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국교회는 지난 2013년 말, WCC 제 10차 총회를 개최하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경험을 하였다. 무언가 우리 한국교회의 교회론에서 빠진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저마다 교회를 위한 교회에 집중하다보니 성령론적인 교회로서의 모습을 채우지 못한 것이다. ‘예수중심, 교회중심, 교역자중심’ 이란 표어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순수한 유기적인 몸으로서의 시스템을 갖춘다하기 보다는, 세상이 이미 갖추고 있는 익숙한 구조의 시스템을 선호함을 내포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항시 가시적 존재가 목회자이다 보니, 목회자 중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였던 것이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도읍하여 성전이 건축된 이후, 400년간 지속된 예배의 예전이나 사제들의 사역은 진부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시피 모세가 이집트에서 자신의 백성을 탈출 시킬 때에, 이집트 제국이 바탕하고 있는 종교가 거짓임을 밝혀내야 했고, 그 제국이 터를 둔 그 바탕마저도 거짓의 기반 위에 형성된 제국임을 만민들에게 들어내야 했던 것이다. 제국이 세력을 확장하고 정권의 권력 유지를 하기위해서, 그들의 백성들 가운데에 귀족이나 황족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노예 계급으로 전락되었고, 대다수의 백성들이 왕의 무덤과 전승 기념 도시를 세우는 데에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서 이집트 제국의 종교는 권력을 뒷받침하는 시녀에 불과하였고, 사제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부와 권력에 편승하는 데에 시간을 모두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야훼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억울하게 종살이를 하는 백성들을, 하나님의 기업으로서의 위치에 자리매김 하도록,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모세는 하나님과 호흡을 같이 하며, 자신의 백성들을 일깨우고 움직이게 하는 데에 높은 공감대를 끌어내었다. 이집트인들마저도 모세 편이 되어 주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약자의 집에 곡소리가 나는 법이었는데, 이제는 그 신음소리가 이집트인들의 진영으로 옮겨 붙고, 이스라엘 진영에는 신뢰가 공고하게 되고, 역사적인 야훼의 새로운 공동체로 출애굽하게 된 것이었다. 모세가 절제 있게 날린 열 가지 하나님의 능력 펀치는 효율성이 극대화되어서, 마침내 홍해를 건너게 되면서 승리의 음악과 춤의 잔치가 열린다.
에스겔이 만난 다윗 이후의 중앙성전교회는 이집트의 제국의 종교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권력에 편승하여서 부귀와 영화에 몰두한 사제들 집단은, 결국에 가서는 나라를 병들게 만들었고, 타락한 다윗 왕조마저도 이웃 강대국의 빗자루에 쓸려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에스겔은 이런 역사적 전환점에서 새로운 통치자에 대한 꿈은 물론, 새로운 교회를 꿈꾼다. 그가 에스겔서 47장에 새롭게 보게 된 교회는 진부한 세상 여느 종교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성전 문지방에서부터 물이 솟아나서 흐르게 되는데, 그 물이 강을 이루어서 동서남북으로 흘러 나간다. 동편 사해바다로 강줄기가 흘러 나가더니, 지금까지 죽음의 바다였던 그 바다에 온갖 물고기가 사는 생명의 장을 이루는 것이었다. 남쪽으로 흘러내린 물은 광야에 강을 내어서 광야를 적시고 온갖 과일나무와 어부들이 그물을 치고 사는 생명의 땅을 일궈내는 것이었다.
이 붕괴하는 국가의 벼랑 끝에서 본 에스겔의 환상이란, 생수의 강을 흐르게 함으로써 죽은 나라를 회복시키게 하는 그림이었다. 요엘이 그동안 하나의 지도자에게만 볼 수 있던 불꽃을 역발상으로, 그의 백성들 각 사람의 머리 위에 불꽃이 붙음으로 인해서, 개개인 모두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고, 하나님과 친밀하여지고, 하나님과 즉각 소통되고, 이웃에게 화평과 사랑과 신뢰와 희망이 넘쳐나고, 서로가 서로에게 열려서 함께 나아가는 교회를 꿈꾸었듯이, 에스겔은 생수의 강이 흘러나는 교회를 그려냈던 것이었다.
교회에 생수의 강이 흘러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만약 우리가 우리의 교회에 생수가 솟아서 사해 바다로 흘러가고, 메마른 광야로 흘러가는 꿈을 꾸었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 한국교회는 복음서 기자들이 그렇게 경계하던 네 가지 시험의 산을 넘어서질 못하였다. 어디 그 뿐이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우리 주님의 교회와, 그 교회의 사역자들이 마땅히 갖추었던, 성령의 능력과 은사들을 등한히 하였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동행하며, 하나님의 신과 함께 호흡하는 훈련을 간과하였던 것이다. 늦은 감이 없진 않으나 이제라도 바삐 성령으로 재무장되어야 할 것이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도읍하여 성전이 건축된 이후, 400년간 지속된 예배의 예전이나 사제들의 사역은 진부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시피 모세가 이집트에서 자신의 백성을 탈출 시킬 때에, 이집트 제국이 바탕하고 있는 종교가 거짓임을 밝혀내야 했고, 그 제국이 터를 둔 그 바탕마저도 거짓의 기반 위에 형성된 제국임을 만민들에게 들어내야 했던 것이다. 제국이 세력을 확장하고 정권의 권력 유지를 하기위해서, 그들의 백성들 가운데에 귀족이나 황족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노예 계급으로 전락되었고, 대다수의 백성들이 왕의 무덤과 전승 기념 도시를 세우는 데에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서 이집트 제국의 종교는 권력을 뒷받침하는 시녀에 불과하였고, 사제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부와 권력에 편승하는 데에 시간을 모두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야훼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억울하게 종살이를 하는 백성들을, 하나님의 기업으로서의 위치에 자리매김 하도록,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모세는 하나님과 호흡을 같이 하며, 자신의 백성들을 일깨우고 움직이게 하는 데에 높은 공감대를 끌어내었다. 이집트인들마저도 모세 편이 되어 주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약자의 집에 곡소리가 나는 법이었는데, 이제는 그 신음소리가 이집트인들의 진영으로 옮겨 붙고, 이스라엘 진영에는 신뢰가 공고하게 되고, 역사적인 야훼의 새로운 공동체로 출애굽하게 된 것이었다. 모세가 절제 있게 날린 열 가지 하나님의 능력 펀치는 효율성이 극대화되어서, 마침내 홍해를 건너게 되면서 승리의 음악과 춤의 잔치가 열린다.
에스겔이 만난 다윗 이후의 중앙성전교회는 이집트의 제국의 종교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권력에 편승하여서 부귀와 영화에 몰두한 사제들 집단은, 결국에 가서는 나라를 병들게 만들었고, 타락한 다윗 왕조마저도 이웃 강대국의 빗자루에 쓸려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에스겔은 이런 역사적 전환점에서 새로운 통치자에 대한 꿈은 물론, 새로운 교회를 꿈꾼다. 그가 에스겔서 47장에 새롭게 보게 된 교회는 진부한 세상 여느 종교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성전 문지방에서부터 물이 솟아나서 흐르게 되는데, 그 물이 강을 이루어서 동서남북으로 흘러 나간다. 동편 사해바다로 강줄기가 흘러 나가더니, 지금까지 죽음의 바다였던 그 바다에 온갖 물고기가 사는 생명의 장을 이루는 것이었다. 남쪽으로 흘러내린 물은 광야에 강을 내어서 광야를 적시고 온갖 과일나무와 어부들이 그물을 치고 사는 생명의 땅을 일궈내는 것이었다.
이 붕괴하는 국가의 벼랑 끝에서 본 에스겔의 환상이란, 생수의 강을 흐르게 함으로써 죽은 나라를 회복시키게 하는 그림이었다. 요엘이 그동안 하나의 지도자에게만 볼 수 있던 불꽃을 역발상으로, 그의 백성들 각 사람의 머리 위에 불꽃이 붙음으로 인해서, 개개인 모두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고, 하나님과 친밀하여지고, 하나님과 즉각 소통되고, 이웃에게 화평과 사랑과 신뢰와 희망이 넘쳐나고, 서로가 서로에게 열려서 함께 나아가는 교회를 꿈꾸었듯이, 에스겔은 생수의 강이 흘러나는 교회를 그려냈던 것이었다.
교회에 생수의 강이 흘러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만약 우리가 우리의 교회에 생수가 솟아서 사해 바다로 흘러가고, 메마른 광야로 흘러가는 꿈을 꾸었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 한국교회는 복음서 기자들이 그렇게 경계하던 네 가지 시험의 산을 넘어서질 못하였다. 어디 그 뿐이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우리 주님의 교회와, 그 교회의 사역자들이 마땅히 갖추었던, 성령의 능력과 은사들을 등한히 하였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동행하며, 하나님의 신과 함께 호흡하는 훈련을 간과하였던 것이다. 늦은 감이 없진 않으나 이제라도 바삐 성령으로 재무장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