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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회 논평] 종교개혁 506주년을 맞이하며
    종교개혁 506주년을 맞는다. 종교개혁은 단순히 가톨릭 안에서 일어난 대립이나 기독교의 탄생이 이뤄진 종교 내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를 통하여 중세와 근세가 나누어지며, 가톨릭에 의하여 정치와 종교가 혼합되었던 것에서 유럽에서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고 이는 세계사에도 변화를 주었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고유명사를 써서 “the Reformation”이라고 한다. 당시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에 의하여 본격화되지만, 실제적인 종교개혁은 이미 그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기 100년 전,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는 성경의 내용으로 가톨릭교회의 부패상을 비판했었다. 루터가 가톨릭교회를 비판한 것도, 중세 신학과 교리가 교회를 잘못 이끌었다고 본 것이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성공은 인쇄술의 발달로 급격히 확산될 수 있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성공 원인은 여러 가지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때가 되어서 이뤄진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개혁 506주년을 맞는 우리 한국교회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첫째는 더욱 철저하게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 한국교회는 세속적인 정치와 사상과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성경적 가치관과 세계관보다 이를 추종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교회 지도자들이 함부로 정치 지도자들과 결탁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과도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둘째는 철저한 자기 회개와 하나님께로 향한 거룩의 모습들이 회복되어야 한다. 세상의 권력과 욕심과 정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경건의 능력으로 살아가야 한다. 셋째는 세상의 악에 대하여 대항하여야 한다. 지금 한국교회 안에는 다원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성공주의, 물량주의, 세속주의가 들어와 있다. 또 교회를 둘러싼 악습들과 악법들이 있다. 여기에 눈을 감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도 당시 권력자들과 잘못된 종교에 대하여 싸우셨다. 한국교회가 교세는 많고, 타종교에 비하여 숫자는 많지만, 악에 대하여 일사분란하게 싸우고 대응하는 모습은 보기 어렵다. 506년 전 종교개혁은 사회의 부패와 교회의 불법에 대하여 동시에 비판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종교개혁을 통하여 두 가지의 개혁을 이루게 된다. 이 땅에 거룩한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교회가 바르게 됨으로 불의한 세상을 동시에 바로 잡아 나가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종교개혁 506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 앞에 새로운 도전과 과제가 있음을 잊지 말자. 21세기, 한국교회를 통하여 종교개혁의 기치가 새롭고 힘차게 들려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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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10-27
  • [언론회 논평] 자선과 기부에 대해서도 갈라치기 하는 사회
    최근 우리 사회에서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문제가 대두되면서, 이에 동조하는 기부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이승만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가 지난 7월 발족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기부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이승만 대통령은 지금까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었다. 이 나라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하고, 6.25전쟁의 참혹함으로부터 이 나라를 지킨 것만으로도 초대 대통령으로서 엄청난 기여를 한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변변한 기념관 하나 없다는 것은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고, 벌써 했어야 할 일이 아니었나? 그런데 문제는 기부자들에 대하여 이념 성향에 따라 공격하는 일들이 있다고 한다.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자선과 기부를 하는 것도 검열과 비판을 받는 사회가 된 것인가? 이는 아주 건강하지 못한 어두운 모습이다. 최근 모 유명 여배우가 기부한 것을 두고, 소위 말하는 좌파언론들과 유튜브에서 그녀를 비난하여 공격을 일삼고, 심지어 가짜뉴스까지 만들어 인신 공격을 하고 있으니, 우리나라가 자유대한민국이 맞는가? 이 여배우는 이승만 대통령뿐만 아니라,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재단에도 기부를 했다고 한다. 그녀는 기부 의사를 밝히면서, ‘그분 덕분에 우리 가족도 자유대한민국의 품 안에서 잘 살고 있다’고 고마워했다. 또 ‘잘못한 것만 비난하며 국민을 갈등하게 하는 것보다 잘한 것을 칭찬하며 화합을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우리 아이들이 더 평안하고 좋은 나라에서 살게 되지 않을까 소망해 본다’고 하였다. 지극히 당연하고 소박한 바람이 아닌가! 그런데 좌파 언론에서는 ‘이승만의 과거, 이00 씨가 다시 꼼꼼하게 봤으면’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자 이런 선동적 기사에 넘어간 사람들이 비난과 욕설을 퍼붓는다. 여론을 선동하는 언론도 안되지만 이에 동조하는 것도 성숙한 시민의식이 아니다. 어찌 한 나라의 지도자를 성인(聖人)처럼 생각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이승만 대통령이 통치할 때에는 지금과 같은 국가의 발전이나, 국민들의 높은 의식 수준이 갖춰졌을 때가 아니었다. 또 나라가 해방이 되었다고는 하나,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경제 규모도 형편이 없었고, 국가를 위해 일할만한 인재들도 태부족할 때이다. 거기에다 공산주의자들이 국가 전복을 위한 준동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배부르고 등이 따뜻한 잣대로 재단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부정하고, 국민들이 뜻을 모아(국가가 벌써 했어야 할 일) 기념관을 세우자고 십시일반으로 모금하는 것까지 공격하고 비난하는 것은, 이제는 높아진 의식과 국민들의 의지마저도 자신들의 저급한 이념의 테두리에 가두려는 몰지성이 아닌가? 이런 현상들이 지속 된다면 결코 우리나라는 건강한 시민사회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독단과 독재와 외눈박이와 색안경을 끼고 연출하는 선동가들로 인하여 불구(不具) 사회가 될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 존경의 염원을 이렇듯 무시한다면, 또 다른 갈등이 국민들 간에 증폭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지 않은가? 건국에 준한 업적을 남긴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들로부터 충분히 존경과 인정을 받을 만한 지도자가 됨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분에게 과(過)가 있다면,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하고, 공(功)이 있다는 것은 당연히 떠받들고 기려서, 후대들이 지표(指標)로 삼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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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10-23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생명은 그 자체로 존귀한 것입니다”
    지난주에 CBS가 주최한 순천 전도 부흥회를 다녀오는 길에 순천만 갈대숲을 갔다 왔습니다. 문득 제가 쓴 ‘꽃으로 만나 갈대로 헤어지다’라는 시 구절이 생각이 났습니다. “우린 꽃으로 만나 갈대로 헤어지나니 / 풀잎으로 만나 낙엽 되어 이별하나니 / 산은 눈을 감고 / 강물은 귀를 막고 / 달은 소리 없이 걷고 있나니 / 새 한 마리 울어 청산이 울리고 / 꽃송이 하나로 봄이 오고 / 별 하나 떠서 온 밤이 환해지나니 / 바람이 스쳐가는 갈대 사이로 / 내가 서 있어요 / 갈대로 헤어진 우리 / 다시 꽃으로 만날 순 없을까.” 지금은 은갈색의 갈대꽃이 춤을 추고 있는 계절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름다운 은갈색 꽃으로 만났지만 이제 12월이 되고 혹한의 겨울 추위가 오면 갈대들이 부러지고 상하게 될 것입니다. 더더구나 폭설이 내리면 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서 모두가 다 쓰러져버리고 아쉽게 헤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시 또 봄이 되면 그 속에서 다시 싹이 나고 또 여름이 되면 푸른 잎사귀가 돋고 가을이 되면 은갈색의 꽃이 피잖아요. 이런 걸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모든 생명은 존귀하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가을 들판에서 바람에 몸을 흔들고 있는 억새도, 산기슭의 구절초도, 어두운 구석에서 울고 있는 귀뚜라미도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존귀한 생명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생명이라고 발음할 때마다 저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느낍니다. 생명은 언제나 신비롭고 눈부시며 그 신비스러움과 눈부심 앞에 때로는 울컥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중동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발단은 무장단체 하마스의 공격과 민간인 학살로 시작이 되었지요. 또 이스라엘은 응징을 하게 되고요. 이것이 또 민족과 인종, 종교 간의 갈등으로 확전되고 중동 전쟁으로 확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망자만 해도 수 천명에 달합니다. 그런데 서로 간의 앙금이 있어서 군 시설은 파괴할 수 있고 공격할 수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민간인을 학살하고 병원을 공격하느냔 말입니다. 그것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기독교 병원을 말이죠. 누구의 공격으로 시설이 파괴되었는지 명명백백하게 밝혀지겠지만 미국과 이스라엘에서는 하마스의 공격이라고 하고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공격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건 있을 수가 없는얘기입니다. 어떻게 군사시설도 아닌 병원을 공격할 수 있습니까? 생명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하지요.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종교란 무엇입니까? 특별히 종교는 생명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에 해답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내세에 대한 궁극적인 길을 안내하는 게 종교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평화를 지켜내고 생명을 존중해야 되는 것입니다. 종교는 어떤 경우에도 살인을 조장하거나 전쟁을 조장해서 평화를 깨면 안 됩니다. 어떻든지 화해와 평화의 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꽃으로 만나 갈대 헤어져서는 안 됩니다. 헤어진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듬해 다시 태어날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갖고 소망을 가져야 됩니다. 그리고 다시 갈대꽃들이 피는 꿈을 꿔야 합니다. 순천만의 갈대숲을 거닐며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무리 혹한의 겨울에 갈대가 부러져 있고 쓰러져 있더라도 우리는 다시 새 생명의 꿈을 꾸고 은갈색 갈대꽃의 꿈을 꿔야 한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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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10-22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목표를 분명히 합시다’(빌 3:12-14)
    무슨 일이든지 목적이나 목표가 확실해야 합니다. 목표가 없거나 목표를 상실하면 그 때부터 방황하며 전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가운데 유혹과 시험에 자주 넘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표가 없거나 목표가 있어도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자가 쟁기를 잡고 뒤돌아다보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눅 9:62). 쟁기를 잡은 자가 앞을 보지 않고 뒤를 돌아다보면 밭고랑이 갈지(之)자로 파이지 똑바로 파일 수가 없습니다. 목표를 향해 분명히 견고히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목표를 향하는 사람은 온전히 그 목표를 바라보고, 온전히 달려가야 승리의 인생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였다”(고전 9:26)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경주자에게 목표가 중요한 이유는 목표가 노력을 크게 증대시키고, 노력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스티븐 코비가 쓴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란 책에 보면 시간관리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관리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오늘날 같이 정신없이 살아가는 이 시대에서는 어느 방향으로 목표를 향해서 뛰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로서 천성이란 이 목표가 희미하거나 확정되지 않는다면, 이 세상 물결에 휩싸이거나 표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우왕좌왕하게 되고, 또한 세상의 화려한 유혹에 빠지게 되어 깊은 은혜의 생활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가나안이라는 인생의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살았기에, 백성들이 늘 비판하고 반대하고 원망하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바울도 자만하지 않고 설정한 목표를 향해 질주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12절)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만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가되, 계속해서 추구하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단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쫓아갔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가 취해야 할 목표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의 자세입니다.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쫓아간다고 하였습니다.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손을 내뻗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경주하는 사람이 잡념에 시달리거나 얽매이는 장애물이 있으면 달려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하여 온전히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기대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들도 열리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8-19). 바울이 달려가는 목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었습니다(14절). 우리의 관심을 세상에 두지 말고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을 향해 열심히 달려갑시다. 하나님께서 주실 칭찬과 위로와 영광이 분명히 있음을 확신하며 승리의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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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6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나와 안 맞으면 선을 긋는 사회
    저는 4.19혁명 국가조찬기도회 설교를 몇 번 하러 갔습니다. 그때마다 농림부장관을 지내고 국회의원 5선을 하신 김영진 장로님이 “4.19혁명의 기록은 역사 속의 고서로 감춰져 있으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4.19혁명을 유엔 유네스코에 등재하기 위해서 정말 애를 많이 썼습니다. 우리 교회도 약간의 도움은 드렸지만 그분은 온몸을 다 바쳐서 그 일을 했습니다. 4.19혁명이야 말로 대한민국을 새로 거듭나게 한 고통의 산실이었습니다. 부정과 불의를 추방하고 정의와 인권을 회복시킨 위대한 혁명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민주화의 불길을 활화산처럼 타오르게 한 불씨 혁명이고 점화 혁명이었습니다. 당시 독재 정부는 자유와 민주의 팔을 묶고 목을 죄었지만 4.19 혁명은 검은 군홧발에도 굴하지 않는 민주와 자유를 향한 인권 운동의 함성이었으며 고독한 새벽별의 피눈물과 처절한 절규로 독재의 성벽을 무너뜨렸던 타오르는 민주의 혼이었습니다. 그 민주화의 횃불은 민족의 가슴마다 들불로 번지고 조국 근대화와 자유 민주주의의 향기로운 꽃이 필 때까지 자유와 인권, 민주화의 정신적 보고요, 폭풍의 진원지가 되었습니다. 급기야 4.19의 정신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불쏘시개가 되고 그 불멸의 꽃은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의 꽃을 만발하게 하는 한 알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4.19정신을 기억하고 계승시켜야 합니다. 4.19의 대가없는 희생으로 대한민국은 지금 자유민주주의가 꽃을 피우고 모든 국민이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김영진 장로님께서 몇 년을 고생한 끝에 드디어 4.19혁명이 유엔 유네스코에 등재가 되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4.19묘역에서 유엔 유네스코 등재 헌정식을 하고 기념식을 하려고 하는데 4.19에 속한 어느 단체에서 그걸 문제 삼은 것입니다. “왜 우리하고 의논을 안 하고 당신들끼리 추진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묘역 앞에서 행사를 하지 못하고 장소를 옮겨서 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정말 탄식을 하였습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인 4.19혁명이 유엔 유네스코에 등재된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가. 그런데 그런 일을 자기들과 의논하지 않았다고 그렇게 기분 나쁘게 생각할 일인가.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이렇게 극단적 왜곡 편향 사회가 되었는가. 혹시 소통이 조금 부족했어도 그렇게 노력해서 유네스코에 등재가 되었으면 서로 칭찬하고 격려하며 감사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너무 다행스럽게도 누군가의 중재로 조정을 하고 화해를 하게 해서 4.19에 속한 여러 단체가 함께 4.19묘역에서 헌정식과 기념식을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참 얼마나 다행입니까? 저는 그 소식을 듣고 너무 다행이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교회라고 예외이겠습니까? 지난번에 제가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님들을 모아놓고 세미나를 하고 난 후 몇 분이 저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사과를 하는 것입니다. “소 목사님, 지난날 유튜브의 헛소문을 듣고 목사님을 한동안 오해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목사님의 강의를 듣고 보니 그것이 전혀 아닌 걸 알았습니다. 한국교회를 위해서 그토록 애를 쓰셨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또한 부산 엑스포 유치를 위한 홍보 활동이야말로 아름다운 공공외교의 일환입니다. 그런데 이걸 또 다른 방식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제 주변에 있다는 것을 알고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무조건 자기하고 안 맞으면 선을 긋고, 아무리 아름다운 가치와 정신, 숭고함을 계승해도 자기와 의논 없이 하면 이렇게 반대를 해 버리는가. 또는 자기 확증편향성과 맞지 않으면 이렇게 해 버리는가?” 요즘 주변을 보면 진짜 뜻하지 않는 오해와 확증 편향적 사고에 갇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설명을 하고 이해를 시키려고 해도 자기만의 생각에 갇혀 남들을 판단하고 왜곡된 시각으로 보려고 합니다. 교회는 결코 싸움과 다툼, 분열의 종교가 아닙니다. 사랑과 화해, 용서의 종교입니다. 전쟁을 막고 자유와 평화를 선도하며 국민 모두가 행복한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종교의 사회적 책임과 환원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새에덴교회가 목회적 대형교회로서 사회적 순기능과 선순환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섬겨나갈 것입니다. 아니 저부터 분열과 다툼이 있는 곳에 사랑과 평화, 연합과 일치의 중재적 역할을 해 나가는데 앞장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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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10-15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존귀한 자’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49:20). 인류 역사상 가장 불행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히틀러? 네로? 김일성? 이런 사람들도 당연히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특별히 택함을 받은 제자였지만, 그리스도를 팔아넘김으로 가장 파렴치하고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배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다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26:24). 조선인보다 더 조선을 사랑한 미국인 조선 독립운동가 헐버트(1863-1949)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1886년 그의 나이 23세 때 선교사로 조선에 왔습니다. 헐버트는 여느 선교사처럼 조선에서 고생할 각오를 하고 왔지만, 막상 와보니 조선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열악했습니다. 그는 ‘선교사라면 자신이 선교하는 나라의 지리 역사 문헌 등에 대하여 특별히 공부하고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조선을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나흘 만에 한글을 깨우쳤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언어 자질이 남달랐기 때문이라기보다, 익히기 쉬운 한글의 특징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그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훌륭한 글자를 만들 수 있는 민족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부터 조선에 애정을 가지고 조선을 위하여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훈민정음을 보고 세 가지 면에서 놀랐습니다. 첫째는 매우 과학적인 것에 놀랐고, 둘째는 가장 익히기 쉬우면서도 사용할 수 있는 범위가 매우 넓은 점에서 놀랐고, 셋째는 이런 글자를 국민들이 무시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매우 귀중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익히고 발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천시하는 것을 보고 만일 조선이 훈민정음을 중요시 여겼다면 그토록 낙후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가룟유다는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택함을 받은 제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제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30).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은 위임 받은 심판의 권세와 영생 상속이었습니다. 계시록에는 열 두 사도에게 주어지는 다음과 같은 상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계21:14). 그들은 하나님 나라 성벽의 주춧돌이 되는 영광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런 영광을 받지 못하고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현 위치가 어떤 상황인지 안다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의 형편 나의 처지는 존귀한 위치입니다.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복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니 때로는 시험들 일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유익하게 하시고 모든 것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줄 믿고 감사함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한 가룟유다는 결국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자의 명분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몰라서 야곱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고라는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레위 지파에 속한 것에 대하여 귀중함을 모르고 제사장 직분을 탐내다가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민16:9). 우리가 가진 명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분입니다. 우리가 가진 지위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자신의 자리가 얼마나 존귀한지 깨닫고 더욱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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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0
  • [언론회 논평] 방송의 공정성 파괴는 국민의 알권리 침해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심위)는 25일 전체 회의를 통하여, 지난해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뉴스타파의 인터뷰 조작을 인용 보도한 방송들에 대하여 중징계를 내렸다. 여기에는 KBS1 TV ‘9시 뉴스’와 JTBC ‘뉴스룸’과 YTN의 ‘뉴스가 있는 저녁’이 해당되며, 해당 방송에 대하여 ‘과징금 부과’를 결정한 것이다. 이 방송들은 지난 해 대선을 앞둔 매우 중요하고 민감한 시기에 뉴스타파(대표: 김용진)가 화천대유의 대주주인 김만배와 신학림 전 언론노조위원장의 대화를 녹음한 것을 방송했는데, 여기에 방송들이 정확한 사실 확인 없이 보도하므로, 공적책임 위반, 국민 혼란과 민주주의 근간을 흔들어 징계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그 인터뷰 내용이라는 것이 워낙 예민하여, 사실이거나, 국민들이 사실로 받아들일 경우 대선(대통령 선거)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뉴스타파는 대선을 사흘 앞둔 2022년 3월 6일, 당시 국민의 힘 윤석열 대통령 후보가 검사 시절이던 2011년, 대장동 사건 주범인 김만배 일당의 부탁을 받고 부산저축은행 사건을 무마해줬다는 허위 사실을 포함한, 김 씨 등의 육성이 담긴 녹음 파일과 함께 보도했던 것이다. 이것을 받아서 KBS1 TV의 9시 뉴스, JTBC의 뉴스룸, YTN의 뉴스가 있는 저녁에서 보도하므로, 당시 윤석열 대선 후보를 궁지에 몰아넣으며, 반대급부를 노린 정황 의혹을 갖게 된다. 이에 대하여 방심위가 중징계를 결정한 이유를 밝혔는데, ‘다수의 대화 내용 누락 등 편집 녹취록만이 공개·제공됐음에도 근거가 불명확한 일방의 녹취록을 검증 없이 보도하고 사실인 것처럼 보도한 것’이 문제가 됨으로 보았다. 또 ‘인용보도할 경우 출처와 사실관계에 대한 검증과 확인 작업을 더욱 철저하게 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선거를 불과 이틀 앞두고 정치적 편향성이 의심되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은 객관적 진실 추구보다는 이슈 몰이에 편승한 것이다’고 판단하였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공적 책임을 가진 방송사들이 국민들의 선택에 큰 혼란을 야기하여 민주주의 근간을 흔든 중대한 사건으로 엄중한 책임이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다. 한편 MBC의 경우에는 다른 방송사보다 양적으로 많은 내용을 보도하여 역시 심사 대상이었으나, 방송사의 요청으로 심의가 늦춰진 것으로 알려진다. 그 외에도 방심위는 KBS2 TV의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같은 방송의 ‘신상출시 편스토랑’ SBS TV의 ‘집사부일체 2’ MBC TV의 ‘뉴스데스크’에 대하여도 ‘주의’ 결정을 내렸다. 그동안 공영방송 KBS와 MBC는 끊임없이 공정성과 객관성과 편파성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었다. 공영방송들이 국민들과 언론 수용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은 특정 정치 권력과 언론노조 권력에 편승하여 방송의 공정성을 훼손하는 일들을 자행해 오면서도, 국민들에게 잘못을 부끄러워 할 줄 몰랐다. 이에 새롭게 바뀐 방심위에 의해서 철퇴를 맞은 것이다. 방심위의 제재는 ‘주의’ ‘경고’가 마이너스 1~2점을 차지하지만, ‘과징금’은 마이너스 10점이며, 그 금액도 상당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렇게 징계를 받으면 방송사의 재허가•재승인할 때 상당히 불리한 것이 되어 이는 중징계에 해당하는 것이다. 국민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는 공영방송은 사라져야 한다. 권력의 언저리에서 서성이는 언론 권력은 무너져야 제정신을 차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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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치료의 하나님’(출 15:22-27)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힘들고 어렵고 낙심되는 일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때 이 어려운 과정을 어떻게 통과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홍해를 건너 3일 동안 수르 광야를 지나는 동안 마실 물이 없어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다행히 마라에 이르러 물을 발견했으나, 그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진퇴양난에 처하며 위기를 만났습니다. 애굽의 병사들의 추격을 뿌리치고 홍해를 건넜던 3일 전의 감사와 감격, 기쁨과 찬양은 온데간데없고, 모세를 원망하고 낙심하며 좌절했으며, 백성들의 불평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때에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절실한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25절상). 하나님께서는 쓴 것을 달게도 만드십니다. 이 같은 이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치료자가 되심을 계시해주셨습니다(26절).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성도의 아픔을 치료하십니다. 깨어지고 불행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쓴물을 단물로 바꾸는 역사를 나뭇가지가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모세가 믿음으로 그대로 순종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으면, 그 말씀이 내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불신의 마음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 굳게 서야 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불신의 마음을 떨쳐버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인생에서 만나는 마라의 쓴물(재물, 건강, 각종 문제들)을 단물로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이니,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원망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제일 바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것입니다. 욥은 수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감사했습니다. 그럴 때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롬 8:28). 마라의 쓴물을 달게 한 나무는 물가 가까이에 있었듯이, 이 세상 마라의 쓴물 때문에 고생하는 우리 곁에도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마라에서 붙든 나뭇가지는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생존을 지켜주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다짐하게 합니다. 우리의 인생길에도 힘들고 어려운 마라를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치료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치료의 말씀을 듣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능력이며, 역사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마라를 지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두신 엘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27절). ‘엘림’이란 오아시스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라’라는 고통과 고난을 잘 이겨내고 통과했을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출애굽 역사는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 출애굽의 역사가 우리의 삶에서 구현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며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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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아프리카에 꽃씨를 뿌리러 갑니다.”
    저는 10여 년 전에 아프리카 선교를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마사이족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선교를 하였습니다. 몇 년 후에는 ‘월드비전’과 함께 에티오피아에 가서 선교와 구호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글로벌에듀’에서 아프리카에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은 가지 말고 학교를 하나 짓자는 것입니다. 제가 사실은 ‘글로벌에듀’의 이사장이 아닙니까? 그러나 한 주 동안에 아프리카를 갔다 온다는 게 너무 엄두가 안 나고, 또 학교를 하나 짓는 것도 재정적 부담이 들어서 안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글로벌에듀’ 상임 이사님이 “아프리카에 학교 하나 짓고 부산 엑스포 유치대에 가서 아프리카의 정상과 외교부 장관에게 부산 엑스포 유치를 위한 스피치를 해주라”는 것입니다. 저는 갈등이 많았습니다. “이것도 공공외교 중의 하나인데 김진표 국회의장님께서 가시지만 나 같은 것이 가서 스피치를 한다고 얼마나 효력이 있겠는가...” 그런데 제가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김철수 장로님이 학교 짓는 돈을 자기가 감당하겠다고 연락이 오고, 또 안영준 집사님이 행사비 일부를 감당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에 고민이 생긴 것입니다. 제가 가면 아프리카 전역에서 선교사들이 오실 텐데 선교사들에게 식사 대접을 하고 세미나를 하고 또 교통비를 지원하고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각국 정상과 외교부장관들이 삼성 스마트폰 폴더 폰을 선물 받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먼저 힘겹게 헌신하는 성도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개미군단의 헌신자들이 생겨나서 어쩔 수 없이 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 아들이 국제정치학을 전공하였는데 “아빠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폼 나게 가서 공공외교를 하고 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 말 한마디에 마음이 움직였던 거죠. 그래서 요즘 영어 연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가서 이런 요지의 스피치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눈 떠보니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선진국이 그냥 된 게 아니라 선교사들이 와서 복음을 전하고 신문명을 전달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왕에 이 자리에 선 김에 우리 대한민국을 자랑하고 싶습니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때 딸랑 부산밖에 안 남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원조받은 나라에서 최초로 원조를 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저는 부산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부산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최후의 보루였고 대한민국의 혼과 정신이 아직도 숨 쉬고 있는 곳입니다. 더구나 부산은 세계 최고로 아름다운 항구도시입니다. 부산은 태고적의 신비로움과 현대 문화가 조화를 이루는 얼마나 아름다운 바다의 도시인지 모릅니다. 마치 모든 소리가 세이렌의 노래로 들릴 정도로 아름답고 고혹적인 항구도시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한민국 종교 지도자로서 여러분이 2030년도 엑스포에 부산으로 오시면 좋겠다는 마음이 강렬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2030년도 부산 엑스포에 오시게 된다면 여러분은 환상의 도시에 오시는 듯 착각을 하게 될 것이고 세이렌의 앞바다를 지나가는 듯한 매혹적인 여행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부산을 응원해 주십시오. 부산을 사랑해 주십시오. 부산 엑스포를 위하여 박수를 쳐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아프리카에 복음과 선교, 그리고 공공외교의 꽃씨를 뿌리러 가는데 얼마나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꽃이 피어날지 모르겠습니다. 오직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녀오겠습니다. 성도님들께서 저의 건강과 숙면 그리고 선교와 공공외교 활동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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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10-01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겸비함’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왕상21:29). 동서를 막론하고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포악한 군주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로마의 네로, 조선의 연산군, 독일의 히틀러,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등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북왕국 아합이었고, 남왕국의 므낫세였습니다. 아합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우상을 이스라엘에 들여놓고 아무 거리낌 없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그것을 반대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자기의 나물 밭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아합의 삶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저가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음이라.”(왕상21:25). 곧 아합은 이세벨에게 팔려 살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며, 충동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죄악에 대한 결과로 하나님의 종 엘리야는 아합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또 네 집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의 노를 격동하고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왕상21:22). 이 말을 들었을 때 아합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한지라.”(왕상21:27).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합에 대하여 엘리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왕상22:29). 이러한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은 어느 누구든지 회개하고 돌이키면 사해주시는 분이며, 겸비함을 보이는 자는 내리기로 한 재앙까지 돌이키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히틀러같이 악한 자라도 돌이키기만 하면 사해 주시는 분이며, 자기 고모부를 죽이고, 이복형까지 죽인 김정은이라 할지라도 회개하여 합당한 열매를 맺으면 용서해 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에 속아 죄를 지었을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자백하면 긍휼을 베푸시고 사해주시는 주님 앞에 담대히 나가야 할 것입니다(히4:16). 하나님께서는 아합의 겸비함을 들은 것이 아니라 보았습니다. 입으로 겸비를 외친 것이 아니라 직접 겸비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우리도 겸비를 외치기는 쉽습니다. 겸비함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직접 겸비를 보여주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겸비함을 보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함을 보이는 것 가운데 하나는 겸비이기 때문입니다. 아합이 엘리야의 책망을 강하게 들었을 때 성령께서는 아합의 마음을 열어 그 자신의 죄악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한 행동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선지자들을 죽이고, 나봇을 죽인 일들이 얼마나 끔찍한 죄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내가 이렇게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다니, 그까짓 나물이 뭐라고, 나봇의 포도원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는데, 하나님께 충성된 사람 나봇을 나의 사욕을 위하여 죽였구나’ 그야말로 자신이 미웠고 한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며 굵은 베에 누운 것입니다. 너무나 마음이 아파 음식을 먹을 마음도 사라진 것입니다. 옷을 찢는 것은 통회하는 마음, 상한 마음을 의미합니다(사57:15). 신앙인들이 믿음과 착한 양심을 쓰려고 할 때 자신이 착한 양심을 못 쓰는 사람임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 중심에서 통회가 나옵니다. 제가 저를 볼 때 매일 매일 탄식하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영광은 말 뿐이고, 저의 영광을 나타내려 하는 마음이 가득 찬 모습을 볼 때 탄식하게 됩니다. 식탐으로 인하여 탄식하게 됩니다. 게으름으로 인하여 탄식하게 됩니다. 저 실제 모습보다 그 이상 되게 보이려하는 외식하는 모습을 볼 때 탄식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한 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세마포로 시체를 쌌듯이(눅23:53), 베로 몸을 동인다는 것은 자신을 죽은 자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금식은 식물을 금하는 것을 뜻하는데 영적인 금식은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대로 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굵은 베에 눕는다는 것은 편안한 생활을 추구하지 않고 고난 받을 각오를 하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말로만 하는 겸손이 아니라, 통회하는 겸손, 죽은 자 곧 십자가 지고 살아가는 겸손, 자신의 기쁨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기쁨만을 추구하는 겸손, 주님을 위하여 고난 받을 각오로 살아가는 겸손, 의복과 삶에 있어서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의 겸손을 보이기를 우리 주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이러한 겸손을 보일 때 주님은 “아무개가 내 앞에서 겸손함을 보느냐?” 하시며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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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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