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4(화)
 

한국교회와 함께 가려는 자는 누구나 ‘이단’ 족쇄 풀어 같이 가야
이단감별사들에 ‘이단대책비’ 지원한 기성교회 목사들도 교계 분열에 책임 있어



한국교회 이단시비, ‘이단대책비’가 문제다
한국교회는 매달 수천만원씩 ‘이단대책비’를 거두어 먹는 직업적 이단감별사들의 무분별한 이단시비가 교계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칼운동을 분열시키고, 또 분쟁 중인 개교회에 개입해 교회를 회복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단논쟁을 건강한 교회를 위한 교리와 신학의 발전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특정인이나 특정교회를 죽이는 일에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한 번 이단은 영원한 이단’이라며, 회개도, 정통교단의 바른 신학교육을 받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사소한 해석상의 차이만 있어도 이단으로 매도하고, 지적된 잘못을 바로 잡고 한국교회와 함께 가고 쉽다는 성명을 발표해도 받아주지 않는다. 그 이유가 바로 직업적 이단감별사들이 자신들의 물질적 이익을 챙기기 위한 방편으로 이단시비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직업적 이단감별사들은 ‘이단대책비’니, ‘강의료’니 하며 한달에 수천만원씩 돈을 거둬들인다. 기성교회는 이들이 순수하게 진정으로 이단대책을 위해 애쓰는 줄로 알고 있다. 지금 교계에 이단시비가 난무하는 데는 정통 기성교회 목사들의 이단감별사들에 대한 ‘이단대책비’ 지원이 크게 한몫하고 있다. 왜 멀쩡한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이들에게 속고 있는지 이해가 안된다. 이로인해 이단이 하나라도 줄어들거나 기성교회가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단이 양산될 뿐이다.

한국교회의 ‘진짜이단’과 ‘가짜이단'
한국교회에는 두 종류의 ‘이단’이 있다. 하나는 통일교나 안상홍증인회 하나님의교회, 증거장막성전 신천지교회 등과, 여기에서 떨어져 나와 만들어진 분파 등 교주를 신격화 하는 교주우상주의가 있는 집단이다. 이들은 두말할 필요없이 분명히 이단이다. 어떤 사람이 이 시대에 새로운 예수로  왔다거나, 그 집단의 지도자를 재림예수나 보혜사 등으로 믿는 것이 그것이다.
또 다른 이단은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근본적으로 보편적 교회의 성경해석과 달리하는 교리적 이단이다. 교리적 이단은 칼케톤 신조나 콘스탄티노플 신조 등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와 다른 해석을 갖고 있는 경우이다.
이외에 사소한 성경해석의 차이나 신학적 설(說)을 이단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한국교회는 이단에 대한 이러한 구분을 명확히 하지 못하고 무분별하게 이단시비를 하다보니 “진짜 이단”이 아닌, 정치적으로 “억울한 이단”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 밖에서는 절대로 이단이라 할 수 없는 자들도 이단으로 정죄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단논쟁으로 인한 교계의 피해가 심각하다. 교계가 하나로 뭉쳐 안티기독교로 대변되는 기독교 공격세력과 진짜이단에 대한 강력한 대처를 해야 하는데, 교계 내부가 서로 불신하고 있으니 효과적인 대처가 불가능하다.
직업적 이단감별사들은 오히려 이런 상황을 즐긴다. 그래야만 교계가 이단 문제에 경각심을 갖고 자신들을 불러다 강의도 하고, 후원금도 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편적 기독교에서 떠난 “진짜 이단”은 어떠한 경우에도 돌이키지 않는다. 자기네가 가진 종교적 신념과 교리가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설혹 옳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할지라도 세력이 어느 정도 규합되면 그 조직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고, 비록 섹트일망정 그들 조직 내에서 행세할 수 있기 때문에 쉽사리 그 추종세력을 포기하지 못한다. 이들은 한국교회의 일천만 기독교인들이나 세계교회의 수십억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가려하지 않고 자기네 끼리 노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사소한 신학적 견해로 이단으로 몰린 “억울한 이단”들은 기회만 주어지면 언제든지 한국교회와 함께 가겠다는 입장을 밝힌다. 그런데도 소위 정통파로 자처하는 한국교회가 다수의 이름으로 이들의 합류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을 살리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일을 더 즐기는 인간의 못된 성품에 기인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금 다락방 전도총회는 정통 개혁파에 합류해 건강한 교회로 성장해 가고 있다. 그런데도 이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다”고 보고하자, 즉석에서 “금하지 말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38-40)고 했다. 기독교의 기본교리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아주 사소한 차이를 문제 삼아 이단으로 내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한국교회 이제 좀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
 
살리는 쪽으로 가야 한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단시비는 아주 단순한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단시비를 하는 자들은 그들이 자신들과 ‘무엇이 다른가’에 관심을 갖고 열심히 ‘다른 것’을 찾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와 ‘무엇이 같은가’를  찾는다면, 그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형제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이제 한국교회가 그들의 신학과 신앙을 다시 검증해 보고, 과연 그들에 대한 이단정죄가 옳았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억울한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묶은 족쇄에서 풀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형제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피흘려 대속한 주의 백성을 누가 무슨 권리로 한국교회 밖으로 내몬단 말인가.
언론이 무분별한 이단시비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만 해도 이단감별사들은 ‘이단을 옹호한다’, 또는 ‘이단을 이롭게 한다’며, 이단문제는 자신들만이 취급할 수 있는 특권으로 아는 직업적 이단감별사들이 문제이다. 이들은 순전히 돈벌이를 위해 이단연구를 하면서도 마치 그것이 한국교회를 지키는 자신들의 사명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런 착각 속에 이들이 휘겡이 춤을 추고 있는 마당에, 과연 누가, 어느 누가 이단으로 몰린 사람들을 변호하기 위해 나설 수 있겠는가. 나서는 순간 이단감별사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아무개가 이단을 풀려 한다’고 온갖 음해와 선동을 다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자해지(結者解之)이다.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한 교단에서 나서는 것이 옳다. 과연 우리가 이단으로 정죄한 인사들이 진짜로 이단인가, 아니면 ‘우리 교회 교인 한두 사람이 그 집단으로 옮겨 갔다’는 사소한 시기심과 선동에 의해 억울하게 이단으로 몰린 것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내 일’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나서려 하지 않는 세태에, 과연 그들을 묶은 교단이나 연합단체에 이런 일에 사심없이 나설 수 있는 양심적 지도자가 있겠는가. 이는 기대하기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공신력도 없는 어떤 교계 단체가 나선다고 될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반드시 살리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당위론적이다. 한국교회를 살리기 위해 이 일에 나설 수 있는 용기있는 지도자가 요구된다.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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