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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제주에게 쓰는 편지, 나는 기억한다.”
- (이 글은 대한항공 모닝캄 잡지 March ~ May호에 실린 다니엘 린데만이 쓴 ‘지구에게 쓰는 편지’를 읽고 착안하여 쓴 글임을 밝힙니다.) 나야, 나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다니엘 린데만이 지구에게 편지를 썼던 것처럼 나는 너 제주에게 편지를 쓴다. 요새는 예전처럼 서로가 눈 맞추고 얘기할 시간이 별로 없었잖아. 아마 37~38년 전일거야. 내가 처음에 너에게 방문할 때는 신학생 시절이었지. 내가 제주 땅을 밟았을 때 얼마나 신비롭고 신기한 느낌을 가졌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구나. 어쩌면 너도 어렴풋이 그때 나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때 나는 한라산 기도원에서 숙식을 하며 하나님뿐만 아니라 수많은 나무들에게 이야기를 건넸지. 하나님 지으신 세계가 너무나 아름답다고 말이야. 나는 그때 한라산의 노루가 뛰어 노는 모습도 봤지. 처음으로 정방폭포를 보고 천지연폭포를 봤을 때 나는 그냥 입을 벌려 노래했지. “♪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두 번째 너를 찾았을 때는 개척교회 시절이었어. 그때도 우리 교회 한 집사님이 서귀포에 있는 군 휴양소의 방을 얻어주어서 며칠 다녀온 적이 있었지. 아들 성군이와 함께 생전 처음으로 말을 탔을 때 너무 신기하고 감사해서 나는 그냥 울어 버렸지. 그 이후로도 나는 너 제주를 찾을 때마다 푸른 바닷길을 걷고 곶자왈 숲을 걷기를 좋아했었지. 기억 안 나? 교래 자연휴양림을 걸을 때마다 작은 아마존의 원시림을 걷는 것 같다고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지. “이곳에만 오면 에덴동산이 생각이 난다고. 마치 내 삶의 근원, 생의 원형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고.” 그러니까 살아온 내 삶을 돌아볼 수 있었고 에덴동산과 나를 지으신 그 분과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하고 돌아갔어. 아직도 기억이 안 난다고? 아마 기억이 안 나더라도 지금쯤은 눈치라도 챌 수 있지 않겠어? 요즘은 제주에 올 때마다 그런 시간을 갖지를 못하고 업무상, 사역상으로만 왔다가는 나잖아. 제주라는 자연의 신비는 참으로 위대하고 한라산은 깊고 높기만 한데 난 요즘 너에게 와도 그곳을 찾을 시간도 없어. 그저 철근 콘크리트 건물 속에서 회의나 하고 강연이나 하며 나머지 시간은 핸드폰이나 부지런히 사용하다가 돌아가는 나 말이야. 교단 총회장과 연합기관 대표회장이 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 구나. 이번에도 곶자왈 원시림을 잠깐이라도 들리지 못한 게 아쉽고 속상하기 그지없네. 사랑하는 친구 제주야, 네가 날 기억하지 못해서 속상하다. 그러나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 역시 육지로 올라오면 너를 잊은 채 일과 스케줄에 파묻혀 살아가지. 언젠가, 아니 총회장 사역이 끝나고 한국교회 연합기관을 하나로 만든 후에 적어도 몇 주는 너와 함께, 아니 너의 원시림 숲 속에 푹 파묻혀 살고 싶구나! 너를 처음 찾았을 때 한라산의 나무들과 대화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던 그 설레는 가슴으로 말이야. 그런데 과연 이 일이 이루어질지는 모르겠구나. 벌써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착륙을 하려고 하네. 비행기가 착륙하면 나에게 어떤 바쁜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 난 잘 알고 있지. 그러나 그 꿈만은 꼭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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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제주에게 쓰는 편지, 나는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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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돌베개의 추억을 간직해야 합니다.”
- 지난주는 오랜만에 강단 기도를 하며 강단에서 잠을 잤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우리 교단의 수많은 목사님들이 강단에서 기도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Prayer Again’ 준비위원장이신 최남수 목사님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1안은 목사님들이 강단에서 12시까지 기도하다가 잠을 자고 새벽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2안은 저녁에 강단에서 기도를 하고 집에서 주무신 후 새벽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3안은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낮에라도 2시간 이상 강단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명색이 총회장인데 1안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8시부터 고난주간 특별 밤 기도회를 인도한 후 밤1시, 2시까지 강단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강단에서 잠자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저는 개척교회 때부터 강단에서 기도하고 잠자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구미동에 와서는 강단에서 기도한 후 4층 서재에서 잠을 잤지요. 그래서 그 후부터 혼자 자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모처럼 강단에서 기도하고 자려고 하니까 잠이 잘 안 오는 것입니다. 더구나 부목사님이 한 명씩 돌아가면서 뒤쪽에서 저를 지킨다고 하니 왜 그렇게 신경이 쓰였는지 모릅니다. 박주옥 목사님은 제가 화장실만 가도 움직이고 이리저리 따라다니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신경을 좀 끄려고 KBS 앵커를 하셨던 신은경 권사님의 성경낭독을 켜 놓고 잠을 청하였습니다. 첫 날과 둘째 날은 시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셋째 날은 창세기를 들었습니다. 창세기를 듣다가 잠이 들었는데 28장에 와서 잠이 깨는 것입니다. 창세기 28장, 즉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자는 대목에서 잠이 퍼뜩 깨 버렸습니다. 누운 채로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하늘 보좌에서 사닥다리가 자신의 머리맡까지 연결되는 모습이 그림으로 상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집시 시절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돌베개의 추억이 있거든요. 그 엄동설한에 집에서 쫓겨나서 군산의 이 교회, 저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잠을 자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가지고 있었던 전 재산은 침낭 하나였습니다. 그 침낭을 들고 이 교회 저 교회 지하실 바닥이나 차디찬 교회 의자에서 잤습니다. 지난주에 강남에서 셀피아병원을 운영하고 계시는 신현순 권사님이 제 방을 보고 은혜 받고 회개했다는 것이 아닙니까? ‘새에덴교회라고 하는 대형교회 목사님의 방이 너무 고시원 방처럼 어둡고 침침할 뿐만 아니라, 양쪽에 다 책과 메모지로만 쌓여 있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담임목사님께서 쉼 없이 노력하시고 자기와의 싸움을 하며 살고 있는가’ 하며 자기는 너무 좋은 방에서 잠자는 게 송구스러웠다는 것입니다. 저는 외로운 돌베개 시절을 생각하면 그것도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나 사방이 공개 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수많은 사람이 저를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강단에서의 잠은 정말 편하지가 않았습니다. 더구나 본당 안에 있는 CCTV가 저의 잠자는 모습을 다 지켜본다고 생각하니까 더 그렇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한 주간 동안 강단에서 저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고 총회와의 약속을 지키게 된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의 돌베개 시절을 떠오르게 하고 다시 침낭 속에서 부들부들 떨며 잠자던 추억이 그리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잠을 자긴 하였지만 영적으로는 정말로 행복한 밤들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구에게나 돌베개 시절이 있습니다. 침낭의 추억도 있었을 것이고요. 그렇다고 돌베개와 침낭의 시절로 돌아갈 순 없지만, 그때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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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돌베개의 추억을 간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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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아주 특별한 찬양이 특별한 경험과 사역을 하게 합니다”
- CTS에서 윤동현 목사님을 통해 저에게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김석균, 김정석 목사님이 인도하는 ‘아주 특별한 찬양’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특별게스트로 출연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방송은 성도들의 신청곡을 받으면서 찬양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요즘 저처럼 바쁜 사람이 없지만, 제가 쓴 시에 김석균 목사님께서 곡을 붙여 ‘사명의 길’ 이라는 아름다운 찬양으로 만들어 주신 사연도 있고 해서, 김석균 목사님이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하니까 한번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찬양이 무엇이고, 왜 좋아하는 가를 이야기하면서 직접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저는 ‘깨뜨린 옥합’을 부르기로 했습니다. “왜 이 노래를 좋아 하는가”를 물어보기에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저 같이 마른 막대기와 같은 종, 타다 남은 재와 같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요긴하게 써 주시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다윗의 감격으로 자주 부르고 있습니다. 특별히 요즘 같은 때 예배를 회복하고 무너진 제단을 세우며 교회 생태계를 보호하는데 저 같은 사람이 쓰임 받는다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이 노래를 젖은 눈으로 부릅니다. 더구나 비대면 사회 속에서 예배 회복과 한국교회 세움을 위해 소수의 사람이 모이다보니 소수의 만남이 얼마나 귀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이 얼마나 가치 있는 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대하는 진정성과 간절함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사역을 하다보면 가슴이 허해지고 냉해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기쁨을 주시고 내 영혼이 만족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하다 보니까 이 찬송이 좋아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1절을 부르고 간주한 후 3절을 부를 때는 김석균, 김정석 목사님이 화음을 맞추어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어색했습니다. 찬양사역자도 아닌 사람이 스튜디오에서 노래를 부르는 일이 드물거든요. 그래도 찬송이 너무 은혜스러워 젖은 눈으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수행하는 강인철 집사가 “목사님은 원곡 스타일로 부르지 않고 교회에서 부르듯이 트로트풍으로 담대하게 불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이 사람아, 트로트풍이건 우리 교회풍이건 내가 깊은 영감으로 불렀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는가. 더구나 나는 찬양을 부르면서 아주 특별한 경험을 했어. 성령께서 나를 에워싸시고 내 마음에 강력한 감동을 주시는 것을 경험했어. 김석균, 김정석 목사님도 감탄을 하지 않았는가. 나는 앞으로도 이런 감격을 가지고 남은 사역을 감당해갈 것이네.” 총회장이 된지 벌써 반년이 되어 반환점을 돌고 있습니다. 때로는 너무 지쳐서 빨리 끝내고 싶지만, 앞으로 남은 6개월도 이런 특별한 감격으로 총회를 세우고 한국교회를 세우는 총회장으로 쓰임 받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또 다시 눈시울이 젖고 목젖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저를 불러주시고 써 주시는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서 마음속으로 ‘깨뜨린 옥합’을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 내가 주님 앞에 무엇입니까... 내 영혼 만족케 하옵소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좋아하는 찬양이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의 삶의 환경이 달라질 때마다 우리의 신앙도 상황에 적응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특별한 찬양이 우리에게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하지요. 그리고 그 특별한 경험이 특별하게 쓰임 받고 특별한 사역을 하는 촉매제가 되곤 합니다. 이번 고난주간 밤 집회에도 아주 특별한 은혜의 경험을 많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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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아주 특별한 찬양이 특별한 경험과 사역을 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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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교회 부흥의 씨앗, 순교의 정신이 절실할 때입니다.”
- 지난 목요일 오전에는 전북신학교 샬롬복지관 준공 감사예배에서 설교를 하고 바로 김제 광활교회에 가서 故 최원귀 집사님 순교자 등재 감사예배 설교를 했습니다. 최원귀 집사님은 김익두 목사님의 부흥성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후 일사각오, 순교자의 믿음으로 1948년 7월 4일에 광활교회를 설립하고 오직 교회와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사셨습니다. 그러던 중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 8월 15일 김제경찰서에서 온갖 폭행과 고문을 당하다가 철사줄에 묶인 채로 생매장 당하여 순교를 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얼마나 참혹한 삶입니까? 최원귀 집사님은 생전에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인 최대진 장로님이 동생들을 다 키웠습니다. 저는 그 분을 보면서 주기철 목사님의 아들 주광조 장로님을 만난 것처럼 감격스러웠습니다. 최원귀 집사님의 아들들은 장로님이 되고 딸들은 권사님이 되어 다들 신앙의 명문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런 분들 앞에서 설교하려고 하니 눈물이 울컥거려서 몇 번을 참았습니다. 이윽고 제가 순교자 기념등재증서를 드린 후에 차남 최광진 장로님이 인사말씀을 하시면서 아버지를 향한 글을 써서 읽으셨습니다. 그 글을 읽는데 제 가슴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 꿈에도 잊지 못할 6.25, 민족의 가슴에 아픈 상처를 냈던 6.25, 시간이 지나도 빈자리는 크고 가슴은 시리기만 합니다. 아버지 없는 빈자리에 때로 외롭고 때론 힘들었지만 돌이켜 보니 오늘의 우리를 여기까지 지킨 것은 아버지의 순교였습니다. 지나간 70년, 가난과 풍요, 고난과 성공이 수없이 교차했지만 가난 속에서도 비굴하지 않고 풍요 속에서 물질이 하나님이라 믿지 않고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견뎌온 것은 아버지가 말없이 가르친 순교의 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동안 교회도 어지러워 곁길로 가고 우리도 세속화, 물질화, 영적 전쟁으로 힘들어할 때 그래도 주님의 몸이라 무너진 교회의 기둥을 붙들며 눈물로 지새워온 것도 아버지가 우리 가슴에 새겨준 순교의 교훈 때문이었습니다. 죽으면 살고 죽어야 살며 살아서 죽으면 죽어도 살고 죽어서 살면 영원을 사는 진리를 몸으로 가르친 아버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숲을 이루고 그 숲에서 많은 열매를 맺는 복음의 진리를 죽음으로 가르쳐 주신 아버지, 우리도 아버지처럼 살아 매일 순교적 삶으로 살고 아버지처럼 죽어 매일 순교자의 영광으로 사는 복되고 아름다운 후손들이 되겠습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 평안히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고 아직도 다 오지 않은 부활의 아침을 위해 조국과 교회를 위해 도고해 주소서...(하략)” 이러한 내용을 들으면서 그 분들께 너무 감사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실망하지 않고 각 교회에서 장로로, 권사로. 또 장손은 헝가리의 선교사로 간 집안을 이루었으니 말이죠. 교부 터툴리안은 “순교는 교회 부흥의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청년시절 소원도 순교였는데 그렇지 못해서 항상 빚진 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우리가 순교를 하고 싶어도 순교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그렇다고 순교를 너무 쉽게 이야기 하거나 아무데나 적용해서도 안 됩니다. 분명한 것은 이럴 때일수록 순교의 정신과 가치가 더 고귀하게 여겨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 진정한 순교의 정신을 회복하고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최원귀 집사님의 모든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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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교회 부흥의 씨앗, 순교의 정신이 절실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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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당신이 꽃이어서 봄이 옵니다”
- 제가 쓴 ‘하얀 철쭉’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리움이 지나치면 외로움이 되는 줄을 왜 몰랐겠어요 사랑도 지나치면 상처가 된다는 걸 알았지만 한겨울에 하얗게 피어난 이유는 화사한 봄 초록의 여름이 다 지나도 당신에게 고백하지 못한 마지막 말 한 마디 남아서 이렇듯 창백한 얼굴로 하고 싶은 말도 잊은 채 하얗게 피어 있다는 걸 왜 모르겠어요 우리 교회로 오는 길에는 철쭉나무 벽이 있습니다. 철쭉꽃은 봄에 피어야 하는데 겨울인데도 핀 것입니다. 12월에도 피고 심지어는 1월에 피었다가 얼어 버린 것도 있습니다. 그렇게 핀 꽃은 하얀 철쭉이었습니다. 자기가 인동초도 아니고 에델바이스도 아니면서 겨울에 피어 시들어버린 꽃을 보며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꽃에 옷을 입혀 줄 수도 없고요. 안타까워서 그저 마음으로 축복하다가 시적화자는 하얀 철쭉이 되어 꽃의 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외로울 줄 알면서도, 상처가 될 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연모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죠. 그런 상념에 잠기다가 저는 우리 교회 외벽과 분당선 지하철 안에 감성 이미지 광고판에 “당신이 꽃이어서 봄이 옵니다”라는 글귀를 생각해 낸 것입니다. 그전, 2018년 남북정상회담을 할 때도 “그대 때문에 봄이 옵니다”라는 글귀를 걸었습니다. 그랬더니 남북예술협력단 공연 주제를 “봄이 온다”로 정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후로 우리 교회 30주년 기념 책자 제목도 “꽃송이 하나로도 봄은 오리라”라고 했습니다. 보통 일반 사람들은 봄이 와서 꽃이 핀다고 합니다. 그것은 서사적이고 일반 산문적인 표현이지요. 그러나 “당신이 꽃이어서 봄이 옵니다”라는 문구는 그 자체가 시이고 이 한 마디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그대 때문에 봄이 옵니다”, 이 글귀도 반전과 역설이 담겨 있는 시적 표현입니다. 저는 옛날 백설희씨가 부른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가 그렇게 좋은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국민 디바인 이선희씨가 KBS 다큐에서 독일에 남아 있는 광부와 간호사들을 위로하는 노래를 부르는걸 보며 그 노래의 깊은 감성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봄날은 간다고 하니까 너무 허전한 것입니다. 물론 그 허전함 속에 힐링이 있고 위로가 있지만 꼭 봄날이 가야 하는가 하는 마음이 들어서 ‘봄날은 온다’라고 가사를 고쳐서 부르곤 합니다. “♪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져도 같이 울던 따뜻한 그 사랑에 봄날은 온다. 따뜻한 님 때문에 봄날은 온다.” 코로나로 인하여 차가운 세상이지만, 우리 마음 속에 따뜻한 꽃, 화사한 꽃, 사랑의 꽃을 피우면 그 꽃 때문에 우리에게 진짜 봄이 오지 않을까요? 우리 마음과 삶에서 향기롭게 피어난 꽃 때문에 오는 봄은 코로나 바이러스도 물러나게 하고 진정으로 살만한 사회를 만들어 줄 겁니다. 이러한 꽃들이 우리 교회 안에서 먼저 피어나기를 원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서 먼저 피어나기를 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가 코로나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지역 영세 소상인들을 위한 ‘선한소통 상품권’ 운동을 했는데, 각종 일간지에서 잘 보도를 해 주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앞으로도 아름다운 꽃들을 많이 피워냈으면 좋겠습니다. 가수 심수봉씨의 노래처럼 백만 송이의 장미를 피워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피운 꽃 때문에 사계의 봄을 넘어서 진정한 봄이 오는 세상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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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당신이 꽃이어서 봄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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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어쩐다지요. 야속하게 가 버린 분의 생각 때문에요”
- 과거 유달리 저에게 문자를 자주 보내주셨던 한 여성도가 있었습니다. 직장 생활하면서 미주알고주알 같은 이야기, 삶의 고달픈 사연까지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삶이 힘든 만큼 관심을 갖고 기도해 달라는 의미였겠지요. 어떨 땐 “목사님께서는 어쩜 그렇게 시도 잘 쓰시고 노래도 잘 하세요. 짝짝짝” 하는 문자도 보내 주셨습니다. 저는 목양적 차원에서는 답을 해 줄 때도 있었지만 그리 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엄연히 저는 목회자이고 그 분은 여성도였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성가대도 열심히 하셨고 성가대를 서지 않는 저녁예배 때는 꼭 앞자리에 앉아서 설교에 은혜를 받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문자가 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월 중순쯤 되었을까요. 2부 예배를 마치고 본당에서 4층 계단으로 올라오는 길에 그분과 마주쳤습니다. 왠지 얼굴이 창백하게 보였습니다. 화장을 안 해서 그랬겠지 하고 저는 “집사님, 안녕하세요?”만 하고 제 방으로 올라왔습니다. 제 방에서 특별 기도를 받을 분들이 줄을 서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저녁예배가 끝나갈 무렵 그 분의 소천광고 소식이 강단으로 올라왔습니다. 제가 깜짝 놀라 동명이인인가 하고 강단에서 공개적으로 물어보았더니 그 분이 맞다는 것입니다. 저는 방망이로 뒤통수를 사정없이 한 대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교역자회의 때 담당 교구교역자에게 자세히 물어보았습니다. 내용인즉 몇 년 전에 난소암에 걸려 완치가 되었는데 연말에 다시 재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암치료 받는 것을 거부하다가 갑자기 위독해져서 그만 천국으로 떠났다는 것이죠.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그 분은 암과 투병을 할 때, 나에게 기도해 달라는 한 마디 문자를 보내지 않았을까. 암의 고통이 그렇게 컸을 텐데 왜 힘들다는 문자 한 마디, 위로 받고 싶다는 한 마디의 문자도 보내지 않았을까. 고통스러워서 잠들지 못하는 밤, 어떻게 그 고통과 싸웠을까.’ 저는 월요일 오전부터 용인시장님과 함께 지역 영세 상가를 돌아다니고 오후에는 총회회관에 가서 총신대 정이사 문제 해결을 위하여 회의를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저녁 늦게 장례식장에 찾아가서 가족들을 위로하고 기도해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담당 교역자에게 물어보니 이미 아침에 발인을 해버렸다는 것입니다. 저는 소리를 버럭 지르며 나무랐습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나에게 데려와서 기도를 받게 해야지요. 교인들을 어떻게 관리하는 겁니까.” 당장 남편 집사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곤하게 주무시는지 전화를 안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성도가 쓰던 핸드폰에 문자를 보냈습니다. 제가 문자를 보낸다고 이 세상을 떠나신 분이 어찌 문자를 보겠습니까마는. “집사님! 어쩌면 그리도 야속하게 떠나셨나요. 오늘 조문을 가려고 했더니 아침에 발인했다 해서 너무 기가 막혔어요...(중략) 천국에서라도 이 목자의 심정을 알아주시라고 부질없는 문자를 보내봅니다. 이젠 고통도 아픔도 없는 천국에서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누리세요.” 그날 저녁은 도대체 잠이 안와 거의 꼬빡 밤을 새웠습니다. 김용택 시인이 쓴 ‘어쩐다지요’라는 시가 맴돌았습니다. “오직 한 가지 당신 생각으로 / 나는 날이 새고 / 날이 저뭅니다...(중략) 어쩐다지요 / 나도 말리지 못합니다.” 순간, 머릿속에서는 우리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애달픈 연서를 쓰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 부디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해 주세요. 이렇게 야속하게 떠나버리면 안되잖아요.” 이틀 후 남편 집사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연거푸 누구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진짜 소강석 목사님 맞느냐”고 엉엉 우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 담임목사님이 맞으십니까? 집사람을 일찍 데려간 하나님이 원망 되어서 목사님도 한동안 미워했습니다. 저는 어찌하면 좋습니까? 죽고 싶네요.” 제가 전화로나마 위로하고 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인생은 이토록 슬플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슬픔이 있기에 우리에게는 그리움이 있고 그 그리움은 아름다운 시와 음악과 예술을 만들어내곤 합니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죽음 너머에 영원한 천국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영원한 그리움 속에 살고 죽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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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어쩐다지요. 야속하게 가 버린 분의 생각 때문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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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이 세상에 우연은 하나도 없습니다”
- 저는 군산제일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군산제일고등학교의 전신은 전킨 선교사가 세운 ‘영명학교’였습니다. 그후 영명학교의 교장이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국제진료소 소장이신 인요한 박사님의 할아버지인 린튼 선교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영명학교 학생들과 멜본딘여학교(현 영광중,고등학교)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가 장터에서 3.1운동을 주도한 것입니다. 그때 린튼 선교사는 학생들의 3.1운동을 막지 않고 오히려 뒤에서 도와주고 3.1절 만세 시국선언문까지 작성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애틀랜타로 건너가서 3.1운동의 진상을 알렸고 그의 이야기가 애틀랜타 국제신문에 보도 되었습니다. 급기야 이 소식이 미국의 백악관에까지 전달이 되었고, 장롱 속 고서로 묻힐 뻔 했던 3.1운동의 기록이 전 세계에 다 알려진 것입니다. 그런데 린튼 선교사는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신사참배 반대를 했습니다. 그 일로 조선총독부의 요주의인물이 되어 결국 미국으로 강제추방을 당한 것입니다. 원래 영명학교를 세운 분은 전킨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유니언 신학교를 졸업하고 1892년 11월 3일 한국에 도착한 선교사입니다. 그런데 군산지역에서 열정적인 선교 활동을 펼치다 그만 풍토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세 아들 모두가 풍토병으로 모두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낙심하지 않고 계속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동료 선교사들은 그의 건강을 생각하여 사역지를 전주로 이동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를 세우고 고아원까지 설립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풍토병이 제발하여 결국 1908년 1월 2일 43세의 젊은 나이로 이 땅에 묻히고 맙니다. 제가 제일고를 다닐때는 린튼 선교사나 전킨 선교사에 대해서 전혀 몰랐습니다. 그것도 모른 채 교회를 다니고 신학교를 다녔습니다. 먼 훗날에야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제가 필라델피아의 장로교 선교 역사박물관에 갔을 때 선교사들의 편지들이 수두룩 쌓여 있는 것을 봤습니다. 특별히 린튼 선교사와 전킨 선교사, 영명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본 것입니다. 저는 가난한 촌로의 아들이어서 남원에서 학교를 다니는 게 맞습니다. 만약에 타지로 갔다면 전주로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군산으로, 그것도 하필이면 군산제일고등학교로 간 것입니다. 그래서였는지 전킨 선교사의 선교정신, 린튼 선교사의 저항정신이 저도 모르게 깊이깊이 심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그 분들의 가르침을 전수받거나 역사를 전혀 알지 못했는데도 저도 모르게 그분들의 소명정신과 신앙의 혼이 제 안에 들어와 있지 않습니까? 이걸 무의식적 전이 현상이라고 해야 할까요? 2년 전,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서 군산제일고등학교와 멜본딘여학교(현 영광중,고등학교)에 가서 특강 할 때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섭리에 저는 가슴이 뭉클하기만 했습니다. 제가 지금 이 난국에 우리 총회를 섬기고 한교총을 섬기는 게 결코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요즘 한국교회 연합을 위해서도 온 신경을 써야 하는데, 저는 총신 정이사 문제로까지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 안에 있고 그 분의 경륜 안에 있다고 봅니다. 지금 우리가 코로나 때문에 당하는 고통, 어려움도 다 주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주님은 결코 실수가 없으십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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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이 세상에 우연은 하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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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뒷마당 총회장이어서 감사합니다··· ”
- 지난 수요일 저녁예배 시간에 홍경호 부목사님이 설교를 하셨는데 설교 중에 하나님의 뒷마당이라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고향이 강원도인데 강원도에도 뒷마당이 있었나봅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 집 앞마당에서 한참 신나게 놀고 있을 때 집안에 어르신이 오시거나 마을 손님들이 오시면 부모님이 무조건 뒷마당에 가서 놀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뒷마당은 참으로 후미지고 어둡고 쓸쓸한 곳이었지요. 홍 목사님 역시 ‘아, 우리 집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어둡고 습기 차고 외로운 공터로 느껴졌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전에 광야라는 뒷마당으로 가게 하셨지요. 마찬가지로 본인에게도 인생에서 두 번의 뒷마당 경험이 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첫 번째 뒷마당은 군목 생활 중에 진급을 하지 못하여 전역을 할 수밖에 없었던 뼈아픈 경험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그분의 인물이나 학벌, 설교의 능력으로 볼 때 당연히 좋은 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야 했는데 이상하게 일이 어그러지게 되어 우리교회에 부목사님으로 오시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뒷마당은 최근에 사모님께서 갑상선암이 발견되어 수술을 하게 된 일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런 뒷마당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을 연단하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뒷마당이라는 말이 콱 꽂혀왔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저도 뒷마당 총회장이지 않습니까? 코로나 이전의 총회장님들은 행사가 많았습니다. 미국, 캐나다, 남미, 유럽, 일본 할 것 없이 해외 행사도 많이 초청받아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융숭한 대접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교단 총회장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최대 연합기관인 한교총 대표회장이 되었지만 해외 한 번도 못 나가고 국내에서도 변변한 행사 한번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가장 바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사역은 앞마당 사역이 아니라 뒷마당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바쁘게 뛰어다녀도 칭찬은커녕 비난과 원망을 받기가 일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뒷마당’이라는 이야기가 너무 큰 은혜가 된 것입니다. 저는 젊었을 때 원 없이 해외를 다녔던 사람이라 해외행사에 큰 미련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교단총회장과 연합기관의 대표회장으로서 해외를 다니며 자주 주일을 비우면 우리교회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무래도 교회가 침체가 되고 영적으로 다운이 될 수가 있겠죠. 저부터도 내면세계가 황량한 사막이 될 수 있고요. 그러나 다행히 제가 뒷마당 총회장이 되어서 해외를 나가지 않기 때문에 기도와 묵상의 시간이 더 많고 주일예배와 철야기도회를 한 번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수요예배도 거의 안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너무나 다행이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코로나 상황으로 인하여 뒷마당 총회장으로 끝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비록 뒷마당 사역을 한다 해도 기쁜 마음으로 앞마당 사역을 준비하고 더 넓히는 사역을 할 것입니다. 제 이후 다른 총회장과 다른 연합기관의 대표회장들이 앞마당에서 더 잘 사역하실 수 있도록 열심히 뛰고 또 뛸 것입니다. 뒷마당에서 한국교회의 앞마당을 더 넓히는 일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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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뒷마당 총회장이어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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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시대와 사회를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보내는 이생축의 연서”
- ‘이생망’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는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헬조선이라는 기관차 뒤에 여러 가슴 아픈 객차 같은 신조어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인구론’, “인문계의 90%이상이 논다” ‘이태백’, “20대의 태반이 백수”라는 말이죠. 그러다가 ‘삼포’ ‘오포’, ‘칠포세대’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를 포기할 뿐만 아니라 꿈과 희망마저 포기한 세대라는 말입니다. 아니, 몇 가지가 되었든지 다른 것도 다 포기해야 하는 ‘N포 세대’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이생망’이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이번 생은 망해버렸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의 사회좌절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생망이라는 의식 세계관이 젊은이들에게 집단 우울증을 만들게 하고 심지어는 자살률까지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삼포, 칠포, N포를 외치고 이생망을 외치는 사회라 할지라도 저는 당당하게 ‘이생축’의 삶을 제안합니다. “이번 생은 축복이었다. 축복을 받아 내 인생은 너무나 찬란하고 눈부셨다.”이런 삶을 이생찬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생망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지만 그 이생망의 운명을 이생축의 삶으로 바꾼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야곱, 요셉, 야베스, 룻, 라합, 밧세바와 같은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생축, 이생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 역시 이생망의 사람이었습니다. 불신가정에서 예수를 믿고 집에서 쫓겨난 후 신학교에 가서 굶기를 밥 먹듯 한 사람이고 신학생들 사이에서 망이나 망소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죽어도 저는 성경책 맨 첫 페이지 하얀 빈 공간에 이렇게 써 놓고 항상 읽었습니다. “소강석, 너는 다음 시대에 큰 종이 될 거야. 너는 여호수아 같은 종이고 다윗 같은 종이고 바울 같은 종이 될 거야. 하나님이 너를 크게 들어 쓸 거야. 그러니 너는 강하고 담대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마라.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가장 많이 전하는 종이되리라.” 그리고 거울을 볼 때 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강석, 넌 어쩌면 그렇게 다윗을 닮았어? 어쩌면 그렇게 넌 모세를 닮고 여호수아를 닮았어? 네가 봐도 멋지잖아. 큰 종처럼 보이잖아. 그러니까 말하는 것도 큰 종처럼 말하고 걸어 다닐 때도 큰 종처럼 걸어 다녀라.” 이렇게 축복언어의 씨를 뿌리고 또 뿌리다 보니까 어느새 그 축복언어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더욱 힘든 시기입니다. 여기저기서 이생망이라는 말들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추운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있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트지 않습니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희망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함박눈이 아무리 펑펑 온다 할지라도 봄을 덮을 수 없듯이, 이생망의 먹구름이 아무리 자욱하게 우리의 삶을 덮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희망만큼은 덮을 수 없습니다. 이번 주는 음력으로 하면 새해 첫 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해를 맞아 우리도 아무리 이생망의 어두운 안개가 덮쳐도 다시 한 번 일어나 이생축, 이생찬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이생축, 이생찬이라는 축복언어가 한국교회와 우리 사회를 덮어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어서 빨리 코로나의 절망과 어둠이 물러나고 찬란한 축복의 아침이 밝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새에덴의 성도들과 함께 이생축, 이생찬의 눈부신 길을 걸어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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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시대와 사회를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보내는 이생축의 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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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외롭고 슬플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이지요.”
- 지지난 주 목요일에 백암교회 손병회 안수집사님의 큰 따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가 위독하신데 마지막으로 소 목사님을 한 번 보고 싶다고 하시네요.” 우선 전화를 바꿔달라고 해서 위로를 해 드렸습니다. “집사님, 저는 평생에 집사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꼭 내려가서 뵙겠습니다. 제가 내려갈 때까지 꼭 살아계셔야 합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그러자 90세 노인이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도저히 틈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계신 병원이 전남 순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총회와 한교총의 공적 사역을 위한 빡빡한 스케줄로 도저히 틈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밤을 새워서라도 가려고 했지만 코로나 때문에 밤에는 면회도 안되었습니다. 큰 따님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가 하루 종일 병실 문만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행여나 소 목사가 병실 문을 열고 찾아올까하고 말입니다. 아들과 딸들이 와도 그리 반가워하지 않았는데 제가 오기를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전화로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기도를 해 드린 후 이렇게 약속을 했습니다. “손 집사님, 제가 내일 저녁 늦게 출발을 하여 이른 아침에 뵙겠습니다. 제발 그때까지만 꼭 살아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집사님, 저를 만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어요. 하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꼭 붙잡으면 마음 속 깊은 평화를 느끼실 거예요.” 그런데 수요일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 따님으로부터 문자가 와 있었습니다. “목사님, 아버님께서 소천을 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도 소 목사님의 이름을 부르시고 또 주님, 주님을 부르시다가 가셨습니다. 장례식장은 화순으로 옮기겠습니다.” 저는 너무 어이가 없고 슬프기 짝이 없었습니다. 손 집사님은 제가 20대 초반 시절, 백암교회를 개척할 때 정말로 충성스러운 교인이셨습니다. 부락주민들이 150명, 200명이 와서 교회를 못 짓도록 저의 멱살을 잡고 얼굴에 침을 뱉을 때 달려와서 육두문자를 쓰며 그들과 싸우셨습니다. “야, 이 0 같은 놈들아, 우리 소 전도사님이 힘이 없어서 참고 있는 줄 아느냐. 너희 같은 놈들 천국가고 복 받으라고 참고 있는 줄 알아라 이놈들아.” 그 분은 그 동네의 유지이셨거든요. 그런 분이 일부러 부락 사람들 들으라고 또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소 전도사님, 절대로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교회를 지을 때까지 전도사님을 끝까지 지켜드릴 것입니다.” 열 일을 제치고 화순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영정사진 앞에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손 집사님, 서로가 약속을 못 지켰네요. 이런 슬픔과 아픔도 있네요. 이제 외로움도 슬픔도 없는 저 천국에서 영원히 평안을 누리세요.” 정호승 시인의 말마따나 우리의 육체는 슬프고 외로울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외로우니까 사람이지요.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쁜 목사가 화순까지 내려간다니 감동에 감동을 먹고 2시간 전부터 백암교회 목사님, 장로님, 몇몇 분들이 와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곳으로 이사 간 저희 교회 반가영 집사님도 오셨고요. 가슴속 깊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은 가슴에서 내장으로 흘렀습니다. 올라오면서 스스로 이런 위무를 하였습니다. 이런 사랑으로 인한 외로움과 슬픔이 시가 있게 하고 음악을 만들며 예술이 있게 하는 거라고. 제가 설교나 여러 에세이에 손병회 집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제 시의 중심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제부터는 저에게 슬픔을 안겨주고 떠나간 손 집사님이 제 시의 모티브가 되고 바탕이 될 때가 많을 겁니다. 아니, 그 분에 대한 추억과 슬픔의 사연이 제 시 속으로 언제든지 걸어 들어올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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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외롭고 슬플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