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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욥의 고백’(욥 42:5)
-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1:1) 사탄은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9절)라고 하며 욥의 모든 소유물을 치면 주님을 욕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11절) 하나님께서는 욥을 신뢰하심으로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하시며 사탄에게 욥을 맡기셨습니다.(12절) 그래서 욥은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사탄의 전략을 다 보게 되었습니다. 욥은 고난 중에도 중보자가 계심을 믿었습니다.(19:25) 본문을 보면,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그동안 하나님을 귀로 듣기만 하였는데, 이제 눈으로 하나님을 보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닫고, 고난 문제를 단순한 죄로만 본 것을 회개하며 하나님 섭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욥이 매우 심한 고난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스발이 찾아왔습니다. 나중에 엘리후가 등장합니다. 세 친구는 욥의 고난을 죄의 값으로 보았습니다. 엘리후는 욥을 훈련하기 위해서 고난을 주신다고 말하지만, 나중에는 죄의 값으로 보았습니다. 고난은 죄의 값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의 세 친구들의 그런 주장에 노하셨습니다. 사람 자체만으로도 우주를 다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섭리와 무궁한 지혜를 사람이 다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욥의 네 친구가 욥의 고난을 보며 말한 내용을 살펴봅니다. 엘리바스는 고난에 대한 지혜를 그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5:27) 엘리바스의 태도는 잘 관찰하고 스스로 판단하겠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빌닷은 고난에 대한 지혜를 과거 전통으로 보았습니다.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8:8) 전통과 격언은 참고는 되지만, 사람의 것이므로 한계가 있습니다. 소발은 고난에 대한 지혜를 자기 느낌, 즉 즉감으로 보았습니다. 자기 생각이 옳으면 옳은 것입니다. 소발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12:12) 소발은 자신의 지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지혜의 근본 된 것이 문제입니다. 엘리후는 욥에 대해 심각하게 비난하지 않지만 세 사람이 놓친 것, 즉 고난은 사람을 사람되게 만들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33:17) 그러나 엘리후가 잘못 생각한 것은, 고난을 이기면 반드시 번영과 축복이 온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견해입니다. “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내며 즐거운 해를 지낼 것이요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36:11-12)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고난에 대한 지혜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28:28) 우리도 고난을 이기는 지혜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세 친구들이 고난에 대해 말한 것이 욥의 말처럼 옳지 못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42:7)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세 친구가 욥의 고난을 죄의 값으로 본 것은 맞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단순화시킨 것이 잘못입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한 것이 잘못입니다. 세 친구 생각에 교훈이 될 말한 지혜는 사람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겼는데,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종적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안다고 한 것이 잘못입니다. 세 친구는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고 욥의 기도를 통해 어리석게 말한 것을 용서받게 되었습니다.(42:8) 한편, 엘리후는 책망에서 제외됩니다. 사람 만들기 위해 고난이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죄의 값이기도 하지만, 회개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보상해 주신다고 본 것이 문제입니다. 죄의 값의 결과가 이 세상에서 꼭 일어난다고 볼 수 없으며, 회개하더라도 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지혜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섭리를 다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참다운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신뢰하며 경외하는 자에게 주님께서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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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욥의 고백’(욥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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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저 푸르지만, 아직 연약한 잎새들”
- 저는 이따금 머리를 식히기 위해 창문의 커튼을 열고 푸른 나무들을 바라봅니다. 보기만 해도 마음에 푸르름의 기운이 들어오듯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오늘따라 바람에 퍼덕이는 잎들이 가여워 보입니다. 서로 바람에 부딪혀 상처받지 않을까 해서요. 그렇지만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푸르름을 반짝이는 나뭇잎들이 대단해 보입니다. 바람이 불어도 새들은 날아다니고 지저귑니다. 제가 창문으로 다 보고 있는데, 새들은 누구도 보지 않는 것처럼 자유롭게 지저귑니다. 도대체 저 새들의 보금자리는 어디일까요? 어렸을 적에는 새들의 보금자리에서 알도 훔쳐먹은 시절이 까마득한데, 저 습자지처럼 얇고 부드러운 나뭇잎 사이에 둥지를 틀리는 만무할 것이고... 우리 교회가 지어질 때만 해도 오동나무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지금은 거목이 되어 있습니다. 하긴 거의 20년이 흘렀으니까요. 나무는 자라서 모든 날아다니는 새들의 쉼터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정말 여리고 부드럽게 느껴지던 것이 제법 푸르름의 빛을 반짝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푸름보다 여림이 더 강하다고 할 것입니다. 얼마 전 심방을 했던 한 성도가 떠올랐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지, 저의 첫사랑과 첫 열정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보통은 처음부터 그렇게 열심을 내기가 쉽지 않거든요. 얼마나 교회 생활에 몰두했냐면, 학업보다 교회 일을 더 중히 여겼습니다. 그런 세월이 거의 반세기, 안식년이나 안식월을 한 번도 갖지 못하고 푸르름이라고 하는 페달을 밟고 왔지요.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셨다면 이미 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저 오동나무는 가을이 되면 스스로 낙엽이 되지만, 교회 뒤편에 있는 소나무들은 겨울도 쉬지 않고 푸르름을 자랑하죠. 낙엽으로 떨어질 때는 떨어지더라도, 이 순간 푸르름으로 발화하고 있는 저 넓적한 활엽수들을 축복합니다. 겨울에 폭설이 내리면 저 넓은 잎사귀가 그 무게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저 푸른 잎들을 바라보며, 얼마 전 심방 했던 새 가족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가을이 온다고 푸르름을 포기하지 않으시겠지... 아직은 푸르름보다는 여린 면이 더 많지만, 가을이 와도, 겨울이 와도 더 단단하겠지.” 부족하지만 저처럼 말이죠. 푸르지만 아직은 여린 그 성도님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가호가 그분에게 가득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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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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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저 푸르지만, 아직 연약한 잎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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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이재명 대통령의 NATO정상회담 불참의 이해득실’
-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불참하기로 결정한 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정상회담, 이 결정에 대한 정권 차원의 고민이 있었겠지만, 국익에 미칠 영향을 따져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NATO는 북미와 유럽 중심의 군사동맹체이지만, 최근에는 글로벌 전략파트너들과의 협력, 특히 중국·러시아 견제, 인도·태평양 전략, 사이버 안보, 방산 협력, 기술 동맹 등으로 역할이 확대되었다. 우리나라는 회원국은 아니지만 파트너 국가(Asia-Pacific Four)로서 2022년부터 초청을 받아 정상급 외교를 이어왔다. 그렇기에 이번 이 대통령의 NATO 정상회의 불참 결정은 여러 면에서 아쉬운 점이 많이 있다. 먼저 가장 큰 우려와 부정적 영향으로는 (1)글로벌 외교 네트워크의 약화이다. 살펴보면 새 정부 출범 직후 세계 리더들과의 직접 대면 기회인 NATO는 이 대통령의 국제적 위상과 신뢰 구축에 매우 중요한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불참은 나토 및 서방국가들에게 ‘한국의 외교적 후퇴’로 비칠 수 있다. 특히 미국, 유럽, 호주, 일본과의 다자외교에서 입지 약화는 단순한 우려가 아니다. 자칫하면 미국과 일본과 함께 하는 대중·대러 견제 틀에서 소외될 가능성이 있다. NATO는 최근 중·러의 영향력 확장에 대한 견제의 장이 되었기에 한국이 불참은 안보·경제 측면의 공동 대응 논의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 (2)방산·기술 산업 외교의 기회 손실이다. NATO 회의 기간 중 열리는 정상회담은 방산 수출, 기술 협력, 에너지 안보 분야의 정상급 교섭 기회임에는 특림없다. K-방산, 반도체, AI 등 전략산업 외교 무대를 놓치는 것은 엄청난 국익의 손실이다. 그러면 이런 선택을 한 이 대통령과 신정부의 의도는 무엇일까? (1)표면상으로 균형외교의 의지로 보인다. 나토의 성격상 중국·러시아를 자극할 수 있는 외교 무대인데, 균형외교 또는 비동맹적 중립외교를 추구하는 관점에서 불참은 그 전략의 일환일 수는 있다. (2)한중 관계 개선,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공간 확보의지로 해석될 수 있다. (3)국내 우선 의제에 집중하겠다는 시그널로 볼 수도 하다. 취임 직후라서 민생·경제 회복·개혁 드라이브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로 ‘외교보다 당장은 국민’이라는 정치적 상징성을 의도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국제사회에서 존재감을 확보하고 외교·경제 실리를 챙기려면 초기 외교 무대인 NATO정상회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보다 유리했다. 특히 미국과 유럽 중심의 다자외교 흐름에서 한국의 입지와 안보 전략을 어떻게 설정하고 유지할지에 대한 일관된 메시지가 필요하다. 일부 평론가들과 국제정치 전문가들은 이 대통령의 NATO 정상회담 불참을 국제 정세 속에서의 전략적 선택으로 해석하지만 정말 “친미 일변도 외교에서 균형외교로의 전환”이라는 관점에서 선택한 전략적 불참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다른 외교적 성과나 메시지 보완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보이지 아니한다. 반면 이에 따르는 전략적 리스크인 오해와 신뢰 손실의 가능성이 높졌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한국의 신정부가 자신들과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약화시키는 신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로써 한미동맹의 신뢰 기반이 흔들릴 경우, 북핵 대응, 방산 협력, 기술 안보에서 한국 입지의 약화는 불문가지이다. ‘균형외교’는 결코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국제 정세가 미중 신냉전 구도로 재편되면서, 양쪽 모두 중립을 허용하지 않는 압박 외교가 현실이다. 이는 '전략적 모호성'이 오히려 양쪽 모두의 신뢰를 잃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대통령의 NATO 정상회담 불참은 단기적으로 중·러의 반발을 사전 차단하고 경제적 충격을 줄이려는 ‘방어적 외교’일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균형외교를 위한 시험적 조정일 수 있으나, 그러려면 미국·서방과의 외교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한 ‘보완 외교’가 반드시 뒤따라야 할 전략적 과제로 남겼다. 그러나 최근 그의 내각을 살펴보면, 이를 뒷받침해줄 인사들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더 친중, 친북으로 흐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처럼 이미 실패한 전략을 다시 집어 드는 것이 지난 날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오기가 아니라면, 이 대통령은 민족 장래를 위하여 밤을 지새우는 깊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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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이재명 대통령의 NATO정상회담 불참의 이해득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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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순간 촬영되는 우리 신앙’ (빌 2:12~18)
- 성도는 언제든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 매우 허영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나타나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특별한 사건이 있을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상시 물건을 나르는 모습에서, 일상적인 걸음걸이에서, 눈빛과 머리를 흔들어 보이는 과정에서 그러한 모습이 묻어나 보이게 됩니다. 사진을 촬영할 때 쓰는 용어로 ‘스냅샷’(snapshot)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는 순간적인 장면을 촬영한 사진으로, 인물 사진에서는 자연스러운 동작이나 표정을 재빠르게 포착한 사진을 뜻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 나타나는 0.1초의 순간적 동작과 모습 속에 휙 하고 지나가는 몸동작이지만 그 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기만의 현실과 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게 됩니다. 그러한 모습은 대개 과거로부터 이어져 오는 습관적인 것들입니다. 때로는 평소 감사를 잃어버린 채 불만족스러워하던 습관적인 모습이, 때로는 자신의 우월함을 은근히 나타내 보려는 모습으로, 때로는 무능력함의 뒷모습으로, 때로는 자기의 이익을 애써 감추며 생활이 어려운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는 모습으로, 때로는 상대방을 속으로 조소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자기만의 연약하고 부족한 허영심의 모습은 자기 내면에 숨어있는 과거의 모습이며,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연약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나 믿음의 부모와 같이 신앙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그렇게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뤄나가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작은 일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구원과 관련되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일은 그렇게 ‘값싼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요, 순교자인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값싼 은혜는 교회의 철천지 원수입니다. 값싼 은혜란, 회개가 없는 사죄요, 교회의 권징이 없는 세례요, 죄의 고백이 없는 성만찬이요, 개인의 참회개가 없는 용서입니다. 값싼 은혜란 뒤따름이 없는 은혜요, 십자가가 없는 은혜입니다.” 즉 하나님과 구원이 가장 귀한 것인데도, 실상은 은혜와 신앙을 쉽고 값싼 것이라고 생각해서 하나님도 교회도 하찮고 쉬운 존재로 여기는 잘못된 신앙, 빗나간 교인의 모습을 뜻하는 말입니다. 기도회에 곧잘 나오지만, 막상 참된 회개는 없는 그런 기도를 하는 모습이라든지, 하나님과 교회 앞에 분명히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교회는 권징하지 못하고, 잘못을 행한 자들은 여전히 교회의 주요 활동에 참여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쉽게 여긴다든지, 참된 회개가 없는데도 형식적인 용서를 받은 것처럼 예배드리며 마당만 밟고 자리를 떠나는 모습 등에 대해 ‘값싼 은혜’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값싼 은혜로 무장된 마음이 우리 안에 있게 된다면, 그러한 모습은 하나님과 신앙과 교회를 등한시하는 내면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실상은 이런 값싼 은혜가 아닌, 순전하신 예수님의 보혈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값진 은혜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에 따른 진정한 값진 은혜를 체험하고 그것을 끝까지 소유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값진 삶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순간의 동작이 회개를 이룬 고귀한 마음에서 나와야 합니다. 자신의 말 한마디, 한 동작이 그 사람의 신앙의 현주소를 정확히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 자신과 하나님의 현재의 관계를 나타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귀한 뜻을 위해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도록 하신다고 하셨습니다(13절). 그러므로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며(14절), 이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우리의 양심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놓여 있는 우리의 모습과 마음이 더욱 값진 은혜를 사모하는 자의 모습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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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순간 촬영되는 우리 신앙’ (빌 2: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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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탈북민이라는 용어 대신, 반도자(叛逃者)라니
- 최근 국무총리 후보자로 나선 김민석 의원에 대한 여러 가지 설왕설래(說往說來)가 있는 가운데, 그가 중국의 모 대학에서 석사 학문을 쓰면서, 북한 정권의 압제로 인하여 탈북한 탈북민들을 도북자(逃北者)와 반도자(叛逃者)라고 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현재 탈북민(脫北民)은 지난해 기준으로 34,314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체제 불만에 의한 것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 정권의 3대를 이은 폭정과 탄압, 그리고 주민의 가장 기본적인 식량문제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건들이 탈북민들을 양산하였다. 우리는 그들을 탈북민(脫北民)이라고 부른다. 북한의 생지옥 같은 체제를 벗어나 탈출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들의 사연 하나하나를 들어보면, 기가 막히고, 눈물겹지 않은 사연이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김민석 의원은 중국의 유명 대학에서 석사 학위 논문을 쓰면서, 도북자(逃北者)라는 표현을 여러 번을 썼다. 이는 말 그대로 북한을 버리고 도망한 배신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본다. 물론 북한이나 북한과 혈맹인 중국 입장에서는 그런 표현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김민석 의원은 한국인이지, 북한이나 중국인이 아니다. 그가 이런 논물을 쓰던 2010년에도 탈북민은 2,402명에 달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대한 용어를 굳이 도북자(逃北者)라고 써야 했을까? 심지어 반도자(叛逃者)라는 용어도 썼다고 한다. 북한을 배반하고 도망친 사람이란 뜻일 것이다. 그가 속한 당에서는 그를 감싸기 위하여 사전에 나오는 말이라느니, 또 색깔론을 주장한다고 하는데, 정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지긋지긋한 북한 당국의 폭정을 피해 지금 우리나라에 수 많은 탈북민들이 들어와 가슴에 피멍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데, 용어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변명한다고 이해가 되겠는가? 도북자(逃北者)나 탈북민(脫北民)의 차이는 세계 최악의 인권 박해국인 북한을 탈출했던지, 혹은 도망했던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문제는 누구의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이다. 중국이나 북한 입장에서는 북한 당국을 배신하고 도망간 사람들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우리의 따뜻하고 감싸는 마음으로는 자유와 생명을 찾아 탈북한 사람들이다. 이것이 지금, 사전에 나온 것이라느니, 중국에서 중립적 의미로 사용하는 용어라느니 하는 것이 마음에 와 닿겠는가? 적어도 임명직으로는 국가 최고의 위치에 올라가려는 국무총리 후보자라면 정중히 사과해야 하고, 같은 당이라고 생떼 같은 소리로 덮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대한민국을 대표할 내각의 책임자를 찾는 것이지, 우리 국민들을 억압하는 세력의 입장을 대변하여 표현하면서, 탈북민들에게는 사과조차 없는 뻔뻔함과 그를 덮어주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정치가 뭔가?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듬어 주는 것이 아닌가? 아픈 상처를 더 후벼파는 것은 결코 좋은 정치의 모습이 아니라고 본다.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바로 잡는 것이 정도(正道)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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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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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탈북민이라는 용어 대신, 반도자(叛逃者)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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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목사의 설교를 ‘내란선동죄’로 몰아가나
- 지난달 5월 26일 경기도 파주에 있는 모 교회의 담임목사에 대하여 경기북부경찰청에 고발장이 접수되었다. 그 이유는 내란선동, 초중등교육법, 아동복지법 위반이라고 한다. 고발 내용을 보면, 담임목사가 교회의 설교에서 ‘종북주사파 등 반국가 세력을 척결해야 한다’ ‘비상 계엄이 나라를 살리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목사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설교를 한다. 그 말씀에는 기독교 교리와 신앙과 영성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또 성경에 나타나는 사회적 정의와 공의에 대한 것도 포함된다. 그리고 무엇이 이 나라의 정체성을 위하여 필요한가를 판단하여, 교인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 이것은 자유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공동체를 생각하면서, 나라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에 대하여,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또 대안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편파적인 내용이 아닌 사실에 근거한 교육을 하여, 학생들이 올바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가능하다고 본다. 지금 일선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교육이 과연 균형 잡히고, 공정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아이들이 담임목사에게 배운 대로 정치적 발언을 한 것을, 정서적 ‘아동학대죄’로 몰아가고 있다. 아이들도 자기들의 주관이 있고 사고(思考)가 있고, 판단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정치적 상황에 대한 것을 충분히 피력할 수 있다고 본다. 과거에 학생운동에서 청소년들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가? 그런데도 목사가 교회 안에서 설교한 것을 극우로 몰고, 계엄을 찬성한 것을 내란 선동으로 몰아가는 것은, 국민들에게 보장된 기본권인 헌법을 외면하는 것이 된다. 우리나라에는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분명히 보장된다. 이것은 어떠한 정부나 정권, 체제하에서도 보장받고 보호받아야 한다. 국민 가운데에는 탄핵 사태에 대하여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현 정부를 지지하는 국민들도 있고, 반대하는 국민들도 지난 대선에서 절반이 넘었다. 그런데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인용된 4월 4일 이후인, 5월 26일 목회자의 설교에 대한 것을 문제 삼아 고발한 것은 분명히 정치적 성향을 달리하는 세력이 고 목사를 표적으로 삼아 공격함으로, 결과적으로 한국교회 전체에 대하여 재갈을 물리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이 교회는 지난 1월 19일 일어난 서울서부지법의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데, 좌파 유튜브 방송에서 마치 관련이 있는 것처럼 방송하여, 교회가 ‘방화범 교회’ ‘폭력범 교회’로 낙인이 찍혀, 교인들이 떠나고, 교인 가정에서 이혼을 당하고, 그야말로 고립무원으로 전도와 복음 전파의 길이 막히는 집단적 폭력을 경험하고 있다. 이것은 지역의 한 교회에 대한 도발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를 무력화시키려는 책동으로 본다. 일찍이 김구 선생은 ‘10곳의 경찰서보다 한 곳의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을 하였다. 교회가 무너지면, 우리 사회도 국가도 흔들린다. 도덕도 윤리도 가치관도 허물어지게 되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큰 기둥이 무너져 내림으로 나라 전체가 붕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경찰도 간첩을 잡아야 할 시간에, 건전한 교회의 목사가 설교한 것을 가지고 고발을 일삼는 것에 거리를 두어야 한다. 이 나라는 국민들이 알게 모르게, 상당히 좌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고 있음을, 뜻이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종교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가 더 민주화된 나라인가? 이런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억압하는 사회가 더 민주적인 사회인가? 종교의 역할을 보장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인가? 그렇지 않은 사회가 더 건강한가? 종교인들의 양심적이고 바른 목소리에 재갈을 물리는 사회는 결코 건강하지도, 좋지도 않은 사회임을 알아야 한다. 목사의 설교를 트집 잡아 ‘내란선동죄’로 몰아가는 사회는 지독한 전체주의, 독재주의로 가는 길목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거 독재 시절이라고 말하는 시대에도 종교인들의 발언과, 특히 교회 안에서 전하는 설교에 대하여 ‘내란 선동’으로 몰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들은 민주주의가 뒤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되물을 일이다. 한국교회도 이번 일에 대하여 결코 침묵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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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목사의 설교를 ‘내란선동죄’로 몰아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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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6·25전쟁, 75주년에 생각하는 교훈
- 올해로 6·25전쟁이 발발한 지 75주년이 된다. 이 전쟁은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우리 민족 최대의 끔찍한 전쟁이었다. 당시 피해 상황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인명 피해만 약 300만 명에 이르며, 전쟁고아 10만 명, 전쟁 미망인 30만 명, 피난민 1,000만 명, 이산가족 1,000만 명에 이른다. 또 재산 피해는 전 국토의 80% 이상이 피해지역이었는데, 지방까지도 피해가 컸다. 전국 1,000여 개 읍면 중에서 600개 지역이 파괴되었다. 건물도 60만 채가 파괴되었다. 산업시설의 45%가 파괴되었다. 철도는 약 2,000Km가 파괴되었고, 도로도 수천 km가 유실되었으며, 주요 교량도 1,000여 개가 파괴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가 30억 달러(당시 GDP의 5배)에 달한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전후 30억 달러의 원조 금액을 보내 준다. 6·25전쟁은 75주년을 맞이하고 있으나 ‘정전 상태’로 불안한 가운데 놓여 있다. 여전히 북한 공산당은 대한민국을 적화(赤化)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분명히 북한은 우리의 ‘주적’이다. 북한은 1953년 7월 27일에 정전협정을 한 후에도, 유엔군사령부의 집계에 의하면, 1953년 7월 27일부터 1994년 4월까지 무려 40만 건 이상을 정전협정을 위반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후에도 연평 해전, 천안함 폭침과 같은 도발은 계속되고 있다. 한반도가 이처럼 무참하게 6·25전쟁을 겪게 된 이유가 뭔가? 1948년 북한의 김일성 정권이 들어선 이후,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48차례에 걸쳐 대한민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자고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묵살하였다. 그러던 것이 1949년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모택동의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스탈린도 김일성에게 남침을 허락하게 된다. 이는 소련의 세계 공산화 전략과 김일성의 대남 적화 야욕, 그리고 소련의 지시로 중공군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빚어진 한반도에서의 비극이었다(중공군의 개입으로 우리나라는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때 대한민국에서조차 ‘북침설’과 ‘남침유도설’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있었으나 수많은 반박 자료에 의하여 논파(論破)되었다. 6·25전쟁은 소련과 중공과 북한에 의한 치밀한 계획 속에 이뤄진 전면적인 남침임에 틀림 없다. 우리는 75주년을 맞는 6·25전쟁을 잊으면 안 된다. 이런 불행한 전쟁을 방지하려면 철저한 힘에 의한, 대비가 가장 중요하다. 이 땅에 평화가 지금까지 지속되는 것은 1953년 10월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하여 맺어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이 협정으로 미군이 합법적으로 이 땅에 주둔하고, 그 힘에 의한 전쟁억제력과 북한 공산당의 오판을 미연(未然)에 방지한 까닭이다. 지금도 미군과 철저한 공조 없이는 자유대한민국의 안위를 보장하기 어렵다. 우리는 이 중요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며, 한반도에서 절대로 다시는 6·25전쟁과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전쟁은 수많은 피를 흘리게 한다. 미국의 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는 ‘전쟁은 노인이 시작하고 젊은이가 죽는다’고 하였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전쟁은 누구에게도 승리를 주지 않는다. 오직 상처만 남긴다’고 하였다. 미국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전쟁은 인간이 만든 가장 잔혹한 게임이다’라고 하였다. 자유대한민국을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지키는 것은 어설픈 정책의 오류나(과거 잘못된 대북정책으로 그들에게 핵무기를 만들 시간과 자금을 대준 사례가 있었다) ‘감상적 평화주의’로 되는 것이 아니다. 평화 정책도 상대편의 호응 반응과 협력을 예의(銳意) 주시하여 정확히 평가하면서 추진해야 한다. 우리는 6·25전쟁 75주년을 맞이하면서, 전 국민이 하나 된 마음으로 전쟁을 방비하고, 억제하고, 평화가 실제적으로 존속하도록 힘써야 한다.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전쟁으로 망한다. 그렇지만 그 전쟁이 일어나도록 빌미를 주는 것도 매우 어리석은 일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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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6·25전쟁, 75주년에 생각하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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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뉴스타파의 기독교계 정책 제안 비틀기 지나치다
- 진보 언론을 대표하는 뉴스타파는 지난 5일 ‘국가 정책으로 포장된 개신교의 이권 사업들’이란 제목으로 기독교계가 정부에 제안한 정책을 이권 사업으로 몰아가는 방송을 하였다. 아마도 얼마 전에 불교계의 정부에 대한 지나친 재정의존도에 대하여 비판한 것과 구색(具色)을 맞추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독교계가 생명 존중, 출산•돌봄•교육에 대한 국가 책임제 실시, 건전한 민주 시민으로의 청소년 교육 지원, 종교자유의 실질적 보장, 종립학교에서의 종교교육 보장, 중독 예방과 치료, 기독교문화유산보호법 제정 등에 대하여 이권 사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내용도 제대로 맞지 않으면서, 기독교에 흠집을 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저출산으로 심각한 몸살을 앓고 있다.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낳아도 제대로 맡기고 사회 활동을 할 수 없기에, 전국적인 시설과 인적인 인프라를 가진 교회가 자녀들을 돌본다는 것은 국가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도 이것을 악의적으로 이권 사업으로 몰아가는 것은 언론의 잘못된 권력사용으로 보인다. 국가는 어차피 국민들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하고, 국가의 운명을 가를 출산과 돌봄을 기독교가 협력한다는데, 그것을 색안경을 끼고, 포장된 이권 사업으로 몰아가는 것은 언론의 정도(正導)가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국가를 대신하는 것을 교회가 맡아서 할 때, 최소한의 비용 지불은 이권(利權)과는 거리가 멀다고 본다. 부모 세대가 자녀 세대를 위하여 손자 세대를 돌보면서, 자녀 세대가 부모 세대에게 용돈을 드리는 것도 이권 사업으로 몰아갈 것인가? 저출산 문제는 이제 더 이상 미루거나 늦출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이것을 제안한 기독교를 매도하는 것은 기독교가 잘할 것을 알고 미리 방해하려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에서의 기독교 교육이나 청소년들의 성장을 위한 지원은 우리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것으로, 당연하다. 오늘날에야 일반 학교가 많아졌지만, 우리 교육 역사에서 기독교에 의하여 이루어진 공로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지나친 폄훼(貶毁)로 보인다. 뉴스타파는 기독교의 정책 제안을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공공정책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데 이것은 헌법적 가치와 사회적 공공성을 해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럼, 우리 기독교인은 우리 사회 구성원이 아니라는 것인가? 아니면 국가와 사회의 심각한 문제를 도울 자격이 없다는 것인가? 언론의 책무는 진실에 대한 보도가 가장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종교도 헌법에 보장된 만큼, 사회를 위하여 기여하고, 또 더 큰 선한 역할을 위하여 정부에 정책 제안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가 지역에서 태어나는 자녀들을 돌보겠다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의 실천이지, 당치도 않은 이권 개입과는 거리가 멀다고 본다. 뉴스타파는 타종교의 문제점을 보도한 것과 연계하여, 기독교에 대하여 얼토당토않은 구색(鉤索-갈고리를 거는) 맞추기에 애쓸 필요가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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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뉴스타파의 기독교계 정책 제안 비틀기 지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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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대한민국호를 바뀐 정권이 바로 세울 수 있을까?
- 6월 3일 치러진 대선에서 대통령이 결정되었다. 수많은 ‘사법리스크’와 부정·부패의 큰 결함을 가지고 있는데도, 특정 지역의 절대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당초에는 절반에서 60%대가 넘는 지지로 당선될 것이란 전망은 깨지고 말았다. 절반 가까운 국민들은 그를 지지하지 않은 것이다. 이번의 대통령 당선은 당시 여당의 갈팡질팡이 빚은 결과이기도 하다.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자신들이 뽑은 대선후보를 불법적으로 바꿔치기하려는 시도까지 한, 정체성 불명의 정당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새로운 대통령은 다수결에 의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그에 대한 사법적 무거운 굴레는 여전히 남아 있다. 방송 3사가 선거 당일 5,190명을 대상으로 ‘이미 진행 중인 재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을 때, 응답자의 63.9%가 재판을 계속해야 한다고 답했다. 심지어 민주당 지지자들 중에서도 42.7%가 재판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고 보면 대통령 당선인이 얼마나 취약한 상태인가를 알 수 있다. 정말 사법부가 법과 양심에 흐트러지지 않는 결정을 내린다면, 그 결과는 얼마나 더 큰 혼란이 될 것이며, 국가적 위신을 떨어트리게 될까? 그런데도 여당에서는 대법원의 법관을 현재 14명에서 30~100명으로 늘리는 ‘입법발의’를 하였다. 그 엄청나게 늘어나는 법관을 모두 새로운 대통령이 임명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금은 완전히 입법부, 행정부를 차지했는데, 이제는 사법부조차 완전히 틀어쥐고 나가겠다는 시도가 아닌가? 전 정권과 지금은 야소(野小) 정당을 제2의 적폐로 몰아가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없고, 또다시 국민들을 분열시키는 결과가 될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대통령 당선인은 본인이 주장한 대로, 진보와 보수를 따지지 않는 절제와 포용과 협치를 실행해야 한다. 어느 언론의 말처럼 ‘권불 5년은 뭔가를 이루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지만, 뭐든 망치기에는 하염없이 긴 시간이라’고 했다. 우리는 지난 8년 사이 두 명의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여, 새로운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다. 신임 대통령은 이러한 점들을 감안하여, 함부로 권력을 남용하고, 지나친 욕심으로 국정을 망치지 않기를 바란다. 만약 그런 분위기가 감지된다면, 그를 지지하지 않았던 절반의 국민들이 결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황금 같은 시간을 지난 6개월간 한없는 다툼과 분열과 혼란으로 지새웠다. 이제는 그렇게 낭비할 시간이 없다. 국제적으로 냉혹하고, 국내적으로도 숱한 난제들이 쌓여 있다. 대통령은 국가의 미래와 국민들을 생각하며 ‘국민 머슴’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새로운 대통령은 국민을 무시하면 국민들로부터 막 바로 버림받는다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란다. 또한 기독교계에 약속한 ‘차별금지법’과 같은 악법(惡法)을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또 종교와 관련된 법들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우리 기독교는 애국의 종교로, 나라를 위하여, 국가 지도자를 위하여, 국가의 바른 정체성을 위하여 늘 기도하는 종교이다. 이 나라가 불행한 나라가 되지 않도록 더욱 힘써 기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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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대한민국호를 바뀐 정권이 바로 세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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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평화에 이르는 새 길”
- 명지대학교 정성철 교수께서 쓰신 ‘국가는 왜 싸우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한반도 평화로 가는 길에 대해서 로버트 저비스의 이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국가는 왜 싸우는가, 사회평론 아카데미) 로버트 저비스에 의하면 나선형 모델(Spiral 모델)과 억제 모델(Deterrence 모델)이 있습니다. 나선형 모델은 안보 딜레마에 기초하여 충돌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두 국가가 모두 자국의 안보를 위해 방어적 행동을 취하지만 이는 상대의 안보 불안을 야기 시킨다고 합니다. 결국 두 국가는 위기의 고조를 막지 못한 채 충돌에 이른다는 것이죠. 이러한 모델은 유화와 관용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남북한 모두 평화를 희망하더라도 오해와 불신으로 상대의 방어적 행위를 공격적으로 바라보게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한 경우 남북한은 번갈아 가며 그러한 오해에 따른 대응을 취하면서 소용돌이에 휘말린 채 충돌로 치닫게 되고 맙니다. 바로 그러한 비극은 상호 인정을 바탕으로 신뢰를 쌓아갈 때 피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억제 모델의 관점에서 평화는 상대의 공격에 맞서 싸울 결연한 의지를 보일 때 가능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상대의 도발에 미온적으로 대처한다면 결국 양측은 대규모 분쟁에 휩싸이고 맙니다. 상대방이 군사적 수단 자체를 고려하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압박하고 봉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 모델에 따르면 평화는 역설적이게도 싸울 준비를 마치고 결의에 찬 국가들 사이에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죠. 상대를 공격하여 압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과거 6.25 전쟁의 발발도 김일성이 승리할 수 있다는 오판에 따른 결과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과 미국이 적극적으로 북한의 공격이 엄청난 피해를 불러올 것이라는 메시지를 다양한 방법으로 전달하였을 때 한반도의 평화가 보장되어왔다는 것이죠. 이러한 두 가지의 주장은 모두 한반도 평화를 지향해 왔습니다. 하지만 상반된 가정에서 기초한 두 입장의 정책제안은 상이하다고 합니다. 나선형 모델에서 국가는 현상 유지를 희망하는 불안한 행위자이지만, 억제 모델에서 상대국은 불만족으로 현상 변경을 노리는 도전적 행위자입니다. 그래서 정성철 교수에 의하면 우리는 북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북한은 오랜 경제 실패와 외교 고립으로 생존을 갈구하는 국가인가? 이라크 전쟁과 후세인 처형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힌 실패 국가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핵과 미사일 개발을 지속하면서 체제 안정이 위협받을 경우 모험적 도발도 감행할 준비가 된 도전 국가인가? 그것도 아니면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외부 세력의 영향을 차단하며 정권 안보에 사활을 건 공격적 행위자로 볼 것인가?” 저자에 의하면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우리의 대북 통일정책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북한은 안보 불안에 시달리는 국가인가? 아니면 정권 안보를 추구하는 불만족 국가인가?” 이에 대한 우리 안에서 열린 토론이 합의에 이를 때 저자는 장기적 관점에서 지속 가능한 대북 통일 정책이 가능하다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다소 전문가적이고 어려운 글이긴 하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이 얼마나 아슬아슬했던가를 느낄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6.25 참전용사들의 헌신과 희생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지금의 번영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와 평화는 절대로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6.25 참전용사들의 수고와 지금도 우리나라를 지키고 있는 안보의 힘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국민 모두가 서로 단합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평화에 이르는 새 길입니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우리 교회는 6.25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19년째 맞이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행사들이 거룩한 낙수 효과를 이루며 나비효과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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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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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평화에 이르는 새 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