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영화의 전설적 명배우 커크 더글러스가 지난 2월5일 103세의 장수를 누리고 영면하였다. 그의 장남으로서 부친 못지않게 영화계에서 맹활약을 해온, 오스카(아카데미)상 수상자이기도 한 마이클 더글러스를 뒤에 남겨두고 표표히 현세를 떠나갔다. 이 기회에 배우 커크 더글러스에 대하여 좀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인들(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들에 대한 대박해, 소위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보다 더 이른(앞선) 시기에 러시아인들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들에 대한 대박해, 소위 포그람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홀로코스트만큼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러시아에서의 포그람도 유대인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큰 박해였고, 그것을 참아내기 힘들었던 그들 중의 일부는 고향을 찾아 떠나는 연어처럼 옛 고향(고국) 땅으로 되돌아갔으며, 또 일부는 미국 땅으로 이민을 떠나버린 사람들도 상당수였다.
영화 <OK 목장의 결투>로 잘 알려진 미국 서부극의 명배우 커크 더글러스는 러시아인들의 포그람(유대인 박해)에 견디다 못해 미국 땅으로 이민을 떠나버린, 러시아계 유대인의 아들로 뉴욕(인근 작은 마을)에서 1916년 태어났다. 청소년 시절 그는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그리고 학비 조달을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신문배달은 기본이고 노점상, 정원사, 경비원… 등 닥치는 대로 이일 저일, 여러 일터들을 전전했던 것이다.
그는 레슬링 선수 생활로 몸을 단련했고, 그 스포츠를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이용해 생활비 또는 학비를 조달하는 데 일정액 보태어 쓰기도 했다. 어떻든 그는 “젊어 고생은 돈 주고도 못 산다”는 청년 때부터의 그 고난의 삶을 자연적으로 터득하게 되었고, 거기에다 신체적 단련까지 곁들여 탄탄한 몸매와 강인한 정신력을 함께 구비한 채 자신의 앞날(은막생활)에 대비해 왔다고 보겠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스파르타쿠스>란 영화의 주인공인 노예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야무지고도 강인한 모습은 벌써 청소년 때부터 자기단련을 통해 그가 이미 습득해 지녔던 그다운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어느 영화학교에 들어가 배우로서의 기본훈련을 마친 뒤 30세란 늦은 나이에 영화계에 투신하게 된다. 일생 동안 무려 90여 편에 가까운 영화에 출연했다고 하는데, 그것들 중에서 특히 그의 대표작들로 일컬어지는 <OK 목장의 결투>와 <스파르타쿠스>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케빈 코스트너의 서부극 <늑대와 춤을>이 나오게 되면서 할리우드 웨스턴에도 일대변화가 오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 영화는 1990년에야 나온 작품이었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때나 되어서야 썩 참신한 미국의 서부극, 곧 인디언을 진멸(盡滅)의 대상이 아닌 화해(和解)의 대상으로 삼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1957년)에 이미 커크 더글러스 주연의 <OK 목장의 결투>가 나왔으며, 그 작품 속에 인디언들은 아예 출몰하지도 않았던 것은 매우 이색적인 일이었다고 하겠다. 지금껏 존 포드 감독의 서부극 같은 데서 ‘인디언 악당’이란 공식이 널리 통용되고 있었음을 상기해 본다면 충분히 이해될 만한 일이다. 커크 더글러스는 그 영화 속에서 포악한 인디언이 아닌 탐욕가인 백인 악당들을 무찌르는 최고의 속사포 총잡이로 그 위력을 발휘한다.
커크 더글러스는 그보다 몇 년 뒤에 나온 영화 <스파르타쿠스>(1960)의 주연을 맡아, 이번엔 불세출의 검투사가 되어 위력적인 칼잡이로서의 힘을 발휘한다. 로마 의 절대권에 대항해 노예항쟁을 이끌었던 노예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영웅적인 삶을 연기함으로써 배우로서도 완전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배우로서의 그는 이처럼 총잡이와 칼잡이로서 세상의 악(惡)과 절대권에 맞싸워 승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영화 속이 아닌 일반 현실 속에서도 총잡이나 칼잡이로 행세할 수는 없었지 않았겠는가.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도 그는 훌륭한 면을 보여준 생활인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50년대 미국 사회에 소위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쳤을 때 영화계라고 해서 그 거센 바람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때 소위 블랙리스트에 오른 동료 배우들을 위해 사실상 블랙리스트 철폐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함으로써 총잡이나 칼잡이 이상의 위력을 발휘했다는 것은 미국 영화사의 엄연한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그렇다고 그가 투사로서만 위대했던 것만은 아니다. 한편,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 자선사업을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가 이번(생의 말년)에 자신의 사유재산 거의 전액(한화 600억원 이상)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는 엄연한 사실에서도 튼튼하게 뒷받침돼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인들(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들에 대한 대박해, 소위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보다 더 이른(앞선) 시기에 러시아인들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들에 대한 대박해, 소위 포그람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홀로코스트만큼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러시아에서의 포그람도 유대인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큰 박해였고, 그것을 참아내기 힘들었던 그들 중의 일부는 고향을 찾아 떠나는 연어처럼 옛 고향(고국) 땅으로 되돌아갔으며, 또 일부는 미국 땅으로 이민을 떠나버린 사람들도 상당수였다.
영화 <OK 목장의 결투>로 잘 알려진 미국 서부극의 명배우 커크 더글러스는 러시아인들의 포그람(유대인 박해)에 견디다 못해 미국 땅으로 이민을 떠나버린, 러시아계 유대인의 아들로 뉴욕(인근 작은 마을)에서 1916년 태어났다. 청소년 시절 그는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그리고 학비 조달을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신문배달은 기본이고 노점상, 정원사, 경비원… 등 닥치는 대로 이일 저일, 여러 일터들을 전전했던 것이다.
그는 레슬링 선수 생활로 몸을 단련했고, 그 스포츠를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이용해 생활비 또는 학비를 조달하는 데 일정액 보태어 쓰기도 했다. 어떻든 그는 “젊어 고생은 돈 주고도 못 산다”는 청년 때부터의 그 고난의 삶을 자연적으로 터득하게 되었고, 거기에다 신체적 단련까지 곁들여 탄탄한 몸매와 강인한 정신력을 함께 구비한 채 자신의 앞날(은막생활)에 대비해 왔다고 보겠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스파르타쿠스>란 영화의 주인공인 노예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야무지고도 강인한 모습은 벌써 청소년 때부터 자기단련을 통해 그가 이미 습득해 지녔던 그다운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어느 영화학교에 들어가 배우로서의 기본훈련을 마친 뒤 30세란 늦은 나이에 영화계에 투신하게 된다. 일생 동안 무려 90여 편에 가까운 영화에 출연했다고 하는데, 그것들 중에서 특히 그의 대표작들로 일컬어지는 <OK 목장의 결투>와 <스파르타쿠스>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케빈 코스트너의 서부극 <늑대와 춤을>이 나오게 되면서 할리우드 웨스턴에도 일대변화가 오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 영화는 1990년에야 나온 작품이었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때나 되어서야 썩 참신한 미국의 서부극, 곧 인디언을 진멸(盡滅)의 대상이 아닌 화해(和解)의 대상으로 삼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1957년)에 이미 커크 더글러스 주연의 <OK 목장의 결투>가 나왔으며, 그 작품 속에 인디언들은 아예 출몰하지도 않았던 것은 매우 이색적인 일이었다고 하겠다. 지금껏 존 포드 감독의 서부극 같은 데서 ‘인디언 악당’이란 공식이 널리 통용되고 있었음을 상기해 본다면 충분히 이해될 만한 일이다. 커크 더글러스는 그 영화 속에서 포악한 인디언이 아닌 탐욕가인 백인 악당들을 무찌르는 최고의 속사포 총잡이로 그 위력을 발휘한다.
커크 더글러스는 그보다 몇 년 뒤에 나온 영화 <스파르타쿠스>(1960)의 주연을 맡아, 이번엔 불세출의 검투사가 되어 위력적인 칼잡이로서의 힘을 발휘한다. 로마 의 절대권에 대항해 노예항쟁을 이끌었던 노예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영웅적인 삶을 연기함으로써 배우로서도 완전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배우로서의 그는 이처럼 총잡이와 칼잡이로서 세상의 악(惡)과 절대권에 맞싸워 승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영화 속이 아닌 일반 현실 속에서도 총잡이나 칼잡이로 행세할 수는 없었지 않았겠는가.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도 그는 훌륭한 면을 보여준 생활인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50년대 미국 사회에 소위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쳤을 때 영화계라고 해서 그 거센 바람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때 소위 블랙리스트에 오른 동료 배우들을 위해 사실상 블랙리스트 철폐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함으로써 총잡이나 칼잡이 이상의 위력을 발휘했다는 것은 미국 영화사의 엄연한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그렇다고 그가 투사로서만 위대했던 것만은 아니다. 한편,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 자선사업을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가 이번(생의 말년)에 자신의 사유재산 거의 전액(한화 600억원 이상)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는 엄연한 사실에서도 튼튼하게 뒷받침돼 있다.
ⓒ 교회연합신문 & ecumenicalpress.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