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목사는 ‘자기비하’ 통해 자신은 낮추고, 성령만 드높이는 광대
유행가 논란? 성 프란스시스, 칼빈도 설교 중에 대중가요를 사용했다
“소강석 목사의 독특한 설교는 신학적 유산으로서의 분명한 가치가 있다”
시종일관 역동적이고, 드라마틱한 전개로 유명한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의 설교가 근래 유튜브 등에서 크리스천들의 큰 각광을 받고 있는 가운데, 일부 목회자들이 소 목사의 설교 행태를 시비하며, 때아닌 논란이 일고 있다.
스스로 ‘광대’를 자처하며, 목회자로서의 정형화된 고정관념과 권위를 내던진 것으로 유명한 소 목사이기에, 사실 이번 논란 자체가 시기적으로 매우 부적절하고, 부자연스러운 감이 없지 않다. 다만 코로나 확산 이후 시대의 대세가 되어버린 유튜브를 통해 소 목사의 ‘설교’ 역시 높은 인지도와 함께 그 인기가 급상승하며 새로운 반항을 일으킨 것 역시 사실이다.
문제는 이번 ‘설교 논란’ 자체가 기존 소 목사를 향한 정치적 공격과 그 맥락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이들 상당수가 이전에도 소 목사에 대한 정치적 비판을 자주 해 왔다는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당연히 설교의 행태, 구성, 유행가 삽입 등 소 목사의 행태를 두고 도를 넘는 온갖 문제를 제기하지만, ‘비판을 위한 비판’에 매진하다보니, 딱히 설득력은 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튜브, SNS 등을 통해 해당 논란이 끊임없이 재생산, 확대 되며, 논란은 쉬이 사그러들지 않았고, 결국 정통 신학자들까지 나서 해당 논란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밝히고 나서는 지경에 이르렀다.
신성욱 교수(아신대 설교학), 김덕현 교수(칼빈대 설교학 교수) 등이 참여한 토론에서 나온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 목사의 설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철저히 개혁주의적이며, 자기희생적인 매우 훌륭한 설교다. 이번 논란이 오히려 전문가들로 하여금 소 목사의 설교를 검증하고, 인정하게끔 만들어 준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논란과 별개로 소 목사의 설교에 대한 두 교수의 견해는 교계의 또다른 주목을 받고 있다.
<영상보기: youtu.be/iRC2NN8AP5s>
김덕현 교수 “소 목사는 광대 설교의 표본”
신성욱 교수 “바울과 같은 아이덴티피케이션(자기 동일시)’기법 적용”
먼저 김덕현 교수는 세계적인 설교학 박사 요한 H. 실리에(Johan H. Cilliers/ 남아공 스텔렌보쉬대 교수)가 주창한 ‘광대 설교’가 소 목사의 설교 행태와 정확히 부합한다고 설명했다. ‘광대 설교’의 핵심은 ‘자기비하’로 자기를 낮추고 희생함으로 청중들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성경 인물이 다름아닌 ‘바울’이었다.
다음은 요한 H. 실리에 박사는 자신의 저서 ‘하나님의 어릿광대’에서 표현한 바울의 모습이다.
“바울이 보는 설교자의 모습은 보다 이상하고 불편한 그것, 바로 바보의 모습이다··· 우리는 바울을 연극 안의 바보처럼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예고도 없이 무대 위로 뛰어올라와 그의 발칙한 말들과 익살맞은 행동들도 극 전체를 헤집어 놓는 바보 말이다. 연극 속의 바보처럼 바울은 관습을 거스르는 행동들을 보인다. 십자가를 선포함으로써 그는 힘과 지혜에 대한 세상의 이해를 바꾸어 놓는다"
김 교수는 “요한 H. 실리에 교수는 성경에서 드러나는 전형적인 설교자의 이미지를 광대로 봤고, 그 대표적인 인물로 바울을 지목했다”면서 “자기비하를 통해 스스로를 낮추고, 오직 성령만 드높이는 것이 바로 광대설교다”고 말했다.
이어 요한 H. 실리에 교수가 그린 ‘광대상’에 소강석 목사가 매우 근접했다며 “만약 요한 H. 실리에 교수가 한국어를 배워, 소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면 ‘한국에 이런 설교 컨텐츠가 있구나’ 하고 놀랐을 것이다”고 말했다.
신성욱 교수는 소 목사의 설교를 ‘아이덴티피케이션(자기 동일시)’ 기법의 전형으로 봤다. 자기를 낮춰서 상대를 배려하며, 이를 통해 감동을 주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인데, 이 역시 ‘바울’의 설교 기법이라는 것이다.
이 외에도 신 교수는 소 목사의 설교가 ‘개혁주의’가 아니라는 비판에 대해 지속적인 변화와 수정을 의미하는 ‘reform’에 오히려 매우 충실함을 지적했고, 김 교수는 ‘유행가’ 논란을 놓고 과거 성 프란시스와 칼빈도 설교 중 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사용했고, 실제 많은 호응을 받았음을 설명하며, 일각의 근거없는 비판들을 일축했다.
‘나’의 기준을 ‘기독교’의 기준으로 삼아선 안돼
사실 이번 논란은 굳이 전문가의 평가나 신학자들의 연구가 아니더라도, 이를 듣는 청중들의 반응에서 그 결과가 증명되고 있다. 진지함으로 포장한 권위에 도취된 일부 목회자들이 다름과 틀림의 구분 없이 무조건 비판으로 일관하는 자세는 오직 스스로만 옳다는 자만을 증명할 뿐이다.
기독교의 정체성은 변치 않지만, 교회와 예배의 문화는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또한 보는 이들의 관념에 의해서도 옳고 그름이 판단된다. 당장 우리가 예배 중에 아무렇지 않게 부르고 있는 복음성가나 지금은 은혜의 척도처럼 되어버린 ‘통성기도’가 불과 30~40년 전 만해도 장로교에서 금기시되었던 사실은 지금으로써는 결코 상상키 어려운 일이다. 또한 지금도 일부 보수교단에서는 복음성가는 물론 설교 중 ‘예화’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하고 있다. 예배의 권위를 떨어뜨린다는 이유에서다.
윤항기 목사는 자신의 곡 ‘여러분’의 가사를 철저히 성경을 염두하며 썼다.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라는 가사의 ‘나’는 바로 ‘하나님’을 뜻하고 있다. 일반사람들은 서울국제가요제 대상을 수상한 ‘여러분’을 단순 대중가요로 기억하지만, 기독교인들에게 ‘여러분’은 은혜로운 복음성가다.
비판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면 이를 부정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인지하는 것보다 많은 변화를 겪었고, 또 그 변화에 자연스레 익숙해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교회와 예배는 그 익숙한 변화를 통해 점진적인 진화를 이룬다. 이를 인정치 않고자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개혁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