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5(일)

칼럼
Home >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칼럼 기사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우리들만의 아주 특별한 밤
    저는 故 이어령 교수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어령 교수님이 누구이십니까? 천의무봉의 필력으로 끝없는 지식을 거대한 산맥처럼 이어가셨고 '디지로그' '젊음의 탄생' '생명이 자본이다' 등과 같은 고정관념의 틀을 깨뜨리는 창조적 신지식의 세계를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저의 문학세계를 인정해 주시고 시집 ‘꽃씨’ 추천사에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한국시사의 첫장으로 알려진 육당 최남선의 ‘바다에서 소년에게’에서는 파도가 네까짓께 뭐야라고 바위와 뭍을 몰아세우며 우르르 쾅 덤벼들지만 소강석 목사의 그리움에서는 오히려 파도와 뭍의 절벽은 서로 친화의 사랑과 그리움으로 어울린다.(중략) 불교에 한용운 스님의 임의 침묵이 있었던 것처럼 기독교의 지도자들도 시를 쓰는 계기를 마련해 주시기를 빌면서 이만 말을 거두려한다.” 특별히 이어령 교수님께서 저의 시에 대해서 애착심이 많으셨습니다. 언젠가는 전화를 주셔서 “내가 하늘나라 갈 날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습니다. 내가 뭐 추천서 쓸 거 없습니까? 작품 있으면 마지막으로 선물을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시집 ‘외로운 선율을 찾아서’를 썼을 때 추천사를 써 주셨습니다. “소강석 목사는 예향(藝鄕)의 마을 남원 출신으로서 목회자이면서 동시에 시문(詩文)에 능하고 풍류와 흥이 있으며 거친 남도 사내의 야성도 있다. 그의 특유의 친화력과 열정, 사람을 웃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풍모를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에게 나의 언어를 마지막 선물처럼 주고 이 시집의 추천사는 어쩌면 나의 마지막 도움의 말이 될지 모른다.(중략) 나는 그가 그리울 것이다. 그의 시가 그리울 것이다. 그와 나누었던 추억과 순간들이 그리울 것이다. 소년 같은 그의 웃음과 미소도…” 결국 이어령 교수님은 돌아가셨고 저는 코로나 상황에서도 그 분의 장례식에 직접 가서 조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이 시대 최고의 문학평론가인 김종회 교수님께서 저의 시를 인정해 주시고 평가해 주셨습니다. 저에게는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실 목사들의 시가 문단에서 잘 인정을 못 받습니다. 일반 서점에서도 잘 팔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자의 시가 이미지나 낯설게 하기, 은유와 함축, 반전 같은 것들이 없고 그냥 고백적이고 서사적으로 드러나게 쓰다 보니까 논외로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김종회 교수님께서는 저의 시를 접하시더니 목회자 시의 테두리를 넘어서 문학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 시집 원고를 보내 드렸더니 “몇 군데 좀 수정하면 안 되겠느냐” 하셔서 다시 표현을 했더니 확실히 더 돋보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작년에 한강 세빛섬에서 북 콘서트를 했을 때도 직접 참석하셔서 시 토크를 진행해 주셨습니다. 후문에 의하면 우리 교인들 가운데 그때 세빛섬에 초청받지 못한 분들이 정말 부러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말 예상을 초월한 북 콘서트였습니다. 이번에는 책을 파는 북 콘서트가 아니라 봄을 맞아 꽃과 관련된 저의 시를 이해하고 감상하고 느끼는 ‘꽃소리 들리는 밤’의 시 콘서트입니다. 물론 김종회 교수님을 초청하지 않고 우리끼리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광스럽게도 문단에서 가장 위대한 평론가 중에 한 분이신 김종회 교수님을 모시고 시 콘서트를 할 수 있어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먼저 짧게 1부 예배를 드린 후, 우리 교인들과 함께 시 낭송과 노래, 연주, 토크를 진행하며 꽃향기가 보이고 꽃소리가 들리는 특별한 밤을 갖는 것은 우리들만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저녁에 오신 분들을 정말 예의를 갖춰서 모시겠습니다. 오늘 밤, 우리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꽃소리 들리는 밤’이 되면 좋겠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4-07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참된 헌신’(벧전 4:11)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께 헌신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할 것입니다. 헌신은 자기의 생각이 아무리 옳고 자기의 방법이 편리하다 할지라도 인간적인 생각과 의지를 철저하게 배격하고 하나님 방법대로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힘으로 한다면 반드시 부작용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일하다 보면 늘 경우가 나오고 불평이 생기고 분쟁이 일어나고 갈등을 빚기에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때보다 못한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헌신은 문제가 생기고 시험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의 열심과 생각과 힘으로 주님의 일을 하면 자기 의와 공로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았을 때 가인이 분노한 것은 믿음으로 행하지 않았기에 자기 의가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부작용이 생기지 않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과 은혜로 해야 합니다. 벧전 4:11절에서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자기를 위하여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기가 태반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일을 하러 오신 예수님을 방해하는 일을 하였지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모압 땅에서 온갖 풍파를 겪었고, 앞으로 당할 고통을 감수하면서 유대 베들레헴으로 향하고 있는 룻과 나오미에게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하는 헌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힘을 공급해주신 것입니다. 룻이 자기 민족을 버리고 남편의 민족에게로 갈 결심을 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의 마음이 지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조건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자신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룻에게는 당연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일이 그녀의 최대의 목표이었기에 그녀의 전진은 중단이 없었으며 도중에 머뭇거리거나 곁길로 나가지도 않았고 가야 할 목적지도 잊은 적이 결코 없는 헌신된 발걸음이었습니다. 또한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의 헌신의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해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오직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전폭적으로 거룩한 헌신을 한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는 타산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온전히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헌신을 다짐하시고 온전히 실천하십시다.
    • 칼럼
    • WAIC 칼럼
    2024-04-02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사탄의 유혹 ‘마침’’
    지난 시간에는 여호와 이레 ‘마침’에 대하여 글을 썼습니다. ‘마침’은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타이밍이기도 하지만, 항상 좋은 편에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탄도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듯(고후11:14), 신앙인들이 혹할 수 있도록 적절한 때 행동을 부추기는 추임새로 ‘마침’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거짓말쟁입니다(요8:44).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했지만(창3:17), 죽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창3:4-5). 아담 이후로 사람들의 두뇌가 점점 발달 된 것처럼, 사탄도 사기술이 점점 고도화되었습니다. 아담 때의 뱀이 지금은 용이 된 것입니다. 지금도 아무런 가책 없이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은 사탄의 사자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욘1:2).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이 싫었습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니느웨는 그대로 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서쪽 끝에 있는 다시스로 도망을 가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마침 다시스행 배가 왔습니다(욘1:3). 그 당시 배는 지금처럼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외국행 배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스행 배가 떡 앞에 나타나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배를 탔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 상태를 이해해 주신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였습니다. ‘마침’ 다시스로 향하는 배가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보내심이 아니라, 마귀의 유혹이었습니다. 그 배와 선원과 승객들이 마귀라는 것이 아니라,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 하여 다시스로 가려할 때 나타난 적절한 타이밍이 마귀 유혹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에 넘어가서 그는 배를 탔고 배는 얼마쯤 가다가 대풍랑을 만났습니다(욘1:4). 이처럼 ‘마침’이라고 해서 항상 하나님의 이레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죄수 아닌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이 미항이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배가 더 가면 생명까지 위태하다고 권하였습니다(행27:9-10). 하지만 선장과 선원들은 그곳에서 겨울을 나기가 불편하니 뵈닉스에서 겨울을 나자고 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남풍이 순하게 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자신들은 득의한 줄 알고 갔습니다(행27:13). 그러다가 얼마 못 가서 유라굴로 광풍이 덮쳤고(행27:14), 배에 탄 사람 모두는 죽다가 겨우 살아났습니다. 이처럼 ‘마침’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온 것도 있지만, 마귀도 그것을 활용해 적절하게 속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못 가 본색을 드러내고 맙니다. 마귀는 사람들에게 결코 복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탄의 속임수 마침’과 ‘여호와이레 마침’을 어떻게 분별합니까?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첫째는 말씀에 맞아야 합니다. 아무리 순풍이 불어와도 우리가 하는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마침’이 아닌 사탄의 속임수 ‘마침’입니다. 요나는 분명히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욘1:2)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말씀에 따르지 않고 다시스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다시스로 가려고 했던 것 자체가 잘 못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을 맡았던 백부장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도 바울이 미항이라는 곳에서 떠나지 말라고 하면 그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선장과 선원들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전문가의 말입니다. 전문가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었던 것입니다. 일례로 신앙인들 가운데 매주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지겹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마침’ 비가 온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 하나님께서 오늘은 집에서 쉬라고 하시는 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매 주일 첫 날에 떡 떼고 말씀을 나누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행20:7). 떡을 뗀다는 것은 성찬식의 의미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말씀의 떡을 나누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주일에 말씀을 먹지 않고서는 한 주를 살아가기 힘듭니다. ‘마침’이라고 모두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말씀에 맞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4-03-26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의료대란'과 '낭만닥터 김사부
    “오늘도, 내일도 여기 이 자리에서 이렇게 서서 날 필요로 하는 환자들을 계속 기다릴 거야.” 유명한 SBS 드라마 의학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 중에서 나오는 명대사 중 하나이다. 팰자는 이 드라마의 1,2,3부를 모두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반복해서 시청했다. 목사인 필자가 얼마나 목사다운가를 묻는 질문 앞에서 이를 대신해 주는 드라마로서 목사를 의사로 대입해서 이 드라마를 반복하여 시청한 것이다.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의사, 의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대답은 목양 현실에서 목사임을 고미하는 필자에게 매우 진지한 참고가 되었다. 돈과 의사의 명예만을 추구하는 병원장을 향하여 “난 믿고 있어. 아직은 의사 사장님보다 의사 선생님이 되고 싶은 애들이 더 많다고 말이야”라는 일갈로, 험한 분야의 의사보다 우아한 기업 병원을 원하는 자들에 대하여 일갈하는 장면에서도 ‘목사 사장님’의 이미지가 떠올라 명치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괴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병원 이사장의 사주를 받은 감사요원에게 “열심히 살려고 하는건 좋은데, 우리 못나게 살지는 맙시다. 사람이 뭣 때문에 사는지 그건 알고나 살아야 되지 않겠어요?”라며, 목적지향적인 저돌적인 무례한 인간에게 대한 일갈이 있다. 제자들에게 “우리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마. 그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의 낭만도 끝이 나는 거다.”라는 대사에서 왜 의사인가? 왜 의사로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 있다. 지금 의료대란은 의사들의 절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의사답지 못함 때문이다. 지금 그들이 멱살을 잡고 있는 것은 대통령도 정치인도 아닌 국민의 멱살이다. 그것도 생명의 목줄을 잡고 정부를 향하여 시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의사 가운을 입는 순간부터 그들의 의술과 지식은 자신들만의 것이 아니다. 그들 주관적으로 결정하고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민주 사회에서 대중과 개인의 생명에 관련된 직종은 절대로 자신들의 이익이 행동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바뀌어도 적어도 ‘종교인’, ‘교육자’, ‘군인’, ‘의료인’의 신념과 가치는 바뀌면 안된다. 그런데 지금 필자의 눈에 보이는 의료인들은 ‘의사 사장님’들로 보인다. 의사들이 열심히 살려는건 좋은데 못나게 살면 안된다. 의사가 뭣 때문에 사는지 그건 알고나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의사들은 의사들이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면 안된다. 그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 의사의 의사다움도 끝나게 되는 것이다. 여론은 싸늘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 임박한 4.10 총선을 앞둔 각 당의 의료대란 계산서의 총액이 다르다. 만일 의사들이 이 계산서를 의지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의사가 아니다. 의사가 생각하고 바라봐야 하는 것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다. 그런데 의사들이 정치적 사고를 시작한다면 ‘의사 정치인’이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의사들의 절박함을 악용하는 정치인들의 수작에 놀아나면 안된다. 정치인들의 특기 중 하나가 절박한 사람들의 심리나 환경을 활용할 줄 아는 기술자들이다. 그들이 교사들과 공무원을 망가뜨렸다. 이제 의사들이다. 의사의 의사다움을 포기하는 순간 의사는 정치인들의 먹음직한 먹이감일 뿐이다. 교사들이 교사다움을 스스로 포기하고 월급쟁이 노동자로 자처하며 전교조를 만드는 순간 이 땅에 교육이 무너졌다. 필자는 최강의 낭만닥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의사다움만은 잃지 않기를 바라며, 그들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며 그 기다림이 절실한 국민들 곁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기다림이 오래 가지 않기를 기도하며, 이를 기회로 진정한 이 시대의 반듯한 의사 윤리가 확립되고, 풍족한 의사 인력과 개선된 의료 환경을 조성하여 세계적 한류 의료가 지구촌 곳곳으로 뻗어 나가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 칼럼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4-03-23
  • [언론회 논평] 가짜뉴스로 한국 총선에 개입하는 중국 언론 매체
    지난해 11월 국가정보원이 발표한 바에 의하면, 중국 언론홍보 매체들 38개가 국내 언론사 사이트로 위장하여, 우리나라 여론을 호도하는 공작이 있다고 하였다. 그들은 지역 이름에다, 00프레스, 00온라인, 00타임스, 00저널, 00교통, 00여행, 00문화, 00포커스, 00글로벌, 00발전 등의 이름으로 전국에서 활동하였다. 또 기존의 언론사 명칭을 앞부분에 사칭하기도 하였다. 결국은 한국의 여론을 호도하려는 획책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중국발 언론 매체들이 한국의 총선이 다음 달로 다가온 것을 기화로, 한국의 정책을 비판하고, 심지어 가짜뉴스를 만들어 유포하는 등의 선거판에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다고 한다. 이런 매체는 해외에서 유입되기 때문에 통제하기도 어렵고, 차단하기도 어렵다. 저들의 목적은 한국의 총선을 맞아, 온갖 허위 정보와 가짜 뉴스를 양산하여 정국을 혼란하게 만들고 자유 대한민국의 체제를 흔들려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런 것을 적대국의 정보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체제를 붕괴시키는 ‘샤프 파워 전략’(sharp power strategy)이라고 한다. 이를 뒷받침하듯, 중국 언론 매체 혹은 중국계 유튜버들의 조직적인 활동이 감지되고 있다. 중국은 지역별로 전문가, 인플루언서, 국제팀 등 상당수의 댓글 부대도 운용(運用)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의 상당수는 현 대통령의 정책을 왜곡하여 비판하고, ‘자유 민주주의자는 낙선시켜야 한다’라고 주장하여 반민주적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또 야당 대표가 옳다는 식으로 국내 여론을 왜곡시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만약 이러한 일에 중국 정부가 주도하거나 배후 세력이라면, 이를 즉각 중단 해야 한다. 이는 내정간섭으로 국가 간 신뢰를 저버리는 것이다. 또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권위주의, 전체주의 국가인 중국 정부가 자국의 잘못된 언론 매체들의 행위를 엄하게 단속해야 한다. 중국의 이런 총선 개입은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세력이 당선이 되거나, 그 세력이 커지지 못하도록 다방면으로 활동하는 것이며, 이것을 받아 국내에서도 확대 재생산하여 퍼트리는 경우까지 생겨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우리는 이런 도발 행위에 대하여 단호하게 대처해야 하며, 국민들도 잘못된 가짜뉴스에 속거나, 이를 확인조차 없이 퍼트리는 행위를 조심해야 한다. 시중에 떠돌아다니는 정체불명의 여론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바른 결정과 선택이 선거의 정확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총선이 불과 2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국민들의 선택이 국가의 장래를 결정하고, 미래에 대한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 국민들은 이렇듯 중요한 시점에 중국의 조직적이고 대대적인 여론 호도에 흔들리지 말고, 오직 국가를 위하여, 국민의 대표로 일할 참된 일군을 신중하게 선출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부정선거에 대한 불안감과 의구심이 다 사라지지도 않고, 그에 대한 확실한 제도 개선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웃 나라의 불순세력까지 총선에 끼어들어 우리나라 선거판을 뒤흔드는 책동은 고약한 일이다. 오직 국민들이 나라를 바로 세운다는 각오로 이런 것들에 흔들리지 않는 방법밖에 없다. 이번 총선은 국민의 승리가 되어야 하며, 국민의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어야 하며, 우리 자유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더욱 확실하게 드러나는 선거가 되어야 한다. 또한 불순한 외세가 틈타지 못하도록 철저한 방비와 함께 국민적 의식의 고취(高趣)가 필요하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4-03-21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거시적 안목을 가집시다’(창 13:14-15)
    세상을 너무 근시안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신경 쓰고, 당장의 이익에만 집착을 합니다. 그러나 멀리 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와 같은 지혜를 갖지 않고는 인생을 올바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멀리 보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집(믿음의 집)을 지을 때 아주 견고하게 지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눈앞의 이익에만 연연했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실수는 멀리 보지 못하는 인생의 비극을 교훈합니다. 당장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서 팥죽 한 그릇에만 집착했던 에서는 장자의 축복권이라는 뒤에 것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창 13장에 보면 애굽에서 올라온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가축이 너무 많아 목자들 간에 다툼이 일어나자 아브라함은 다투지 말고 서로 갈라서자고 하며 조건 없이 선택권을 조카 롯에게 먼저 주었습니다. 롯은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바로 눈앞에 보이는 넓은 들판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마치 에덴동산과 같고 애굽 땅과 같이 아주 비옥하고 기름진 곳으로 보였기에 그 땅을 선택했습니다. 그곳의 환경은 생각지 않고 어디를 가든지 신앙생활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눈앞의 이익이나 모든 기득권을 조카에게 양보하며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고자 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온 것입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14-15절). 사람이 눈앞에 이익을 위해 욕심의 노예가 되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속에 더러운 탐욕과 정욕과 이기심과 명예욕과 정욕으로 가득 차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신령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겠으며, 신령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의 귀가 열릴 수 있겠습니까? 롯은 당장 눈앞의 이익을 선택했지만 멀리 보는 지혜가 없었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땅을 택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롯은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7). 그 후 그곳은 죄악 때문에 유황불의 심판을 당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당하고 난 후에 롯의 두 딸들은 아버지에게 술을 잔뜩 취하게 한 뒤 번갈아 자면서 잠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그리하여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과 대적하는 민족으로 살았습니다. 가족의 족보를 그와 같은 방법으로 이어가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닐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멀리 보는 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근시안적인 생각으로 할 일들은 후대까지 악영향이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당장 눈앞의 화려한 것에 속지 말고, 지금 당장은 서운하고 안타까워도 먼 장래를 위해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먼 곳을 바라보는 지혜를 갖아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믿음의 눈을 들어 지경을 넓히며, 넓게 멀리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4-03-19
  • [언론회 논평] 러시아는 한국인 선교사를 속히 석방하라
    지난 11일 러시아가 언론을 통하여 한국인 선교사를 간첩혐의로 체포하여 모스크바에 구금하고 있음을 밝혔다. 러시아는 1월 중순에 한국인 선교사를 블라디보스톡에서 체포하여, 2월 말에 모스크바로 이송하고, 그리고 3월 11일에야 그러한 사실을 뒤늦게 공개했다. 러시아답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그런데 러시아 당국에 의하여 소위 간첩혐의를 받고 체포된 선교사는 러시아 내 탈북민과 북한 벌목공들에게 인도적 차원의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것들이 간첩혐의가 된다면 러시아는 심각한 인권 탄압국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가 한국인 선교사에게 간첩혐의를 씌워 체포•구금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는데, 과연 러시아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간첩행위를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믿기 어려운 억측이다. 따라서 러시아는 한국인 선교사를 즉시 석방해야 한다. 현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러시아와 북한 간의 정상 회담이 이뤄지고, 서로의 무기 거래를 위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그렇다하더라도 러시아가 인도적 차원에서 궁핍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활동을 하는 한국인 선교사를 붙잡아 억류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전쟁 중에도 인도적 활동은 계속되는 것이고, 특히 북한 당국의 독재와 그 주민들을 돌보지 않아 북한 주민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해, 탈북한 사람들을 돕는 활동은 정당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러시아는 주권국가로서, 북한 당국의 눈치를 볼 것이 아니라 신속히 한국 선교사를 돌려보내기 바란다. 한국 정부도 자국민의 안전이 보장되도록, 또 인도적 차원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안전하게 귀국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 주기 바란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4-03-18
  • [언론회 논평] 살인권도 헌법에 보장하나? 프랑스가 세계 최초가 되다
    • 칼럼
    2024-03-18
  • [언론회 논평] 살인권도 헌법에 보장하나? 프랑스가 세계 최초가 되다
    지난 4일 프랑스에서는 상•하원 통합회의를 통하여 여성들의 낙태할 권리를 헌법에 보장하는 결정을 무려 찬성 780대 반대 72표의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쉽게 말해 살인권을 헌법에 보장하는 최악의 참사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그리고는 좋아하고 있다. 프랑스 대통령은 ‘프랑스의 자부심’이라고 하였다. 무슨 자부심일까? 생명을 죽이는 것이 그다지도 기뻐할 일인가? 총리는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라는 역사적 메시지를 전 세계에 보낸 것’이라고 하였다. 어쩌면 그 엄마들이 그런 살인허용 속에서 살았다면, 그들도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생명에 관하여 이처럼 정치적 결단을 내리고 대단한 위업을 이룬 것처럼 즐거워하는 모습이 매우 불편하다. 물론 여성의 건강권이나 혹은 성폭력과 같은 불가피한 상황에서 임신하는 경우는 매우 불행한 것이며, 또 그런 예들은 각 나라에서도 합법적으로 보호받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전면적인 낙태를 헌법에 보장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의 생명을 이처럼 인간들이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결정을 하고 득의양양(得意揚揚)하는 모습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엄마가 자기 몸속에 들어온 생명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놓는 것이라면, 이는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더군다나 이번 프랑스에서의 낙태를 헌법에 보장하는 결정을 내린 것이 2022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낙태권을 폐지한 것에 대한 반발이라는 말도 있는데, 어찌 생명을 죽이는데, 낙태권이라는 쟁점을 국제간에 선점하려는 것이 되어야 하겠는가?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의 이런 결정에 대하여 로마 교황청은 ‘생명을 앗아갈 권리는 없다’는 성명을 냈다. 당연한 것이다. 낙태를 합법화하고, 이를 헌법으로 제정하는 행위는 인간의 가장 타락하고 교만한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2019년에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침해한다며 낙태죄가 폐지되었다. 이때 임신 14주까지는 무조건, 15~24주까지는 제한적으로 낙태를 허용한다는 대체 입법안을 냈으나 아직까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 극단적인 성폭행이나 산모의 건강이나 어떤 유전적 질병에 의한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면, 엄마에 의하여 어린 생명이 살해당하는 끔찍한 법이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금 한 유럽국가에서 낙태권을 헌법에 보장하는 ‘살인 면허’를 허용하는 법을 만들어 놓고 무슨 위엄을 달성한 것처럼 자랑스럽게 여기는 무서운 광경을 보고 있다. 이래서는 절대 안 된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4-03-18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험한 세상 사잇꾼 되어”
    이어령 선생님은 생전에 '사잇꾼'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느 조직이든 이쪽과 저쪽의 사이를 좋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조직은 망하지 않아. 개발부와 영업부, 두 부서를 오가며 서로의 요구와 불만을 살살 풀어주며 다리 놓는 사람, 그 사람이 인재고 리더야. 리더라면 그런 '사잇꾼'이 되어야 하네. 큰소리치고 이간질하는 '사기꾼'이 아니라 여기저기 오가며 함께 뛰는 '사잇꾼'이 돼야 해.”(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역시 언어의 연금술사요 천재적 통찰력이 빛나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시대를 보면 사잇꾼은 보이지 않고 사기꾼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정치도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고 행복하게 하는 본령을 벗어나서 자기 진영과 정파의 이익만을 위해 온갖 협작과 비난을 앞세워 공격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 사회는 이념, 계층, 지역 갈등을 일으키며 분열하고 충돌하고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종교마저도 어느 한쪽에 서서 진영과 정파에 치우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종교는 어느 한쪽으로 서는 게 아닙니다. 특별히 종교 지도자는 여기도 품고 저기도 품는 사잇꾼이 돼야 합니다. 코로나 때 저는 이미 정부에 주도권을 빼앗겨 버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교단 총회장과 한교총 대표회장을 하면서 어떻게든지 현장 예배를 지키면서도 국민 보건을 도모하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어떻게든지 션샤인 처치가 되고 허들링 처치가 되도록 나날이 애를 태우며 하루하루를 살아갔습니다. 특별히 초갈등 사회를 맞이하여 진보와 보수 사이의 간격을 좁히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어서 특별한 상황이지만, 그렇지 않은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진보와 보수, 좌우가 서로 잘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을 봅니다. 저도 지금까지 사잇꾼의 지도력을 발휘해 왔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저의 스탠스를 지지해주고 응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극단적 진영에서는 저를 얼마나 공격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특별히 코로나 시기에 만약 제가 어느 한쪽 말만 듣고 잘못된 판단을 하였다면, 한국교회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데드크로스의 깊은 수렁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션사인 처치가 되어 사회적 순기능 역할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사회에 초갈등을 유발하고 심화시키는 우를 범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코로나 시기에 예배 회복을 위하여 정부와 맞서서 싸울 때는 싸우면서도 동시에 사회의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교회의 역할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코로나로 인하여 상처를 입은 한국교회의 사회적 이미지도 점점 회복할 수 있었고, 분열과 갈등이 아닌 협력과 상생의 길을 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저는 여전히 이런 사잇꾼의 리더십을 발휘하려고 했습니다. 분열된 교계 연합기관을 하나로 묶으려고 엄청 노력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지나치게 여(與)도 아니고, 야(野)도 아닌 중도적 균형을 지켰습니다. 성경적 본질과 가치를 지키는 데는 철저하게 보수적이지만 사회적 약자와 동서 화합, 남북 화해에 있어서는 진보적인 가치도 추구했습니다. 물론 자신의 태도를 극명하게 표현하는 게 가장 쉬운 일이죠. 누구를 비판하든지, 누구 한 사람을 치켜세우든지 이런 건 아주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양쪽을 다 품고 양쪽과 함께 같이 가는 사잇꾼의 역할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종교가 무엇입니까? 영혼 구원과 함께 사회에서는 순기능이 되고 선순환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오히려 종교가 사회 분열과 갈등을 심화시키는 기폭제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무엇보다 종교는 영생의 길을 안내하면서도 갈등하고 충돌하는 사회로 하여금 숨통을 트이게 해줘야 합니다. 종교 지도자가 사기꾼이 되면 사이비가 되고 이단이 되어 자기 욕망과 욕구만 채우게 되죠. 그런 사이비나 이단은 사회에 더 큰 해악을 가져다주고 악순환을 일으키며 인간의 삶을 오염시키고 파멸의 길로 인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애당초 종교를 잘못 만났으면 잘못된 종교 지도자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소속 목사이고, 그 교단의 총회장과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한교총 대표회장으로 섬기게 된 것을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단 한 번도 양극단에 서서 대척점을 두는 행동을 하지 않고 저만의 정체성 위에서 화합꾼과 사잇꾼이 되어왔던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저의 욕망보다는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살아온 것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저는 험한 세상의 사잇꾼 되어 하나님과 성도들, 그리고 우리 교계와 사회에 사랑과 용서, 화해와 연합의 다리를 놓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3-17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