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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시대를 보며
    오늘의 세상 풍조는 기능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삶의 위험을 본다. 여기에 신학자 마르틴 부버는 '오늘의 사회는 집단은 있으나 공동 사회는 없다'고 한다. 유기체적인 삶의 결여로 기능주의의 의미를 알게 하여 이로서 유기적인 관계를 알게 한다. 여기에 본질이나 내용보다도 그 기능이나 작용을 중시하는 점을 알게 한다. 오늘에 있어서 그 시대어로 모던(modern)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이 매너리즘의 시대는 그런 뜻에서 이전의 가치체계에 대한 하나의 반역의 시대로 그런 특징이 생활감정과 예술 전반에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비 고전적 내지는 반고전적인 것으로 주관주의와 기능주의를 그 근본 성격으로 간주하게 함도 알게 하지만 사실로 삶을 살아가는 데는 기능만이 아니라 삶은 살아있는 것이기에 살아있음으로 살림이 됨을 알아야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정치와 경제 제일주의와 권력이라는 등식 관계를 절대적으로 인정하는 오늘의 사회 구조 속에서 권력 남용이라는 인식이 통하는 사회의 구조 속에서 시달려 왔음을 인식하고 있다. 이는 삶의 가치관이 혼돈된 시대적 삶의 방향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가치관이 혼돈된 시대에 살면서 혼돈된 시대에 사람들을 올 바르게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을 갈구하고 있는 현실을 보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치가 혼돈된 시대에 방향을 몸소 실천하는 지도자가 아쉬움을 절절히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정치개혁은 제도 개혁도 중요하지만 모든 정치인의 의식 개혁이 더 중요함을 현실에서 갖게 한다. 이렇게 오늘의 정치 위기는 잘못된 가치 의식과 그 규범에서 유래됨을 알게 한다. 예컨대 양심의 빈곤, 윤리의 타락, 질서의 굴절이라는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는 곧 정의보다는 불의, 신뢰보다는 불신, 질서보다는 무질서가 속출하는 어두운 사회 현실을 보게 한다. 삶의 가치는 바른 길을 택하여 걸어가야 한다. 세상이 건저하게 걸어가야 하는 길은 삶의 가치를 택하여 정도를 밟아 살아가게 되어 있다. 처음 세상을 알게 한다. 예컨대 정치가 진실과 정의와 인권과 박애를 중심하지 아니하고 자기이권을 중심으로 음모를 한다든가?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기회로 국민을 기만하려 한다면 잠시 이는 성공한 것 같게 보일런지는 모르지만 그 결과는 허무와 몰락의 길을 자처하게 될 것이다. 이는 사람의 양심과 신념, 신조를 속이지 않고 양심을 따라 이를 행하면 만인의 추앙을 받게 된다는 사실과 진실이 여기에 있기에 타인의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우주 만물을 창조하심의 하늘의 뜻을 믿게 한다. 모두 함께 지으신 그 뜻을 헤아려 이 세계를 이분법적인 관계로 보지 않고 통전적으로 보고 유기체적인 생명 관계로 살피는 믿음의 지혜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여기서 더 생각 할 것은 오늘의 신학자 화이트 헤드(A.N. Whitehead ,1861-1947)의 “과정신학”을 적용해 보면 그는 사람이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공간과 시간과의 관계를 전제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한다. 예컨대 인간이 사는 공간의 삶은 필히 시간과의 관계를 벗어나지 못함을 제시한다. 그는 인간이 행동하기 위해서는 공간을 조정함과 동시에 행동하는 것으로 공간을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그 의미가 인간이 삶을 영위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간을 조정함과 동시에 행동하기 때문에 여기서 사실과 의미가 부여되고 사물에 대해서는 사실 공간, 자연 공간, 인간 공간으로 그 의미 있는 공간을 갖게 된다는 것을 알게 한다. 여기서 알게 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은 “하나님이 이 세상 만물을 창조했다”는 신앙으로 그 공간 안에 가능한 모든 차원의 세계를 초월하신 분으로 창조자 하나님을 믿게 함에 유의한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공유하는 우주 공동체 의식을 갖는 신앙고백을 알게 한다. 이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고간의 신앙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깨닫게 한다. 이렇게 인간도 한 생명으로 우주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삶의 가치를 누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함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과 우주만물을 이분법적인 대립으로 보지 않고 통전적이며 유기체적인 생명관계로 믿는 믿음임을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5-31
  • 약속은 기다림이다
    성서에서 기다림의 의미를 구약에서 보면 ‘기다림’은 ‘서로 묶다’ ‘참을성 있게 바라보다’ ‘기다리다’ ‘희망하다’ ‘기대하다’ ‘침묵하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그리고 신약에서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다’ ‘기대하다’ ‘받아들이다’ ‘고대하다’ ‘기대하다’ ‘희망하다’ 등의 의미가 있다. 기다림은 무언가 특별한 것을 고대하는 것이다. 장차 나타날 어떤 일에 대하여 고대하고 확신에 차서 바라보는 것이다. 기다림은 신뢰에 근거한 기대를 의미한다. 신뢰와 지식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기다릴 수 없다. 그저 막연하게 어떤 대상을 기다리는 것은 맹신에 가깝다. 그런 기다림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회의로 바뀌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믿음과 지식에 근거한 기다림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다. 우리의 기다림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인격과 일에 대한 믿을 만한 증거들을 기록한 것이 성서의 역사인 것이다. 기다림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포함한다. 기다린다는 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냥 손을 놓고 무언가 이루어지겠지 하고 기다리는 것을 떠올리지만 이러한 행동은 성서가 말하는 기다림과는 거리가 멀다. 기다림은 수동성과 능동성(부정 및 긍정)을 함께 가지고 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서로 얽혀 있는 것이 기다림이다. 이 두 가지 측면이 균형을 이룰 때 힘과 용기와 인내를 가져다준다. 긍정적인 면에서 기다림은 항상 주를 찾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골방에 들어 가 하나님을 찾는데 시간을 모두 써야 한다. 그리하여 기다림은 정확한 시기에 행동에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바로 시간 안에서 때를 알게 한다. 때는 여기에 걸맞은 때를 말한다. 때는 밭을 갈 때와 씨를 뿌릴 때가 있고, 거두고 저장할 때가 있다.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할 수는 없음으로 이를 알게 한다. 모든 것은 그 시기에 따라 ‘때’가 맞추어져 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도 이와 같다. 그리하여 신앙생활은 교회의 전통이나 개인의 신앙 습관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분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주시는 약속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무엇인지 알고 그 약속이 자신의 생활 속에서 성취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사는 것이다. 성서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믿었다. 그리고 그 약속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시간 즉 때가 되어서야 성취된다. 그들이 가졌던 가장 큰 어려움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중도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참 믿음의 여부는 이 기다림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믿음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기다리며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림과 믿음으로 붙잡고 의를 구하며 애통해하는 겸손한 사람을 높이시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약속하고 성취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 사이에는 “기다림”이라는 우리의 몫이 있다. 약속이 없어 지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에 지친다. 하지만 나는 지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지치지 않는다는 기다림에 인내하는 자 이어야 함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신앙은 기다림이다. 기다림이 없이는 신앙이 자라지 못한다. 지금 우리는 기다려야 할 일들이 있다. 응답이 더딜지라도 기다려야 한다. 그것은 기다림 뒤에 감춰두신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 게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순종, 인내, 기다림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기다림은 약속이요 기다림은 우선하는 책임감당이다. 성서에서 보면 기다림은 정지해 있는 시간도 낭비하는 시간도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하지 않는 시간을 알게 한다. 아브라함은 24년의 기다림 끝에 아들 이삭을 얻는 것이 대표적인 실례이다. 야곱이 베델에서 받은 하나님의 약속도 마찬가지이다. 요셉도 어린 나이에 13년이라는 고통의 세월을 보냈지만 하나님이 환상을 통해 주셨던 약속을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다윗도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어려움 가운데 있었지만 그는 어떠한 시험에도 굴하지 않았음을 알게 한다. 결국 다윗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임함을 알게 한다. 이렇게 성서는 하나님의 약속들이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 가는 것을 믿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5-18
  • 하나 된 민족의 회복
    지난해 묵은 역사를 살펴보면 1950년 6.25전쟁은 하나의 민족이 남과 북으로 타의 힘에 의하여 한 민족이 사상과 이념으로 분단의 현실로 서로의 갈등을 품고 분열과 갈등으로 살아오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남과 북은 1972년 ‘7,4 남과 북이 공동성명’을 통해 민족이 공동의 통일 의지를 밝히고 이후 남과 북은 1992년 ‘남북기본 합의서’로 통일의지를 밝힌바 있다. 그 이후 ‘2000년 6.15남북공동 선언’, ‘2007년 10월4일 “남북공동선언”, 등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노력해 왔음을 알게 한다. 이는 우리 민족의 통일의 의지와 평화를 확수 고대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렇게 자주적인 민족공동체가 민족의 통일을 위해 화해의 일치로 숙원하고 있는지를 알게 한다. 이러한 뜻은 민족이 동질성회복을 위해 통일을 위한 이산가족 상봉을 얼마나 갈망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렇게 민족의 한을 달래는 그 동안 정부는 어떠했는가를 알게 한다. 또한 여기에 한국교회는 이 한을 달래는 기도를 하고 노력해 왔는지를 반성하게 한다. 그 동안 우리 하나의 민족은 어떻게 살아 왔는가? 생각해 보면 비정상적인 강점기를 통하여 분단장벽, 계급장벽, 빈부격차, 상대적 경제박탈감, 정치적 갈등 등 부당한 구조적 장벽에 시달려 왔다. 또한 생명, 평화, 공의의 가치를 조직적으로 훼손하는 벽들을 허무는 일에 교회가 사회 선교에는 삶의 갈등의 구조에 외면하고 살아왔음을 알게 한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육신 신앙’에 거리를 두고 살아 왔음을 깨닫고 회개하게 한다. 세상 만물과 만사의 일에 하느님의 성령의 역사가 그 생명의 뒤에 숨어서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이치를 깨닫게 한다. 우리가 구약성서에서 보면 민족의 지도자 모세가 80세 되던 해 호렙 산에서 기도 중에 하느님으로 부터 ‘민족의 해방을 하라’는 음성을 듣는다. 이집트로 돌아 와 형인 아론과 더불어 믿음의 힘을 얻어 파라오와 싸워 이겨서 히브리 민족의 해방을 이룩함을 알게 한다. 이어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하느님과 이스라엘백성 사이의 약속(계약)의 중개자가 되면서 이후에 모세가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이 끌고 에돔 모압의 광야에서 40년의 세월동안 유랑 세월을 계속하지만 가나안에 도달하지는 못하고 120세에 세상을 떠났으나 후계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감을 알게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민족도 과거 3.1운동이 지난 역사적 의미와 그 운동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의 민족의식을 보면서 민족의 어려움을 보는 그리스도인들은 교파와 교단을 넘어 한 민족의 아픔에 참여함을 알게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안에서 삶의 가치는 정의, 사랑, 평화, 화해가 그 기초가 됨을 믿음으로 알게 한다. 역사를 살펴 돌아보면 그 역사적 사건은 시대가 처해 있는 그 시대를 두고 새롭게 그 의미와 그 시대에 함께한 말씀이 항상 따르며 거기에 해석이 따른다. 예컨대 하나인 민족이 화해하며 만나는 사건은 그 시대가 처하여있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하느님의 의지가 있다. 민족이라는 의식이 하나의 인식으로 믿음이 생기고 여기에 따라 화해가 가능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민족’이라는 서로의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 ‘피는 물보다 강하다’는 교훈을 알게 된다. 예컨대 옛날 히브리인들은 살롬(Shalom)이라는 말로 서로 인사를 하는 말로 사용하게 됐음을 알게 한다. 여러 세기를 거쳐 오면서 고난과 수난, 억압과 비극의 쓰라린 역사 경험을 가졌지만 헤어질 때마다 ‘샬롬’외치고 기도하였음을 보게 한다. 그 예로서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자식들이 나치 강제 수용소로 끌려 갈 때 이스라엘의 부모들은 끌려가는 자식들의 귀에다 되고 ‘샬롬’하고 전쟁이 끝났을 때도 ‘샬롬’을 외치면서 만남의 기쁨을 나누었다. 이는 전 역사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전 존재가 경험할 수 있는 평화, 기쁨, 상호의존, 공존, 공생적인 서로 관계의 중심은 ‘화해’에 있음을 주목하게 한다. 이제 남과 북은 서로 화해하는 실천의지로 믿음을 경험해야 한다.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성서의 이 모든 말씀은 약속이다. 이 말씀의 약속은 크게 두 가지이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이요 그 믿음의 중심은 ‘화해’이며 이’화해’로 믿음은 가능하다. “하나 된 민족의 회복”은 오로지 ‘화해’ 뿐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5-10
  •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구주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인간 소외가 극복된 인간화의 실현에 있음을 알아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에 휴머니즘의 해석을 통해 구원 받는 구주 예수를 알고자 한다.‘사람’은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로 법에서 나타난 권리. 의무의 주체자로 상대편과 자기 자신을 인격체로 가리키며 자기 외에 남을 막연하게 부르는 말로 자연인을 가리켜 사람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물질이며 생물이고 인간에게는 마음을 쓸 줄 알아 자각할 줄 아는 존재이고 인간은 고도의 개성을 가지고 있고 자주적으로 행동 할 줄을 알아 인간이라 하여 ‘사람’과 ‘인간’의 차이를 알게 한다.우리가 잘 부르는 “아리랑”의 가사를 살피면 ‘아리랑’은 신을 지칭하고 ‘쓰리랑’은 사람을 지칭한다. 그래서 ‘아라리가 났네’는 신의 자녀들이 ‘사람으로 생겨났다’는 것이다. 성서에서 창조의 역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의 삶의 역사를 통하여 나타남을 알게 한다. 그 역사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서 이를 살펴 증언하고 그 삶으로 이 세상에서 나라를 구축하고 관계를 이루며 삶을 펼쳐 나감을 믿게 한다. 이는 나라를 건국해서 보이며 실천하는 것은 그 역사로 족보를 살펴 삶을 엮어 흥망성쇠를 보여 믿게 한다. 여기서 살펴보는 것은 인간이 사는 세상은 사람이 삶만을 위해 사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임을 알게 하는 곳이 세상이다. 그리하여 세상이란 의미는 사람들이 한이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바깥세상’인 저 ‘세상인 본래의 천상’을 빚 되게 한다. 그래서 사람이 세상을 살다가 죽으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간다’는 죽음을 말하게 된다. 이는 세상만사의 온갖 모든 일이 하늘의 뜻 아래 있음을 알게 한다.그리스도교에서 인간을 묻는 궁극적인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은 인간의 구원에 대한 진술을 처음부터 최종적 목표로 하고 출발함을 아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구원의 문제가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의 핵심이다. 인간의 존재가 유한한 자유, 그리고 소외로서의 죄를 특징으로 한다. 그리스도교가 인간을 처음부터 ‘죄인’이라고 규정하고 선포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가장 본질적인 것이 곧 ‘인간의 구원’에 대한 메시지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의 구원에 대한 메시지로서 예수는 곧 ‘그리스도’라고 선포한다. 예수가 자칭 그리스도라고 일컬어졌던 예수, 곧 실제로 역사에서 살았던 “역사의 예수”의 말과 행태에서 인간의 구원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 밖에 없다.우리가 인간의 구원을 이해하고, 삶을 영위에 살아가는 데는 그 때 그 때의 실존적 상황과 사회적 역사적인 정황이 무엇인가? 에서 알게 하듯이, 구원의 현재도 구원 자체의 휴머니즘적인 성격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즉 구원은 곤경의 삶의 정황에서 비로소 그 의미를 갖는다. 예컨대 인간이 사회의 법을 어길 때 그리고 인간 자신이 인간으로 있지 못할 때 그리고 인간 자체로 부터 떠나 소외 상태가 될 때. 그리고 ‘나’가 인간의 주체성을 빼앗기고 남의 것이 되어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해 무시와 경멸과 모욕을 당해서 인간으로 행세하지 못해 인간 자체의 소외에로 전락된 때 인간 자체의 소외 극복이라는 현대적 의미를 늘 상 삶의 현실에서 보아 온 삶의 지평을 열어가야 한다. 여기에 오늘의 인간 사회는 인간 소외의 극복이라는 구실로 인간화의 실현을 구심점으로 말하지만 그러나 구원을 죄로부터의 구원이라고 할 때 인간의 ‘자유와 해방’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인간화의 실현에 오늘의 구원이 있다면 여기에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교의 구원의 메시지는 ‘인간 부재’의 현실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임을 믿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알고 갈 것은 “하나님은 사람이 잠잠하면 돌로도 소리치게 하는 분이심을 알게 한다.”(눅19:40)“하나님은 예언자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당나귀와 같은 짐승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교의 예수만이 아니라 ‘인간’을 걱정하는 모든 사람의 예수이심을 믿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어라.”(마가복음1:15)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4-25
  • 부활의 의미
    부활은 죽었던 사람이 몸과 혼의 생명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기적을 알게 한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신약의 기사에서 나사로(요11:38)에게서 부활은 현세의 생명을 회복하는 경우나 그리스도와 같이 재림 때에 그가 일으키실 자들의 영생을 회복한 경우 다 같이 적용되었다. 그리고 성서는 가르치기를 그리스도 없이 살다가 죽은 자들에게는 부활이 몸과 혼의 영원한 형벌이 될 것이라 한다(마10:28, 요5:28,29:,행24:15). “부활” 이란 낱말이 수식을 받을 경우에는 대체로 ‘죽은 자들의 부활’이라는 표현이 쓰인다(마22:31, 눅20:37 행4:2,17:32,23:6,24:21:고전15:12이하). 신도들의 부활은 (이렇게 ‘의인’들의 부활이라 했다.)이렇게 때로는 이렇게 신도들의 부활을 ‘의인들의 부활’. ‘생명의 부활’ 여기에 반하여 불신자들의 부활을 ‘심판의 부활’(요5:29) 이라고 불의한 자들의 부활을 (행24:15)이라 했다. 이렇게 교회의 신조들 속에 자주 사용되는 ‘몸의 부활’이란 표현들은 성서에 준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초대 교부들과 신조들이 입증하는 바에 의하면 ‘육신의 부활’이라 함은 초대 교회가 도입함을 알게 한다. 이러한 표현들이 당시 신조들 속에 표현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는 오늘의 삶을 현실로 살아가는 우리 믿는 자에게 반드시 믿음의 자리를 찾아 여기에 우리의 삶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는 전능하신 창조주 우리 모두의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주이심으로 죽은 자를 일으키신 창조주 하나님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심을 믿는 믿음의 관계를 회복함에 있음을 살아있는 믿음의 행위로 알게 하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창조적 행위에 의해서 죽은 자를 일으키신 생명의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 또한 귀중한 것임을 잃지 않아야 한다. 옛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왕상17:17, 왕상17:17,왕하4:32) 창조적 행위에 의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친히 부활이요 생명이 (요11:25) 되심을 보여 주신다(고전15:20-23, 47-49 살전4:14) 전능하신 창조적 행위에 의해서 죽은 자를 일으키신 분은 바로 하나님 한분뿐이심을 믿는 생명의 삶은 부활뿐이다.여기서 우리가 살핀 것은 하나님의 독특한 삶의 행위자이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하나님의 행위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살다가 죽은 자들도 일어나게 됨을 믿는 것이고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친히 보이셨음을 의심 할 여지가 없음은 그는 살과 뼈를 가지고 있어 눈에 보이는 몸을 지니고 있어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려 보이셨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부활 이후에도 나타나 눈에 보이는 상처까지 아직 지니고 있었음을 보이시고 함께하는 삶의 태도를 증거되게 하심에 우리는 눈 여겨 보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의 현실은 죽음이 육체의 몸에 미치는 영향력까지를 포함하여 몸을 이기셨음을 믿게 한다. 여기서 우리가 믿음으로 살피어야 하는 것은 육신으로 된 진짜 몸(육신체)을 영적으로 해석하려는 일체의 입장은 성서의 가르침과는 반대가 되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누가복음24:39절에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영은 나와 같은 살과 뼈가 없느니라’에서 말씀하심을 알게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의 순간에 겪은 놀라운 변화를 배제하지 않는다. 예컨대 부활한 주님께서 마음대로 나타났다가 사라질 수 있었다는 신비한 요소가 출현 설화 속에 나온다. 예수 부활 후 주님의 인성에 대하여 성서는 그리스도께서 비록 참 하나님이셨으나 또한 한 인간이셨고 그는 여전히 인간이셨다고 말한다(딤전 2:5). 인간의 몸을 지닌 그리스도가 신처럼 무소부재하게 되었다면 그의 참 인간성은 소멸되고 승천의 실제 사건이 되지 못함을 알게 한다.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는 예수의 품격과 그 업적이 너무나도 특이함을 믿음으로 믿기에 여기에 따른 그 “부활의 의미”도 깊게 알아야 한다. 예컨대 예수의 품격과 그 업적이 너무도 특이하기에 그의 부활도 특이하며 그 의미도 깊음을 깨우쳐야 한다. 영광스러운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 능력의 가장 놀라운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권능이 자기들 속에서도 역사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해주신다는 믿음의 확신을 부활신앙으로 채워가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4-11
  • 바로 지금은
    세월은 ‘바로 지금을’ 알게 한다. 세월은 흘러가는 시간이나 지내는(사는) 형편이나 사정이나 살아가는 세상을 알게 한다. 여기에 삶의 소중한 선물은 추억이다. 추억은 삶의 흔적이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돌이켜 보면 희망, 기쁨, 실망, 슬픔, 그리움, 기다림, 깨달음, 아픔, 등의 마음을 추상(追想)하게 한다. 세상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는 가운데 삶은 짙어지고 흘러가는 시간을 통하여 그때그때의 지냈던 형편이나 사정을 알게 하며 지내온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이 빨리 흘러갔구나 하는 기억을 남기게 된다. 여기에 성서의 전도자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한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고 한다. 이는 그 때가 과거에서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의 이 순간 ‘바로 지금’이라는 때를 알게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과거의 소중한 추억만 그리며 살려한다. 행복이란 현재와 상관한다. 행복은 여행을 알게 하는 데 어떤 목적지에 이르러야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행하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이는 마음이 머무는 공간이라야 풍성하고 그 여정(旅程)이 추억의 세월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소중한 사람, 소중한 일, 시간을 보내는 일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어느 때에 가면 약속한 일들이 우리들 누구에게도 내일 여기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것은 ‘지금’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삶은 지금을 살아야 한다는 전제가 되어 있다. 지금을 산다는 것은 어떤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지금’을 사는 지혜를 알게 하는 것이다. 삶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항상 무겁다. 그리하여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음을 알게 한다. 그 때를 알려면 주어진 삶의 깊은 곳에 깊은 눈으로 낮과 밤을 흐르는 시간을 응시하고 길고 넓은 공간을 넘어 저 곳의 피안(彼岸)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10).삶이란 시간과 공간의 범주 안에서 살아간다. 여기에 성서가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는 말은 반드시 까닭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말에서 “때문”이라는 낱말은 의존명사로서 쓰인다. 즉 어떤 말 뒤에 쓰여 그 말이 가리키는 사물이 다른 말이 가리키는 일의 ‘까닭이나 원인임’을 나타낸다고 하여 ‘때’에 따라다녀 “때문”이라 우리나라 국어사전은 가리킴으로 그 뜻을 확실히 한다. 그리하여 전도자는 때를 모르고 사는 사람을 가리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다 헛되도다’고 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세월을 아끼라 함은 시간과 공간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집에서 거하는 것을 알게 한다. 시간에서 삶을 보면 시간은 간다는 것이다. 나만 가는 것이 아니고 너도 간다는 것이다. 시계에는 총 세 개의 가리키는 침이 있다. 어떤 것은 아주 빨리 가고 어떤 것은 느릿 느릿하게 가고 또 어떤 것은 가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천천히 간다. 이 침들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거치며 결국 처음에 출발한 곳을 향해 끊임없이 가는 것을 본다. 시간은 만든 이가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 건가? 하는 물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분만이 아시는 것이요 그 분의 본향을 가기위한 나그네의 여정인가? 고 생각하며 “세월은 바로 지금”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바울은 고린도 후서 6:1-10에서 믿음으로 사는 삶에 대하여 자세하게 살펴 신앙의 삶을 펼친다.세월의 의미는 바로 이 ‘때’를 (now. right. so far, today)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3-29
  • 사람됨의 구실
    옛날에 그리스 철학자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가 인간인 사람이 무엇인가? 하고 물었더니 첫 번에 두 발로 걷는 동물이라 하더니 그 다음날에는 닭을 가져와 동물은 두 발로 걷고 두 팔이 있고 털이 있어 동물이라 하더니 그 다음 날에는 두 발로 걷고 두 팔이 있고 몸에 털이 없는 원숭이를 데려와 동물이라 하더니 다음날 원숭이 털을 밀어서 가져오고 그 다음에 하는 말이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라’했다는 말을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생각해 보는 것은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서양철학은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이성’이라 한다.이성(reason)은 곧 사물을 판단하는 능력(힘)을 말함인데 참과 거짓,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을 말하기도 하고 아름다움과 추함을 식별하는 능력을 말하기도 한다. 이는 곧 사람됨의 구실을 하게한다.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모든 사람이 태어 날 때부터 평등하게 갖고 있는 이성능력을 ‘양식’ 이를 또한 ‘자연의 빛’이라고 표현한다. 칸트의 말을 빌리면 본능이나 감성적 욕망에 기초한 행동에 반해서 의무 또는 당위(sollen)의식에 의해서 결정되는 행위가 ‘이성’이라 하는 것을 알게 한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어원은 옛말로 하면 ‘구실아치’다. 요사이 연예인들이 공인이라 자처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는 바른 용법이 아니다. ‘집사람, 안사람’은 자기 아내를 겸손하게 일컫는 말이다. ‘댁사람’은 큰 살림집에 친밀하게 자주 드나드는 사람이다. ‘새사람’은 신인이란 뜻 외에 새로 시집온 사람을 손윗사람이 이르는 말이다. 제3자는 신부를 ‘새색시’라 한다. ‘가욋사람, 군사람’은 정원(定員) 이외의 사람이란 말이다. 이와는 달리 ‘상사람, 손윗사람, 손아랫사람, 윗사람, 아랫사람’은 사회적 계층과 관련된 지칭이다. ‘상사람’은 상민(常民) · 상인(常人)으로, 양반(兩班)에 대가 되는 말이다. 이는 조선조 중엽 이후 평민을 일컫던 말이다. ‘손윗사람’이나 ‘손아랫사람’은 수상자(手上者) 또는 수하자(手下者)를 일컫는 말로, 나이나 항렬에 따라 구별하는 지칭이다. ‘윗사람, 아랫사람’은 ‘손윗사람’이나 ‘손아랫사람’이란 뜻 외에 지위의 높낮이까지 나타낸다. 사람은 또한 사람의 됨됨이, 인품 등에 따라 구별된다. ‘난사람, 숫사람, 큰사람, 홑사람, 홑벌사람’이 그것이다. ‘난사람’은 출중(出衆)한 사람, 남보다 뛰어나게 잘난 사람이란 말이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그리스도교의 통찰은 인간의 죄와 고통이라는 실재적이고 현상적인 신학적 주제들로 알게 한다 .예컨대 인간들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인간의 삶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섭리 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은 무엇이고 어떻게 다가오는지 그리고 그 죽음과 종말을 인식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또한 이는 어떤 상태인지에 대한 물음들로 발전한다.인간을 하느님의 형상대로 빚어내셨음을 감사하고 존재의 고통과 환희 그리고 무자각 속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인간에게 창조주의 형상을 내어주심은 인간을 포기(파괴)할 수 없다는 하느님의 의지이고, 끊임없이 삶에 희망을 주시는 존재로 거듭나게 하심이라 믿는 것이다. 생명 중에 가장 완벽한 사람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그래서 어느 인간도 흉내 낼 수 없는 형상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인간 예수 그리스도. 그의 인간의 삶은 그래서 가장 고통스러운 인간의 길이었음을 성서는 말하고 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인간 때문에 완성되지 못하고 지속되고 있는 하느님의 창조 과정 속에 인간으로서 가장 완벽한 하느님의 형상은 끊임없이 인간에게 요청하고 있다. 인간의 죄와 악으로 점철되어진 피조세계의 신음소리는 ‘하느님의 형상’을 매개로 유한자 인간과 무한자 하느님이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통해 감각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피조세계의 신음소리에 가장 민감했던 인간 그리스도의 삶은 고난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인간은 제 십자가를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삶의 입장 정리를 해야 한다.‘사람’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어원은 어디 있는가? ‘사람’의 옛말은 ‘사’으로, 이 말은 ‘살다(生)’의 어간 ‘살-’에 접미사 ‘’이 결합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을 ‘살아 있는 것’, 곧 하나의 생명체로 파악했다. 그리고 사람은 또한 사람의 됨됨이, 인품 등에 따라 구별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3-21
  • 생명과 사랑의 관계
    태어나지 얼마 안 된 쌍둥이가 있었는데 왼쪽의 아이는 몸이 약하여 작고 작은 인큐베이터 안에서 혼자죽음을 맞이했다. 간호사가 이를 너무 안타깝게 여겨 다른 쌍둥이를 인큐베이터 안에 같이 넣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쌍둥이가 죽은 쌍둥이의 어깨의 힘없이 손을 올리며 안아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왼쪽쌍둥이는 맥박, 심장, 체온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하는 실제적인 병원의 치료 과정을 알게 한다. 이와 같이 생명의 세계는 모계사회로 형성되며 지구생명도 마찬가지이다. 지구생명은 태양으로부터 햇볕을 받아서 이렇게 많은 개체 생명들을 탄생시킴은 물론 성장에 이르기까지 양육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태양은 생명을 생성시키는 양기로, 땅은 양기를 받아 생명을 잉태하고 기르는 음기로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주변의 달과 별들은 보조적인 기운으로 이웃처럼 그 생명의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이 온전한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햇볕도 공기, 물, 땅과 함께 생명의 기본요소을 이룬다. 땅의 생명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태양의 햇볕과 공기, 그리고 물의 도움을 받아 상호작용을 함으로 땅의 생명을 형성할 수 있는 그 근거와 그 이 역할은 사랑의 유기체로서의 그 힘을 알게 하는 것임을 알게 한다. 예컨대 그 생명의 기능으로서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공기, 물, 땅이 유기적인 사랑의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즉 그 유기적인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첫째 다른 생명들과 공기는 자신에게 맞는 여러 형태의 영기가 고유한 성질을 형성해 낸다는 것과 두 번째 물도 갖가지 모습으로 변하면서 생체에너지를 생성하는데 결정적인 기능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땅은 생명의 근거인 동시에 상실로서 여러 가지 형태의 생명들이 생성할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도록 토양을 만들어 생명의 다양성을 서로 확보해 준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들이 사랑의 역할로서 아름다운 땅의 생명을 창조해 내는 데 서로의 그 사랑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물 속에 투영시키고 생명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찾게 하신다. 이렇게 창조하신 만물을 보면 생명은 모채를 통해 잉태하고 낳는 과정이 사랑으로 이어지며 생명의 잉태를 보게 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생명이 근거가 되고 땅은 개체생명의 모체로서 생명의 산실의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모든 생명들은 이 땅에서 상호교류하며 소통하며 평등하게 누릴 권한과 성장하는 기회를 4계절을 통해 똑같이 제공받는다. 이렇게 땅은 생명의 생성과정에서 하늘의 창조질서를 따라 생명을 지속하고 유지한다.세상에 존재하는 진리 가운데 만고불변의 법칙은 “생명만이 생명을 생성시킬 수 있는 생명작용이 가능하다는 것과 생명들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 또한 과학적인 사고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과학에서 무생명으로 보았던 햇빛, 땅, 물, 공기 등도 본질적으로는 생명력을 보유한 생명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생명작용에 의하여 생명들이 생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질서 회복에 앞장서서 생태계의 위기를 보며 삶의 환경을 살리는 실천이 요구됨도 알게 한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 하실 때 그 안에는 질서가 있었고 하나님의 주권이 있었고 하나님을 향한 생명의 경외(敬畏)가 있었음을 알게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세계는 처음에는 선했으나 인간들이 그 위에 군림하고 억압하는 타락과 그 죄과로 심판을 받는 점을 알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은 모든 생명 관계 안에 일하고 섬기며 책임지는 청지기적 존재로서 삶을 영위하여야 하며 생명은 서로 존중하는 상호적인 관계를 갖게 함을 알아야 한다.사랑은 생명을 나누는 것이다. 생명이 무생명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 한 알의 씨가 죽어 많은 씨를 낳게 한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생명주심을 알게 한다. 생명 받은 우리가 생명 없는 사람에게 생명을 나누는 것이다.사랑은 존재와 존재가 서로 이끌리는 것이다. 사랑만이 살아 있는 존재를 결합시켜 그 존재들을 완성하고 충족시킨다. 그러므로 사랑은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큰 힘을 가졌으며 우주 에너지 가운데에서도 가장 신비로운 것이다. 결국 사랑이란 하나님이 창조 과정에서 모든 의식 체계에 부어 주신 이끌림이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실재에 참여하며 거기서 하나님의 실재를 끌어들인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이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3-07
  • ‘사람’과 ‘사랑’
    사람을 말한다면 생각과 말을 하고 기구를 만들어 쓰며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이라 하며 사람의 몸에서 뻗어 나온 두 쌍의 다리 중 한 쌍의 다리를 사용해 허리를 꼿꼿이 펴고 걷는 직립 보행하는 동물이라 하기도 한다. 본래 사람은 어느 한 곳에서 태어나 일정한 품격이나 자격을 갖추며 사람을 기르며 사람이 되게 하고 사람의 됨됨이나 그 성질이 사람으로서 해야 할 노릇으로 삶의 가치로 사랑을 맺으며 사랑 노릇을 하는 사람다운 사람을 일컫는다. 원래 '사람'과 '사랑'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서로 말이 같지만 이 관계는 서로 미묘하고도 확실하게 다름을 알게 한다. 그 차이는 느낌의 변화가 있다. 예컨대 '사람'과 '사랑'이라는 말을 발음하면 그 들리는 의미는 그 진동이 전달된 뇌와 심장, 그리고 우리의 의식(이성), 그리고 마음은 이 둘 사이에는 큰 차이를 두고 인식하게 된다. 즉 '사랑'이라는 발음을 마지막에 무뚝뚝하게 발음하면 '사람'이라는 '사람'이 되지만, '사람'이라는 발음을 마지막에 부드럽게 발음하면 '사랑'이 된다. 이는 '사람'이 부드러워지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이 되지만 사랑이라는 발음을 무뚝뚝하게 하면 '사람'으로 머무르게 됨을 알게 한다. 이러한 사실은 그 존재의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한다. 이러한 차이는 서로를 다른 하나의 차이가 서로를 다른 하나의 의미로 알게 하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3장1절에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가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하는 말씀을 알게 한다. 그런데 흔히 사람들은 태어났으니 산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죽지 못해 산다고 한다. 그렇다면 산다는 것은 그냥 운명일 뿐인가? 태어났으니 살고 죽음이 아직 오지 않았으니 산다는 말인가? 운명적으로 말한다면 그렇게 말 할 수 있다. 이는 생물학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나름대로 이유가 될 수는 있겠지만 실로 생각해 보면 심층적으로 사람에게는 욕심이 있다. 이 인간의 욕심은 본능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욕심을 부인하거나 억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기초적인 작용은 욕심에서 부터 나온다. 그렇다면 사람이 삶을 사는 이유가 이 욕심에서 부터 나온다. 여기에 삶의 본질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보편적 본능과 성서가 가리키는 사람에 대하여 가장 우선적이고 근본적인 요소는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의 한 부분이고 사람의 삶에 존재와 그 지속성을 위해서 사람의 마음 중심에는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한다. 생각 할 수로록 사람은 역시 피조물이며 따라서 의존적이고 우연한 존재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은 인간의 피조적 삶이 그 유한성, 개체성, 그리고 시간성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선한 것임의 근거를 갖게 하는 것이다. 성서는 사람이 유한한 존재이고 태어나고 죽으며 이 삶이 고통과 고난을 수반한다는 성서의 확증은 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을 알게 한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2:7),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창3:19), "사람이 제아무리 영화를 누린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 미련한 짐승과 같다" (시49:12). 신약성서에서도 바울이 이러한 견해를 "로마서 5:12에서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느니라" 한다. 이러한 성서에서 사람의 삶에 의미를 둔 것은 죽음은 피조적 삶에 부여된 하나님의 질서이고 죄를 통해서 회개하는 구원을 알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피조적인 존재임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가 사람의 구원이 무엇임을 믿음으로 깨닫게 한다. 여기서 사람의 특별한 존엄성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을 알게 하여 피조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존재를 깨우치게 한다. 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는 사람의 독특성의 한 면으로 순종과 불순종,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을 행 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를 알게 한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 또는 하나님과의 약속에 연관된 사람의 책임을 지니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2-22
  • 하나님의 형상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그리스도교의 통찰은 인간의 죄와 고통이라는 실재적이고 현상적인 신학적 주제들로 알게 한다 .예컨대 인간들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인간의 삶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섭리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은 무엇이고 어떻게 다가오는지 그리고 그 죽음과 종말을 인식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또한 이는 어떤 상태인지에 대한 물음들로 발전한다.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빚어내셨음을 감사하고 존재의 고통과 환희 그리고 무자각 속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인간에게 창조주의 형상을 내어주심은 인간을 포기(파괴)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의지이고, 끊임없이 삶에 희망을 주시는 존재로 거듭나게 하심이라 믿는 것이다. 생명 중에 가장 완벽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래서 어느 인간도 흉내 낼 수 없는 형상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인간 예수 그리스도. 그의 인간의 삶은 그래서 가장 고통스러운 인간의 길이었음을 성서는 말하고 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인간 때문에 완성되지 못하고 지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 과정 속에 인간으로서 가장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은 끊임없이 인간에게 요청하고 있다. 인간의 죄와 악으로 점철되어진 피조세계의 신음소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매개로 유한자 인간과 무한자 하나님이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통해 감각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피조세계의 신음소리에 가장 민감했던 인간 그리스도의 삶은 고난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인간은 제 십자가를 지고 그 고난에 동참해야 하는 것이며,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음의 사명이 아닌가 싶다.이러한 현상을 인식하게 되는 것은 컴퓨터를 이용하는 형상인식에는 문자의 특징을 형상화해두고 손으로 쓰거나 인쇄된 문자를 읽어 이것과 비교하여 어떤 글자인가를 판별한다. 마찬가지로 성문(聲紋)을 형상화하면 음성을 인식할 수 있고 지문을 형상화하면 범죄수사에 유용하게 이용된다고 한다. 이 분야에서 가장 일찍 실용화된 것은 손으로 쓴 숫자를 읽는 우편번호 자동판별기이다. 또 활자로 된 글과 또박또박 쓴 필기체의 형상인식은 이미 실용화 단계로 들어섰다. 이미 시판된 컴퓨터 모니터 중에는 화면에 전자 펜으로 글을 쓰면 내장된 글자인식 장치가 글을 판별하여 건반으로 타자한 것처럼 기억 장치에 입력할 수 있다. 한글의 경우도 획마다 또박또박 쓰는 경우에는 90%의 인식률을 가진 한글필기인식 방식을 이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인공지능연구센터에서 개발했다고 한다. 또한 인간의 음성은 변화하는 가청진동수의 형상으로 나타낼 수 있어 음성인식 방식은 이것을 컴퓨터에 내장된 음질과 낱말의 소리의 형상과 비교 판별하여 인식하게 된다고 한다. 음성인식 방식은 우선 전화번호 안내에 이용될 것이며, 다음 단계는 인간의 구술(口述)을 컴퓨터 문장으로 옮기는 받아쓰기에 이용된다는 것이다. 과학 기술의 능숙한 기능은 이미 근래 들어 형상인식은 하나의 시스템으로 구축되어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이고 있다.‘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자기 초월의 능력을 가리킨데 대해서 최초의 신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이다. 그는 인간의 능력은 하나님을 가리킬 뿐 하나님을 직접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한다. 이는 인간은 자기 초월의 힘으로서의 그 정신은 사고의 능력으로서의 이성(logos)을 배제하지 않는 것을 의미함에 유의 한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하게 하는 것은 로고스(logos)가 하나님의 형상을 의미한다고 할 때 이것은 본래 단순히 합리주의적인 이성에 국한하기보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말한 우주적 이성, 보편적 이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이 우주적 이성에 근거한 데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칼 빈의 “그리스도교의 강요”에 의하면 칼빈은 “영혼의 이성” 속에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인간의 자기 초월성과 함께 의지의 자기결정성을 포함시킨다는 점에 유의한다. 또한 여기에 루터는 그의 “창세기 주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영혼, 기억, 정신, 지성, 그리고 ‘의지의 힘 이상의 것’이라 말하고 있음에 유의하기 바란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오늘의 인간은 타락 이전의 아담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있으며 여기에 신학적인 논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사실로 인정하는 귀결로 삼아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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