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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교회가 세속 정치에 승리하는 길’
    삼국시대를 경험한 우리 민족에게서 남북분단은 숙명처럼 느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우리 민족의 운명은 그나마 단일민족, 혈통적 일체감으로 외부의 재난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왔다. 왕과 위정자들이 타락하고 부패하여 그들이 나라를 망쳐도 민초들이 일어나 피로써 지켜냈다. 언제나 우리의 가슴속에는 우리는 하나이며, 이 땅의 주인은 민초라는 아주 오랜 민족적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고 있었고, 그 힘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이 뿌리가 썩어가고 있음에 화들짝 놀라 정신이 혼미해지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 극심한 신분차별의 역사도 거쳐보았고. 무지막지한 사상적 좌우 대결에 의한 피눈물도 경험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고통받고 설움 받은 계층이 생겨나고 아픈 역사적 사건을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존립을 위협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작금의 작태는 우리 민족의 뿌리깊은 우리식 민주주의의 근간을 썩이고 녹여내고 있다. 이러다가는 더 이상 우리가 존재할 수 없는 사태에 이를 수도 있다. 고질적인 영호남의 대결은 이미 익숙하고 그렇다고 치자. 이미 내성도 생겼고, 서로 얼굴을 마주하면 까닭없이 기분이 상한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래도 지금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공존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르렀다. 영호남의 갈등은 다른 지역 출신들과의 갈등을 이야기할 때 조금 강도가 셀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제 영호남의 차별을 서로의 농담 정도로 여길 수 있다. 그리고 남녀차별도 이제 그리 큰 문제는 아니고, 신분의 차별은 이미 극복했다고 보아도 좋다. 그런데 지금 새롭게 부각하는 갈등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고 권력의 문제이고, 그 배후에는 엄청난 경제적 배려가 당근처럼 있고. 그 방법은 교묘한 편 가르기다. 최근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에서 나타난 이대남과 이대녀의 대결을 바라보면서 청년을 사랑하는 필자의 마음은 아픔을 금할 수 없었다. 노사(勞使)의 편가르기는 고전적이고, 코로나 그 혹독한 전쟁 중에도 표를 위하여 의사와 간호사로 편을 갈라 싸우게 한탄을 넘어 감탄했다. 선생과 학생을 가르고, 세대와 세대를 가른다. 더 무서운 것은 내 편은 절대선이며, 상대는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유명한 대깨문의 표어가 이런 세대를 대변한다. 내로남불은 문제가 아니다. 내로남불이라 공격하면 그런 것은 없다는 식으로, 나아가 그러면 어떠냐고 말한다. 내편이 하면 그것은 언제나 정의요, 개혁과 혁신의 길이니 어쩔 수 없다는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런 면에서 진보와 보수라고 서로 다른 것은 없지만, 양측의 극단적 선악 논쟁은 결국은 모두의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이들은 강력한 결속력으로 정치적 세력을 형성하고, 정치인들이 이 세력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구속한다. 자신들을 벗어나려 하거나 공격하면 문자 폭탄은 기본이고, 그들이 가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가용하여 그를 추방하든지 무력화시키고 결국 항복하게 만든다. 검수완박법에 반대했던 금태섭 의원은 쫒겨났고, 그나마 부정적인 소신을 밝히던 의원들마저 결국 전원 동의했다. 필자는 그들의 동의를 보고 그 나약함과 비겁함에 절망했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희망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교회의 차례다. 180석에 가까운 의석을 가진 민주당과 진보 계열의 정치 세력에 의해 차별금지법 통과라는 위협 앞에 직면해 있다. 각종 악법들이 다수당의 횡포로 만들어지고, 무기력한 여당의 대응은 말만 요란하다. 이미 그들의 관심은 2년 후 총선에 가 있고, 득표를 위한 정략적 선택을 준비한다. 그들에 정의란 곧 득표일 뿐이다. 이들의 선택이 가져올 불행한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갈등은 망국적이다. 오직 자신과 같은 편의 승리를 위하여 우리의 근본을 허무는 이 무도함을 교회는 더 이상 지켜만 보면 안된다.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세상 정치에 대한 무한 책임을 부여받았다. 그것이 인간에게 통치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정치적 처분이다. 이 인간의 권력 앞에 신정정치의 준엄함을 교회가 보여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더 이상 교회는 정부에 티끌하나도 구걸하지 말라. 받는 순간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 스스로 정화하고 갱신하고 개혁하여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그들 위에 서야 한다. 교회가 세속 정치에 승리하는 길은 이런 힘으로 민초의 정치적 지지를 결집하여 그들을 사로잡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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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2-06-14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청와대, 국민의 가슴으로 이전하라!’
    평생을 학자와 목회자로서 살면서 참 많은 글을 썼고, 많은 강연과 집회를 다녔다. 그러던 필자가 지난 3년간 절필하다시피 하고, 강연과 집회를 자제했다. 물론 코로나라는 외적인 요소가 있었지만, 굳이 그 이유만은 아니다. 촛불 정권에 대한 절망감과 소위 이 시대 리더들에게서 발견한 도덕적 불감증과 분열적 편가르기 앞에서는 더 이상 글과 강연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편싸움에서 도덕적 가치는 중립을 상실했고, 인간의 가치는 진영의 논리에 함몰되고, 정당성은 주장의 힘에 실려 떠밀렸다. 글을 쓸 의욕은 물론이요, 이런 글로 무엇을 할수 있을까라는 펜의 힘에 대한 의구심까지 들었다. 그런 필자가 다시 글과 말에 힘을 내기로 했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한번 더 믿어보자는 소탈하고도 조금은 어리석어 보이는 생각 때문이다. 이 필에 먼저 부딪히는 것이 청와대의 용산이전이다. 필자는 청와대 이전에 반대한다. 청와대를 옮겨야 한다는 주장의 배경은 제왕적 대통령의 국민과의 이격(離隔)이며 소통에 문제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주장은 상상을 초월하는 국민적 비용은 차지하고, 가소롭기까지하다. 역대 대통령들의 청와대 이전 공약은 가장 대표적인 표풀리즘 공약이다. 청와대가 구중궁궐이라서 소통이 안된다고? 말 같지도 않는 주장이 힘을 얻은 것은 그 동안 청와대 주인들이 보여온 행태 때문다. 청와대 주인의 행태만 바꾸면 될 일을 혈세를 퍼부어 청와대를 옮길 일인가? 불가한 이유가 다음과 같다. 첫째, 정권 교체기 국방의 위협이다. 전시 상황에서 청와대 위치의 중요성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그 청와대가 전혀 운용해본 경험이 없는 생소한 시설로 북한이 미사일을 쏘아대는 시점에 옮기겠다는 것은 그야말로 성과를 보여주기 위한 포퍼먼스에 불과하다. 둘째, 천문학적인 비용이다. 보도에 의하면 국방부는 이전을 위하여 오천억원을 제시했다. 청와대 이전 비용에 국방부 이전과 그 이전에 뒤따르는 이전 도미노 비용이 과연 얼마일까? 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고 얻은 용산에서 청와대처럼 살면 그때 반발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셋째, 필요한 것은 진심으로 국민 곁으로 다가가겠다는 대통령의 결심과 실천이다. 그 비용이 바로 청와대 이전 비용을 대신할 수 있다. 대통령이 자주 언론 앞에 나서고, 국민과 동행하는 행보를 보인다면, 그야말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는 가장 경제적인 청와대 이전, 국민의 가슴 속으로의 이전일 것이다. 더불어 야당은 무조건 새 정부의 청와대 이전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이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었고 그 앞선 같은 당 대통령들의 약속이었다. 이행하지 못한 공약이었음을 안다면, 실천하지도 못할 공약을 번번히 내건 것에 대한 사과가 먼저 있어야 할 것인데, 정작 자신들이 못하던 것을 당선인이 하는 것을 배아파 하는 심술인가? 적어도 야당은 제대로 된 정치적 판단이 있다면 새 정부의 청와대 이전을 돕던지 아니면 침묵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필자는 다시 한번 새 정부의 청와대 이전을 재고해 줄 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정말 이전이 절대적 필요라면, 최소한 일년의 시간을 가지고 차근차근 준비해서 부드럽게 이전해야 한다. 개인도 이사하는 데 한달도 부족한데, 어찌 청와대 이전을 두달만에 끝내겠다는가? 그야말로 보여주기식 행정이며, 정치적 실수이며, 새 정부의 능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차라리 그 힘과 재원을 이미 60만을 넘어선 오미크론 확진자 대책을 세우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너무나 쉽고 단순한 문제를 정략적 판단에 따라, 혹은 인기에 영합하여 일을 저지르면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안게 될 것임을 새 정부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청와대를 국민의 가슴속으로 이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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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2-03-20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정청래 의원의 불교 관련 발언의 교훈’
    기억이 가물하지만 상당히 오래 전 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한국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통일교의 폐해로 인해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자 이를 정부에서 제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실제로 집회 금지 등등의 조치들이 나왔고, 이로 인해 통일교 측과 당국 간의 갈등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사태에 통일교의 편을 들고 나선 것이 묘하게도 미국의 건전한 기독교였다. 이를 대변한 목회자들의 핵심 주장은 ‘정부는 종교의 자유와 신념에 지나치게 관계하지 말라’는 것이다. 종교탄압이 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당신 신학생있던 필자는 매우 분개하였고, 동료들과 이 문제를 상당히 진지하게 토론했던 기억이 있다. 최근 정청래 의원이 불교계를 향한 발언이 정가와 불교계를 뜨겁게 다루고 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정 의원의 발언에 공감하고 있고, 실제로 불사가 있는 산을 등산하면서 입장료라는 명록으로 통행료를 내야 할 때마다 법당 쪽을 쳐다보며 궁시렁거렸던 기억이 있다. 그 산이 불교 재산이고, 그 사찰이 고적임에는 틀림없지만, 먼가 불편했던 마음이 사실이다. 그런데 같은 말인데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듯이 정의원의 발언은 표현상 문제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알기로 정 의원의 거침없는 발언과 센 소신 표현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그러나 그런 화법이 적어도 종교계를 향할 때는 달라야 한다. 정치인끼리 주고받은 화법, 정치적 상대를 향해서 주고받은 화법, 거래 성사를 위해 판깔이용 화법 등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화법이라도, 어른들, 아이들, 청년들, 여성들, 실직자 등등 일명 사회 약자와 소외층을 향한 화법은 이와 달라야 하며, 특별히 종교계를 향한 발언에서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 종교는 현행법보다 우선하는 자신들의 계율을 가지고 있다. 현행법과 계율이 부딪히면 신앙적인 사람은 계율을 택한다. 이런 종교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자신들의 교리와 존재에 대한 사회적 존중과 그에 합당한 예의이다. 종교는 이것이 무시당하지 않는 한 본질적으로 세상(속세)과 부딪치지 않는다. 이것은 어느 종교나 동일한 것이다. 정 의원은 지금 가장 예민한 이 부분을 거침없이 건드렸다. 내가 아는 정의원의 한번도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는 교회 집사이다. 그의 담임목사님은 그를 두고 세상 사람들의 인상처럼 거칠고 무지막지한 독설가가 아니라, 매우 성실한 집사요, 말없이 교회를 잘 섬기고 순종하는 성도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정 의원의 본래의 성품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했다. 그런 정의원의 이번 발언의 충격은 그가 바로 이 경계선을 구분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그는 본성적으로 불교를 폄훼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서두에서 말한 불합리하다는 세간의 지적을 정치적 언사로 거칠게 표현한 것이 불심을 성나게 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불교계는 정의원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들이고, 그와 진솔하게 대화하는 한 차원 높은 종교적 지도력을 보여주면 좋겠다. 정 의원도 불교의 궁극적인 요구가 민주당적을 버리는 것이라면, 그리고 자신의 사과가 진심이라면 당적을 버릴 용기도 가져야 한다. 오늘 기사에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2년만에 정의당에 복당했다. 조국 사태에 대한 정의당에 처신이 반발하여 탈당한 지 2년만에 당의 위기를 보고 돌아온 것이다. 탈당한다고 해서 정 의원의 민주당 사랑을 의심할 사람이 없다. 언제가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오히려 당을 위한 헌신적 결단으로 이해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성난 불심을 잠재울 수 있다면, 그것이 바른 길일 것이다. 그리고 또 종교편향 문제를 들고나오는 불교계는 이것을 자신들의 전가의 보도로 여겨서는 안된다. 공식적이 아닌 대통령의 개인적 신앙활동을 종교편향이라고 몰아가는 것은 다분히 의도가 있다. 대통령이 신봉하는 특정종교에 대한 관계부처의 부당한 우대가 있으면, 이는 정상적인 경로로 바로 잡으면 되는 것이다. 이 갈등이 장기화되는 것은 기독교 선교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유사한 상황이 우리 교회를 향해서도 있지 말라는 법이 없다. 오히려 그 가능성이 기독교에 더 많다. 이때마다 정치인들이 거친 언사로 치고 나오면 우리 목사들도 5,000명 정도 몰려가야 하는 것일까? 다시 한번 정 의원과 불교계의 심사숙고와 한발씩 물러선 이해를 요청한다. 이것이 종교인의 자세요 신앙 덕목이 아닐까? 자비로운 불심에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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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2-01-22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위드 코로나 정책의 실패가 주는 교훈’
    “제발 전문가의 말 좀 듣고, 정치인들은 그 전면에서 물러서라!” 늘 전문가인 것처럼 처신하는 정치인들이 늘 하는 실수를 보면서 하게 되는 자조 섞인 말이다. 그것은 “권력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정치인들의 무모한 자신감 혹은 “모든 구조는 권력의 통제 아래 있어야만 한다”는 족보없는 강변이다. 정치만큼 전문적이고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예술적 요소를 갖춘 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가의 감각과 실력은 정치가 영향력을 미치는 모든 곳에서 그 실패와 성공을 좌우한다. 이런 관점에서 정치가에게서 가장 요구되는 것은 모든 전문적 분야에 산재한 실력자들을 조율 조합하며 최고의 가치를 창출해내는 일이다. 바야흐로 전문가 시대에 정치가의 최고 능력은 전문가들을 여하히 조율, 조합하여 냄으로서 국민복리 증진과 세계 속에 국가의 위상을 당당히 세우는 일이다. 그런데 지음 우리 정부와 권력은 이와 정반대로 가고 있다. 이 말은 가장 수준낮은 정치적 아마추어들이 각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춘 프로들을 제 부하 다루듯이 하고, 그들의 조언과 실력을 한갓 정치적 판단에 맞춤으로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도출함으로서 정치적 무능의 극단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드 코로나 정책 시행 45일만에 18만명 확진, 1,700명 사망이라는 초대형 사고로 인해 급기야 다시 원점으로 되돌린 위드 코로나를 바라보면서 도대체 이 정부의 무능과 부실함이 어디까지인가 궁금할 정도이고, 코로나 방역에 대한 청와대의 진정성과 실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방역은 그 어떤 분야보다도 전문적인 의료행위이다. 의술을 정치적 의도로 사용할 생각이 없는 한, 정치인들은 절대적으로 그들의 조언과 판단을 믿고 수용해야 한다. 이미 섣부른 위드 코로나 정책은 전문가들로부터 우려와 경고를 받았다.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지난 10월 27일 '위드 코로나 시행에 따른 준비와 대책'을 주제로 간담회를 열고 코로나19 방역(COVID-19)과 치료방안 등을 논의했다. 염호기 의협 코로나19 대책 전문위원회 위원장(인제대 서울백병원 내과 교수)은 "전문가들이 위드 코로나로 5차 대유행이 올 수 있다고 염려한다"며 "국내 하루 확진자 수가 2만명까지도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김재석 위원(한림대 강동성심병원 진단검사의학과 교수) 역시 "계절적 요인으로 올해 12월부터 내년 1월 사이에 코로나19 환자 수가 상당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간담회에서는 백신 접종률이 70%를 돌파한 것만으로 위드 코로나를 도입하기엔 시기가 이르다는 염 위원장은 "단순히 백신 접종률이 높다는 이유로 위드 코로나를 추진하는 것은 옳은 방향은 아닌 것 같다"며 "모임의 숫자만 조정하는 기존의 정량적인 방역은 중단하고 과학적 원칙에 따른 정성적인 방역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위드 코로나 전환 단계에서 의료체계가 마비되지 않도록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는 주문도 나왔다. 김 위원은 "일상회복으로 가는 단계에서 환자 수가 증가할 것"이라며 "의료체계가 마비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명백한 전문가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앞장서서 위드 코로나의 장밋빛 정책을 강행했다. 아마 운을 바랐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정말 아마추어 중에 아마추어들이다. 아무리 정치적 환경이 어렵고 대통령 선거라는 매거톤급 정치 이벤트가 있다고 하더라도 세계적 재앙에 시달리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전문의료인들의 냉철한 분석과 처방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뒷받침된 정치적 판단이 뒤따라야 한다. 다시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린 지금이라도 정부는 제발 전문가들의 말을 귀담아 듣고, 그들을 이 문제해결에 전면에 내세우고 제발 정치인들이 이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 진정한 코로나 대책과 정치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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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1-12-19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정권교체론의 시대적 의미’
    연애 중에 첫사랑의 배신이 가장 가슴 아프고, 인생 중에서 믿었던 사람의 배신이 또한 가슴 쓰라리며. 역사 중에서 충신의 배신이 가장 치명적이다. 그래서 배신한 첫사랑에 대한 보복은 때로 잔인한 결과에 이르고, 믿었던 사람의 배신에 대한 응징은 때로 제로섬에 가까운 투쟁을 유발하며, 충신의 간신 짓은 두고두고 후대의 조롱과 놀림이 된다. 지난 날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의 영어의 몸은 배신의 댓가라기 보다 세력 대 세력의 싸움에서 패한 패전지장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패전한 세력의 회복 정도에 따라 그 다음 운명이 결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새로운 울림으로 들리는 정권교체론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일 밖에 없는 것은 이 정권교체론의 근저가 적대 세력이 아닌 과거 촛불 세력, 즉 지금의 정권 수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민심의 이반이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태 앞에서 집권 여당은 지지세력의 이탈과 민심이반에 대하여 심각한 고민과 처방을 찾아야 하는데, 여전히 대통령은 자화자찬에 몰두하고, 참모들은 간신배성 아첨 경쟁에 치열하고, 당은 당대로 거대한 의석의 힘을 믿고 여전히 태만한 바, 그 이탈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결국 국민은 정권교체라는 권리를 내밀며 대안을 찾기에 이른 것이다. 필자는 진심으로 이 정권이 성공적으로 권력을 이양하고, 공과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통해 다음 정권이 국가의 미래를 위해 헌신할 것을 기대한다. 지금 이재명 후보의 태도는 국민의 분노와 의혹을 불러일으킴에 모자람이 없다. 대장동 문제에 대한 특검에 동의했으면, 깨끗하게 이를 추진해야 한다. 그러나 야당 후보를 같이 물고 들어가는 모습은 추하다 못해, 겨우 이 정도의 후보가 집권여당의 후보이고, 이런 후보를 엄호하기 위해 전혀 논리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버티는 여당 인사들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지금 국민은 국민의 당과 그 후보에 대한 호불호 평가의 결과를 갖지도 않은 채, 이미 이재명 후보에 대한 심정적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사태가 이럼에도 대안이 없이 뚝심과 어설픈 정면돌파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더욱 국민을 분노하게 만든다. 이에 민주당과 이재명 후보는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허물에 대해 정직하고 진솔한 해명으로 국민의 가슴으로 파고 들어야 한다. 우리 국민들의 정치적 수준과 의식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자기 진영에 있는 절대 충성파들의 말만 들으면 이미 선거는 끝난 것이다. 충성파는 진정한 충언을 하지 않고, 오로지 상대를 격파해야 한다고만 주장한다. 이것이 충성으로 망가뜨리는 반역이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은 이런 충성파들이 여전히 후보를 감싸고 있고, 후보 역시 이들의 가마 위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다. 버려야 얻는다. 충성파를 버려도 어차피 그들의 표는 다른 데로 갈 데가 없다. 버리라는 의미는 그들을 등지라는 말이 아님을 너무도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버릴 용기가 없고 버릴 수 없다는 것은 이미 그 마음 속에 패전을 예상하고 있고, 그 패전 이후를 위해 그들이 제공한 가마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패배주의자들의 슬픈 가면극이며 무의미한 객기가 보인다. 살펴보면 비록 패하더라도 국민 속에 깊은 여운으로 남아 차기라도 기약하려면, 적어도 그 사람은 자신의 실수와 허물에 대해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라는 인상이라도 남겨야 한다. 이재명 후보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정상인들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지를 살피고 이들과 분리되어야 한다. 만일 이런 무뢰배들과 분리될 수 없다면 그는 이번 대통령 후보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것이 적어도 국민에 대한 예의이며 그나마 차기라도 기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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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1-11-21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가오없는 비겁한 자의 정면돌파론’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수갑 차고 다니면서 가오 떨어질 짓 하지 말자!”. 그 유명한 영화 ‘베테랑’에 나오는 말단형사 서도철(황정민 분)의 한 대사다. 행동파 형사인 ‘서도철’은 큰 사건 하나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승승장구하던 중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 생각하는 막무가내 재벌 3세 ‘조태오’를 만나 끝까지 ‘조태오’를 뒤쫓아 수사하며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재벌 3세 조태오의 패륜과 무개념은 돈과 권력으로 포장된 악인의 전형이다. 요즈음 우리가 정계로부터 여야를 막론하고 ‘정면돌파’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정면돌파란 전투용어이다. 서로 대치 국면에서 아군의 승리를 전제로 한 피치못할 마지막 전략적 선택이다. 좌고우면할 여유가 없고, 불필요한 힘의 낭비가 없이 가장 효율적으로 치고 나가는 최종적인 선택이다. 이런 용어가 정치판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 이런 위험에 처한 인물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군사적 의미에서의 정면돌파는 아군을 보호하고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최종적 전략이라면, 정치판의 정면돌파는 주로 대형 부정부패나 스캔들, 비교적 지저분한 일을 당한 자들이 정의와 정당성을 위장한 비겁한 자들의 수사에 불과했음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이때까지 정면돌파를 시도한 이들의 귀결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군사정권이 자신들의 정권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하여 ‘정면돌파’ 방식으로 자신들의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 정면돌파의 주인공들은 모두 줄줄이 영어의 몸이 되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면돌파가 멋있어 보이지만 최종적이고 공익적인 차원이어야 한다는 것을 당사자들은 알고 있을까? 정면돌파 이전에 관련된 사람들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해명과 해법이 분명히 있을 텐데 정치권의 정면돌파는 소위 ‘뚝심과 배짱’이라는 전혀 상관없는 개념들과 짝을 이루고 있다. 특별히 정치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대형 악재를 만나면, 어떤 정치적 타협이나 대안을 통해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소위 나름대로의 원칙과 소신을 앞세워 ‘정면돌파’를 선언하곤 하였다. 필자의 눈에는 비겁한 자들의 화려하고 힘찬 언어적 유희에 불과하다. 근자에 대통령 후보들 가운데 ‘정면돌파’라는 표현을 사용한 후보들이 벌써 몇명이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들은 정면돌파로 대중의 의심과 관심을 무너뜨리고 일거에 사건을 덮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설명하고 해명해야 할 일들이며, 나아가 조사받고 수사받아야 할 사안들이다. 이런 것들을 ‘정면돌파’라는 어줍잖은 군사적 용어를 정치적 용어로 희화화하는 비겁함을 버려야 한다. 적어도 그것은 정치인의 태도는 아니다. 이제 민주당 후보로 정해진 이재명 후보는 ‘대장동 사태’에 대하여 적어도 ‘정면돌파’라는 용어를 사용하거나 그런 개념으로 이 일을 대응해서는 안된다. 연일 메스컴에서 이와 관련된 새로운 의혹들이 보도되고 있다. 이 일에 대하여 이재명 후보가 자신의 말대로 당당하다면, 정면돌파가 아니라,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지위에서 속히 경기도지사 직을 내려놓고 성실하고 진지하게 수사든 특검이든 받아야 한다. 그런 당당한 태도를 보고서 국민들은 이재명을 후보다운 후보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정치인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정치적 가오는 있어야 한다. 그것은 국가적 애국과 애민에 바탕을 둔 정치적 대의명분이다. 지금 각 당의 후보들에게서 정치적 가오를 보기가 힘들고, 나아가 비겁한 자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이제 국민의 힘 후보가 결정되고 양당이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대장동 사태가 어떤 위력을 발휘할지 알 수 없지만, 이것으로부터 이재명 후보가 안전하기 위해서는 그의 정치적 가오를 보여주는 길 외에는 없다. 정면돌파 식은 아니다.
    • 칼럼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1-10-16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더럽고 지저분한 선거를 보고 있다’
    자고로 대통령선거는 그 치열함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의 최고 권력자를 국민이 선출한다는 면에서 신나는 축제의 마당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어떻게 나라를 발전시키고 국민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살맛나는 세상을 구현해 줄지에 대한 후보자들의 열띤 토론을 보고 즐기는 것이 선거권을 가진 평범한 국민의 권리이다. 그런데 이 즐거움을 위한 기본 전제들이 있다. 그것은 후보자들의 지녀야 할 도덕성과 전문성이다. 먼저 도덕성은 선수가 링에 올라오기 전에 정리해야 한다. 당 후보 선발전부터 자체적인 검증 시스템을 통해 걸러내야 한다. 무소속이 아닌 이상 당은 자당의 명운을 걸고 도덕적, 법률적 하자를 어떻게든 걸러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여야를 막론하고 그런 검증 절차는 애시당초 무시되고 선정적이고 유치한 말장난으로 편가르기식 정치로 충성도 높은 지지층을 확보한 특정인들이 높은 지지도를 바탕으로 당 후보로 무혈 입성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당원이며 당연히 출마할 자격이 있지만 그것도 난립한 군소 정당이 아니고 집권당과 제1야당의 후보선발전이 이 정도이면 기분좋은 선거 축제를 치르기는 연목구어(緣木求魚)일 것이다. 단순히 적극적 지지자들의 높은 충성도로 인해 사전에 걸러내지 못하면 승부를 떠나 이를 바라보는 국민적 근심의 원인이 된다. 이런 검증의 책임은 일부 언론에도 있다. 언론 나름의 취재력을 바탕으로 후보로 거명되는 자들의 도덕적 문제들에 대하여 치열하게 문제 제기를 해야 한다. 두번째 전문성이다. 리더가 모든 면에서 탁월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대통령으로서의 전문성은 (1)인재를 보는 탁월한 능력과 (2)국정의 조정 관리 능력, 그리고 (3)통치적 언어 구사력이다. 인재를 가려 쓸 줄 아는 능력에 관하여 적어도 거의 모든 정부에서 실패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링컨처럼 핵심적인 정적을 불러서 핵심 장관에 앉히는 그런 대통령을 보지 못했다는 말이다. 두 번째 사태 관리 조정능력은 그 간의 그의 행적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세 번째로 제시한 통치적 언어 구사력이다. 이것은 대 국민, 대 언론, 대 외교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촉새같은 입방정도 문제이지만, 페이퍼를 읽는 수준이면 곤란하다. 그리고 설화를 일으킬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진 인물을 정말 곤란하다. 그의 한마디가 국내외에서 파장을 일으키고, 사회적인 공포와 불안, 경제적인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 또한 단순한 외교적 마찰을 빚을 수 있고, 최악의 경우 전쟁을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여, 야 모두 대통령 후보 선발전을 보면서 더럽고 지저분해서 두고 볼 수가 없다. 조폭 두목 뽑는 것도 아니고, 초등학교 반장 뽑는 것도 아닌데, 차라리 조폭들은 자기들 방법이 확실하고, 반장은 어설프지만 나름대로 그리고 선생님 지도를 착실히 받기라도 한다. 그런데 지금 여야는 경우도 없고, 룰도 없고, 원칙도 없고, 서로 잘났다고 쌈박질하는 꼴에 국민들은 아예 안중에 없는 모양이다. 지금은 다들 좌와 우, 진보와 보수 등으로 편이 갈려 서로 자기 의중에 있는 사람의 허물을 감추고 상대방 허물은 잔인하게 드러내 침소봉대하기를 예사로 하면서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몸서리치게 무서운 생각은 그 싸움의 결과가 가져올 비참한 결과이다. 도덕성과 전문성을 결여한 채, 오직 대중적 인기와 충성도 높은 적극 지지층들의 지지를 받은 사람이 대통령이 될 경우,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을 상상해 보면 더 이상 이 땅에는 희망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예선전이 이 정도이니 본선에 가면 어느 정도일까? 그야말로 생사결단의 대전이 벌어질텐데 그때도 경험해야 할 이 더럽고 지저분한 기분을 또 어찌할까? 결국 그것을 끝내고 심판할 사람은 역시 나, 즉 유권자들이다. 더럽고 지저분한 기분을 누르고 눈을 부릅뜨고 도덕성과 전문성을 갖충 후보를 찾아내야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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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1-09-05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이준석 대표, 맞지만 경솔하다’
    국민의 힘이 당대표 경선을 통해서 세계정치사에도 드문 혁신적 사건을 도모하고 성취한 것에 대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박수와 격려를 보냄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젊은 대표의 등장으로 기대하고 있는 정치적 염증에 지친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해줄 젊은 대표를 향한 기대도 결코 숨기려 하지 않는다. 그 동안 그가 보여준 삶의 궤적이 그에 대한 지지가 단순한 바람이 아님을 설명하고 있음에 충분한다. 그런 그의 취임 이후 행보는 대단히 신선한 충격이었고 더 큰 기대를 가지게 하도록 만들었다. 대변인을 베틀을 통해 뽑겠다는 발상 자체가 신선했고, 이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시대의 요구를 읽을 줄 아는 그의 지혜를 또한 귀히 보았다. 따릉이를 타고 등원하는 모습이 연출 같이 보이지 않았고, 만나는 사람마다, 그것도 서열상 한참 아래인 인사를 만나도 언제나 깍듯한 90도 폴더 인사로 만나는 것도 꾸며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단숨에 늙은 꼰대당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던 국민의 힘이 젊고 힘차면서도 겸손하고 실력있는 당으로 이미지 변신을 하는 데 성공한 것 같다. 그런데, 이 대표를 향한 어른들의 걱정, 짧은 경륜과 경박함에 대한 염려를 거두기에는 아직 미숙함이 보인다. 필자가 집고자 하는 이 대표의 약한 점은 기성 정치인들보다 더 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젊고 한 나라의 제1야당을 책임진 대표로서의 언행은 다른 기성 정치인의 언행과 같은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 더구나 대선을 앞둔 현실에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생각하지 못했던 풍파를 몰고 올 수 있고, 그 간의 신선한 변화를 단숨에 묻어 버릴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는 여가부와 통일부의 폐지를 주장했다. 원론적으로 맞는 말이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있는 현대 사회의 기조에 맞고, 업무의 효율성 측면에서도 맞고, 세계에서도 유일한 부서를 갖는 광대스러움을 벗어나는 면에서도 맞다. 외교와 통일은 같은 부서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여성와 청소년의 문제는 복지와 교육의 영역 안에서 교감되어야 한다. 이것을 분리하고 부딪히면 결국 혼란과 사회적 비용만 초래할 뿐이다. 그리고 내년 새 정부는 이 틀로 가야 맞다. 그런데 왜 이런 이 대표의 발언이 부정적인 파장을 몰고 올까? 그것은 지금 그가 이런 발언을 할 정도의 내공을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런 화두는 같은 당 중진에 의해 던져지고 여론의 흐름을 살피는 노련함이 아쉬운 것이다. 당 대표의 의견은 그 당 내부에서 합의된 마지막 결정이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한 의원이 던질 수 있는 문제제기가 당 대표에 의해서, 그것도 내부 논의 없이 불쑥 던지는 것은 곤란하다. 만일 이것이 개인 이준석이 방송에 출연해서 던지 화두라면 참으로 진지한 갑론을박이 있었을 것이다. 켤코 지금과 같은 문제는 고상하고 상당한 지지와 성원을 받았을 것이다. 또 코로나 지원금에 관하여서도 당론을 무시하고 불쑥 여당 대표와 전국민 지급을 합의했다가 곧장 이를 뒤집는 경우는 더 곤란하다. 이로 인해 국민의 힘 내부로부터도 비난을 받고 상대로부터 조롱을 받았고, 국민들로 부터도 “뭐야?”하는 뜨아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이해할 것이다. 필자를 포함한 국민은 이 대표의 성공을 통해 국민의 힘이 개혁과 혁신을 완수하고, 개인 이준석도 더 큰 정치인으로 성장해 줄 것을 간곡히 열망하다. 정치 인재가 부재한 이 시대에 작은 경솔함으로 이런 인물이 망가지면 그 손실이 얼마나 크고 아프겠는가? 그렇게 되려면 이 대표는 앞으로 두가지, 단순하지만 국민의 준엄한 명령이요, 기대로 받아서 명심해 줄 것을 부탁한다. “이준석 대표, 말하기 전에 협의하십시오. 내뱉은 말에 정직하십시오..”
    • 칼럼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1-07-17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이준석 돌풍을 바라보는 교회의 생각’
    국민의 힘 당대표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승리한 이준석 대표를 바라보는 각계 각층의 생각이 복잡하고 심란한 듯하다. 칭찬하고 박수치자니 그의 짧은 경륜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고, 같지 않는 꼰대들을 생각하니 자다가다도 벌떡 일어나 꼭 이기라고 응원하고 싶은 심정이 이 사태를 바라보는 세대를 막론한 시대양심의 생각임에는 틀림없다. ‘이준석’이라는 개인에게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0선의 38세 미혼 청년을 향한 열광은 기형적이고 왜곡된 사회병리 현상에 실망하고 좌절한 이들의 분노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뚜렷한 정치투쟁 경력은 고사하고 지방의원의 경험도 없는 그가 이런 일으킨 태풍의 이유는 기성세대의 꼰대질에 절망한 젊은이들의 반란이며, 변화와 가능성을 기대했던 기성세대의 정부를 향한 배신감이다. 현 정권에 대하여 열정적 지지를 보냈던 전 연령층에서 일제히 등을 돌린 이 무서운 현상이 이를 증명한다. 분노와 절망의 근본적인 문제점과 증상은 심각하고 두려운데,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증상의 책임자들은 전혀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들은 잘하고 있으니, 젊은이들의 저항을 설익은 과일 정도로 취급하고, 기성세대의 치열한 질문에는 패거리적 정치로 응전하는 몰염치와 적반하장에 놀랄 뿐이다. 180여석에 가까운 의석을 믿고 내로남불하여 힘으로 밀어붙이다가 완패한 지난 보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고만장한 집권당의 그 용기가 정말 눈물겹게 가상하다. 이제 이들을 정리해야 할 때가 되었고, 민심은 지금의 리더쉽을 물리고, 정당하고 공정한 민주주의의 가치와 질서를 회복할 새로운 리더쉽을 요구하고 있다. 비단 이런 현상이 정치권에만 있을까? 또 젊은이들이 움직이는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친 그들의 반란을 기성세대가 감당할 수 있을까? 아무리 후하게 쳐주어도 이 젊은 반란을 진압할 힘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이준석 현상을 바라보는 교회 지도자들의 생각은 어떨까? 교회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젊은 크리스천들, 단순히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대적 공격으로 나서는 그들에게 교회 지도자들은 어떻게 응답할까? 그렇다고 기성교인들은 만족하고 있을까? 분명히 그들도 고루한 교회 지도자들을 향하여 의미 있는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서서히 구체화되고 있는 젊은 크리스천들의 반란을 수습하고 감당할 수 있을까? 무엇을 내세워 무력화 시킬까? 지금까지 교회 개혁을 요구하며 용감하게 맞섰던 이들을 가차없이 제거해온 한국 교회가 거센 파도, 들불처럼 일어날 젊은 크리스천들의 도전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결국은 절망적이라는 필자의 생각에 달리던 필이 잠시 멈춘다. 더 큰 문제는 이준석처럼 거세게 나설 용기있는 젊은 크리스천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는 청년들의 발언대를 빼앗고, 무시하고, 그들의 저항을 꼰대 권위로 교회밖으로 내몰았다. 결국 그들은 떠났고, 교회 밖에서 방황하고 있다. 청년들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필자와 같은 이들의 목마름이 격해지는 순간이다. 한국교회의 이준석은 없고, 앞으로도 가능성조차도 없다는 현실이 답답하다. 지금이라도 그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책임과 권한을 주면 안될까? 언제까지 그 높고 거룩한 자리는 종교 꼰대들의 전유물이어야 하는가? 0선의 38세 미혼 청년이 대한민국 제1야당 대표의 가능성을 드높이는 이 시대에 여전히 7,80년대 교회 성장신화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꼰대들의 놀이터에 터질 수류탄이 준비되면 좋겠다. 그래도 기도하기는 그 수류탄이 터지기 전에 그 놀이터에 청년들의 거칠고 서툰 음성이 들렸으면 너무 좋겠다. 그렇게 변한 놀이터에서 젊은이와 기성세대가 함께 어우러져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어갔으면 정말 좋겠다. 이런 생각이 샘솟고, 필(筆)은 달린다.
    • 칼럼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1-06-14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LH공사 해체?, 징벌적 해체가 답이다’
    정부가 일부 직원들이 LH공사 내부 정보를 이용한 땅 투기로 인한 국민적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LH공사를 지주회사(공단)와 자회사로 나누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내용은 (가칭)주거복지관리공단을 설립하고 자회사 관리, 매입임대, 전세임대 등 비수익사업을 담당하고, 자회사는 3개로 분리하여 주택, 토지, 도시 재생을 담당하는 자회사, 산엄단지 조성, 해외 사업 등 비핵심업무를 담당하는 자회사, 임대주택 관리를 담담하는 자회사 등으로 나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내용은 당정협의를 거쳐 이달 안에 발표할 예정이고, 협의 과정에서 바뀔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직해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대수술을 하면서도 2.4대책 등 공공 중심의 주택 공급계획에 큰 차질을 빚지 않도록 절출한 모색한 결과라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 안이 현재의 국민적 분노를 누그러뜨릴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한명의 공단 이사장에 세명의 자회사 사장이 생기는 지극히 업무 비능률이 눈에 보이는 조악한 개편이요, 더 심하게 말하는 국민의 분노를 악용한 자리 만들기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문제가 LH공사를 해체한다고 해결될까? 그 역시도 국민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LH직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감찰과 징계, 그리고 그렇게 얻은 소득에 대한 징벌적 환수 등등 그야말로 필수적이고 실효적인 대책은 4.3지방선거 끝나기가 무섭게 사라지고 느닷없이 등장한 조직 개편안으로 이 일을 종말지으려고 하는 것에 분노한다. 이제 어느 국민도 정부의 정직성을 믿지 않으며 어떤 개혁도 선량한 개혁으로 보지 않는다. 검찰 개혁에 정권의 운명을 걸다시피해서 이룬 결과가 결국 자신들을 수사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수사하더라고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기구에서 수사하도록 만드는 것을 보고 대경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가장 불공정하고, 가장 불합리하며, 가장 정의롭지 못한 정권이라는 오명을 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죽했으면 콘크리트 지지층인 젊은이들이 대거 이탈하고, 야당의 텃밭인 호남마져 전례없는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을까? 지금 이 정권의 실책은 영호남을 넘어서는 것이요, 남녀노소의 구별없이 분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상하게 서민의 분노를 참된 개혁과 바른 정치로 보답하겠다고 자임한 촛불정신의 정권이 이렇게 허무맹랑할 수가 있는가? 부자는 더욱 부자되게 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오직 집 한 채를 꿈꾸는 젊은이들을 좌절시킨 이 무능한 정책은 도대체 어느 교활한 인사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인가? 문제는 사람이다. 유능해야 하며 동시에 청렴해야 한다. 적어도 일반 시민의 도덕적 가치보다는 높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공직자들, 특히 남다른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공무원들의 공직의식은 탁월해야 하며, 그들의 고의적인 과실에 대하여서는 더 엄중하게 그 책임을 끝까지 물어, 그것으로 취득한 모든 이익은 갑절로 환수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나아가 그들의 이러한 몰지각한 행각은 그들의 윗선의 이해 없이는 불가능한 바, 고위 공직자들의 공직의식에 대한 문제도 심각히 고민해야 한다. 이것이 청문회의 주요 목적이다. 청문회에서 도덕성을 비공개로 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부터 살펴볼 일이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의 지도적 인사들의 과거는 도덕성의 성적표가 좋지 못하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대두분이 개발 시대에 국민 대부분이 관습적으로 묵인된 행태들임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문제가 된다고 반발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금 가려고 하는 직이 그런 허물들을 다스려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다시한번 LH공사 관련 정부 방안을 심도있게 고민해서 진정한 해체에 버금가는 징벌적 조치들이 마련되기를 강력히 촉구한다.
    • 칼럼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1-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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