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그를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가르치시고, 계속하여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3)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디도에게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되었다고 했다(디도 3:5). 중생이란 씻음의 요소가 있으며, 요한 15:3에 의하면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셨다”(엡 5:26)는 구절에서 “물과 말씀”, “씻는다는 말과 거룩하게 한다”는 말이 서로 병행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물”은 말씀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말씀과 성령으로 새롭게 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은 말씀과 성령은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말씀과 성령은 마치 동전의 앞뒤와 같아서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 성령이 역사하고,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일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이 우리를 거듭나게 한다. 그러나 말씀과 성령이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인만큼 거듭남의 역사는 또한 말씀의 역사라고도 말한다. 베드로는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곧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이다.”(벧전 1:23)라고 가르친다. 베드로는 일찍이 성령의 체험을 많이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말씀을 순종하는 가운데 말씀의 체험을 많이 했다(눅 5:1-11; 요한 6:68-69)). 그러한 베드로가 거듭남의 역사를 성령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라고 말한다. 말씀이 사람을 거듭나게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말씀은 우리 성도들의 성화를 관장하는 일을 한다. 거듭난 사람은 마치 모태에서 갓 태어난 어린 아이와 같아서 어머니의 젖을 먹고 성장해야 한다. 성령은 바로 이 일을 주관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화는 성령 뿐만아니라 말씀도 한다고 가르친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주는 고별사 가운데 “이제 나는 너희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니, 그 말씀이 너희를 굳게 세우고 거룩함을 입은 모든 이들 가운데 너희에게 유업을 줄 것이다.”(행 20:32) 라고 말한다. 말씀이 성도들을 굳게 세우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디모데에게 쓰는 편지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한다.”(딤후 3:15-16)고 쓰고 있다.
이 같은 말씀의 중생과 성화의 사역은 시편 19:7-11에도 잘 나타나 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생시키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어리석은 사람을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당하여 마음을 즐겁게 하며, 여호와의 명령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한다.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토록 지속되고, 여호와의 법도는 진실하며 한결같이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 곧 송이 꿀보다 더 달다. 또 주님의 종이 이로 인하여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다.”
말씀의 완전성, 확실성, 정당성, 순수성, 정결성, 진실성이 사람의 영혼을 소생시키고, 사람을 지혜롭게 하며,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사람의 눈을 밝게 한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도 성령의 성화 사역을 말씀 사역으로 가르치고 있다. 물론 말씀에 대한 성경의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 인간들의 구원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전제한 것이다. 성령은 성령대로 자유롭게 일하시는 분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우리는 말씀과 성령의 관계와 그 역할을 살펴 보았다.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이란 성령이 충만한 생활이다. 우리는 어떻게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성령을 부릴 수 없다. 우리는 성령을 오게 할 수도 없고, 가게 할 수도 없다. 설령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서 우리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성령은 예수님 말씀대로 그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요한 3:8).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일하시게 하는 한 가지 길이 있다. 말씀을 내 안에 충만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말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성령께서는 내 안에 임하시고, 내 안에 거하시고, 내 안에서 일하시어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친다면 말씀과 성령은 마치 바늘과 실의 관계와 같아서 성령은 말씀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시고, 사람을 성숙하게 하며, 많은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풍성하게 차고 넘쳐야 한다. 바울을 빌립보 성도들에게 “너희가 생명의 말씀을 붙들어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하게 하라.”(빌 2:16)고 권고한다. 우리가 성도로서 그리스도 앞에 서는 날까지 해야 할 일이 바로 생명의 말씀을 붙잡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며(시 1:2), 말씀을 내 뱃속에 가득 채워야 한다(겔 3:3).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말씀이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미국의 유명한 개혁주의 신학자 로벗 레이몬드 교수는 이렇게 가르친다.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 거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 거한다는 것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 분리하거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성령으로부터 분리해서도 안된다.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한 말씀과 함께 한 사역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성령에 성령과 함께 하신다.” (Robert I. Reymond, A New 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ain Faith, 766. quoted in 손석태 『성령세례 다시 해석한다』 서울: CLC, 2016) 135-36.)
바울은 에베소서 5:18에서 “너희는 술에 취하지 마라. 그것은 방탕한 것이니 도리어 너희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라.” 고 명한다. “성령으로 충만하여라"라는 말은 능동형이 아니라 수동형이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은 나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충만한 가운데 성령께서 임하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충만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말씀으로 충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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