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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반석에서 생수를 주신 교훈과 의미’(출 17:1-7)
- 모든 인생들은 광야를 지나는 나그네와 같습니다. 험악한 인생행로에서 목마르고 갈증 난 인생들은 저마다 갈증에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인생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공허합니다. 본문을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던 중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물이 없어 아우성치며 원망한 사건을 일어났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켜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기도하니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샘을 파라하지 않으시고 반석을 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에게 신앙의 사고력을 길러주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여호와의 명령대로 나갔음에도 물이 없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주어진 사명에 충실함에도 불구하고 시련을 만납니다.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사람이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이 갈증의 고통입니다. 인생행로에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이나 고통이 있을지라도 성급하게 불평하거나 원망치 말고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깊은 뜻을 분별해나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시고 반석을 쳐서 생수를 얻게 하신 데에는 단순히 기적으로 물을 먹게 했다는 뜻 이외에 깊은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모세가 친 반석은 호렙산에 있는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반석이었습니다. 이 반석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여 주신 반석입니다. 이스라엘이 마신 그 물은 신기한 기적의 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전 10:4에서는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해석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영적 갈증에 허덕이는 인생들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명수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영혼의 갈증을 풀어 줄 물을 얻기 위해서 세속적인 쾌락의 강을 찾기도 하고 철학의 시내를 찾기도 하며 부의 샘물을 파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들에게 멸시와 배척을 받고 슬픔과 애통을 맛본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영적인 생수가 나오며 그 생수만이 영혼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요 7:38-39). 사 55:1에서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값없이 와서” 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면 누구든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하는 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요 4:14). 이 세상의 향락이나 물질이나 아름다움이나 명예나 사상의 물은 마시면 마실수록 바닷물처럼 더욱 심한 갈증을 가져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시며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십니다. 혼미해지고 배고프고 목마를 때마다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으로 만족하려 하지 말고 차라리 때리시더라도 어루만져 주시는 주님의 품을 찾아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양식으로 충족함을 얻고 참된 생수로 만족함을 얻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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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반석에서 생수를 주신 교훈과 의미’(출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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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처절한 절규의 산제사
- 지난 주일 저녁부터 수요일 저녁까지 우리 교회 많은 성도들이 처절한 절규의 산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가 탈진을 하고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는 동안 갑자기 박순애 전도사님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박순애 전도사님과 친한 윤동현 목사님에게 올해 안에 집회가 가능할지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내년까지 집회 일정이 다 차 있지만 어느 한 교회를 잘 설득해서 다음으로 연기하면 12월 첫 주에 우리 교회에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일찍 11월 중에 했으면 좋았을 텐데 날짜가 그렇게밖에 안 된다고 하니 저도 잠시 고민을 하였습니다. 12월부터는 저의 일정이 비상사태나 마찬가지거든요. 교회와 교회 밖의 크고 작은 행사에 참석해야 하고 교역자정책수련회와 성탄절 행사를 하고 나면 곧바로 송구영신예배와 신년축복성회를 인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박순애 전도사님 초청 부흥집회를 가진다는 것은 쉽게 결단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다가오는 확고한 감동과 거룩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제가 박순애 전도사님 초청 집회를 한다고 했더니 제 측근에 있는 몇몇 동역자들이 “또 해요? 같은 간증일 텐데요. 목사님이 알아서 하시면 순종해야지만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견을 들었지만 제가 다시 기도하는데 이런 감동이 왔습니다. “아니야, 간증이 반복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차원에서의 접근 프레임으로 전혀 다른 스토리텔링을 하실 거야. 더 깊은 간증과 새로운 영적 언어로 말씀을 전해주실 거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부터 은혜 받아야 돼. 많은 신도시 교회들은 트렌드를 따라가지만, 우리 교회는 시대 흐름보다 중요한 게 은혜야.” 그리고는 제가 담임목사의 권한으로 이 집회를 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분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항상 하고 다니는 간증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간증이었고 말씀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분은 시대에 편승하고 조류를 타는 말씀을 전하는 게 아니라 시대를 역행하고 시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도전적인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한순간, 한순간의 간증과 말씀이 우리의 심장과 폐부를 찔러대는 말씀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제가 하고 싶은 말씀을 속 시원하게 다 전해주는 것입니다. 솔직히 주일예배에는 담임목사로서 그런 극한적 고도의 메시지를 전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심령부흥회를 열어서 담임목사는 하지 못하는 회개의 말씀, 헌신과 사명의 말씀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개척 초창기에 심령부흥회를 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심령 부흥 보다는 심령 부작용이 나타나는 걸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제가 직접 신년축복성회와 장년여름수련회를 인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신년축복성회와 장년여름수련회는 우리 교회의 두 날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도 모자라서 제 자신이 은혜를 받고 도전을 받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해서 마침내 성회를 열게 되었는데, 새로운 깊이의 간증과 말씀을 저에게만 들으라고 하신 말씀 같았습니다. 무학으로 자라난 산골 소녀가 어떻게 그러한 영적인 언어를 구사하고 영혼의 문장을 이어가는지 모릅니다. “그녀는 지치지도 않는단 말인가. 피곤하지도 않는단 말인가. 목이 상하지도 않는단 말인가.” 그분은 집회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저와 함께 식사하는 것도 양해를 구했습니다. 어쩌다가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다 보면 말씀의 초점이 흐려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집회 기간 동안에 전화 한통 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저는 발 뒤꿈치에 화상을 입었는데도 엎드려서 저도 무릎 꿇고 기도하느라 가시는 길도 배웅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꼭 짜놓고 치는 것처럼 우리 교회에 꼭 필요한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물론 다른 교회 가서도 최선을 다하셨겠지만 우리 교회에서는 처절한 산 절규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윤동현 목사님에 의하면 셋째 날은 얼마나 기도를 쏟아 부었는지 내려오는 길에 다리가 후들거리더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오셔서 강단에 올라가기 전에 “전도사님, 살살 하세요. 목도 아끼셔야지요.” “예, 그러겠습니다.” 해놓고 또 올라가서 처절한 절규의 산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적당하게 기도하고 끝내고 갈 수 있잖아요. 그런데 최선을 다하여 베스트 원, 넘버 원이 되는 게 아니라 온리 원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분의 간증 앞에 누가 고개를 저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아니라고 손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유레카의 감탄을 할 뿐이죠. 우리가 그런 삶을 못 산 것이 부끄러울 뿐이죠. 다만 아쉬운 것은 유튜브로 방송을 못 보내서 더 많은 분이 듣지 못한 걸 아쉽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저 자신부터 도전을 받아 온리 원의 신년축복성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박순애 전도사님의 성회가 온리 원이었다면, 제가 하는 신년축복성회는 온리 원 중의 온리 원의 집회가 될 것입니다. 그 분 뿐만 아니라 우리도 처절한 산 절규의 제사를 드려서 누구도 받지 못하는 최고도의 축복, 아니, 온리 원의 복된 삶을 사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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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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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처절한 절규의 산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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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자비하신 예수님’(마 4:23-25)
- 예수님의 성품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자비를 떠오르게 됩니다. 우리가 긍휼을 받을 만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받을 자격이 없는 데도 주시는 것이지요. 죄인인 우리는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죄와 사망을 다스려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는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모든 환자를 데리고 예수께로 왔습니다. 자비하신 예수께서는 그들을 긍휼히 보시고 다 고쳐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으로부터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자비하다’는 ‘긍휼히 여긴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긍휼히 여김은 ‘함께 고통을 당함’이라는 의미입니다. 긍휼은 섬기는 마음입니다. 긍휼은 불쌍한 자에 대한 동정심을 넘어 그 사람의 입장에서 같은 감정으로 공감하는 마음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 9: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자비와 사랑이 부족한 형식뿐인 제사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며, 예수께서는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소외되고 억눌린 자들에게 자유와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은 죄인인 자신이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받은 은혜대로, 나도 다른 사람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공감하며 함께 나눌 수 있는 자비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힘없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긍휼한 마음으로 도와준 것을, 주님을 섬긴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자비의 마음으로 기쁘게 섬겨줍니다. 약자나 장애인을 섬기는 삶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레 19:13-14)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나 거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제사장과 레위인은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도 만난 사람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어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여기서 포도주는 말씀을 상징하며(렘 23:9), 기름은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즉 상처는 말씀과 성령님의 도움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긍휼이란 자기를 희생하면서 불쌍한 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을 보면, 바울은 주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 아그립바 왕을 긍휼히 여겨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그러자 아그립바 왕이 “그대가 짧은 말로 나를 설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고 하는가!”라고 바울에게 말하였습니다. 이처럼 아그립바는 애매한 대답으로 바울의 질문을 피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짧거나 길거나 간에, 나는 임금님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결박을 당한 것 외에는 꼭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뵙니다.”(행 26:28-29)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긍휼의 마음을 갖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장 불쌍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8장을 보면, 굶주리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면, 즉 동정함으로 선행을 행하면, 죄악과 고통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항상 든든하게 지켜주시고, 영혼육의 건강함과 풍성한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너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10-1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와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구원받은 자들이 마땅히 행할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서로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엡 4:32) 진정한 긍휼은 실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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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자비하신 예수님’(마 4: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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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찔레꽃 향기 은혜를 기대해요”
- 오늘 저녁예배 때부터 박순애 전도사 초청 특별집회가 열립니다. 정말 이번 집회는 저부터 가장 앞자리에 앉아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제 영혼의 옷깃을 여미며 목회에 새로운 도전을 받으려고 합니다. 박순애 전도사님은 그야말로 찔레같은 인생이었고 모진 삶의 가시덤불에서 최상의 꽃을 피워낸 여자입니다. 청송의 산자락에서 산나물을 캐고 토끼를 잡으며 자란 산골 소녀, 어린 시절 알코올 중독 아버지의 폭행을 못 이겨 집을 나간 어머니, 말로 할 수 없는 가난과 외로움 속에 버려져 학력이라고는 초등학교 3학년 중퇴가 전부였으며 음식물 쓰레기를 주워 먹었던 절대절망의 삶... 그런 그녀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때부터 그녀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 집중되었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붙잡고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었지만 판타지 드라마와 같은 과정을 거쳐 학생 700명의 학원 원장이 되고 안정된 삶을 살게 된 대역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폭력배 출신의 남편을 만나면서부터 찾아온 죽음과 절망의 위기, 그리고 불의 연단을 통하여 빚어진 순금 같은 신앙, 하나님께 돌아온 남편의 회심과 그녀가 받은 오늘의 축복과 사명의 길... 그분의 간증은 꼭 꿈같은 소설이자 격정의 드라마입니다. 원래 간증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적으로 스토리가 흐르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박순애 전도사님은 간증을 하면서도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높이고 영광 돌립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북유럽풍의 세련미와 여유, 고적함과 관조를 즐기는 스칸디 스타일을 추구하는데, 그녀의 메시지는 너무 처절하고 야생적이고 맹렬해서 시대를 역행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저 역시 아무래도 신도시에서 목회를 하다보니까 현대 문화에 동화된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여전히 야생적이고 역설적입니다. 인생을 건 희생과 눈물이 담긴 헌신을 강조할 때는 섬뜩, 섬뜩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박순애 전도사님의 메시지가 맞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육신의 소욕은 시대에 편승하고 싶고 시대에 역행하고 싶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결코 우리의 신앙이 타성에 젖고 안일함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사실 고난 없는 성도가 어디 있고, 문제없는 가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럴수록 이번 집회를 통해서 우리의 심령이 다시 살아나고 대역전되는 놀라운 은혜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박순애 전도사님은 얼마나 건강관리도 잘하고 활발하게 사역하는지 코로나 기간에도 한 주도 안 빠지고 집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분은 늙지도 않는 걸까요, 피곤하지도 않는 걸까요, 정말 돌덩이고 쇳덩이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하나님이 항상 그분을 붙들어 주시고 사용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젊어서 아니 어려서 주의 이름으로 고생을 하고 고난받았던 걸 다 보상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우리 교회에 세 번째 집회를 오는데 어떤 교회는 10번도 넘게 가셨다고 합니다. 더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찔레꽃 여자, 박순애 전도사님을 통해서 도전을 받고 큰 은혜를 받기 위해서 잔치를 마련했습니다. 우리 함께 집회에서 큰 은혜를 받고 새해에는 우리가 베스트 원(best one)이 아니라 ‘온리 원’(only one)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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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찔레꽃 향기 은혜를 기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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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다수(多數)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 민주주의에서 다수는 절대적 권위를 갖는다. 이것은 민의의 대변으로 누구도 거역해서는 안되는 민주질서의 기본이요, 법적 근간을 이루는 기둥이다. 이 다수의 힘으로 소수를 포용하며 사회를 이끌어 가는 것이 민주사회이다. 그래서 이 민주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민의를 대변하는 이들이 법을 만들고, 엄격한 선발 절차를 거친 판사들의 입법부가 법을 수호하며, 국민이 그 법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 그 앞뒤에서 법의 집행을 방해하는 자들을 척결하는 이들이 경찰과 검찰이 있다. 그러나 삼권분립에는 하나의 불변의 가치가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양심에 기초한 정의'가 모든 것의 시종(始終)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다수의 의사가 결집되고 집행되어야 한다. 다수가 정의롭지 못하면 그 다수는 폭력이요 반인륜적 패역이다. 이런 다수의 폭력이 만든 역사는 일인 독재가 가져온 폐해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지금 우리나라 정치 현실이 이 위기를 맞고 있다. 지금 다수당이 된 야당은 견제 불가의 절대 우위의 힘으로 입법권을 행사하고 있다. 행정부는 물론 사법부를 통제하고 압박함으로 삼권분립의 민주주의 틀을 무너뜨리고 있다. 이런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런 사태가 오게 한 여당과 행정부의 책임은 나중에 따질 것이지만, 삼권분립에서 각 권력에는 도덕성과 책임이 따르는 국민적 위임이 있는데 이것을 자파 자당 그리고 지지 팬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다면 이는 권력을 위임한 국민에 대한 반민주적 배신행위이며, 정치적 패륜이라 할 것이다. 검찰이 법과 원칙에 기초한 수사를 못하도록 검사를 겁박하고 탄핵한다면 이 땅의 질서와 안녕은 누가 지켜내는가? 판결이 마음에 안든다고 법관의 양심과 소신에 따른 판결을 물리적으로 위협하고 비난한다면 이 땅의 정의와 가치는 누가 지켜 준다는 말인가? 모든 판,검사가 법과 원칙에 정의로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들의 윤리적인 가치를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마음에 안든다고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핍박하고 무찔러버린다면, 그것도 다수의 힘으로 장악한 입법권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법을 바꾸고 집단의 힘의 위력으로 개인 판,검사를 찍어누르면 그 피해는 누가 당하게 되는가? 엄연히 삼심제가 있어, 혹시 있을 지 모르는 하급심의 오판을 살펴보는 정당한 이의제기 신청제재도가 살아있는데, 다수의 힘과 권력으로 사태를 뒤잡으려는 것이 바로 민간 쿠테타 음모요 시도인 것이다. 법은 양심과 정의의 편일뿐, 어느 집단의 편이 돨 수 없다. 그것을 믿기에 법의 보호 아래서는 법 위에 사람없고 법 아래 사람없다는 가치를 믿고 따르는 것이다. 분명히 지금 민주당은 잘못하고 있다. 국익앞에서는 정파가 없어야 하고 침략 위험에 대해서는 여야가 따로 없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야당은 오직 유일한 목표, 이재명 대표의 신변보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또 챙기고 있다. 영부인의 잘못에 대하여 필자는 아는 것이 없지만, 명백한 허물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국정을 멈추게 하고 대통령의 통치를 가로막아설 만큼 중대한 일인가? 수많은 자영업자들이 줄도산을 하고 있고, 주가는 곤두박질치고 있는데 이는 아랑곳없이 죽기살기로 대통령의 멱살을 잡아 끄는 것이 이재명 대표 살려달라는 애절한 몸부림으로 보여 이제는 안쓰럽기까지 하다. 수사 검사를 탄핵하고 유죄를 선고한 판사를 조롱하고 폄하하는 모습도 이제는 살려달라는 비겁한 협박으로 보여 한심할 뿐이다. 다수는 겸손해야 하며 그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음으로 품격을 지켜야한다. 지금같이 시정잡배만도 못한 처신으로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저급함은 이를 지켜본 국민들이 처결할 것이다. 이제 절대 다수 야당의 야당다움은 거칠고 무례한 전투력이 아니라, 겸손하고 단호하게 양심과 정의의 편에 서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다수를 기뻐하지않으시는 하나님이 그 다수를 기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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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택시사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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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다수(多數)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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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재림을 준비하는 신앙’(눅 12:35-40)
- 인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더 살기 좋은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역사의 수례 바퀴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시계는 종말이 가까웠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재림을 준비하며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35절)고 말씀하심으로 다가올 심판을 준비하는 제자의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를 대비하여 믿음으로 굳게 서서 맡기신 일을 열심히 감당하며 깨어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으라는 뜻입니다(출 12:11). 예수님께서 재림하시어 이 세상을 심판하고 성도들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함으로 하나님의 인류구원 계획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지금 인류의 역사는 인류의 심판 즉 예수님 재림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받게 될 복을 사모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주님의 재림이란 더 없이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것보다 재림에 대해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한국 초기 교회 목회자나 성도들은 지진이나 천둥 번개 소리나 전쟁의 포성의 소리를 듣고도 주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냐고 집이나 교회 밖을 나아와 하늘을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너무 세상적인 관심에 깊이 빠져 있어서 그만큼 주님의 재림에 대한 관심이 훨씬 멀어졌습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확고히 서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살아간 종들에게 주인이 돌아왔을 때 놀랍게도 주인으로부터 종이 수종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37절). 그들은 단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깨어서 기다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귀하게 여겨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섬김이 만만찮은 순간도 있을 것이고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는 주인을 마냥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도착했을 때 그렇게 깨어서 기다리는 종들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38-40절). 분명히 오신다는 것은 예고되어 있지만 그 정확한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때와 기한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예비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항상 예비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언제 오시든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오늘처럼 풍요로운 세상에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의 쾌락과 염려가 우리의 천국 소망을 가로막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 물질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재림에 대한 준비 자세가 아닙니다. 세상의 평안과 성공 세상의 안일한 삶이 목표인 사람은 술에 취한 사람과 같이 주님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라면 영적인 영원한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그때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믿음의 발걸음을 옮기십시다. 자신이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며 재림을 준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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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재림을 준비하는 신앙’(눅 12: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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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책이 풍겨주는 가을 향기
- 레미 드 구르몽의 ‘낙엽’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시몬, 너는 좋으냐 / 낙엽 밟는 소리가 / 해 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 시몬, 너는 아느냐 / 낙엽 밟는 소리가 /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 낙엽은 날개 소리와 /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 시몬, 너는 아느냐 / 낙엽 밟는 소리가 / 가까이 오라 /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 되리니 /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가을길은 낙엽길과 같습니다. 단풍잎을 밟으며 가을길을 걸으면 뭔가 숙연해 집니다. 하늘은 파랗고 산은 붉고 길은 스산합니다. 안도현 시인의 말마따나 나뭇잎이 가을엽서가 됩니다. 우리는 그냥 낙엽을 밟는 게 아니라 가을엽서를 밟는 것입니다. 낙엽은 정말 향기로운 가을향기를 물씬물씬 풍겨주죠. 그러나 우리는 가을낙엽이 주는 향기로만 만족할 수 없습니다. 가을에는 책 읽기가 너무 좋은 계절입니다. 하늘이 푸르듯이 책도 푸르게 보이고 단풍이 아름답듯이 글씨가 어쩌면 그렇게 곱게 보이는지요. 그리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책에서 나오는 냄새가 가을 향기처럼 느껴집니다. 요즘 공원이나 기차 여행길에서 보면 책 읽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거의 스마트폰에 집중을 합니다. 물론 저도 스마트폰 검색은 하죠. 그러나 스마트폰 검색 가지고는 다분히 정보만 얻을 수 있지 향기를 느낄 수는 없습니다. 스마트폰을 통하여 알게 된 책을 구입해서 책장을 넘길 때야 책 향기를 느끼거든요. 저는 요즘 무척 마음이 무겁고 힘들 때가 많습니다. 우리 교회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교회 일로 많이 고민하고 애태울 때가 있습니다. 제가 앞으로 있을 어떤 행사에 우호적 반대를 해야 할지 조금이라도 발을 담가야 할지 어제와 오늘도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제 측근에 있는 사람들은 반대를 하고 교계의 몇몇 분들은 같이 하자고 주문을 합니다. 또 연합기관 통합 문제도 이렇다 할 해결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심란할 때 저는 책을 읽습니다. 쉬운 책은 빨리 읽히고 어려운 책은 늦게 읽히지만, 쉬운 책이건 어려운 책이건 책을 읽는 그 순간은 얼마나 마음이 평온하고 코끝에 향기가 묻어나는지 모릅니다. 특히 이소동집사(숙명여대 중문과교수)님이 쓰신 ‘공맹과 노장’이라는 책은 어려운 내용인데도 감탄사를 나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힘들면 책상에 앉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습니다. 책을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독서 탐닉가가 되죠. 그 많은 독서의 힘이 설교의 내용을 더 탄탄하게 하고 견고하게 합니다. 물론 목회자가 힘들 때 기도해야죠. 그리고 성경을 읽어야죠. 그건 너무나 당연한 얘기입니다. 사실 일반 책을 읽는 것보다 성경을 읽고 연구할 때는 얼마나 마음이 평안한지 모릅니다. 눈이 침침하도록 성경을 읽죠. 그 장을 읽다가 원근통시법적으로 그 장과 관련된 여러 편의 성경을 연구합니다. 또한 주석을 묵상하면 성경 본문이 제 안에서 거의 완벽하게 흡수가 되고 용해가 되어 새로운 창작의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책을 읽어도 제가 읽는 책보다 읽지 않는 책이 훨씬 더 많고 성경도 제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끝없이 독서를 할 겁니다. 특별히 가을일수록 푸른 하늘과 책장을 넘기며 독서할 겁니다. 그리고 가을 길을 걸을 때 모든 잎새 하나하나가 가을엽서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길을 걸을 것입니다. 글을 쓰는 이 시간도 종이 위에 가을 낙엽 향기가 폐 속 깊이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이 좋은 계절에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양서를 읽으며 가을엽서를 이웃들에게 보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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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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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책이 풍겨주는 가을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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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KBS의 여전한 동성애 사랑과 방송물 방영
- 지난 14일 공영방송 KBS 1TV에서는 동성애를 알리는 방송을 하였다. KBS는 다양한 가족을 알린다며, 미국에 있는 동성애 가족의 일상사를 방송하였다. KBS는 ‘다큐인사이트’를 통하여 이 방송을 했는데, 한국인 남성과 일본인 남성이 동성 결합을 하여 살면서, 두 쌍둥이 여자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아이들에게 엄마는 없고, 아빠와 대디만 있다. 사실 인정받지 못하는 동성애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남성 동성애 가정에서 자녀들을 키우는 것이, 여느 가정들처럼 자녀를 가지고 싶어 하고, 가족을 갖기를 원하는 것이 충족되겠는가? 또 그들을 통하여 양육되는 아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여기에 나오는 한 사람이 말하기를 ‘사랑하면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자녀를 낳을 수 없다는 한계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도 공영방송인 KBS가 국민들의 수신료를 통하여 이런 방송물을 내보내는 것은 동성애를 지지하는 것이고, 또 조장하고 홍보하는 꼴이 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용인되지 않는 동성애 가정을 방송한다는 것은, 곧 KBS가 우리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더군다나 이들은 대리출산으로 아이들을 갖게 된 것도 방송 내용 가운데 나온다. 물론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그러한 제도가 있는 미국의 어느 주에서는 허용이 되는지 몰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절대 허용되지 않는 내용까지 슬쩍 끼워서 방송한 것이다. 이 방송에서 동성애자의 친척이 왔다 돌아갈 때, 아이들이 공항에서 엄청 울어서 공항 직원까지 나와서 ‘엄마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바로 그것이다. 아이에게는 반드시 엄마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인륜이고, 천륜이다. 그것을 KBS는 간과(看過)하고 있다. KBS의 이런 방송은 결과적으로 한국에서도 다양한 가족의 형태라는 빌미로,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사례들을 만들어 내는데 일조할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아이들에게도 ‘아빠’와 ‘엄마’를 가진 가정에서 태어나야 할 권리가 있지 않겠는가? 왜 ‘아빠와 아빠’ 혹은 ‘엄마와 엄마’라는 비정상의 가정들을 만들어 내는데 공영방송 KBS가 앞장 서야 하는가? 거기에다 KBS는 가톨릭 성당에서 아이들이 세례를 받는 모습을 방영한다. 동성애는 종교적 영역에서도 인정해야 한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그러나 함부로 종교를 끌어들여, 간접적으로 이를 반대하는 기독교를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동성애는 성경에서 허락하지 않는 행위이기에, 이를 따르는 것이다. KBS는 이런 방송물을 제작한 관계자들을 엄중히 문책할 것이며, 다시는 이렇듯 동성애를 위한 방송물을 내보내지 말아야 한다. KBS는 방송 말미에 이런 방송물은 국민들이 낸 ‘수신료로 제작한다’는 문구를 빼놓지 않는다. 너무 뻔뻔하다. 언제 국민들이 KBS에게 동성애를 지지하는 방송물을 제작하라고 수신료를 낸단 말인가? KBS는 그동안 편파와 왜곡과 불공정의 대명사처럼 여겨져 왔다. 그런데 사장이 바뀌고 나름 대로 개혁을 하는 줄 알았는데, 이런 방송물을 내보내다니 크게 실망이다. 국민들은 KBS가 가정과 우리 사회를 해체시키는 동성애 방송을 하는 것을 결단코 원치 않는다. 공영방송 KBS, 아직도 건강한 가정, 건강한 사회, 미래•발전적인 국가를 만들어 가는데 방송의 역할이 무엇인지 모른단 것인가? 이미 국민들은 동성애 옹호나, 동성애자들이 가정을 이룬다는 식의 허황된 말들에 아주 식상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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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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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KBS의 여전한 동성애 사랑과 방송물 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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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펴] 나라를 위태하게 하고 국민을 무시해도 되나
- 최근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매우 위험하고 무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지난 9일 민주노총은 서울 도심에서 윤석열 퇴진 집회를 열고, 이를 제지하는 경찰과 충돌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 105명이 부상을 당하는 등 쌍방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민주노총이 현재 하고 있는 집회도 국민들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대통령은 국민들이 뽑은 국가의 지도자이다. 그런데 자신들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그리고 세력만 믿고, 대통령을 퇴진하라는 것은 국민들과 헌법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노총이 시위를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지난 6일 간첩 사건에서 4명에 대한 1심 판결이 나왔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은 징역 15년의 중형을 받았다. 다른 사람은 각각 7년과 5년의 형이 선고되었다. 그중에 총책을 맡은 사람은 노동계에서 오랫동안 암약해 왔는데, 평택 미군기지, 오산 공군기지, 평택화력발전소, LNG저장탱크창고 배치도 등 국가 기간망 마비를 위한 북한의 지령에 따라 활동해 왔다. 그런데 이들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에 몸담고 활동하였다. 이곳에서 조직국장, 기획국장, 교육국장, 조직쟁의국장, 보건의료노조 조직실장, 금속노조 부위원장 등 핵심 직책을 가지고 대남혁명을 대행해 온 것이다. 노동자를 대변한다는 민주노총이 북한 정권을 대리로 하여, 국가 전복과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것을 국민들이 인정할까? 또 우려스러운 일이 있다. 현재 야당 대표가 여러 가지 범법의 의혹을 받고 재판 중에 있는데, 그의 무죄 판결을 촉구하는 서명이 지난달 8일에 시작하여 한 달이 조금 지난 이달 11일 10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야당 대표에 대한 1차 판결은 이달 15일쯤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는데, 그를 무조건 지지하는 사람들이 사법부를 위협하는 행동은 옳지도 정당하지도 못하다고 본다. 우리나라는 ‘법치주의’ 국가이다. 누구라도 범법을 하게 되면, 그에 상응한 대가를 치루게 된다. 만약 야당 대표에게 죄가 없다면 법정에서는 무죄를 선고할 것이고, 죄가 성립된다면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극렬 지지자들이 나서서 무죄 판결을 촉구한다면 사법부가 왜 필요하며, 법은 왜 있어야 하는가? 우리는 정치 지도자에 대한 지지도 필요하지만, 결격사유가 명백히 있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그를 지지하고 감싸서는 안 된다. 그런 일들을 국민들이 걸러내지 못한다면 이 나라는 망하는 것이고, 심각한 독재자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 땅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꽃피게 하는 것은, 당연히 국민들의 몫이다. 국민들조차 정의와 공정을 무시한다면, 결국 국가는 국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가 없게 된다. 우리 국민은 120만명의 민주노총이나 특정 정당에게 일방적으로 끌려가서는 안된다. 국민들의 바른 목소리를 통하여 잘못된 길로 가는 나라를 바로 잡아야 한다. 법의 잣대가 일정하지 않으면 그 법은 선량한 사람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권력자들에게는 오히려 도피처가 됨을 알아야 한다. 정치의 수준은 국민의 수준과 같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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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펴] 나라를 위태하게 하고 국민을 무시해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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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노벨문학상 작품이면 청소년들에게 다 필요한가?
- 지난 10월 초에 한국의 여류 작가가 2024년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한국 사회가 시끌하다. 한국인으로 처음이고, 동양 여성 처음으로 그의 수상 소식이 알려지면서, 불과 수일 만에 100만 부가 넘는 책이 팔리는 등 노벨문학상이 갖는 파급력은 대단하다. 그러나 이런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호불호가 분명해졌다. 어떤 이들은 ‘문학의 고급화를 상징하는 봉우리 같은 것’이라고 극찬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청소년의 영혼을 비릿한 정O 냄새로 타락시키는 패륜의 문학’이라고 부정한다. 거기에다 교육감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진보 계열의 모 교육감은 ‘치열한 역사의식과 문화·예술적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교육’으로 그 작품을 평가한다. 그러다 보니 일부에서는 국민신문고를 통하여 그 여류 작가의 책을 초·중·고교 도서관과 공공도서관에 비치해 달라는 민원을 제기했다고 한다. 또 다른 차원에서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의 번역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래서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의역과 오역의 합리적인 절충점을 찾는 것이 한국 여류 작가의 노벨상이 남긴 또 다른 과제’라는 말도 나온다. 이 작가의 작품들이 남긴 과제는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전국 학부모 단체가 주장하는 ‘학생들의 발달 단계에 맞지 않는 도서이기에 학교 도서관에 비치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나오고 있다. 또 하나는 역사적인 소재를 가지고 소설을 구성했는데, 그것이 실제적 진실과 다르며 소문으로 떠돌던 내용들까지 표현하여 역사적 왜곡까지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이다. 어찌 되었든 이런 염려는 충분히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세계인들이 언제 한국의 근·현대사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을까? 그런데 소설적 서술들이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그것을 한국적 역사 상황으로 인식할 수 있는 개연성이 매우 높다. 소설이 역사 교과서보다 더 확증을 발휘할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보고 그대로 믿을 수 있는 작품을 학교의 도서관이나 공공도서관에 비치하는 것은 안 된다고 본다. 소설과 역사를 다른 것으로 구분할 정도로 학생들이 분별력을 갖추기에는 이르다고 본다. 작가가 표현한 약자들의 트라우마는 결국 강자들이 입힌 폭력이며, 용서받지 못할 행동인 것으로 각인된다. 그러나 역사의 소용돌이와 국가를 지키려는 군인과 경찰을 ‘악마’로 만들어 간다면, 국가에 대한 부정과 반발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볍게 보면 안 된다. 그런데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 메사추세츠공과대학의 대런 애스모글루 교수와 사이먼 존슨 교수, 그리고 시카고대학의 제임스 로빈슨 교수는 세계 최빈국에서 50년 만에 선진국으로 도약한 한국의 경제 상황을 연구하여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그들은 한반도의 두 체제, 우리 대한민국과 북한 체제의 경제적 상황을 설파하였다. 그들은 2020년 기준으로, 한국과 북한의 국내총생산(GDP)을 조사했는데 한국은 1,933조 2,000억원이고, 북한은 34조 7,000억원으로 북한은 남한의 1.8%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리적 위치, 천연자원, 문화적 특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남과 북이 정치, 경제 제도를 다르게 선택한 결과인 것이다. 북한이 선택한 공산주의 체제는 소수 엘리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착취적 제도’였으나, 한국은 전 국민이 참여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였다. 이것이 한국을 세계적 경제 강국으로 만든 원동력이 된 것이다. 2024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국의 여류 작가의 작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들이 많다. 그런데 세계적인 경제학자들이 오늘날 한국이 세계 속에서 성공하고 강대국이 된 것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에 의한 것이라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이 여류 작가가 이런 소설을 마음 놓고 쓸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국가 제도와 이런 제도를 과감히 받아들인 지도자들의 결단에 의한 뒷받침 때문에 가능했다. 물론 문학과 경제는 다른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인으로 느끼는 자긍심은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 사람이 받은 상에서는 논란이 생기고, 외국인들이 한국의 상황을 바탕으로 연구한 결과로 받은 상에서는 오히려 자긍심이 생긴다. 그래서 노벨상 수상작이라고 하여 무조건 어린 학생들에게 읽혀야 된다는 생각은 미처 양생(養生) 되지 않은 콘크리트에 또 다른 복층을 연거푸 쏟아부으려는 무리함으로 보인다. 이것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잘못된 욕심이기에 자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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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노벨문학상 작품이면 청소년들에게 다 필요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