 존재를 구원하는 것이기에 더욱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죄에서 자유케 해주셨습니다. ‘구속하다’는 ‘전쟁 포로나 노예를 돈을 주고 사서 다시 해방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보혈, 즉 몸 전체를 대가로 지불하여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5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하게 해주셨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죄를 깨끗하게 해주셨습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넷째, 거룩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섯째, 영생을 얻게 해주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피를 마신다는 말은 보혈의 능력을 우리의 마음속에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혈의 능력을 찬송해야 합니다. 구약시대 드린 동물의 피는 부정하게 된 사람의 몸을 의식적으로 정결하게 하였으나 양심을 씻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죄로 인해 더러워진 사람의 양심을 정결하게 하고, 죽은 심령을 살려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였습니다. 주님의 보혈은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떠나 하나님을 섬기게 해주셨습니다. “하물며 영원한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흠 없는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바쳐진 그리스도의 피야말로, 더욱더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떠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히 9: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양의 피로써 속죄함을 얻은 그 기쁨을 영원히 찬송해야 합니다. 찬송가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268장)의 가사를 봅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는 것은 보혈의 능력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도 보혈의 능력입니다. 눈보다 더 희게 맑히는 것은 보혈의 능력입니다. 구주의 복음을 전할 제목도 보혈의 능력입니다. 주의 보혈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보혈을 믿어야 합니다. 스가랴 13장을 보면,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샘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죄와 더러움을 씻어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계획을 실행하시기 위해서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단 한 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히 9:11-12) 주님의 보혈이 아니고서는 그 무엇으로도 죄에서 떠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이신 것을 믿기 바랍니다. 바울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었습니다.(빌 3:10)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갈 6:14)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눅 9: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지금까지는 자신이 주인이었으나 이제는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평생 주님을 따라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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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논평] 하미자 목사의 ‘보혈의 능력’(벧전 1: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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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새벽 미명처럼, 봄의 햇살처럼”
- 다시 한 번 우리는 가슴 아픈 비극의 역사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대통령의 계엄선포와 탄핵, 그리고 파면으로 이어진 극도의 혼란과 분열은 우리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저는 지난해 12월 발뒤꿈치에 저온 화상을 입은 이후에 거의 외부 활동을 하지 않은 채 고요한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어수선한 시국과 극단으로 치닫는 사회 갈등과 혼란을 보면서 참으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특히 한국교회가 사랑과 화해의 중재자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 분열과 대립의 중심에 서는 듯한 모습들이 미디어를 통해서 보도될 때는 ‘정말 한국교회의 이미지가 이렇게 각인 되어서는 안 되는데... 교회의 본령과 방향성은 이런 모습이 아닌데...’ 하는 탄식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물론 광장에 나와 외치고 저항하는 분들의 그 안타까운 마음이야 어찌 헤아리지 못하겠습니까? 저 또한 의분이 일어날 때도 있고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솟아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교회 전체를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십수 년 전부터 ‘한국교회 생태계’라는 말을 처음으로 쓰면서 반기독교 세력의 실체와 전략을 알리고 반이슬람, 반동성애 운동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아마 대형교회 목사로서는 최초로 수많은 집회와 세미나, 언론 기고 뿐만 아니라 광장에서 반동성애 운동을 이끌면서 저항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교회의 본질과 가치를 위협하는 치명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앞장섰던 것입니다. 결코 어떤 이념이나 정치적인 아젠다를 가지고 어느 진영이나 정파에 서서 외치거나 활동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정관계 지도자들을 만나고 언론인들과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사회적 외연을 확장해 갔던 공적 사역 역시 한국교회의 영광성과 거룩성을 지키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한국교회가 너무 극단적인 이념과 정치에 매몰되어 있는 현상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제 다시 한국교회는 복음의 본질과 가치로 돌아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 화해의 정신으로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희망의 미래를 열어가야 합니다. 남북으로 나뉜 현실만도 비극인데, 교회가 앞장서서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로 나뉘어 극단적인 분열과 충돌을 계속하면 어떻게 새로운 미래를 향해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정치인들 역시 더 이상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거나 선동하지 말고 국민의 안위와 행복, 공공의 선을 이루는 정치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진보 진영이 되었건 보수 진영이 되었건 간에 국민의 행복과 공공선을 이루기 위한 이상과 가치를 펼쳐가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국가 분열과 혼란의 비극적 역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비전과 상생의 정치를 복원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의 가장 높은 산이 되어 진리와 가치, 비전을 제시하고 가장 깊은 바다가 되어 사랑과 용서, 화해의 정신으로 분열된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진실과 진리 그 자체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야 합니다. 결코 지도자의 위치에서 혼란과 분열, 파괴와 갈등을 부추겨서는 안 됩니다. 최근 국민 힐링 드라마라고 불리는 ‘폭싹 속았수다’가 방영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가족 사랑과 인간애의 따스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최근에는 될 수 있으면 슬픈 영화, 슬픈 소설은 안 읽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폭삭 속았수다’라는 드라마도 1회를 보고 더 이상 안 봤습니다. 인생의 과정 과정에 너무나 눈물이 많이 나올 것 같고, 그 슬픔을 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결론만 물어봤습니다. 애순이는 요양원에서 시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관식이는 병들어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드라마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고 합니다. 금명이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을 겪고 나서 고향 제주도를 찾아왔을 때 아버지가 새벽에 배를 타고 나가자고 합니다. 금명이는 안 그래도 힘든데 무슨 새벽에 배를 타고 나가냐고 짜증을 내지만 아버지의 순애보적 사랑을 거부 못하고 겨우 따라 나갑니다. 아버지는 묵묵히 배를 띄우고 딸 금명이에게 서서히 밝아오는 새벽 여명을 보여줍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금명이는 고백합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추웠을 때 가장 따뜻했던 사람...” 훗날 아버지 관식은 딸이 힘겨운 여정을 보낼 때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니다 싶으면 빠꾸, 아빠가 뒤에 있을게.” 한국교회도 집단적 상처와 아픔을 겪으며 가장 차가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우리 사회에 가장 따뜻한 사랑을 보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끝내 어둠을 뚫고 밝아오는 새벽 미명처럼, 봄의 햇살처럼 따스한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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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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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새벽 미명처럼, 봄의 햇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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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교회논평회 논평] 탄핵 기각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증명해야
- 오늘날 대한민국 대통령의 탄핵 여부는 우리나라 국민은 말할 것 없고 전 세계의 관심이 모인 최대 이슈입니다. 탄핵의 기각과 각하, 혹은 인용의 여부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꿀 숨막히는 결정이 될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를 감히 밝히자면, 이번 탄핵이 반드시 기각 내지 각하될 것을 기대합니다. 이는 어느 개인을 지지하거나 지키고자 하는 것이 아닌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법의 상식을 기대하는 당연한 바람입니다. 한 가지 더 기대하는 것은 이번 기회를 통해 새롭게 각성한 우리나라가 부정선거 이슈를 완전히 정리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현재 다수의 국민들이 부정선거에 대한 의혹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혹이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더욱 감추려는 듯한 그들의 행태는 오히려 국민들의 의심을 증폭시키고 이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먼저 선거관리위원회를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기관으로 재편해야 합니다. 그 어디보다 신뢰와 공정을 담보해야 하는 선관위가 가족회사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는 것 자체가 우리 대한민국이 처한 불행이자 국민들의 수치입니다. 미개한 나라에서 존재할 이런 일이 어떻게 대한민국에서 가능할까요? 과연 이런 체제 속에서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떳떳할 수 있습니까? 의혹 앞에 당당하다면 오히려 감추지 말고 더욱 적극적으로 모든 것을 공개해야 할 것입니다. 선거는 국민들의 대표를 뽑는 국가의 가장 큰 중대사입니다. 국가의 미래와 다음세대의 운명이 선거에 달린 셈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선거가 굳이 편리만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요? 좀 더 번거롭더라도, 혹여 고생스럽더라도 한 점 의혹 없는 공명성을 취할 수 있는 길이라면, 결코 마다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논란 많은 사전선거를 없애고, 개표는 선거함을 이동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작업으로 해야 합니다. IT산업 선진국인 대만도, 세계 최고 선진국 중 하나인 독일도 수작업으로 하는 것은 전자개표가 편한 것을 몰라서일까요?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요 기본입니다. 그렇기에 이번 탄핵이 기각되면 먼저 이 부분부터 바로 잡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만에 하나 탄핵이 인용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는 굳건히 지켜질 것입니다. 그 어떠한 시련과 폭압 속에서도 국민들이 자유민주주의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라고 말한 패트릭 헨리의 절규가 우리의 부르짖음과 같습니다. 지금 광화문을 위시하여 전국 각지에 그 많은 국민들이 모여 우리 대통령을 돌려달라 부르짖고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국민들이 스스로 거리로 나와 정의를 외치고 있습니다. 국민의 소리는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우리 민족은 그 심성이 착하나, 불의 앞에 결코 주저하지 않는 뜨거움 가슴을 갖고 있습니다. 3.1운동의 치열한 외침과 4.19혁명의 목숨 건 투쟁은 이 나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위대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자랑스러운 역사를 만들어 낸 이들이 바로 우리 대한의 민족입니다. 지금 대한의 민족이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염려하며, 대통령 탄핵 기각을 간절히 부르짖고 있습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저항할 줄 아는 국민이 있는 나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자신을 하야케 한 4.19혁명을 오히려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지난 역사 속에서 불의 앞에 단 한 번도 타협하지 않았듯 이제 그 어떤 시련이 밀려와도 더 푸르른 저항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켜낼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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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교회논평회 논평] 탄핵 기각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증명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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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덤으로 살고 덤으로 쓰임 받다”
- 지난 월요일에는 제 모교인 군산제일고등학교를 방문하였습니다. 방문 목적은 한국 기독교 선교 140주년을 맞이해서 전킨 선교사의 선교 흔적을 취재하기 위해서 일간지 기자들과 함께 간 것입니다. 전킨 선교사가 호남 최초로 군산제일고를 세웠거든요. 거기 가니까 지난번처럼 교장 선생님이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근데 도착하자마자 어느 기자가 “소강석 목사님이 공부한 교실부터 보여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교장 선생님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지금 본관이 리모델링 중이어서 죄송합니다.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대신 역사 기념관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러더니 역사 기념관으로 안내하셨습니다. 저도 기자들과 함께 그곳에 들어가 “와”하고 탄성부터 내질렀습니다. 진짜 말로만 듣던 저의 사진이 거기에 걸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군산제일고를 빛낸 인물 중에 한 사람으로 제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왜 제 사진을 걸어놨냐면 2015년도 <시사 저널>에서 대한민국을 이끄는 인물 100명 중에 한 사람으로 선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2021년도에 한교총 대표회장이 되었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학교에서는 완전 비주류가 되었습니다. 교회에 완전히 미쳤다고 기숙사에서 쫓겨나다시피 퇴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자취를 하며 마음대로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학교에서 저는 내놓은 자식이고, 교회에 완전히 빠져 있는 놈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공부를 게을리하는 대신 열심히 새벽 기도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부지런히 회지를 만들고 중고등부 학생회를 이끌어 갔습니다. 그런 가운데 저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이러저러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광주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광주신학교 4년을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개혁신학연구원에서도 3년 동안 공부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저는 오갈 데가 없었습니다. 누가 저를 써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저는 부목사로 훈련받을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저에게는 교회를 개척하는 길뿐이었습니다. 개척 멤버 한 명도 없이 말입니다. 개척 멤버가 있다면 저희 집사람이고, 정 권사님이고 배영수 장로였습니다. 감사한 것은 제일 멀리서 살았던 김정호 장로님이 낮 예배에 참석해주셨습니다. 그래도 저는 개척 목회자 가운데도 마이너리거였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개척교회 목회자들은 대부분 친인척들이 모여서 수십 명이 되는데, 저는 그러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부지런히 전도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끝없이 공부하고 학교에 다녔습니다. 다시 학사학위, 석사학위, 박사 과정까지 다 밟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였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저는 30대 나이에 최초로 천여 평에 달하는 예배당을 지었고, 40대 중반에는 만여 평에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제가 속해 있던 예장의 개혁 교단이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과 교단이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가운데 저를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 총회장과 한교총 대표회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가 하고 싶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노력해서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정말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였습니다. 되돌아보면 개혁측 출신이 경쟁 상대 없이 무투표로 총회장에 당선이 된 것은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방역을 지키고 현장 예배를 끝까지 드리게 했던 리더십을 발휘하게 했으니 말입니다. 더구나 제가 코로나가 오기 전, KBS에서 “이방인과 3.1운동”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 모교를 방문하여 특강을 하고 공영방송에 모교의 모습을 보여줬던 적이 있었습니다. 제 모교가 3.1운동을 주도했고 그 배후에 린튼 선교사가 있었다는 이유 하나로 모교에 가서 기념 강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생각해 봐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뭐 주류니 비주류니 이런 것을 생각해 봤지만, 지금은 그런 것조차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은 사는 것 자체가 하나님 은혜요, 덤으로 쓰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산불 소식 때문에 마음에 큰 염려가 있었는데, 다행히 큰 불길은 진화가 되었다고 해서 그 또한 하나님의 은혜요, 그나마도 덤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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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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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덤으로 살고 덤으로 쓰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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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국회의장은 지금의 내란에 책임이 없는가?
- 현재 우리나라는 대통령을 비롯하여 29건의 탄핵(彈劾) 사건으로 인하여 국정이 마비되고, 국격이 떨어지고, 대외 신인도와 대외교 문제에서도 심각한 공백이 생기고 있다. 어떻게 대통령이 임명하는 중요 인사마다 거대 야당이 완력(腕力)으로 ‘탄핵’을 상시화하는가? 이런 나라가 세계에 또 있는가? 그런 과정과 결과에는 국회의 잘못된 역할이 절대적이다. 국민들은 국회의원들을 ‘국민의 대표’로 뽑았지, 국가 운영을 마비시키는 ‘탄핵 거수기’로 선출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국회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더불어민주당 출신의 우원식 국회의장이다. 그는 국회에서 국가 요직에 있는 인사들을 탄핵할 때마다 의사당 의사봉을 두드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12일에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최상묵 대통령 권한대행의 대행에게 마은혁 헌법 재판관을 빨리 임명하라고 요구하였다. 마은혁은 더불어민주당이 추천한 인사로 여러 가지로 문제점이 많아, 헌재 재판관으로 임명하지 못할 인사로 평가받는다. 아니, 해서는 안 된다. 마은혁 판사는 법조계에서 카르텔을 형성하고, 편향성으로 문제가 많은 ‘우리법연구회’ 출신이며, 더욱 심각한 것은 사회주의 지하 혁명 조직인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을 목표로 한 단체)에서 핵심 멤버로 활동했던 사람이다. 그는 판사 시절에도 정의당의 노회찬 출판 기념회에 당당하게 참석하여 기부하고 정치적 참여와 함께, 이념적 편향성에 대한 논란이 있던 인물이다. 그에 대하여 같은 좌파 운동과 노동운동을 했던 김문수 고용노동부장관은 ‘마은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자였고, 그가 헌재 재판관으로 임명된다면 전체가 사상적으로 오염되므로, 헌재 재판관으로의 임명은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런데도 우원식 국회의장은 대행의 대행에 불과한 최상목 장관에게, 마은혁을 헌재 재판관으로 임명하지 않는 것은 입법부와 헌재를 얕잡아 보는 것이며,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맹비난하였다. 우 의장은 왜 모르는가? 국회가 하는 일마다 국민들로부터 얕잡아 보이는 일들만 하고 있고, 국회의장 자신은 이 나라를 위험천만하게 만들어 가는 장본인이 되고 있음을. 어떻게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일들을 해 온 마르크스-레닌주의자를 헌법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헌법 재판관’에 임명하라고 윽박지르는 것인가? 더불어민주당이 추천할 헌법 재판관 후보자가 마은혁 말고는 없는 것인가? 우원식 국회의장은 다수당의 힘과 횡포를 뒤집어쓰고, 현재 대한민국을 위험하게 만드는 인물이 되었다. 더불어민주당과 야당은 대통령 탄핵을 가볍게 본 모양이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국민들이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고 있고, 더군다나 20, 30대 젊은 층이 깨어나니, 매우 불안하고 조급해진 모양이다. 그렇다고 국회의장인 입법부 수장이 명예와 체면도 구기면서 민주당을 돕기 위하여 발 벗고 나선 것은 딱한 일이다. 그는 지금까지 국회가 힘의 논리로 수많은 탄핵 소추를 결정할 때, 가장 앞장 선 사람이다. 국민들은 그의 표정을 기억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7일 첫 번째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표결에서 부결이 되자, 울먹울먹하며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모습이다. 참으로 낭패스런 광경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27일, 대통령 권한 대행인 국무총리의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킬 때 투표에 앞서, ‘재적 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 한다’고 하였다. 이는 ‘헌법 해설서’를 무시한 것이다(여기에서는 권한대행의 탄핵 의결 정족수를 의원 3분의 2로 봄) 그러면서 권한대행은 대통령직으로 보아, 자기들이 추천한 마은혁 등을 헌법 재판관으로 임명해 달라는 요구를 한 것이다(헌재 재판관 임명은 대통령만 할 수 있음) 그런데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탄핵 소추 의결은 총리와 장관급으로 낮춰 처리하는 이중적 행보를 보여 주었다. 나중에 이 문제는 헌재에서도 대통령 탄핵에 대한 심문에서 다뤄졌는데, 헌법 재판관이 묻기를, 왜 국회의장이 그 중요한 문제를 의원들에게 가부를 물어보지 않고, 단독적으로 선언하듯 처리했는가를 확인하기도 하였다. 즉 국회의장이 지나치게 자신감(?)으로 독단적으로 졸속 처리한 것이다. 잘못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원식 국회의장은 지난 2월 7일, 나라가 혼란하고 시끄러운데, 중국의 하얼빈에서 열리는 동계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참석하였다. 그는 이때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인 시진핑을 만났다. 문재인 대통령 시절에 문재인 대통령도 만나기 어려워 8끼를 ‘혼밥’하다 왔는데, 국회의장은 단번에 시진핑을 만나게 된다. 과거 문재인 정부 때 국회의장이던 박병석, 문희상 의원도 시진핑을 만나지 못했었다. 결국 우원식은 시진핑을 쉽게 만났으나, 상호 대등한 관계가 아닌 면담이나 접견쯤으로 만난 것이다. 인민일보도 ‘회담’이 아니라, ‘회견’(會見)으로 보도했다고 한다. 동계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중국을 찾은 외빈은 파키스탄, 키르기즈스탄, 브루나이, 태국 정도의 정상들이 온 것으로 알려진다. 분명히 국회의장은 내란(內亂-국가를 혼란하게 하는 일)의 책임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 정부 출범 이후 더불어민주당은 29건의 ‘탄핵소추안’을 발의하였다. 그중에 우원식 국회의장이 맡은 제22대 국회에서는 18건이 있었다. 처리된 것을 보면, 자진사퇴로 폐기된 것이 4건, 폐기 1건(대통령 건인데 다시 가결) 헌재에서 기각된 것이 5건, 가결로 진행 중인 것이 8건이다. 그중에서도 이재명 대표와 관련된 수사를 맡은 검사들에 대한 탄핵소추안도 4건이나 되는데, 쌍방울 대금 송금, 대장동, 백현동 비리 등과 관련된 문제이다. 이러한 일에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한 국회의장이 또다시 자격 없는 헌재 재판관을 임명하라고 압박하는 것은 결국 국회의장이 더불어민주당의 집사(執事)라는 것인가? 우리 국민들은 수준 높은 국회의장을 원한다. 자신이 속했던 당이 잘못하면, 오히려 그것에 대하여 꾸짖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막아야 한다. 국회에서 국회의장을 뽑은 것은 대한민국에서 ‘삼권 분립’의 중요한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야 할 ‘입법부’의 책임과 정의, 명예와 권위를 세우라는 것이다. 국회의장은 일개 국회의원과는 사뭇 다른 품위와 인격, 그리고 국가의 존망에 대한 엄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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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국회의장은 지금의 내란에 책임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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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완전한 구원자 예수’(눅 9:28-36)
- 예수께서는 변화산 사건 직전에 베드로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신앙고백을 들으셨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가 바로 메시아이신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을 함께 드러낸 것이지요. 예수께서 우리 각자를 향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고백을 해야 합니다. 의심 많던 도마는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도마의 고백이 우리 각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알려주신 수난 예고로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영원한 천국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심으로써 십자가 수난이 과정이지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렇게 제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셨습니다. 본문은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시러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문득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더니 예수님과 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영광을 본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할 때에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상에서 그 모습이 변모된 사건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라는 사실과 장차 수난을 받으실 것과 다시금 주님의 영광을 회복하실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율법을, 엘리야는 예언을 말합니다. 즉 구약의 율법과 예언을 이루는 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변화산 사건은 예수님은 완전한 구원자이심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기도하시던 예수님이 변화되시어 옷이 희어지고 광채가 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것입니다. 기도할 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주님과 함께한 제자들은 그 기도의 능력을 경험한 것이지요. 그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영적인 눈이 열려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되었고, 귀가 열려 듣지 못한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때의 체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벧후 1:16-18)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서 별세는 ‘출발, 밖으로 나가다, 어디로 향하는 길’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영어성경에서 별세는 출발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별세는 예수님이 돌아가신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가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죽음을 출애굽으로 보았습니다. 애굽은 하나님 통치 없는 곳으로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출애굽은 죽을 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구원의 은혜를 절대로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다음날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께서는 귀신들린 아이 아버지의 간청을 들으시고 그 소년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악한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셔서 그 아버지에게 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고 놀랐습니다.(눅 9:37-43) 구약의 가장 큰 부분이 이스라엘이 기적적으로 구출된 출애굽입니다. 신약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즉 출애굽과 십자가는 하나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죄 용서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신 24: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기 전 사탄의 종노릇한 것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죄 사함 받은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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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완전한 구원자 예수’(눅 9:2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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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김호연 목사의 ‘이 시대의 사무엘들을 찾음’
-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 성경은 그 시대를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던“ 시대라고 기록하고 있다(삼상 3:1). 그 시대는 사사 엘리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로서 마지막을 보내던 시대였는데, 성경에 의하면 그는 눈이 어두워져 처소에 누워있기를 밥 먹듯 했던 것으로 보인다(삼상 3:2). 그는 육신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분별력을 잃어 가고 있었고, 따라서 자신의 아들들의 비리조차 꾸짖지 못하는 그러한 상태였다. 과연 이러한 시대에 이스라엘의 소망은 무엇이며, 누가 하나님의 뜻을 저들에게 전하여 이 민족을 바로 인도할 것인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고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워 있었다”고 했다(삼상 3:3). 하나님은 그런 사무엘을 불렀다(삼상 3:4).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첫째, 이 민족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이상이 희귀한 시대라도 하나님의 등불이 남아있는 한 소망은 있다. 하나님은 이 민족을 버리지 아니하고 사무엘과 같은 사람들을 통해 이 민족을 각성시키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사무엘과 같은 사람들을 예비하여 훈련시키시고 그들을 불러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게 하리라는 사실이다.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손에 맡겨져 훈련받은 사사요, 선지자였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장막, 여호와의 궤 앞에서 잠을 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늘 하나님과 가까이하기를 힘썼던 것이다. 그는 거기서 무엇을 했겠는가? 말씀의 훈련을 받았을 것이고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종으로서 훈련받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몰랐다. 그는 선생 엘리가 부른 것으로 착각하고 두 차례나 선생에게 가서 “부르셨냐?”고 물었다. 엘리도 얼마나 영안이 어두워졌던지 두 차례나 그것이 하나님의 부름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가서 자라” 했다. 그리고 세번 째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그를 부른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부르시거든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하라 했다(삼상 3:9). 비록 노쇠한 엘리였지만 사무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를 이어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데 마지막 소임을 다 한 셈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하나님이 사무엘을 불러 하신 말씀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엘리의 두 아들의 불의함을 보았고 그들을 심판하리라는 말씀이었다. 엘리는 사랑하는 제자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 말을 다시 듣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미 엘리에게 이 뜻을 전했지만, 그는 아들들에 대한 저주를 자청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이 나서 아들들의 비리를 금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삼상 3:13). 부정(父情)에 끌려 아들들을 망친 셈이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가 이와 같이 되지 않았는가? 영안이 어두워져 이상이 희귀한 시대가 되지 않았는지? 인간적 정리(情理)에 휘둘려 스스로의 죄조차 씻어내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 빠져 있지 않은지? 최근 일부 모범이 되어야 할 위치에 있는 교계 인사들의 메시지나 행태를 보면서 과연 이 시대가 엘리의 시대와 같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불의한 세력이 나라를 뒤 흔들고 무도한 행위를 서슴지 않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은 어째서 비겁하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 뒤에 숨는가? 이 말씀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할 것을 말한 것이지 네 자신이 심판의 위치에 서라는 말은 아닐 터다. “용서하고 화합하라”는 메시지를 듣기 좋으나 그것을 사단마귀의 세력에까지 확대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을 말씀에 근거하여 영적으로 분별하여 선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분별하게 섞어 얼버무리는 것은 옳지 않다. 한 때 존경받는 위치에 있던 분들이 이로 인하여 삯군이라는 소리를 듣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현 시국 한국교회는 사무엘의 영성으로 무장돼야 하리라.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로하면서도 경고했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않겠다 했다(삼상 12:20-25). 그래도 박조준 목사님이나 김진홍 목사님 같은 원로들이 계신 것에 감사한다. 전광훈 목사님이나 손현보 목사님 같은 분들이 주동이 되어 교회를 일깨우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함에 감사한다. 주류 신학교 교수들이 좌경화 되어 대통령 탄핵을 외치는 와중에도 학생들이 일어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함에 감사한다. 한국교회는 쇄신되어야 한다. 나라와 민족을 살리고, 장차 하나님이 이 민족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비전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이 시대의 사무엘들을 찾음. 하나님의 부름에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성심으로 응답하는 종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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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김호연 목사의 ‘이 시대의 사무엘들을 찾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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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탄식하는 인간, 감탄하시는 하나님
- 저는 요즘 하루에 한 번 혹은 이틀에 한 번은 꼭 정 권사님이 거하시는 방에 들어가서 기도를 해드리고 옵니다. 갈 때 말동무는 못 되더라도 잠시 기도를 해드리고 오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해서지요. 목요일 저녁은 지하 계단에서부터 8층까지 걸어 올라갔는데 그 순간 배영수 장로님 부부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것입니다. “짜고 치고 오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이렇게 그 순간에 복도에서 만날 수가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같이 들어갔는데, 갈 때마다 정 권사님은 성경을 보시거나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성경을 읽으실 때는 불을 밝게 켜놓지만 기도할 때는 전기세를 아낀다고 불을 끄고 캄캄한 상태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저랑 배영수 장로님이랑 탄식하는 말씀을 해드렸습니다. “지하 전 층과 1층, 모든 복도에 다 불이 켜져 있는데 어머니가 방에 불 하나 켜 놓는 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사람 깜짝 놀라게 하지 말고 불 좀 켜놓고 기도하세요.” 그런데 제가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기도만 하고 계세요. 좀 쉬면서 하세요. 성경도 꼭 읽으려고만 하지 말고 누워서 묵상을 하셔도 돼요.” 그랬더니 “아니네. 나는 성경이 너무너무 재미있고 기도가 나의 사명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라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살려두셨겠는가? 기도하라고 살려주신 거라네.” 그때 문득 몇 년 전에 정 권사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어느 대학병원에서 정 권사님이 폐 CT 촬영 결과 폐암 진단을 받으셨거든요. 제가 얄궂게 물어봤습니다. “암으로 돌아가시면 어쩌시려구요?” 그랬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무 걱정도 안 하네. 죽으면 천국이고 살면 기도지...” 하여튼 정 권사님은 생에 대한 탄식이나 후회, 갈망 같은 것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냥 무조건 감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대답을 하였죠. “천국 가시더라도 암으로 돌아가시지 마시고 유언을 잘 남기시고 편안하게 가세요.” 그 이후로 조직검사를 해봤는데 결과는 폐암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정 권사님도 인간인데 폐암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생에 대한 갈망의 의지가 들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정 권사님은 오히려 암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는 영원한 천국에 대한 젠주흐트(Sehnsucht)가 컸습니다. 젠주흐트라는 말은 독일어로 향수의 개념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는 갈망이나 열망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 권사님의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제가 올라갈 때면 “뭐하게 올라왔는가, 내가 대신 기도할 테니까 소 목사는 좀 쉬소.” 얼마나 다정다감하게 따뜻한 손을 잡으면서 그렇게 부탁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정 권사님이 왜 이렇게 부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에게도 젠주흐트라는 향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래도 내세에 대한 젠주흐트보다는 우선 이번 주에 어떤 설교를 하고 어떤 글을 써야 하는 부담감이 가득합니다. 어떨 때는 저도 정 권사님처럼 늘상 기도만 하고 성경만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을 보고 기도하는 순간 새로운 워딩을 해야되고 메모를 해야 되거든요. 저에게 주어진 사명과 정 권사님의 사명이 조금은 다를 수 있지만 구순이 다가오도록 오직 기도, 오직 성령으로 살아가는 정 권사님은 하나님의 큰 복을 받은 분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시편을 보면 탄식의 시(파괴적인 외침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외침의 시)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탄식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 응답을 해주셨지만 정 권사님과 같은 젠주흐트의 기도를 들으시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감탄해 하시겠습니까? 탄식의 기도도 기뻐하시거늘, 감사의 기도와 찬양을 얼마나 기쁘게 받으시겠습니까? 정 권사님을 뵐 때마다 항상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나도 저렇게 오래 살 수 있을까, 저렇게 오래 살면서 오직 기도와 말씀을 붙들고 살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몫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결과일 뿐입니다. 몇 살을 살든지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감탄하시길 빌 뿐입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구호를 외쳐봅니다. “솔라 스크립투라(오직 성경), 솔라 그라티아(오직 은혜), 솔라 피데(오직 믿음), 솔라 크리스토스(오직 그리스도), 솔라 데오 글로리아(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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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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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탄식하는 인간, 감탄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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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선관위는 불법에 불감, 헌재는 감싸기 급급
- 요즘 젊은 세대는 기막힌 상황에 놓여 있다. 그래서 그들을 ‘5포 세대’라고 한다. 즉 연애, 결혼, 출산, 내집마련, 인간관계를 포기한 것을 말한다. 참으로 딱한 현실이다. 그런데 이런 젊은이들과 국민들을 실망시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선거관리위원회가 수많은 채용 비리를 저질러왔다. 선관위는 지난 10년간 291차례의 경력직 채용에서 878건의 규정 위반을 한 것이 감사원에 적발되었다. 선관위의 채용 비리는 공고도 없이 직원 자녀를 내정하거나, 내부 인사로 시험위원을 구성하여 직원의 자녀들 면접 점수를 조작하였다고 한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이런 조직적인 범죄를 국가기관이 저지르고도 태연하단 말인가? 또 직원들은 성실하게 근무도 않은 경우도 있고, 규정 위반을 하면서 근무 시간을 봐주고, 그야말로 세습과 봐주기와 서로가 나눠 먹는 일을 거리낌 없이 했다고 한다. 그리고 감사가 시작되니 비리 관련 자료를 없애는 방법도 썼다고 한다. 오죽하면 국회가 친인척 자료를 요구하자, 별도로 관리를 안 한다고 했다니, 이 기관은 썩을 대로 썩은 ‘마피아 집단’과 같다. 이런 기관에 모든 선거관리를 맡겨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지난 2023년 5월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대법관)이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지만, 여전히 그 행태는 뿌리 뽑지 못하는 모습이다. 이들은 국가기관이라기보다 ‘가족회사’와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국민들을 더욱 경악케 하는 것은 헌법재판소(권한 대행 문형배)이다. 이런 불법이 행해지는 선관위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 행위에 대하여, 헌재가 판결하기를 ‘선관위는 감사원의 감사 대상이 아니라’고 감싸기를 하고, 강하게 쐐기까지 박았는데 ‘감사원이 선관위를 감사하도록 감사원법을 바꾸어서도 안 된다’고 친절(?)하게 선관위를 철저하게 보호하는 역할까지 했다. 헌재는 선관위를 감싸면서 ‘1960년 3•15 부정선거로 대의민주주의와 국민주권주의의 위기를 경험한 우리 국민은 헌법적 결단으로 선관위를 설치했다’며, ‘선관위는 독립된 헌법기관이므로 감사원의 감사 대상이 아니라’고 울타리를 쳐 주었다. 헌재나 선관위 고위직은 모두 판사들이 차지하는데, 이번에 헌재에 의한 선관위 판결은 서로가 서로를 봐주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법률 전문가들은 선관위가 비록 독립적 기관이기는 하지만, 선거관리 업무가 아닌 직원 채용과 같은 행정적 업무에 대해서는 감사원이 감사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선관위가 한두 번도 아니고, 수백 차례에 걸쳐 이런 비리를 저지르는데도 누구도 그 비리를 밝혀 막지 못한다면, 이것이 어떻게 국민의 세금에서 녹(祿)을 먹는 공직자들의 세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속히 국회는 선관위 직원 채용 비리에 대한 ‘특검’을 통해서라도 모든 부정을 낱낱이 밝히고, 이런 조직적, 은폐적, 암흑적 부정을 명명백백히 파헤쳐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리 실력 있고 정의감에 사로잡힌 젊은이들이 들어가야 할, 국가기관의 자리에 세습하는 가족으로 채우는 음성적 범죄 행위는 즉시 사라져야 한다. 선관위는 누구보다도 공정하고 깨끗하고 투명하고 공평해야 할 국가기관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환골탈퇴(換骨脫退)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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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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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선관위는 불법에 불감, 헌재는 감싸기 급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