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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후회함 없이, 물러섬 없이, 아낌없이”
    드디어 우리는 새해 첫 주를 맞이하였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성도들은 송구영신 예배를 드려서 새해 첫날을 주님과 함께하였습니다. 그런데 주일로는 우리가 첫 주를 맞는 것입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새해 첫날을 맞을 때는 설렙니다. 그것도 성도라면 첫 주일이 더 설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새해를 앞두고는 엄청난 부담감이 들어옵니다. 그것은 35년간 해왔던 송구영신 예배와 신년축복성회 때문입니다. 보통 대부분의 교회는 0시에 한 번 예배를 드리거나 아니면 밤 10시 정도에 미리 예배드리고 끝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성도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저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송구영신 예배와 신년축복성회가 새에덴의 브랜드가 되었고, 저의 목회의 거의 절대적인 가치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송구영신 예배를 한 번 드리니까 본당에 접이의자를 놓고, 빈 통로까지 앉아야 하고, 비전홀과 교육관까지 넘쳐서 성도들에게 불편을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송구영신 예배를 1부, 2부로 나누어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1부 예배부터 꽉꽉 차는 걸 보면서 성도들을 배려하기 위해 앞으로는 3부로 나누어서 드려야 하나 그런 고민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물론 송구영신 예배로만 끝나면 또 얼마나 좋겠습니까? 신년축복성회 설교를 적어도 7편, 8편을 준비해야 합니다. 똑같은 성경 내용이지만 어떻게 새롭게 접근하고 옷을 입혀서 성도들의 마음에 어프로치를 할 수 있는가, 이런 창의적 설교를 준비한다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신년축복성회 뿐입니까? 그게 끝나고 나면 당장 장년여름수련회 설교에 대한 부담이 오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교회를 지탱해 주는 큰 두 기둥이지만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힘들게 하지 말고 외부강사를 초청하면 되잖아요!"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고, 어색한 집회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미 새에덴의 린치핀(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연말은 너무 바빴습니다. 왜냐하면 한꺼번에 ‘뉴트로 전략, 핵 처치’,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라는 두 권의 책을 냈습니다. 그리고 북콘서트까지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총 9편의 설교를 준비한다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또 욕심이 많아가지고 원고를 작성하면 넘쳐서 흐릅니다. 그러니까 원고를 줄이고 짧게 전하려고 하니까 수정작업이 또 필요한 것입니다. 요즘 현대인은 시간이 길어지면 자칫 지루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원고를 줄이고 줄이며 계속 수정하였습니다. 게다가 두 번의 송구영신 예배 때 제가 개인적으로 안수기도해 준 사람만 수천 명이 넘을 것입니다. 또 예배 중간중간에 특별기도 받으러 온 사람들 수십 명을 위해 기도해 주고 강단에 올라가면 진짜 마지막 날은 심장이 뻐근하고 현기증이 팍 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 설교를 했는데 머릿속에 사라지지 않는 제목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바로 “후회함 없이, 물러섬 없이, 아낌없이”라는 제목입니다. 영신예배 설교 제목인데, 선교사 윌리엄 보든의 말이기도 합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그래도 선교지에서 후회함 없이 물러서지 않고 아낌없이 자신의 인생을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짧은 인생을 살면서도 그런 말을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었지 않습니까? 이게 지금도 계속 머릿속에 맴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많은 기회를 주셨다면 우리도 후회 없이, 물러섬 없이, 아낌없이 살면 좋겠습니다. 저도 생명이 있고 건강이 있는 한 후회 없이, 물러섬 없이, 아낌없이 새에덴의 린치핀이 되어 송구영신 예배와 신년축복성회, 장년여름수련회를 끝까지 이어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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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1-07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논평] 강성률 목사의 ‘셈하자’(눅 16:1-13)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허비한다는 것은 조금만 소비해도 되는데, 많이 소비하거나 소비해서는 안 될 곳에 소비한다는 것입니다. 청지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것같이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공금횡령이 됩니다. 그러자 평소에 청지기를 믿고 일을 맡겼던 주인은 그러한 청지기가 의심스러워서 장부를 정리해서 넘겨달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썼는지 감사가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신앙인들에 대한 비유입니다.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자신의 것이 없습니다. 모두 받은 것입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 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4:7). 우리는 모두 받았습니다. 우리의 몸도, 두뇌도 받았습니다. 재물도 받았습니다. 직업도 받았습니다. 은사도 받았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우리가 만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셨으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간도 받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연장되는 것 역시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허비하고 있습니다. 허비란 무엇일까요? 주님을 위하여 쓰지 않는 것은 모두가 허비입니다. “셈하자.” 하는 것은 주인의 소유가 허비되니 그것이 사실인지 조사해 보자는 것입니다. 나아가 소문대로 허비하였다면 허비했던 것들에 대하여 보상을 요구할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들을 어떻게 사용하였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쓰셨습니까? 아니면 자신을 위하여 쓰셨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쓰지 않았다면 그것은 허비되는 삶이었습니다. 허비하고 사는 사람과 주인의 것을 합당하게 쓰는 사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울이 왕이 된 것은 자신 스스로 잘 나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직접 다스리는 대신, 사울에게 위임하신 것입니다. 사울이 오직 할 일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진멸하라고 하신 아말렉을 진멸하지 않고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겼습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삼상15:11).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지만, 사울이 세움 받은 왕으로서 합당하게 하지 않고 제 뜻대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파면당하고 다윗을 세운 것입니다.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행13:22). 다윗을 왕으로 세운 것은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버리고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이 헛된 삶입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은 “셈하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를 보면 많은 능력을 가진 분이지만 자신을 위하여 신적인 능력을 하나도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셨으면 돌이 떡이 되게 하실수도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하나도 아프지 않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열 두 군단도 더 되는 군대를 불러 올 수도 있었습니다(마26:53).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실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구름 위로 가실 수도 있었습니다(요4:3,4).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도 자신을 위하여 신적인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고 사람들이 당하는 모든 고통들을 당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인들을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하고 임의대로 살아가는 삶은 모두 헛된 삶입니다. 반면에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영광을 주십니다. 그 영광은 세상이 주는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마귀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자기를 이길 수 있는 영광의 힘입니다. 새해에는 자신에게서 나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전심전력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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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2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나만의 유레카, 파이팅”
    저는 34년 동안 한 번도 안 빠뜨리고 신년축복성회를 해왔습니다. 초창기에 신년축복성회를 하는데 저의 의욕감이 얼마나 불탔는지 모릅니다. 더구나 어떤 분이 말씀에 은혜를 받고 천만 원을 헌금하신 것입니다. 그때 돈 천만 원이면 지금 우리 교회로서 10억이 넘는 큰 헌신입니다. 그렇게 말씀의 은혜와 헌신의 역사가 일어나면서 처음에는 열정과 패기와 의욕감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묵직한 집회가 된 것입니다. 어느새 장년여름수련회와 더불어서 우리 교회의 문화가 되고 기둥이 된 거죠. 그런데 오래 하다 보니까 점점 부담감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끔 두 가지 마음이 생겼습니다. “내가 꼭 이렇게 해야 되는가. 외부강사를 모셔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그런데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문화를 바꾸기에는 너무 어설프고 어울리지 않는 시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모든 집회를 인도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은혜인 것은 신년축복성회 전에는 몸살이 와도 신년축복성회 때는 몸살이 나아 버린 것입니다. 안면마비도 신년축복성회가 끝나고 왔습니다. 몇 년 전 장년여름수련회 때 신장결석이 왔지만 마약진통주사를 맞으면서까지 고통을 이겨내고 제가 집회를 끝까지 마쳤습니다. 앞으로도 제가 어떻게, 언제까지 직접 인도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장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5년 후가 마지막일지 10년 후가 마지막일지, 누구도 장담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끝까지 할 것입니다. 올 연말은 왜 그렇게 바빴는지 모릅니다. 저는 현 총회장도 아니고 연합기관 대표회장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바쁠 수가 없었습니다. 특별히 이번에는 연말에 두 권의 책을 냈지 않습니까? ‘뉴트로 전략, 핵처치’라는 미래목회 전략서와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라는 감성 시집을 냈습니다. 감사하게도 교보문고 시집 부문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연말 교역자정책수련회를 하고 그 와중에도 신년축복성회 말씀을 다 준비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스스로 “유레카!”를 외친 것입니다. 유레카는 고대 수학자인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의 원리를 깨닫고 난 후에 했던 외침인데요,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유레카!”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고민은 차량 임차 문제도 있고 해서 설교 분량을 어떻게 압축해서 짧게 할 것인가입니다. 원고를 줄이고 줄이고 또 줄이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원고를 줄이려고 읽고 또 읽으면서도 계속 “유레카!”를 외친 것입니다. “아, 내가 이런 설교를 준비하다니...” 늘 우리가 읽고 알고 배우는 말씀이지만 새삼스럽게 말씀을 준비하고 정리하다 보니까 “유레카!”의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이번 송구영신예배와 신년축복성회에도 우리 성도들에게 유레카가 터지고 유레카의 탄성을 자아내는 집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한 주간 방학했다 생각하시고, 또 교육받고 훈련받는다 생각하시고, 아프지도 말고 꼬박꼬박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대신 여러분들은 방심하고 아무 사람이나 만나러 다니고 분주한 모임을 갖다가 독감이나 코로나에 걸리지 않길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꼭 참석해 보세요. 새해에는 새로운 태양이 뜨고 여러분의 삶을 새롭게 하는 유레카의 은혜, 유레카의 축복이 임하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새에덴 성도들이여, 나만의 유레카 파이팅! GO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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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31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사 40:31)
    인생의 어두움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어두운 문제를 만날 때 누구나 불안과 무력감과 절망감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현실 앞에 무능한 모습이 아니라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가능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나의 현실의 장벽 앞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고, 무엇에 기대를 걸고 새 힘을 얻으려고 하는지에 대해 자신을 깊이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의 시선은 하나님께 고정이 되어 있어야 시험에 들지 않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주바라기’가 되십시다. 고통의 절벽만 바라보지 말고, 그 고통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 볼 때에 어둡고 힘든 일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앙망하다’란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 혹은 ‘위를 쳐다보면서 대망하다’는 뜻입니다.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며 큰 소망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위기, 원수, 한계를 만날 때 낙심하고 불안에 떨어서는 안 됩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을 의지하여 영광을 나타내십시다. 고통 중에서 세상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앙망함으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시험이 오더라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해야 하는 자가 신앙인인 것입니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소망을 잃고 미친 듯이 방향을 잃고 목표를 잃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참된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며, 그들이 참된 소망을 붙잡고 살아가도록 기도해주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가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 소망은 미래를 바꾸는 그림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는 영안과 영의 귀를 가지고 있는 한 어떤 위기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신앙의 힘은 이처럼 위대한 것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힘은 죽음까지도 넘어설 수 있는 힘입니다. 그 힘은 어떤 바람이 불어도, 어떤 박해가 와도, 어떤 환경에 접어들어도 독수리처럼 올라가게 할 수 있는 힘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깨닫지 못하고 원망과 불평의 소리가 납니다(고전 10:10), 또한 인생이 답답하고, 지루하고, 재미없게 느껴지고 살맛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주저앉지 마시고, 하나님을 우러러 바라보셔서 새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새 힘을 받으면 원망도 불평도 사라집니다. 그리고 어떠한 역경과 시련 중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즐거움과 원동력은 바로 여호와를 기다리고 의지하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힘든 문제가 산처럼 둘러싸고 있을지라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앙모하는 자에게 새 길을 주시고 새 방법을 주십니다.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게 해주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십시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날마다 새 힘을 주셔서 어떤 역경에서도 승리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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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8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예수님 사랑, 나라 사랑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몰라도, 저는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줬던 사람들을 잊지 않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성품인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도 역대 대통령들이 보내온 선물을 한 번도 뜯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올챙이 시절에 은혜를 베풀어주신 분들에게 다 보내드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나름 품격 있는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보은(報恩)이란 한 개인의 품격을 나타내주기 때문이죠. 그런데 우리 교회는 해마다 6월이 되면 해외에서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초청해 왔습니다. 비행기 표와 숙박비 일체를 우리 교회가 담당하며 5박 6일 동안 섬겼습니다. 또한 국내 참전용사들도 우리 교회로 모셔서 식사 대접을 하고 금일봉을 드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는 국가의 품격을 높이는 교회로 쓰임 받아 왔습니다. 보은(報恩)이 한 개인의 품격이라면 보훈(報勳)은 한 국가의 품격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진국일수록 보훈정신과 문화가 함양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보훈청이나 보훈병원에서는 새에덴교회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 교회의 초청을 받고 다녀간 참전용사들이 하도 입소문을 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미국에 가서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할 때는 그 지역의 보훈병원을 꼭 방문하고 오거든요. 이러한 보훈 사역의 공적을 평가받아서 2015년에는 제가 개인 자격으로 보훈문화상을 받았고, 이번에는 우리 교회가 단체로 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목사로서 보훈문화상을 받은 사람도 최초이지만, 교회가 단체상을 받은 것도 최초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제가 개인상을 받았을 때는 보훈처장의 이름으로 받았지만, 이번에는 보훈부로 승격이 되어 보훈부 장관 이름으로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매경미디어그룹 회장과 함께 공동으로 주는 상이지만요. 박민식 보훈부 장관님과 장대환 매경미디어그룹 회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해마다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위하여 헌신해 주시고 기도해 주신 성도들께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참전용사 초청행사 준비위원들, 특히 김종대 장로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장로님은 후두암에 걸려서 행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 중에도 이메일을 사용하여 지금까지 행사를 섬겨 오셨습니다. 저는 이런 수상소감을 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서 피와 땀과 눈물을 쏟으며 희생하신 애국선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의 경제 번영과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보훈 의식을 가지고 한국교회 최초로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시작하여 17년간 해 왔으며, 보훈 정신을 고양하는 다큐멘터리 제작과 캠페인을 선도해 왔습니다. 저희 새에덴교회는 정말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겨왔는데, 국가보훈부에서 보훈문화상 단체상이라는 큰 상을 주셔서 너무나 감사하고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으로도 보훈문화를 선양하고 확산시키는 일에 더욱 앞장서겠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지금까지 물심양면으로 함께해 주신 새에덴교회 성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행사가 끝나고 나니 수상을 축하해 주는 듯 하얀 눈발이 날리고 있었습니다. 17년 동안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하게 저와 함께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섬겨준 새에덴 성도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애국이라고 하는 것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실천하고 삶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애국은 이념 논리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수한 애국은 편 가르기에 앞서 보훈 사상을 높이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념적 애국보다는 성경적 애국, 예수님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의한 애국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예수 믿는 것이 곧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고,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지 않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사랑해서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새에덴교회가 되고 성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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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12-24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여의도 사투리와 한동훈의 화법’
    결국 일은 이렇게 흘러가도록 되어 있었다. 지나친 자존의식과 왜곡된 우월의식, 그리고 펙트보다 표풀리즘에 생리적으로 익숙했던 선동, 또 억울하게 정권을 빼앗겼다는 피해의식이 한동훈이라는 거물 여당 정치리더를 키워내고 말았다. 사실 똑같은 일의 선례가 윤석렬 대통령이다. 누가 윤석렬을 키웠는가? 야당은 내심 여당이 윤석렬을 키워주는 것을 고맙게 여겼고, 여당이 그를 대통령 후보로 만들어 줄 것을 고대했을 뿐, 그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민주당이 온힘을 모아 윤석렬을 야당 후보로 결국 대통령으로 세워주고 말았다. 이런 처절할 실패와 경험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의 고질적인 우월 DNA는 천성적으로 개선이 불가능 한가보다. 똑같은 방법으로 일개 검사 한동훈을 일약 집권 여당의 비대위원장으로, 만일 그가 성공한다면 그야말로 상대할 수 없는 대권 후보가 된다. 이는 누가 뭐래도 민주당의 공로요 뼈아픈 실책이다. 국정감사장이나 국회에서 한동훈과 맞붙어 깨지지 않는 의원이 있는가? 상대 한동훈이 누구인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도 모르고 찌라시 수준의 정보와 가짜뉴스, 인기 유도성 발언으로 덤볐다가 뛰어난 두뇌에 펙트와 논리로 무장한 탁월한 언변의 한동훈의 일격에 망신당하는 모습을 본 국민들의 감정은 어떠했을까? 한동훈은 “여의도 사투리와 5천만의 화법(표준말)”이라는 기막힌 출사표를 던졌다. 필자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한동훈이 끌어갈 비대위의 그림이 미래 파노라마처럼 펼치는데 그리 어려움이 없었다. 여의도 사투리란 긍정적으로 말하면 대화와 타협을 위한 노련한 일련의 정치적 행위들이고, 부정적으로 말하면 그들만의 리그에서 국민을 짜증나게 하는 당리당략을 넘어 길거리 양아치 패당들의 잡담들로 뒤엉킨 얍삽한 정치 놀음이다. 한동훈이 경험한 여의도는 여야를 막론하고 그렇게 보였다. 여의도 사투리에서 국민의 힘이 제외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들은 한동훈의 5천만 화법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여의도 표준말을 듣게 된다면 국민은 행복할 것이고, 그 말 역시 어느 한 쪽만 알아들을 수 있다면 국민은 절망할 것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영광과 치욕의 부침을 대변하는 것이 ‘86’(80년대 학번·1960년대생) 운동권 출신들이다. 이들은 진영 정치에 몰입하고 팬덤 정치로 유지하고, 팬덤의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상대와 의도적으로 극한 정쟁을 유발하였다. 이로 인해 국민을 질식 상태에 빠뜨려 숨쉬기 곤란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나마 기대했던 이준석의 정치 실험은 30대 당대표라는 화려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화법은 여의도 화법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더 노회하고 유치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왜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지, 참 오랜만에 좋은 인재를 만났다고 생각했던 기성세대들이 왜 옷깃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돌렸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그래서 더 한동훈에게 열광하는지 모르겠지만, 젊음과 신선함 그리고 여의도 화법을 일거에 제압하던 장면을 수없이 목격한 국민들은 그의 등장을 당연한 신선함으로 여긴다. 수십년 동안 운동권 전력 하나만으로 일하지도 땀흘리지도 않고 양지만 밟으며, 그 특권을 상속하려는 이들, 그러면서도 애매한 국민을 앞세워 정권 탈환은 물론 200석의 국회 장악을 거론하는 이들을 후안무치를 제압해줄 기대주 한동훈의 5천만 화법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에게 탈진영, 탈팬덤 시대를 열고 진정으로 국민과 함께 열어갈 세계 10대 강대국으로서의 미래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제 한동훈은 온 국민이 알아듣는 5천만의 표준어로 여의도 화법을 바꾸어야 한다. 그 가능 여부가 그의 승패의 열쇠이니, 한동훈의 비대위원장으로서 칼이 자신을 벨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을 가졌다는 것이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의 결국이 온 국민이 행복하게 흘러가기를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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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3-12-23
  • [언론회 논평] 지자체들의 현행 학생인권조례는 폐지가 답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진보·좌파, 전교조 혹은 친전교조 출신의 교육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학생인권조례’가 있다. 2010년 경기도(당시 교육감 김상곤)에서 시작하여 지금은 6개 시·도에서 시행 중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이런 학생인권조례로 인하여 교권 추락과 교육현장이 황폐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심각하게 나오고 있다. 서울시 교육청(교육감 조희연)의 ‘학생인권조례’ 내용을 보면, 학생들의 자유권, 휴식권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다. 결국은 학생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망치는 제도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선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 구성원들에 의하여 제정되는 ‘학칙’인데, 학생인권조례 제3조 3항을 보면, ‘학칙 등 학교 규정은 학생 인권의 본질적인 내용을 제한할 수 없다’고 못 박고 있어, 학생인권조례가 학교의 학칙을 우선하고 있다. 또 곳곳에 동성애와 동성애자 보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5조 1항에 보면, 차별받지 않을 권리에서,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가족 형태’ 등이 나오는데, 이는 동성애를 보호하고 조장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또 제28조 1항에서도 ‘성소수자’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8항에서도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의 정보를 보호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뿐만아니라, 종교적 목적에 따라 설립된 종립학교에서의 종교활동도 제한하고 있다. 제16조 3항의 1에 보면 ‘예배 등 종교 행사의 참여를 강요하지 못하게 하고’ 있고, 2에 보면 ‘종교 과목의 수강을 강요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또 7에서는 수업 시간에 일체 ‘특정종교를 언급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렇듯 지난 10여년간 진보·좌파 교육감들에 의하여 주도되어 제정된 ‘학생인권조례’는 폐지가 답이라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현재 전국에서 가장 빠르게 충남도에서는 15일 충남도의회 본회의에 학생인권조례 폐지안의 표결이 부쳐져 재석 44명 가운데 찬성 31명, 반대 13명으로 가결되었다. 이는 매우 획기적인 일로 다른 지역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서울에서는 18일경 서울시의회 상임위에서 폐지안이 표결된다. 그리고 경기도에서는 6일 폐지안이 입법 예고되어 있다. 그밖에 광주에서는 주민조례청구(주민들이 필요한 조례의 개정, 폐지를 주민 참여를 통해 해당 지자체장에 요구하는 것)가 진행 중이며, 전북에서는 학생의무조항을 신설한 개정안이 추진 중에 있다. 왜 이런 움직임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지난 10월 광주광역시의회 교육문화위원에서는 여론조사 기관을 통해 만 18세 이상 시민 700명을 대상으로 ‘교권 강화 및 학생 인권 여론조사’를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93%가 ‘수업 방해, 교사 조롱, 폭행 등 교권 침해가 사회적 교육적으로 심각하다’고 답했다. 이런 교권 침해의 원인 가운데는 인성교육의 소홀이 32.1%, 학생인권조례 제정으로 인한 것이 23.6%, 교권보호를 위한 법적 제도의 미비가 20.4% 등을 차지했다. 이처럼 학생인권조례의 심각성을 깨달아 교육부에서도 지난 달 29일 이를 대신할 ‘학교 구성원의 권리와 책임에 관한 조례 예시안’을 내놓은 상태이다. 합리적 대안이 나와서 교사, 학생, 학부모에게 적절한 제도가 되고, 교육의 미래를 위한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역행하는 일들도 있다. 지난 5일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송두환)는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숙고해 달라는 의견을 내었고, 서울시 교육청 조희연 교육감은 1인 시위를 통해 서울학생인권조례 폐지 반대를 하고 있다. 조 교육감은 ‘학생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학교에서 선생님의 인권이 보장되기 어렵다’는 동문서답식으로, 여론의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듯하다. 과연 학생인권조례가 교사들의 교권과 인권을 보호해 준다는 것인가? 현재 조 교육감은 전교조 출신 해직교사 4명 등을 불법으로 특채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2심 결과도 곧 나올 전망이다. 교육감은 교육자와 교육 행정가로 최고 위에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아직도 진보•좌파의 입장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합리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도 교권이 붕괴된 조례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입장이라니, 이해하기 어려운 교육가이며, 교육 행정가이며, 교육 정치가이다. 지금 우리의 교육 현장이 무너지는 것은, 지나친 진보·좌파와 친전교조에 매몰된 결과가 아닌가? 또 교육 현장에서 교사나 학부모들의 입장이 무시하고 학생 일변도의 권리만을 내세웠기 때문이 아닌가? 한 마디로 교육에다 지나치게 정치가 개입하였고 교육을 이념화시킨 것이 원인이다. 마치 기둥은 부실한데, 지붕만 자꾸 무겁게 하여 집 전체가 무너질 위기를 맞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대한민국의 교육의 미래를 걱정하는 모든 학부모와 교육자들과 국민들과 정치인들과 교육시민단체 등은 악법은 폐지해야 한다. 그리고 필요한 대안을 합의를 통하여 제정하여 우리 교육의 미래이며, 국가의 주역이 될 학생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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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12-19
  • [언론회 논평] 정치적 허구를 다룬 영화가 역사적 감수성을 높이나
    지난달 정치적인 문제를 소재로 다룬 영화가 한 편 나왔다. ‘서울의 봄’이다. 이 영화의 배경은 1979년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사건으로 우리나라를 뒤흔들었다. 국가 요직과 권력을 가진 인사에 의하여 국가 원수가 살해를 당한 초유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하여 수사하는 과정에서 12.12사건이 벌어지는데, 이때의 군대 내 권력 다툼에 대하여 만든 것이 ‘서울의 봄’이다. 그러나 영화가 어떤 역사적인 소재를 가지고 만들어졌다고 하여도, 여기에는 많은 허구(虛構)가 들어간다. 즉 영화적 재미를 위한 것도 있고, 또는 영화라는 장르를 빌려 의도된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평론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를 국가의 정치적인 사건들과 연계하려는 의도가 강하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정치적인 큰 이벤트가 있을 때, 즉 대선이나 총선이 있을 때 상대 진영의 부정적인 것을 부각시킬 때 곧잘 효과적으로 이용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1980년 벌어진 5.18에 대하여 다룬 영화로 ‘화려한 휴가’가 2007년에 개봉되었는데, 이는 그해 12월에 있게 될 대선을 노렸다고 한다. 또 같은 주제로 2017년에 개봉된 ‘택시운전사’가 있다. 역시 이때도 그런 목적으로 본다. 그리고 2012년에 개봉된 ‘광해, 왕이 된 남자’도 당시 대선후보였던 특정 후보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 12.12를 다룬 ‘서울의 봄’이 개봉되어 불과 짧은 시간에 대단한 흥행을 하고 있다. 이 영화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 과정에서 국군의 중요 보직에 있던 사람들과 당시 보안사령관을 맡았던 전두환 장군과의 힘겨루기를 보여준다. 결과적으로는 나중에 대통령이 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악으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선하다는 식의 프레임이 만들어진다. 이는 내년에 있게 될 총선에서 보수층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조장하려 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실과 허구가 혼재되어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기에 부족한 영화를 각급 학교에서 어린아이들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현재 서울의 송파지역 모 초등학교에서는 6학년 학생들에게 ‘책가방 없는 날’이라면서, 학교부담으로 6학년 전체 학생들에게 ‘서울의 봄’ 영화를 관람시키려고 한다. 그 학교에서 보낸 가정통신문에 보면, ‘영화 관람을 통해 역사적 사실의 심도 있는 이해 및 역사적 감수성을 높이기 위함’이라고 한다. 어찌 영화적 재미를 위하여 허구로 각색 되어진 영화가 어린 학생들에게 ‘역사적 감수성’을 높이는 교재로 사용된다는 말인가? 이 영화를 만든 감독도 ‘역사와 허구가 섞여 있어, 자신도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모른다’고 할 정도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영화들이 사람들에게 관심을 얻게 되는가? 전문가들은 ‘우파는 악, 좌파는 선’이라는 등식을 만들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분석들이 날카롭게 맞을 수도 있고, 지나친 기우로 끝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영화가 주는 파급력이다. 현재 젊은이들이 이 영화를 가장 많이 보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잊혀진 역사를 객관적 사실에서 찾기보다는 영화 한 편에서 압축적인 학습을 쉽게 된다. 이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젊은 세대는 분노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반동원식으로 권하여 영화로써 역사를 학습하는 아이들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이는 위험한 일이다. 이 영화 속 당사자들은 이미 단죄를 받았으며, 고인이 된 분들에 대한 분노심만 유발하게 될 것이다. 그 분노는 마치 판도라 상자처럼 열려서, 어쩌면 내년에 있게 될 총선에도 막대한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이럴 경우 영화가 아니라 정치적, 이념적 도구로 이용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애써 역사적 진실과 실체와 전모를 제대로, 균형적으로 알려고 하기 보다는 영상(映像)을 통해 본 것을 오랫동안 기억하며, 단순하게 그것을 역사의 실제로 받아들여서 구체화•사실화시킬 수 있게 된다. 이런 일들은 의도된 이념적 계산과 만나게 되면 자칫 바른 사고(思考)에 대한 안대(眼帶)가 된다. 결코 바람직한 일이 될 수 없다. 알려지기로는 전직 대통령도 영화 한 편을 보고, 국가의 에너지 정책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실재와 진실과는 무관하게 허구성이 장착된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역사 공부를 대신하려는 교육현장의 강행은 재고되어야 한다. 일선 학교에서는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가르쳐야 할 아이들에게 사실과 허구로 짜여진 문제성 영화에 기대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 의도적 목적이 있거나 그것에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면, 이를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단체로 감상하게 하는 것은, 교육의 정도(正道)가 아니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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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12-1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불 말과 불 수레’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왕하2:11). 이스라엘의 대 선지자 엘리야가 등장하는 곳에 불에 대한 말씀이 세 번 등장합니다. 첫째는 여호와께서 참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로 제물을 사른 불입니다(왕상18:38). 이 일로 인하여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인을 기손 시내에서 죽입니다. 둘째는 엘리야를 잡기 위하여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가 보낸 두 오십부장과 각각 오십인 씩 100명의 군사를 사른 불입니다(왕하1:9-12). 세 번째는 본문에 등장한 불말과 불병거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응답을 의미하고, 두 번째는 징벌을 의미하며, 세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제가 군에 입대하여 자대배치를 받고 일병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연대 종합훈련을 처음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선임들은 이구동성으로 그 훈련이 고되다는 것과, 단단히 마음먹지 않으면 자칫 낙오할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기간에 정기휴가가 있는 병사들을 모두 부러워할 지경이었습니다. 이때 제가 있던 소대에 전역을 앞둔 선임 병사가 있었습니다. 박 병장이었습니다. 소대는 물론 전 중대원이 존경했으며 심지어 장교나 하사관들까지 함부로 대하지 못할 만큼 실력이나 인격적으로 훌륭한 선임이었습니다. 박 병장은 훈련 기간이 전역하는 날이어서 훈련을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훈련을 즐기는 모범 사병들도 있었겠지만, 당시 대부분의 병사들은 전역을 앞둔 박 병장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훈련 날이 다가오자 우리는 박 병장이 전역을 위하여 당연히 사단본부로 떠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대대장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알다시피 오늘은 박 병장과 김 병장의 전역 날이다. 그런데 이들은 전역을 미루고 자원하여 훈련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우리 대대에 이런 훌륭한 사병들이 있다는 것을 대대장은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모두가 박수를” 그렇게 박 병장 김 병장은 우리와 함께 5일여간 훈련에 참여하였습니다. 박 병장은 나와 같은 화기분대 선임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훈련 내내 분대원들과 무거운 M60을 나눠 매면서 이동하였습니다. 모든 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돌아와 연병장에 모였을 때였습니다. ‘붕!’ 하고 사단에서 지프차 한 대가 달려왔습니다. 사단장이 탑승한 차였습니다. 하늘 같은 사단장의 차를 보고 우리는 잔뜩 긴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단장은 박 병장과 김 병장을 호명하더니 지프차 뒷좌석에 승차시킨 후 곧장 사단으로 갔습니다. 본문의 불말과 불병거는 저에게 오래 전의 군대 일을 소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엘리야를 엘리사에게서 떨어뜨려 놓기 위하여 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프차가 다른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려고 전역까지 연기하였던 배려 깊은 두 병사의 영광스러운 전역을 의미하듯이, 불병거와 불말은 하나님께 충성한 엘리야의 아름다운 인생 전역에 대한 면류관이며, 천군 천사의 출동입니다(왕하6:17). 사람들이 얼마나 세상 영광에 힘을 쓰는지 모릅니다. 어디에서든 감투 하나 써보려고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사40:6-8).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이유는 자기 영광을 위하라고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라고 만드셨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사43:21, 고전6:19).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도덕적인 죄는 죄로 여기지만, 명예 영광 허영심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성군 다윗이 저지른 두 가지 큰 죄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한 후 그것을 덮기 위하여 우리아를 죽게 한 살인 죄입니다(삼하11장). 이 죄는 오늘날에도 도덕적으로 가장 큰 죄일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구조사입니다. 인구조사는 큰 죄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자의 죗값으로 네 사람이 죽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자신의 주권을 과시하려 했던 인구조사의 결과 7만 명이 죽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이스라엘이 인구 조사를 할 때 생명의 속전을 내야 하는데 다윗이 속전을 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출30:11-16). 그러나 이면에는 명예영광심이 깊이 박혀 있습니다. 안병모 목사님은 이에 대하여 간음과 살인죄는 육적인 죄인데 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낸 것은 영적인 죄이기 때문에 그 죗값이 더 큰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바울은 세상 영광을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그는 위로부터 오는 상급을 바라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노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9). 우리에게도 세상 영광이든지 하나님의 영광이든지 두 가지 갈림길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소망하고 살아가면 세상 것도 필요한 것 만큼 주시지만, 세상 영광을 소망하고 살아가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여 엘리야나 바울처럼 영원한 영광에 동참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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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너라는 계절
    저는 제 생애 처음으로 북콘서트를 해보았습니다. 사실 북콘서트를 많이 다녀본 경험도 없고, 또 저도 처음이라 많은 부담을 가졌습니다. 물론 제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샘터사 사장님께서 저의 시집 원고를 받아 보시더니 “목사님, 이번 시집이 너무 좋습니다. 이번에는 북콘서트도 하고 베스트셀러에 오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샘터사 사장님께 북콘서트를 하겠다고 약속을 드리고 제 생애 처음으로 북콘서트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저의 ‘스펙을 넘어 스토리를 만들라’라는 책이 중국어 번역본으로 출판되었을 때, 감사예배를 드린 기억이 납니다. 그렇지만 그때는 북콘서트가 아니었죠. 그런데 저의 13번째 시집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 북콘서트를 기획하는데 너무나 부담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시기가 연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연말에 얼마나 많은 미팅과 약속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더더욱 심적인 부담이 많았습니다. 그날 당일도 오전부터 몇 개 일정을 마치고 차에서 도시락을 먹고 도착을 하니까 저보다 손님들이 먼저 와 계셨습니다. 제가 현장을 점검할 시간도 없이 북콘서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에츠하임 앙상블의 연주부터 시작해서 저의 소개 영상까지 너무나 아름답게 잘 준비가 된 것입니다. 특별히 북콘서트 사회를 맡은 이동준, 차유주 아나운서의 진행이 너무나 세련되고 품격이 있었고, 성수현, 김예령 집사님, 기연호 장로님, 박승혁 목사님, 이경희 전도사님으로 이어지는 시낭독이 너무나 시의 향기를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또한 제갈수영 집사님이 작곡한 노래들을 뮤지컬 배우 박은석, 테너 박주옥 교수, 소프라노 임경애 교수가 너무나 멋지게 잘 불러주었고 바이올리니스트 김이슬 집사님, 지휘자 이종진 집사님 부부의 축하 연주도 환상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시대 최고의 문학평론가 김종회 교수님과 정호승 시인님께서 저와 함께 시인 토크를 진행해 주신 것이 큰 영광이었습니다. 김종회 교수님께서는 저의 시집 해설에서 ‘춘풍추우(春風秋雨)의 시적 형상’이라는 글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종교적 언어가 아닌 시의 은유와 함축, 낯설게 하기를 통해서 그려 내었다”고 서평해 주셨습니다. 정호승 시인님께서는 “소강석 목사님의 시집을 통해서 봄, 여름, 가을, 겨울만 있는 줄 알았는데 또 하나의 계절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라는 계절’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목회자 시인은 문익환, 고진하 목사님 정도로 알고 있는데, 소강석 목사님께서 시 창작활동을 하시는 것은 너무나 값지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또한 문화일보 선임기자이신 장재선 시인님께서 객석토크로 함께 해 주셨는데 이런 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요즘처럼 말이 거칠어진 시대에 이토록 아름다운 사계의 서정과 말의 품격을 가진 시집이 나온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실 신앙과 예술의 영역이 함께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면 신앙의 진정성과 언어 예술의 탁월함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강석 목사님의 북콘서트는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꼭 소강석 목사님께서 그런 시의 지평을 열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북콘서트 현장에 있으면서 내내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난 하나님밖에 모르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앞세우며 걸어왔는데 내가 이런 예술적 호사를 누려도 되나...” 그러면서 마지막 청중 질문 시간에 나온 “인간에게 왜 시는 필요하고, 목사님께 시는 어떤 의미인가요?”라는 질문이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이런 대답을 하였습니다. “제가 얼마나 분주한 사람입니까? 또 저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습니까? 그런데 시를 쓰는 순간만큼은 저만의 케렌시아 같은 공간이 되고 창의적 슈필라움을 이루게 됩니다. 저는 한 편의 시를 쓸 때마다 다시 태어나고 새로운 자아를 보는 것 같아 너무 행복합니다.” 북콘서트 모든 순서들마다 진심 어린 환호와 박수가 쏟아지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는 우리 새에덴교회 장로님들과 성도님들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부족하지만, 지금까지 담임목사의 의중을 누구보다 잘 알아주고 무조건 기도해주고 지지해 주었던 장로님들과 성도님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눈송이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특히 최소한의 초청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분들이 와서 자리가 부족해 뒤에서 모니터로 본 성도님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번 시집에 실린 ‘겨울5’의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별 하나 뜨지 않은 / 밤하늘에 / 별 하나 떠 있다면 / 그건 아마 / 내 가슴 속에 들어와 잠든 / 너의 이름이겠지 / 사람들은 보지 못해도 / 내 눈에만 보이는 / 너의 얼굴이겠지.” 저는 앞으로도 사계뿐만 아니라 너라고 하는 계절을 만들면서 계속해서 빚진 자의 마음으로 성도들을 섬기며 또 부지런한 창작활동을 지속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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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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