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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박명수 박사(1953- )
    한국성결교회 및 복음주의 신학의 뿌리 연구 조명 '초기성결교회사' 등 성결교회 역사와 신학 확립에 큰 공헌 전북 완주 출신.. 성결교신학교 서울신학대학원서 공부 박명수(朴明洙) 박사는 1953년 10월 9일(음력), 전북 완주군 동상면 사봉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그 시기는 동족상잔의 이념 투쟁의 결과로 발발한 6.25 전쟁이 한창 전개되던 때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숨겨진 섭리라 할까. 그 산골 마을에 교회가 있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교회에 다녔다. 이것이 그에겐 축복의 근원이었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였다. 이후 그의 전도로 부모님들도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그는 인도의 영성가로 알려진 썬다싱(1893-1929)의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하는 위대한 결단을 읽고 마음이 움직였다. 그래서 선교사나 목사가 되기 위해서 1972년 봄에 성결교신학교(현 성결대학교)에 진학해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이왕이면 학업을 폭넓게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1학년 때부터 종교학을 비롯한 불교학 개론 및 유교학에 관한 저서 등 타종교 서적도 탐독하였다. 4학년 때는 하인리히 오토의 <신학 해제>를 읽고 감동해 각 주제를 암송할 정도로 심취했다고 한다. 그는 성결대학교를 졸업한 후, 1976년 3월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신학을 새롭게 배웠다고 한다. 이른바 신학적 회심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는 성결교신학교 시절에 배웠던 보수신앙과 진보신학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서울신대에서 건전한 복음주의를 배우며 깨달았다. 그때 웨슬리 신학을 가르치던 조종남 학장의 학문적 영향이 컸다고 후일 말했다. 미국 보스톤대학교에서 19세기 성결운동 연구 그는 이곳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박사과정으로 진학하였는데, 당시 박사학위 과정 학제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장로회신학대학, 감리교신학대학, 한신대학교와 서울신대가 연합해 운영하는 5개 대학 '공동박사학위 과정'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조직신학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마치고, 학위는 받지 않은 채로 미국 보스톤대학교로 가서 교회사로 전공을 바꾸어 새로이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한국의 성결교회는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웨슬리의 후예인가? 아니면 자생교단인가? 하는 문제로 논쟁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공부하던 중 그러한 논쟁이 19세기 성결운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9세기 성결운동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1992년에 <19세기 미국성결운동의 성결 개념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명수 박사는 1992년 여름에 귀국하여 그 해 가을 학기부터 서울신학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해, 교수가 된 것은 1994년 봄 학기부터였다. 박명수의 학자로서의 학문여정을 그의 제자 허명섭 박사는 3단계로 나누어 이야기 한 바 있다.(퇴임기념논문집 2020, p.56 이하). 제1기는 한국성결교회의 역사와 신학의 정립을 위해 땀을 쏟았던 시기이다. 당시 성결교회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이에 박명수 교수는 한국성결교회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성결운동에 대해 연구 발표하였고, 이를 묶어 <근대 복음주의의 중요 흐름>(1998)이란 책을 출판했다. 이후에 출판된 <초기성결교회사>(2001), <한국성결교회의 역사와 신학>(2004), <한국성결교회100년사>(2007), <이명직과 한국성결교회>(2008) 등이 츨판되었다. 이것은 성결교회의 역사와 신학을 확립하려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제2기는 한국교회와 복음주의 신앙을 위해 활동했던 시기이다. 이때부터 박명수 교수는 성결교회를 뛰어넘어 한국교회 전체를 대상으로 연구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 시발점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국제신학연구소의 초청으로 참여하게 된 오순절신학에 대한 연구였으며, 1907년 대부흥운동에 대한 연구는 그 지평을 한국교회의 주류 속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넓혀 주었다. 전자의 결과는 <급하고 강한 바람>(2012)이란 책으로 출판되었고, 후자는 <한국교회 부흥운동>(2003)으로 나타났다. <근대사회와 복음주의>(2008)도 한국교회에 복음주의를 전하고자 애썼던 땀의 결실이었다. 이 외에도 2007년을 전후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여러 기관들과 함께 일하며 한국교회 복음주의 기독교를 대표하여 활동하였다. 한국기독교 역사와 한국사는 '불가불리' 또 한 가지 그의 활동 가운데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한국교회 역사 바로 세우기운동"이라 하겠다. 이 운동은 그가 우연한 기회에 한국사(韓國史) 교과서에 서술된 기독교 관련 내용이 왜곡 축소 폄하되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비롯되었다. 당시 한국사 교과서에 "한국기독교가 지나치게 복음주의적이어서 제국주의와 일제 침략의 앞잡이가 되었다"라고 서술되어 있었던 것이다. 박명수 교수는 이 서술이 잘못된 것임을 입증하고 한국사회에 끼친 한국교회의 역할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와중에 그는 종교편향문제, 즉 정부 당국이 불교와 유교는 물론 무속종교에까지 전통종교니, 전통문화니, 또는 민속문화라는 이름으로 각종 혜택과 지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그것은 종교편향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독교 공공정책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를 만들어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 기독교의 현안을 제시하여 답변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이에 공감하는 여러 동료 학자들과 함께 <역사교과서와 기독교, 공정하게 서술되었는가?>(2010), ,한국근대화와 기독교의 역활>(2011), <한국정치와 기독교 공공정책>(2012) 등은 이런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제3기는 2010년도 전후를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그동안의 연구 영역 및 활동을 넘어 한국기독교와 대한민국의 발전 과정을 연구하는 영역으로 그 지평을 확대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한국사 교과서가 기독교 역사만을 축소 왜곡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역사 자체를 공정하게 서술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시작되었다. 해방 후 한국사 연구는 남북 분단 역사의 관점이 대한민국의 출현이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국기독교가 한국사회의 근대화와 일제하 민족운동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운동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해방 후의 한국사가 공정하게 평가를 받을 수 없다면 한국기독교 또한 왜곡 폄하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교회 역사학자로서 박명수 교수의 역사인식은 무엇보다 소중한 역사적 문화 유산에 대한 관심에서 촉발되었다. 한국기독교 안의 냉소적 비판주의와 한국사회의 반기독교적 정서에 대한 반동적인 자각이 그의 역사인식 저변에 흐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그런 것들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그 저변에 깊이 배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계속 제기하는 문제이고, 그의 역사연구는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성결교회의 정체성 확립 및 전파에 애정을 기울인 것도 복음신학과 신앙에 대하여 자긍심을 갖도록 격려하고 도전하는 것도, 한국기독교의 역할에 대하여 긍정적인 비젼을 제시하는 것도, 나아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국기독교가 한국역사에 끼친 영향 과소 평가" 박명수 교수의 역사인식과 연구는 정당한 주체성의 자각과 그것을 고무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한국기독교가 한국역사에 끼친 영향에 비해 우리 역사 속에서 지니치게 과소 평가받고 있다는 인식이다. 한국기독교는 불교나 유교가 미친 영향만큼 근.현대사에서 한국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역사 교과서에서 이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인색하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상당부분은 왜곡되거나 많은 경우 과소 평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박명수 박사는 역사연구 및 해석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를 강조한다. (1) 사실(Fact)에 근거한 역사 서술이어야 한다. 완전한 객관을 견지하긴 어렵지만 역사는 사료가 알려 주는 대로 가능한 객관적으로 서술되어야 한다. 역사가의 일차적인 임무는 과거의 역사를 사실에 입각하여 서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관 중심의 역사연구를 경계한다. 종종 사관(史觀)을 강조한 나머지 역사를 사실과 다르게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역사를 사실에 근거하지 아니하고 선입된 사관에 입각해서 보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곧 사관 중심의 역사연구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푸로크루테스'의 침대의 오류에 빠진다는 것이다. 푸로크루테스는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안으로 불러들여 침대에 눕게 한 후, 나그네의 키가 침대보다 길면 잘라서, 짧으면 늘려서 죽였다. 사관이 중요하지만 사관에 맞추어 역사를 연구하게 되면 역사를 왜곡할 여지가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명수는 자신의 역사연구 방법을 설명하면서 종종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사자성어를 사용한다. "서술하는 것이 창작보다 중요한 것"이란 의미로 일찍이 공자가 사용한 말이다. (2) 역사연구와 해석은 국제적인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딴 섬처럼 완전히 고립되거나 독립된 역사는 없다고 본다. 거의 모든 역사는 교류를 통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연구 및 해석은 국제적인 관계를 염두에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면, 한국성결교회는 세계기독교의 흐름 속에 있고, 특별히 동양선교회(O.M.S)로 대표되는 19세기 웨슬리안 성결운동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발전되어 왔다. 이는 한국교회의 역사에도 비슷하다. 한국교회는 19세기 미국복음주의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교회가 크게 신학적 자유주의와 교리적 정통주의로 나뉘어 있지만 한국교회 저변에 흐르고 있는 것은 체험적인 복음주의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세계기독교의 흐름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으며, 고등학교 교과서에 기독교에 대한 제대로 된 서술이 없는 것도 한국사를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못 보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성결교단과 한국교회의 역사적 혜안의 소유자 (3) 박명수 교수는 교회사 연구 및 해석에 있어서도 일반역사의 흐름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와 종교는 사회적 환경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정교분리와 종교적 사사화(私事化) 현상 등으로 공적인 영역에서 종교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었지만, 그렇다고 종교의 영향이 무시되어도 좋은 정도는 아니다. 구한말의 일제 강점기 그리고 무엇보다 해방 후 대한민국의 건국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는 한국역사 속에 묵직한 비중으로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일반사회의 흐름을 고려하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복음주의를 근대사회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자 했던 것도 이러한 시도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연구를 통해서 그는 근대의 중요한 사상가들이 근대사회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으며, 여기에 기독교가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 지를 설명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전통신학에 익숙한 신학자들은 변화하는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반면, 근대 사상가들 중에는 변화하는 사회를 인식하고 있었다면서, 예를 들면 로크(John Locke, 1632-1704)나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토그빌(Alexis de tocgueville, 1805-1859) 등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성결교회의 교회사가로써만 아니라 이미 한국과 아시아 및 세계교회가 나갈 방향을 제시하는 혜안(慧眼)을 가진 학자이다. 그가 성결교단과 한국기독교를 위한 넓은 역사적인 혜안의 소유자임을 증명하는 것은 유학에서 돌아오지마자 서울신학대학교 안에 성결교회역사연구소를 설립하고, 한국성결교회 및 오순절계 신힉과 복음주의 신학의 뿌리를 연구 조명하고 정리한 과정은 한국교회를 향한 큰 공헌이라 생각된다.
    •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2022-09-27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남양 김명혁 박사(1937- )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한 영원과의 만남 그리스도인은 종말론적 초연의 자세를 가질 때 고난도 소망이 될 수 있어 순교자 김관주 목사의 아들로,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 남양 김명혁(南陽 金明赫) 박사는 1937년 6월 4일, 순교자 김관주(金冠柱, 1905-1950) 목사의 아들로 일본 동경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후 1~9세까지는 평북 의주에서 살았고, 9~11세까지는 평양에서 살았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횡포로 더 이상 그곳에서 살 수 없어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단신 월남하여 서울에서 방산국민학교를 마치고, 서울중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6.25 동란이 발발하자 대구로 피난했다. 이때 이성봉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해 은혜를 받고 부모님들의 대를 이어 목사로서 헌신하기로 다짐하였다. 그는 대구제일교회에 출석하면서 당시 어린이 사역의 대가로 알려진 안성진 목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신앙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피난지에서 이성봉 목사가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해 수 차례 안수기도를 받았는데, 그 목적은 좋은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휴전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서울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를 다니면서 교회는 창동교회와 대창교회에 다니며 김치선 목사 밑에서 철저한 신앙훈련을 받았다. 그는 그때 새벽기도회의 중요성과 전도와 선교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김치선 목사는 새벽마다 한국의 28,000여 동네마다 신앙의 우물을 파게 해 달라고 역설했다. 남양은 1961년 대학을 마친 후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의 교수진은 박형용 명신홍 한철하 최의원 오병세 강태국 등이었다. 그는 특히 한철하 교수에게 많은 도전과 감화를 받았다. 한철하 교수는 교회사를 사건 위주가 아닌 주제와 사상의 흐름 위주로 강의했다. 어거스틴 연구 강의 시간에는 그의 초기 작품들을 영어로 읽으며 그의 신학방법론과 신앙과 이성과의 관계에 대한 그의 입장을 다루었는데, 그 당시 그에게 많은 감동과 학문에 대한 정열을 불어넣어 주었다. 남양은 이를 계기로 어거스틴을 전공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논문을 쓰게 되었다.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예일대학교에서 역사학 공부 그는 총신에서 1년을 마친 후, 1962년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훼이스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inary)로 유학을 가 그곳에서 교장 맥클레이(A. Alexander Macleay) 박사의 교회사 강의에 큰 감명을 받았다. 다시 1966년 웨스터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로 가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친 후, 뉴 헤븐에 있는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 신학부로 가서 다시 석사과정에서 유명한 역사신학 교수 자로슬라브 펠라칸(J. Pelican) 교수의 지도하에 교부들에 나타난 이사야서의 메시야적 해석이란 논문을 썼다. 그의 신학과 사상은 그가 쓴 저술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신학의 원천은 그의 역사관에서 출발한다. 그는 서울대에서 서양사학을 배우면서도 역사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했다. 그 후에 목회자의 삶에 있어서 역사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식하였다. 사람이 참된 삶을 위하여서 하나님의 참 뜻을 분별하기 위하여서는 성경의 계시와 성령의 조명과 함께 필요한 것이 나 자신의 역사적 안목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나 자신과 이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분별하고 습득하는 세 가지 척도와 자원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성령의 조명과 역사적 안목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역사의 중요성을 바로 인식한 펠리칸(Jaroslav Jan Pelican), 라토렛(K.S.Latourette), 베인톤(Roland H. Bainton), 존 스타트(John R.W. Stott) 박사 등의 역사관을 따라 신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책 제1권이며, 교회사를 하나님의 책 제2권이라고 하였다. 이들로부터 기독교 역사관을 배웠다. 남양에게 역사란 무엇이냐? 라고 한다면, 그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 영원과의 만남이라고 한다. 시간의 통합적 연속 속에서 역사의 의미를 찾고 있다. 그는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세 가지 견해를 소개한다. 1)역사란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Facts)을 정확히 기록하는 것(Lanke의 입장), 따라서 역사가의 과업은 단지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을 사실 그대로를 보여주는데 있다. 2)역사란 과거 사건들을 해석(Interpretation)하는 것이란 견해가 있다(R.G. Collingwood), 즉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본다는 견해이다. 따라서 역사가의 과업은 그의 마음 속에 과거의 역사를 재연하는 것이라고 본다. 3) 역사란 과거의 사건을 정확히 기술함과 아울러 그것을 오늘의 상황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이라는 견해(Edward Hallett Carr)이다. 즉 역사는 사건과 해석을 포함하며, 객관적 요소와 주관적 요소를 포함한다는 견해로서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붙잡는 것이라는 입장이 있다. 그런데 남양은 세번째의 견해에 따라서 역사를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데 동의하며,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만남과 대화가 역사요, 역사적 안목이라고 한다. 과거의 역사는 나와 상관없는 역사가 아니다. 오늘 내가 당면하는 문제들을 이미 과거의 역사가 먼저 경험을 했다. 그러므로 과거의 역사를 읽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오늘의 나의 문제와 나의 이야기를 읽는 것과 같다. 그래서 과거의 역사를 읽을 때 오늘 나의 위치와 문제를 보다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하게 되고, 오늘의 현실을 바로 살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얻게 되며 내일을 향한 보다 풍부한 통찰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를 남양의 종말론적 역사관이라 할 것이다. 남양의 역사관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남양은 종말론적 초연을 강조한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나 밖에서 그리고 종말론적 완성의 점에 서서 내려다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사후 체험을 한 사람이 자기 밖에서, 자기 위에서, 자기를 내려다보는 위치를 멀리 종말론적 오메가 포인트에 둘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종말론적 초연의 자세를 가지게 될 때,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이루어 나아가는 구속사의 과정과 방편들이라는 인식을 가질 때, 그 사건들의 의미는 크고 분명해진다. 특히 오늘의 내가 구속사의 한 점을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인식하게 될 때, 나는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삶의 의미와 용기와 기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은 종말론적 초연의 자세를 가지게 될 때, 나에게 가해지는 오해와 멸시와 박해도 나를 도무지 불쾌하게도, 낙심하게도 만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보람과 기쁨과 용기를 가지고 역사 창조의 대열에 나서서 주어진 사명을 묵묵히 수행해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안목을 지닌 신앙의 사람들을 성경은 일컬어 "세상이 능히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히 11: 37)이라 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 양면성의 종말론적 역사신학을 추구한다. 이것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용과도 다른 양극을 붙잡는 역동적인 통일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의 이런 신학사상은 어거스틴(Augustine) 전공자로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 사상에 기인한다고 보여진다. 삶의 지혜를 얻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계시와 성령의 조명이 절대 필요하지만, 그것과 함께 절대로 필요한 것이 역사적인 안목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역사적인 안목은 현재와 과거와 영원과의 만남으로 주어지며 종말론적 초연의 자세를 지니므로 주어진다고 말한다. 역사적인 안목과 양면성의 사고를 지닐 때, 우리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보편적인 관점을 지니게 된다. 그것은 지역주의나 민족주의나 인종주의를 넘어서는 보편적이고 초월적이고 세계적인 관점이며, 하나님이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시는 눈으로 나 또한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고 본다. 남양은 이런 세계관을 지닐 때 우리는 고난과 죽음과 종말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와 자세를 지닐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고난은 일반적으로 범죄의 결과로 주어지는 형벌이지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훈련의 한 도구임을 알게 된다. 고난을 통해 사람은 자신을 바로 알게 되고, 하나님을 바로 알고, 이웃을 바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남양은 실천적 신학자요, 원수도 사랑으로 품는 사랑의 목회자" 남양은 먼저 개혁주의를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1) 하나님 중심 사상 (2) 성경 중심적 사상 (3) 교회 중심적 사상 (4) 기도와 경건 중심 사상 (5) 문화변혁 중심 사상이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신학이나 역사관 또한 그 뿌리가 개혁주의 신학사상과 칼빈주의 교회관에 입각한 학자라 보여진다. 남양은 복음주의 신학의 약점을 익히 알고 있었다. 즉 개인주의적 영향이나 감정주의와 주관주의적 성향, 교회관의 약점이나 교리의 약화 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양은 개혁주의 신학 전통과 더불어 복음주의 신학 전통을 함께 붙잡으려 한다. 마지막으로 남양 김명혁의 삶과 신학은 학자로서 상아탑 안에서 사색적인 이론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는 성도의 교제와 봉사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의 영역을 넓혀간다. 그의 실천적인 신학의 삶은 목회와 신학에 이어 선교와 역사적인 영역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른바 선교와 통일을 향한 실천적인 활동이다. 남양은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신학교에서 선교학을 강의하며 그 분야의 많은 글과 저서를 남기기도 하고, 현장 선교사들을 돌보는 일에 정성을 쏟기도 한다. 은퇴 후에도 미자립농어촌교회를 방문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멘토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스스로 착한 스승이 되고 교계의 지도자가 되어 모범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를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기획출판한 <복음주의와 한국교회>(2004) 논문집에서 정진경 목사는 남양을 가리켜 "내 마음을 열어 보이고 싶고, 또 내 마음 한 구석에 자리를 허용할 수 있는 친구 가운데 한 분"(p.42)이라고 하였다. 남양은 순교자의 아들로서 북한 공산당의 핍박을 받았지만, 역설적으로 북한 동포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고 그들을 위해 기도와 사랑으로 실천적 사역을 감당하는 모습은 진정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연상케 한다. 백석대학교 주도홍 박사는 남양을 가리켜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사랑과 온유, 겸손과 지혜, 거기다 리더십을 갖춘 목회자요 학자요 기독시만운동가로 사는 것이다. 아버지를 죽인 북한 공산당을 한때 원수로 여겼으나 그는 예수님의 심장을 가진 자로 북한을 안타깝게 여기며 북한을 위해 기도하고, 순전한 사랑으로 물심양면으로 사랑하신다. 그의 모습에서 종종 사랑의 사도 요한의 모습을 본다"라고 했다.(한국교회를 빛낸 칼빈주의자들, 2020, p.1121)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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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8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김광수 박사 (1926-2016)
    민족교회론에 기초한 ‘민족교회사관’ 주창 <한국기독교회사, 교회와 민족, 한국민족교회> 형성사론 등 저술 황해도 장연군 솔래 출신... 한국 기독교 역사학계 거목 솔래 민경배(松川 閔庚培)는 1934년 6월 22일, 황해도 장연군 장연읍 읍내리에서 태어났다. 장연읍은 뒷동산엔 무성한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앞으로는 황해(黃海)로 흘러 들어가는 큰 내(川)가 있는데, 그 내를 이름하여 송천(松川, 솔래)이라고 한다. 이곳은 일찌기 기독교가 전래되어 조선 최초의 토착민에 의해 세워진 소래교회(松川敎會)가 있었다. 이 교회는 1885년 미국 선교사들의 한국 입국 전에 서경조 형제와 여러 조선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세운 교회로, 이후 서울의 언더우드 선교사를 찾아와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한 바로 그곳이다. 그곳에서 민경배가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의 선교역사를 널리 광포하기 위해 예비한 큰 사건이 아니었나 생각되어진다. 민경배는 서울로 와 1952년 3월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에 진학하여 대학원을 마친 후, 1956년에 모교에 강사로 임용되어 명예교수가 되기까지 신촌의 연세대학교 캠퍼스를 떠나지 않고, 교회사 학자로서 자리한 기독교계의 거목이라 하겟다. 1994년 9월에 그의 회갑을 기념하여 간행된 <한국교회사론총>에 간행위원장 김인수와 편집위원장 박효생이 공동으로 기술한 간행사를 보면, 솔래의 공적을 읽을 수 있다. 한국교회사연구는 용재 백낙준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지만, 학문적인 체계로 정립한 것은 솔래이다. 그의 학문은 위당 정인보를 비롯하여 백낙준, 홍이섭으로 이어지는 연세의 국학연구 전통에서 이룩된 것으로서, 솔래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는 하나의 금자탑을 일구어냈다. 그가 이룬 학문은 후학들에 의해서 계승 발전되기는 하겠지만 그를 능가하는 학자는 오랫동안 나타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그가 보여준 학문적인 자세는 제자들에게 공감이 되고도 남는다. 명쾌한 논리로 세운 사관(史觀), 수려한 문장 구사, 파 헤쳐지지 않은 사료가 없을 정도로 광범위한 문헌의 섭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한다. 그는 학자로서 행운도 타고나 일찍부터 연세대학교 강단에서 교수하기 시작하여 평생을 연세의 울타리 밖을 나가지 않은 연세의 거목으로 자리하고 있다.(회갑기념론총 p.5). 민족교회론에 기초한 '민족교회사관' 정립 솔래 민경배의 교회사연구 시각은 은사 용재의 교회사관인 선교사관(宣敎史觀)을 뛰어넘어 소위 '민족교회사관'을 주창하였다. 그의 민족교회론은 지금까지 그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독특한 교회사관이다. 그는 이 사관에 입각하여 한국교회의 역사를 전개한다. 이 민족교회론에 기초한 민족교회사관은 앞으로 100년 정도는 더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중심적인 사관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 한국교회사의 정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골격으로 한국교회의 올바른 신앙을 척도하는 기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솔래의 민족교회사관에는 교회와 민족의 조화뿐만 아니라, 신앙과 신학의 조화,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는 지상과제인 민족통일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솔래의 민족교회론에 대하여 장로회신학대학교의 교회사 교수였던 이영헌 목사는 1977년에 "교회사를 일종의 예술품으로 만든 놀라운 솜씨"라고 평했다. 그는 이 민족교회론을 "주체성 있는 민족교회 형성이란 강한 주견을 가지고 종래에 빠지기 쉬웠던 선교사들의 식민지적인 선교교회의 탈피를 그 과제로 하고 있다"며,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민족교회론이 가지는 그 위치의 중요성을 지적한 바 있다.(이영헌, 한국교회사의 최근 동향, 신학사상 1977년 봄호, p.35). 솔래가 주장하는 민족교회론의 구조를 살펴보면, 그의 민족교회론은 내연(內燃)과 외연(外燃)이라는 구조를 가진다. 그가 내연-외연이란 구조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1981년에 간행한 그의 저서 <교회와 민족>(1981)에서 이다. 그는 이 내연-외연 구조의 원형을 1905년 원산에서 시작하여 1907년 평양에서 있었던 '대부흥회'에서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부흥회가 비신자들을 상대한 전도운동이 아니고, 신자들에 대한 정화운동이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당시의 국가 사정에 상심했던 사람들이 마음을 돌이켜서 주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되돌아오게 하려는 노력이 몰역사성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대부흥운동은 민족교회 구형(構形) 과정에서 중요한 특장(特長) 하나를 교회가 구유(具有)케 하는 결정적인 공헌을 남겼다. 그것은 내연의 신앙이 있고 나서 그것이 뿜어내는 외연력에 의하여 확장되고, 역사 속에 참여하는 절차논리의 확립이었다. 그래서 결국 종교와 윤리에 우선 귀착해서 거기서부터 새로운 가치체계를 이루고, 이 내적 변화에 의해 구 질서와의 차질을 경험하면 그 차이점에서 생성되는 에너지가 외연되어 마침내 상황 돌파의 이데올로기가 된다는 그러한 고귀한 체질의 형성이었다. 그의 민족교회론은 신앙의 내연화를 통한 민족운동으로 승화 그의 내연-외연의 구조를 간단명료하게 다시 설명해보면, 1905년에서 1907년에 이 신앙 내연의 구조가 잡히고, 1919년에 그것이 거대한 민족운동으로 외연화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김익두(金益斗)나 이용도(李龍道)의 신앙부흥운동을 통하여 내연화 하고, 1935년 일제의 가혹한 군국파쇼전시체제로의 동원으로 신사참배가 강요될 때 그 마지막 저항으로 외연화 한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내연된 신앙은 외연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 외연 형태는 마치 프리즘을 통과한 빛처럼 다양하지만,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나타난 외연 형태는 사상적 측면에서의 평등사상과 경제적 저항, 민족산업형성의 측면을 말할 수 있고, 사회적 측면으로 신분제 철폐와 같은 사회개혁을 들 수 있다. 또한 정치적 형태로 표출된 것은 충군애국으로, 일제에 의한 조선합병 후에는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투쟁으로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다. 솔래의 역사방법론을 연구한 순복음신학교의 한정열 교수는, 민경배의 역사방법론은 성서 이해에서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교회사 탐구의 대상이 신앙인이고 교회임으로 성경에 대한 지식과 이해 없이는 교회사 서술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반 역사는 인과법칙의 논리구조로 실증적이며 인본주의적 자료해석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반면, 교회사는 역사의 구조와 신앙의 형질은 본질상 같은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성서를 중요시 하는 이유는 성경이 가장 역사적이고 역사에 대해 구원적인 문제를 밝혀주기 때문이다. "민경배의 내연과 외연의 역사방법론의 중요한 가치는 그 방법이 개념적이고 주체적이며 체계적인 점에 있다. 마치 의사가 환자를 진찰할 때 청진기를 사용하는 것과 X-ray로 환자의 내면을 살펴보는 것과의 차이라 하겠다. 이 신앙의 내연이 외연화 되는 현상학의 방법론은 역사에 나타난 사건을 평면적으로 사료(史料)에 의존하는 인문학적 해석으로 끝내지 않고, 심층적인 내부의 신앙과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까지 관통하는 연구방법으로 다양하게 연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분석하였다(한국교회사학연구원 2013. 2 .7, 정기세미나 발표 p.24). 고신대 명예교수 이상규 박사는 솔래의 산수를 기념해 발표한 논문 '민경배 박사의 한국교회사 연구'에서 솔래의 <한국기독교회사>(1962)에 대하여 영어권에서 세계교회사를 연구하는 자들이 필립 샤프(Philip Schaff 1819-1893)의 교회사를 인용하지 않을 학자가 없을 만큼 솔래 선생의 '한국기독교회사'는 한국교회사 연구의 토라이자 카논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 이유를 세 가지로 기술하였다. 첫째, 이 책은 1968년 이후 40여년 간 그 구조상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고, 긴 기간동안 700쪽에 달하는 대작으로 발전한 점이고, 둘째, 1972년판 <한국기독교회사>로부터 '한국민족교회 형성과정사'라는 부제를 붙이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 점은 저자가 한국교회의 역사를 종래의 선교사들의 주도로 파악했던 선교의 역사로 혹은 선교확장사로 보지 않고, 한국교회를 한국민족의 현실에서 읽는 새로운 사안(史眼)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솔래의 역사서술에 있어서 독특한 레토릭 곧 예술적 기술이다. 그의 역사 기술에는 서양적 학리이론과 동양적 재예(才藝)가 조립되어 있다. 이 점은 민경배 교수의 수사학적 묘미라고 할 수 있고 동시에 그의 책의 가독성을 높여준다. 그의 기술적 능력은 다른 역사가들과의 분명한 차이점이라 생각한다. 한문 혹은 한자어에 대한 그의 수사학적 표현은 감성의 여백을 자극하고 심미적인 힘이 있고, 한문을 공부한 이들에겐 상당한 호소력이 있다.  
    •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2022-04-22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김광수 박사 (1926-2016)
    한국기독교 100년사 속에 역사의 족적을 남긴 증인 한국교회 5부작 등 다수 저술 발간… “살아있는 한국교회사”란 애칭 들어 평안북도 한국교회 초기 신앙가문 출신 김광수(金光洙)는 1926년 7월 20일, 평안북도 의주군 피현면에서 한국교회 초기 신앙 가문에서 태어나 기독교 가정에서 고이 자랐다. 조부는 김광호 목사요, 부친은 김희선 목사이다. 어릴 때부터 정의유치원엘 다녔고, 초등교육도 장로교 계통의 숭덕학교(崇德學敎)를 다녔다. 숭덕학교는 사무엘 마펫이 세운 미숀스쿨이다. 그의 유년 시절의 놀이터는 숭실학교 운동장과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정이었다. 사는 집 뒷문을 열면 바로 숭실학교 운동장이었고, 10분 거리에 평양 장로회신학교가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 통치하에서 경천애인(敬天愛人) 사상의 기독교교육으로 민족주의 배양을 목적한 사립학교 운영은 그리 용이하지 못하였다. 학교에서 일본 민속신앙을 숭배하는 신사참배 강요가 시작된 것이다. 신사참배의 명분은 국민의례라고 하면서 전 국민을 상대로 강요하였는데, 유일신 하나님만을 섬기며 예배하는 기독교인들에겐 큰 환란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꿈에도 생각 못한 8.15 광복이 도래하였으나, 얼마 안가 북한은 소련군을 앞세운 공산당이 모든 행정과 정치를 장악해 일반 인민들은 말없이 이에 순응했으나 교회는 핍박의 시작이었다. 1950년 6.25 전쟁의 발발로 신앙의 자유를 원하는 교인들은 공산당의 눈을 피해 하나 둘 남쪽을 향해 3.8선을 넘기 시작하였다. 김 목사의 가족들도 다른 피난민 대열에 끼여 내려오던 중 외삼촌 가족을 만나 황해도 장연(長連)으로 피신해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해주(海州)에 이르렀을 즈음에 전쟁이 곧 끝난다며 해주로 가자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김 목사 가족은 그들이 공산당 선전원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청단(靑丹)을 향해 가다가 샛길로 빠져 3.8선을 넘어 무사히 개성(開城)까지 올 수 있었다.(나의 반평생과 한국교회사, p.273 이하, 2010).   호남지방교회사를 기록한 한인수(韓仁洙) 목사는 스승인 김광수 목사를 "걸어다니는 교회사"라고 말한 바 있고, 장신대 총장을 역임한 장영일 박사는 김 목사를 일컬어 "살아있는 한국교회사"라고 말한 바 있지만, 김광수 목사는 가문이 이루어낸, 자연스런 몸으로 터득한 한국교화사가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외숙부가 김양선 목사요, 김양선 목사의 외할아버지가 초기 조선교회 7인 가운데 한 분인 백홍준이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100년사 속에서 3대를 거쳐 한국교회 역사를 살아낸 몇 안되는 기독교 명문 가정에서 태어나 한국교회 역사의 족적을 남긴 증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월남 후 대구에서 교회개척 그가 피난 내려와 대구에서 이상근 목사를 만난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축복이었다. 그가 당시 이상근 목사가 시무하던 대구 대봉교회에 출석하므로 이상근 목사사와 인연이 맺어졌지만, 실은 이상근 목사가 대구에 정착하기 전, 평양 능라도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부터 이 목사는 김광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이상근 목사는 미국 유학 후 대구제일교회에서 시무함.) 이 목사는 대봉교회에서 그리 멀지 않은 봉덕동에 봉덕교회를 개척하는데 김광수를 전도사로 파송해 사역을 맡겼다. 대봉교회가 봉덕동에 교회를 개척하게 된 동기는 당시 한국의 무디로 불리던 성결교회 이성봉 목사를 강사로 초청해 부흥회를 하였는데, 그때 봉덕동에 60여평의 땅이 생겨 교회를 개척해 보라고 했다. 그는 친구 홍화성과 함께 흙벽돌로 담을 쌓고 깡통을 연결해 지붕을 덮고 비닐로 문을 달고 바닥엔 가마니를 깔고 확장주일학교를 시작하였다. 김 목사는 후에 그때 광경을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베들레험의 마굿간이 연상되었다고 했다. 이런 모습으로 15평 짜리 개척교회가 시작되었고, 주위엔 피난민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당시 무산 아동교육의 선구자였던 권세열 선교사를 찾아가 '성경구락부'를 개설해 달라고 요청하여 전도와 교육을 겸한 사역을 시작했다. 1년 여가 지나자 교인이 50여명으로 늘었다. 아이들 부모들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1954년 초 새벽제단에 엎드려 새교회당을 건축하겠다고 하나님께 서약하였다. 건축기금이 문제였다. 김 목사는 시내에 있는 여러 재력가들과 아는 교인들을 찾아 가 모금을 요청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상당액의 모금이 진척되었고, 대구 약전골목 입구에 한약방을 경영하는 정규만 장로는 거금을 헌금해 주었는데, 혼자 모금액의 절반이 되었다. 그 돈으로 250평의 대지를 구입했는데 건축비가 없었다. 주위에선 땅을 너무 넓게 샀다고 불평하는 이들도 있었고, 심지어 대봉교회 당회에서도 무리한 계획이라고 걱정을 했다. 이런 와중에 이학우(李學祐)라는 교우가 미8군 사령부에 통역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6.25 전쟁 피해 복구사업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고 교회당 건축 자원 물자 신청을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타진해 본 결과 'NO'라는 것이다. 이유인즉 교회는 구제나 전도를 위해 남을 도와야지 피원조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우리는 성경구락부 교육을 하고 있지 않는가?' 전쟁 와중에 난민들의 자녀들을 모아 무산아동교육을 위한 교육용 건물이 필요하니 도와 달라는 취지로 다시 신청을 하게 되었다. 대표자 명함을 영문으로 박아 물자 공급 책임자와 군목과 사병으로부터 고위직에 이르기까지 수십명을 면담한 끝에 'OK' 싸인을 받을 수 있었고, 우여곡절 끝에 어마어마한 건축자재를 지원받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서 '경교 연구'로 박사학위 받아 당시 김 목사는 영남대학교 철학과에 편입하여 학사학위를 받았고, 후에 경북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 즈음에 계성학교 교장으로 있던 신태식 박사로부터 계성학교 교목 겸 교사로 초빙을 받고 부임했다. 그리고 얼마 후 미국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으로 유학의 길이 열렸다.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논문은 중국의 기독교 경교 '네스토리안 기념비문 연구'였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본격적으로 한국교회사 연구에 천착해 외숙부 김양선 목사가 다 이루지 못한 한국기독교 역사 연구와 자료 정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한국교회 5부작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 첫 권이 <한국기독교전래사>(1974), 둘째 권이 <한국기독교성장사>(1976)와 <한국기독교수난사>(1978), 셋째 권이 <한국기독교100년사>(1978), 넷째 권이 <한국기독교재건사>(1981), 다섯째 권이 <북한기독교탐구사>(1994)이다. 이외에도 <세계장로교회역사>(1981), <동방기독교사>(1973) 등을 낸 바 있고, 미 간행본으로 '한국기독교발달사' 유고가 있다. 김광수 박사는 그의 제자 한인수 목사가 발행하는 '호남교회사 연구' 지상에 <나의 반평생과 한국교회사>란 글을 쓰면서 서언에 자신의 역사관을 피력한 바가 있다. "역사는 과거 사실을 그대로 객관적으로 기록해야 한다. 역사가의 최우선 입장은 19세기 초 랑케(Leopold von Ranke)가 말 했듯이 자신의 현재 관념과 사고 형식에 따라 과거를 평가해서는 안되며, 현재의 이해 관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인간 인식의 한계성 때문에 각자 자신의 의식구조가 있어 객관성의 고수가 이미 고상한 꿈이 되어버린 것이 오래이다. 역사가에게 또 하나의 사명은 사건들의 복합적 관계성을 잘 관찰하여 그 진행을 역사 발전의 연속성 속에서 파악하고 절대보편주의적으로 서술해야 옳은 것이다. 사건들을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여 한 시대의, 한 역사의, 한 영역의, 한 사고,의 한 이념의 편향적 대변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것 역시 각자의 당파적 의식구조의 소유로 인해 공정을 기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2010 도서출판 경건 p.18). 숙부 김양선 목사가 다 이루지 못한 '한국교회 역사' 완성 "교회역사가에게는 더 큰 난점이 있다. 역사는 과거와 함께 역사에 포함되어 있는 현재를 말해야 한다. 그렇지만 현재는 전개되고 있는 진행 중에 있어 전체적 파악이 과거의 경우보다 어렵다.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인물의 평가는 신변의 위험마저 각오해야 한다. 교단마다 지배권력과 교파적 영향이 막대하여 상대방의 타도를 위해서는 과거 마틴 루터에게와 같이 파문선고로 귀착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의 숙부 김양선 목사가 한 말이 있다. 저자는 사가(史家)의 입장에서 냉정하고 공정하게 글을 취급하였다. 우리 교단 분열이 일부 교권주의자의 지나친 교권적 행동에 기인하였음을 결코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또 김광수 박사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내가 처음 한국교회사 강의를 시작하자 신학생들은 나에게 "살아있는 한국교회사"라는 애칭을 붙여주더니만, 나의 위치가 중반쯤으로 원숙해 지니까 "움직이는 교회사"로 바뀌더니, 근래에 동료들은 "죽어가는 한국교회사"라고 빈정댄다고 말했다.
    •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2022-04-10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혜암 이장식 박사(1921-2021)
    통전적, 통섭적 이해로 조화와 일치의 미 추구 지성 감성 덕성을 조화시키고 온전케 하는 영성 지향 한국교회서 100세를 넘기까지 활동한 교회사학자 2020년 8월, 그가 친히 설립 운영해온 '혜암 신학연구소'는 정기 학술연구지<신학과 교회> 제13집은 혜암 이장식(惠岩 李章植) 박사의 동료와 후학들이 그의 100세 기념집으로 출간했다. 필자가 알기로는 한국교회 역사상 한국교회사와 세계교회 역사를 강단에서 가르쳐온 학자로서 여생을 100세를 넘긴 이는 이장식 박사가 처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100세를 맞이한 회고담 속에 이런 말을 남겼다. "어렸을 때 철없는 생각 같았지만 목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는데, 목사는 되었으나 설교하는 목사가 되지 못하고 가르치는 목사로 한평생을 보낸 것은 나의 뜻으로 된 것은 아니었다"(신학과 교회, 제13집 p.25). 혜암은 일제의 식민통치 시기였던 1921년 4월 17일 경남 진해에서 태어났다. 그의 신앙은 돈독하기로 유명한 어머니로부터 였음을 고백한 바 있다. 그는 고향 마을교회였던 경화교회 주일학교를 ㅤㅇㅏㅈ지 못한다. 당시 담임목사였던 강상은 목사로부터 받은 감화는 오래도록 그의 신앙생활 한 모퉁이에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어려웠던 경제 사정 속에서 호주선교회 선교부 장학금을 받아 대구 계성중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더우기 계성학교 설립정신인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 1장) 아래 예배와 성경공부를 할 수 있었고, 기독교적인 인격도야를 받은 것을 늘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는 다시 계성학교를 마치고 장차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갔으나, 일본에서 쉽게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 1943년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45년 대한민국은 8.15 광복을 맞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조국은 좌익과 우익으로 분열되고 대립하면서 끝내 남북이 분단되고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을 때, 모교인 계성학교 신태식 선생을 만나 스승의 추천으로 1946년 9월부터 계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조선신학교 시절부터 교수생활 그러나 얼마 후 혜암은 목사가 되기 위하여 계성학교 교사를 사임하고 서울의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에 입학했다. 혜암은 여기에서 자신이 신학교육자로서, 역사학자로서의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신학교 학부를 마칠 즈음, 교수회의 결정으로 전임강사로 학교에 남게 된다. 혜암이 조선신학교를 졸업할 당시의 학교는 시설면에서는 빈약하였으나, 학장이었던 만우 송창근 박사의 목회학적 열정에 감동하였고, 정통주의라는 보수주의 신학의 오류와 약점을 시정하려는 장공 김재준 목사의 신학 열정에 깊이 감동하였다.(이장식, 나의 신학 순례). 그는 조선신학교 재직시 교회와 교단의 문제를 다루는 일에서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 함태영 등의 역사를 곁에서 지켜보며 배울 수 있었다. 혜암이 세계교회사와 한국교회사, 나아가 아시아교회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토대를 조선신학교에서 터득했다고 보여진다. 혜암은 한신대학교에서 교수로 참여하고 가르치고 있었지만, 그는 항상 자신의 학문적인 향상을 위하여 유학의 기회를 노리고 었었다. 그러던 차에 카나다 퀸즈대학교로 유학의 길이 열려 퀸즈를 거쳐 미국 뉴욕에 있는 유니온신학교에서 본격적으로 교회사와 역사학에 심취하여 학문의 넓이와 깊이를 파고 들었다. 고신대학교에서 한국교회사 교수로 평생을 보내고 최근 은퇴한 이상규 박사는 혜암 100세 기념 학술지 <신학과 교회>(제13집)에 기고한 '교회사학사에서 본 이장식 박사의 학문의 여정- 이장식 박사의 저술과 신학'에서, 그의 대표적인 저서 <기독교사상사 1,2>(1963,1966), <기독교신조사 1,2>(1980, 1981), <현대교회학>(1969), <교부 오리게네스>(1977), 기독교와 국가>(1981), <한국교회 백년>(1987), <아시아 고대기독교사>(1990), <세계교회사 이야기>(2011)를 열거하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1) 기독교사상사 제1권에서는 초 .중세 이야기, 제2권에서는 16세기 이후 18세기까지 기술하되 주제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2) 아시아 고대기독교사는 학문적으로 크게 기여한 저술이다. 시리아와 페르시아, 아라비아, 아르메니아 지역의 기독교 연원을 추적한 연구이다. 여기에 곁들여 동방기독교, 특히 경교(景敎)에 대한 연구가 흥미롭다. (3) 기독교신조사 1,2(1980)는 사도신경을 비롯하여 기독교가 선포해온 각종 신앙고백 문서를 편집하고 번역 해설한 문서이다. 1권에서는 사도신경으로부터 16세기까지의 문서, 2권에서는 16세기 이후의 문서들, 즉 아르메니우스 신조, 도르트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조, 스위스 일치 신조, 19세기 이후의 미국, 영국, 한국에서 제정된 장로교 신조들, 회중교회, 침례교회, 웨슬레주의, 퀘이커, 구세군 신조에 이어 1975년 WCC 제5차 총회 폐회사까지 해설하고 있다. (4) 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1977), 한국교회 백년(1987). 혜암은 생애 전반을 서구 기독교 역사에 천착하였으나 그의 후기엔 한국교회사 연구에도 저서와 글을 많이 썼다. 1958년부터 한신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며 한국교회 역사연구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 증거가 바로 이들 두 가지 저서로 남았고, 이외에도 기독교사상 잡지와 다른 학술지 등에 꾸준하게 발표하였다.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모친과 만우 송창근 혜암의 교회사학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의 제자로서 한신대 명예교수인 김경재 박사는 그의 사관을 '통전적 특징을 지닌 역사관'이라고 하였다. 김 박사는 혜암의 사관 형성 배경을 언급하면서 먼저 혜암의 신앙과 신학 체질 형성에서 모친과 만우 송창근의 영향을 언급한다. 혜암의 교회사학에서 통전적인 혹은 통섭적 특징 형성에 큰 영향을 준 인물로서 모친의 경건 신앙과 그의 영원한 멘토요 스승이었던 만우 송창근 목사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고 보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혜암은 경남 진해 동쪽 해안에 있는 한 작은 어촌 덕산에서 태어났는데, 혜암이 태어난 가정은 기독교 가정이 아니었다. 경남지역의 선교를 분담했던 호주장로교선교회가 1900년 초, 경남의 진해와 웅천에 두 교회를 세웠는데, 하나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를 배출한 웅천교회요, 다른 하나는 혜암 이장식 목사를 배출한 경화교회이다. 혜암의 어머니가 덕산으로 시집 오기 전 이미 기독교 신앙을 가졌고, 시집 올 때 성경과 찬송가를 간직해 가지고 와 어린 아들에게 신앙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이 가정을 기독교 가정으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혜암의 어머니는 남편이 병으로 일찍 타계하자 행상을 하면서 가정을 이끌었다. 혜암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어머나의 신앙은 철저한 성수주일 신앙과 삼일기도회와 새벽기도회 참석, 사경회 때 강사 대접, 성미를 모아 드리는 경건, 목돈이 없어 교회 건축 헌금을 빚내어 드리고 다달이 갚는 분납의 생활을 하면서도, 이웃집에서 제사 음식을 가져오면 마다하지 않고 받으면서 감사하는 열린 신앙의 소유자였다고 했다. 혜암의 신앙과 신학적 특성을 강조하는 이유를 김경재 박사는 그의 학창 시절을 보낸 대구 계성학교에서 5년동안의 신앙훈련과 어머니로부터 전해 받은 신앙의 영향이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 그의 계성학교 재학시 학교는 1년에 한번씩 저명한 인사들을 청해 신앙수련회를 개최하는데, 당대의 지성적이고 신앙적인 인격의 소유자들인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 윤인구 채필근 등의 유명인사들의 명설교와 강의를 들으며 신앙집회를 경험했던 바를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중에도 송창근 박사와의 만남을 특기하고 있다. 혜암은 만우 송창근 박사가 한국교회와 신학계에 끼친 공헌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첫째, 만우는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정신을 살리려고 고난도 겪였지만, 소위 민족주의자는 아니었다. 둘째, 신도들의 신앙각성과 교회개척과 북한전도를 열망하여 교회의 권위를 강조하였으나, 교권주의자는 아니었다. 셋째, 기독교 신앙의 정통을 지킬 것을 강조했으나, 소위 정통주의 교리주의자는 아니었다. 넷째, 신학교육의 질적 향상을 부르짖었으나, 소위 신신학자는 아니었다. 다섯째, 새로운 신학사상을 논했지만, 서양신학의 직수입이 아니라 기독교의 토착화를 생각했다. 여섯째, 교회의 목회자 권위와 예배와 신앙생활에서 경건을 강조했지만, 소위 경건주의자연 하지는 않았다. 일곱번째, 빈민과 소외된 자들을 위하여 헌신했고 사회개혁을 강조했으나,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만우는 조화와 일치의 미를 추구하셨는데 애국심과 신앙생활의 조화, 신학과 설교, 문학과 신학, 교회와 사회, 전통과 개혁, 보수와 진보 등등의 조화를 희구하였다. 혜암은 2021년 9월 17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01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2022-02-04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간정 이능화(1869-1945)
    ‘비기독교인 조선인의 손으로 쓴 최초의 ‘조선기독교사’ ‘백교회통’(百敎會通) 통해 예상되는 종교 간의 갈등 해소 주장 일제 강점기 괴산 출신 당대의 대학자 간정 이능화(侃亭 李能和)는 1869년 1월 19일 고종 6년, 충청북도 괴산에서 태어나 1945년 4월 12일 해방을 불과 4개월 앞두고 운명을 달리했다. 불교식의 무능거사로 알려져 있고, 그의 호는 간정, 삼현 등으로 쓰였다. 그는 구한말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를 살아온 당대의 대학자였다. 이능화의 부친 취당 이원긍(取堂 李源兢, 1849-1919)은 홍문관 교리, 이조 참의, 북청 부사 등을 역임하고, 내무아문 참의, 법무 협판 등을 지냈는데, 1901년 독립협회 지도자로 옥고를 치른 후에 1904년 이상재, 이승만 등과 더불어 석방되었다. 수감 중 미국 선교사 방커(Bunker)의 전도로 개종하여 1904년에 서울 연지동 연동교회(蓮洞敎會)로 나가 기독교에 입문한 뒤에, 1910년 연동교회에서 분립해 종로구 봉익동에 묘동교회(妙洞敎會)를 건립하고 장로가 되었다. 하지만 이능화는 부친의 기독교로의 개종에도 불구하고 각황사(覺皇寺) 설법 모임에 참여하여 불자(佛者)가 되었다. 간정은 1912년에는 불교의 선(禪). 교(敎) 양종(兩宗)의 30본산 주지회의의 결의로 종단 설립학교인 능인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그 후 한일합방 이후에는 종교와 민속학 방면의 자료수집과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조선 말기 우리 사회에서 외국어의 사용이 흔치 않던 시절에 한학(漢學)은 물론 영어와 프랑스어, 중국어와 일본어까지 능통하게 구사하는 재능의 소유자였다. 옛 선비들이 으례히 그랬던 것처럼 어려서부터 그는 한학을 수학하였고, 20세 되던 1889년(고종 21년) 상경하여 정동영어학교(貞洞英語學敎)에 입학해 영어를 배웠으며, 1892년에는 한어학교(漢語學敎)에 입학해서 중국어를 공부했다. 이어서 26세가 되던 1895년 관립 법어학교(法語學敎)에 입학해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1897년(광무 1년)엔 관립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敎) 교관이 되어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언어 천재였다.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까지 능통하게 된 그는 1907년 사립 일어야학사(日語夜學舍)에 입학하여 일본어 공부에도 정진하였고, 그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자신이 졸업한 관립 법어학교 교장이 되었다. 또 1914년에는 불교진흥회 간사에 피선되어 <불교진흥회 월보>의 편집 일을 감당하였고, 1921년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식민사관(植民史觀)으로 간행한 <조선사> 편수위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런 이력 때문에 그는 해방 후 친일파로 비판을 받았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 유교, 도교 등 각 종교역사연구 그는 54세가 되던 1923년엔 <조선불교사>(朝鮮佛敎史), <조선기독교사>(朝鮮基督敎史)를 집필하였고, 이어서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한국도교사>(韓國道敎史), <조선여속고>(朝鮮餘俗考), <조선어화사>(朝鮮語花史) 등 개화기 이후 우리 종교와 민속에 관한 중요한 연구 결과물을 남겼다. 아쉬운 점은 이능화의 유품과 저술자료들이 6.25 전쟁으로 인해 소실되고 지금은 남아 있는 것들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이능화가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세쯤 되었을 때 경성에 올라와 서양 사람들로부터 외국어 교육을 받게 되면서 부터이다. 영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하면서 서양 서적과 선교사들을 접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기독교 문물에는 접속되었으나 세례를 받거나 본격적인 신앙훈련을 접하진 못하였다. 그래서 그의 기독교에 대한 관심은 학문적 관심 그 이상으로 발전하지는 못한 것 같다. 한편, 그의 부친 이원긍은 독립협회 회원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후, 이상재 김정식 윤치호 유성준 등과 함께 YMCA에서 활약하였다. 이능화는 부친 이원긍이 종로감옥에 있을 때 면회를 다니면서 감옥 안 서재에 있는 기독교 관계 서적들을 빌려다가 독서하고, 1912년에는 기독교 교리에 관한 그의 첫 저서이자 첫 종교관계 연구서인 <백교회통>(百敎會通)을 저술하였다. 이어서 그는 <조선불교통사>, <조선도교사>, <조선신사지>(朝鮮神事誌), <조선조선교>(朝鮮祖先敎), <조선미신사상사>(朝鮮迷信思想史), <조선기독교 및 외교사>를 집필하였다. 그는 만년에 "나는 불교 신자이지만 아버지가 믿은 기독교의 역사를 저술함으로써 그를 추모하고자 했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조선기독교 및 외교사>를 통하여 조선 전통사회가 낙후된 것은 서양의 우수한 문물을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피력하면서, 당시 조선사회의 낙후성을 기독교와 결부시켜 밝혀보려고 노력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이능화, 조선기독교 및 외교사, 영인본 서문). 이능화는 <조선기독교 및 외교사>에서 기독교의 여러 종파를 개개의 국가와 연결시켜서 이해하고 있다. 천주교는 프랑스와, 개신교는 미국과, 성공회는 영국과, 정교회는 러시아와 관련시켜 살피고 있다. 그 가운데 이능화는 조선사회에 영향을 끼친 정도에 따라 영국과 러시아의 기독교에 관하여는 수용 시기만을 간략하게 언급하고, 그 내용의 대부분을 프랑스의 천주교와 미국의 개신교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고 있다. 먼저 천주교회사에 대해 중요 내용만 약술해 보면 (1) 천주교의 수용과정을 다루고, (2) 이어 천주교의 전파과정과 박해의 전말을 상세히 분석한 다음, (3) 개항(開港)과 함께 천주교가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게 되는 과정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개신교가 한국인 개화에 가장 큰 역할” 이능화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 원인을 당쟁과 세도정치 등 당시의 정치현실과 관련시켜 인식하고 있다. 그는 조선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당쟁과 관련하여 파악하였다. 천주교 박해가 표면적으로는 사교(詐敎) 축출을 표방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능화가 미국의 종교로 생각한 개신교는 그 종파가 역시 다양함을 지적하고, 한국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 미국의 장로교파와 감리교파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능화는 먼저 개신교 수용 과정을 개항 전 미국 상선을 통해 입국을 시도하다 희생된 영국인 토마스 목사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개신교가 정식으로 수용된 것은 조선이 개항한 이후로 1885년(4월 5일) 미국 장로교 파의 언더우드 목사와 감리교 파의 아펜젤러 목사가 입국함으로써 였다고 적고 있다. 이능화가 개신교사에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선교방법이었다. 그것이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을 주목하고 있다. 개신교는 그 교리를 대중에게 적극적으로 열심히 전파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고, 또 개신교 선교사들은 교회를 설립하는 것과 병행하여 학교와 병원을 포교기관으로 세우고 사회사업을 벌인 것을 주목하고 있다. 무엇보다 개신교의 전도활동이 당시의 한국 사람들을 개화시키는데 가장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이능화의 기독교사 기술의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 의의로는 비기독교인이 기독교 교리와 역사를 연구하고 썼다는 데 있다고 하겠다. 사관에 있어서 객관성을 유지했다고 보여진다. 둘째로는 기독교 교리 연구를 통하여 각 종교 간의 회통론(會通論)을 주장하였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각설하고, 이능화의 한국 기독교 연구에서 가장 큰 의의는 그가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기독교사를 저술하였다는 데 있다. 또 한 가지는 한국기독교 연구를 통하여 조선의 양반사회를 비판하고자 했다는 점에도 연구자로서 특이한 관점을 보이고 있다. 그는 조선이 멸망한 원인을 당시 조선사회가 낙후되었고, 왜 일찌기 개화하지 못하였는가 하는 이유를 사상을 통해 밝히고자 하였다.
    •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2022-02-04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혜암 유홍렬 박사(1911-1995)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의 독창적 위상 업적 남겨 개화론 내지 근대화론적 입장에서 천주교회사 서술 성리학을 근간으로 '한국천주교회사' 연구 혜암 유홍렬(惠庵 柳洪烈) 박사는 1911년 3월 21일, 경기도 장단군 군내면 정자리 둔지라는 마을에서 아버지 유인희(柳寅曦)와 어머니 박윤병(朴閏秉) 사이에서 태어나 1995년 6월 14일 84세로 서거했다. 본고에서는 가톨릭대학교 인문학부 교수로 있는 박광용이 쓴 유홍렬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와 그 특성이란 글을 의지하여 약술코자 한다(교회사연구 43집 8). 유홍렬을 학자로서의 생애를 시기에 따라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제1기는 한일합방 직후인 1911년 유서깊은 성리학 종가집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 6살 때부터 서당에서 소학(小學)을 배우고 8세부터 본격적으로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1935년 3월 경성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문학사를 받은 시기이다. 1919년에서 1925년까지는 고향인 장단고등공립보통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25년부터 1930년까지는 서울 경성제일공립보통학교에서 수학하였다. 또 1930년부터 1935년 3월까지는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거쳐 사학과에서 지도교수인 일본인 스에마쯔(末松保和) 등 3인의 한국사 전공교수의 지도아래 한국사학 전공자로 수업을 받아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제2기는 대학을 졸업한 후인 1935년부터 3년 간 경성제국대학 조선민속학 연구실 조교로서 진단학회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역사학자로서 학문활동을 한 1960년 초반까지이다. 조교 시절에는 아카바(秋葉降), 아카마쯔(赤松智域) 교수의 조선 무속연구에 참여하여 열두거리 굿의 무당 노래<巫歌>를 일본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또 1936년 장면을 영세대부로 하여 천주교에 입교하였고, 이후부터 한국천주교회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937년 서울교구장 라리보 주교로부터 달레의 불어판 한국천주교회사(1,2권)를 선물 받아 독학으로 읽기 시작했다. 1938년 4월부터 1945년까지 천주교재단 계열학교인 동성상업고등학교 사회생활과 교사로 봉직했다. 1945년 10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교수로 임명되어 진단학회 이사를 맡으면서 대학교수로서 생활을 시작하였다. 1948년 7월엔 서울대학교 정교수로, 1950년 6.25전쟁 때는 현역 공군으로 1년4개월 복무하였다. 전쟁 후 서울대학교로 돌아와 국사편찬위원을 역임하고, 1956년 미 국무성 초빙교수로 하바드대학에서 수학한 이래 국제동양학자 회의, 국제역사학 회의 등 구미 각지에서 개최되던 여러 국제회의에 참가하고 한국학의 세계화에도 기여하였다. 한국학의 세계화에 기여... 대학의 교육행정가로도 두각 그의 한국사 연구는 성리학을 근간으로 한 조선조 사회에 대한 규명 작업에서 시작해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종합 이해와 정리로 이어졌고, 또 한국천주교순교자현양회를 맡고 있던 윤형중 신부의 요청으로 1949년 2월 <조선천주교회사>(상권)를 집필하였고, 1975년에 <증보 한국천주교회사>(하권)를 간행함으로 오늘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의 초석을 놓았다. 제3기는 4.19 학생혁명 직후인 1960년 7월부터 2년 간 서울대학교 교무처장, 상과대학장서리, 총장직무대리 등을 맡으면서 교육행정가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1966년 9월부터 1967년까지는 대구대학 학장으로 부임해 청구대학과 통합하여 오늘의 영남대학교를 출범시켰고, 1968년 3월부터 1976년까지는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대학원장 및 총장을 역임하였다. 유홍렬 박사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는 개신교 쪽에서도 비슷하지만, 지금까지는 대부분 호교론적인 입장에서 복음전파사와 순교사(殉敎史)와 선교사(宣敎史)로 기술되고 설명되어져 내려온 것을 부인키 어렵다. 이는 조선 시대의 천주교회사가 지니고 있는 특성 그리고 교회사 연구가 지닌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지사라 할 수 있다. 가톨리시즘에 입각한 호교론적 관점에서 천주교회사 정리 여기서는 유홍렬의 천주교회사 연구의 위치와 특성을 파악해 보기로 하겠다. 첫째, 식민지 경영론적 탈교론(脫敎論)이다. 해방 이전 일본 학자들의 연구는 주로 조선 왕조를 부정할 수 있는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식민지 체제를 안정적으로 구축하는데 전력을 다한 관(官)학자 출신들에 의해서 진행되어 왔다. 조선 왕조의 멸망의 은인은 외부에서 오는 근대적 생활 체험이기도 한 천주교회조차 받아들이지 못해서 결국 망국에 이른 조선인 수준 탓이라고 하였다. 둘째, 복음선포적 호교론(護敎論)이다. 1874년 최초의 본격적인 한국천주교회사를 출간한 프랑스인 달레(Ch, Dallet)의 한국천주교회사 서설은 복음선포를 서술의 기준으로 삼는 호교론적 성격의 연구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가톨릭 교리 자체가 인도적 성격을 가지고 있고 평등사상에 입각해 있어서 개화 개방적이기 때문에 조선의 폐쇄적 봉건적 정부가 박해를 할 수 밖에 없었다는 호교론적 관점이다. 호교론적 서술은 신학과 역사학을 두 개의 기둥으로 하는 교회사의 한 기둥이 있고, 한국천주교회에서는 기본적 성격의 순교사라는 점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유지해 오고 있다. 셋째, 민중종교적 호교론이다. 가톨릭의 교리 또는 교회 조직이 민중종교(民衆宗敎)라는 성격을 띄고 있었기 때문에 봉건정부가 박해를 할 수 밖에 없었다는 데 두는 연구의 흐름이다. 이에 대해서 조광(趙光) 박사는 당시 사회 변동의 과정에서 천주교 신앙은 이 변동을 촉진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새로운 사상의 담당자들은 대부분이 비특권적 민인(民人)들이었다. 그들의 천주교 신앙생활은 기존의 성리학적 사회체제에 대한 반역으로서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그들의 신앙 행위는 일종의 민중종교운동의 양상을 띄며 전개되어 나갔던 것이다(조광, 조선후기 종교사연구 서문,1988). 하지만 당시 대다수 천주교인들은 하늘의 뜻<天命>, 군주권<王權>, 삼강오륜<전통사회윤리>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박해자들이 그렇게 뒤집어 씌었을 뿐이다.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유교적 개념의 올바른 학문<正學>, 진실한 길, 하늘을 공경함<敬天>들과 충돌하기 보다는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질의 존재 인정, 동시에 영혼과 천주의 존재도 인정해야" 넷째, 문화론적(문화적응주의) 호교론이다. 천주교회는 어느 체제이든 거기에 들어가서 복음화 시켜야 함으로 교회운동 자체는 근본적으로 문화론적으로 체제 내의 운동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 땅의 천주교우들이 한국 전통사회, 전통사상에도 잘 적응할 수 있는 교회를 건설하고 싶어했던 주체적 자발적 노력 자체를 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 방향의 연구는 오늘날 현실적 영향력이 그다지 크지 못하다. 다섯째, 근대화론적 호교론이다. 물질의 존재를 인정하는 동시에 영혼의 존재와 천주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가톨리시즘(Catholicism, 교회 밖에서 행해지는 가톨릭 신앙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활동을 통틀어 이르는 말) 사관에 입각하고 베른하임(Bernheim)의 문화적 발전 관계를 밝히는 과학이 역사학이라는 정의를 받아들이는 유홍렬의 연구는 기본적으로 달레 교회사 이래의 호교론적 연구의 흐름을 잘 이어가고 있다고 보여진다. 가톨릭대학교 박광용 교수는 "유홍렬의 한국천주교회사의 특징은 그가 원래 성리학 사상 연구자로서 출발했으면서도 성리학을 우리 민족의 올바른 신앙생활 또는 사회생활을 피해한 온천으로 파악하고 이를 자각하고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조선천주교회의 역사였다는 관점 곧 개화론적 내지 근대화론적 입장에서 교회사를 서술한데 있다"라고 하였다.
    •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2021-10-17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약산 홍치모 박사(1932-2013)
    장로교 역사학자로서 '종교개혁사' 서술 '한국교회사학회' 창립멤버로 참여 활동... 일반사를 기독교적 시각으로 해석 평양에서 태어나 해방 후 서울서 학교 다녀 약산 홍치모(樂山 洪致模) 박사는 1932년 1월 5일 평양에서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당시 조선은 이미 일제 식민지 통치하에 있었다. 그러나 부친은 그에게 역사 이야기를 자주해 주었다. 그는 구약성경의 아브라함에서부터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까지 역사상의 신앙인들과 의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하였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약산은 자연스럽게 기독교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에 관한 책들을 접하게 되었다. 특히 그가 속한 프로테스탄트 개신교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후에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대한 역사를 본격적으로 탐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홍치모는 평양 성남소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 평양상업학교에서 한 학기동안 공부하였는데 이 학교에서 매우 인상 깊은 교사 한 분을 만났다. 그는 후에 북한 주체사상의 기초를 다진 바 있는 사상가 황장엽 선생이다. 후에 황장엽은 남한으로 망명하였다. 당시 북한의 정치적 상황이 급변하던 때라 방학 때면 근로봉사가 일상이었고, 이 학교 재학생들은 지금 종합체육관이 자리하고 있는 능라도로 동원되어 수원지 근처의 밭을 개간하고 작물을 심기도 했다. 북한 사정이 악화일로에 접어들자 소년 홍치모는 1947년 자유를 찾아 3.8선을 넘어 서울로 와 1952년까지 경기중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공부에 전념하고 있는 그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그 고난을 잘 참고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기독교 신앙의 힘이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윤선 목사 설교에 감화받아 중생 체험 그는 1949년 여름방학을 잊을 수 없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 당시 방학을 이용하여 부산의 고려신학교 학우회 주최로 학생수양회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주경학자 박윤선 목사의 설교를 듣고 중생의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어려운 타향살이를 하던 그에게 박 목사의 메시지는 실로 메마른 가뭄을 해갈시켜 준 하늘의 축복의 생수였던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인해 학생 홍치모는 박윤선 목사를 평생 은인으로 여기며 그를 따랐고, 박 목사 또한 약산을 친아들처럼 생각하며 그를 거두어 주었다. 그로부터 약산은 박윤선 목사를 가까이 모시면서 그 분의 신앙과 삶을 배웠다. 또 그는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하나는 1950년 4월에 발생한 고신측의 분규사건과 같은 해에 발발한 동족상잔의 6.25 사변이 평생 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때에 고등학교를 졸업 후 역사인식이 심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서울대학교 사학과에 진학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역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부친과 청소년기에 개혁신앙을 심어준 박윤선 목사의 영향은 그로 하여금 역사와 종교개혁사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길로 매진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후에 한국교회사학회 창립에도 백낙준 김양선 민경배 주재용 강근환 박사 등과 함께 주요 멤버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그이 나이 40세에 영국 유학 대학을 졸업한 후 군대에 간 청년 홍치모는 1957년부터 1961년 8월까지 국방의 의무를 마치고 제대한 후, 남산에 있는 숭의여자중고등학교 역사교사로 부임하여 5년간의 교사생활을 했다. 그리고 1967년부터 만 2년간 부산 고려신학교 전임강사로 신학교와 인연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때에 의료선교사로 부산에 와 있던 페터슨의 소개로 스코틀랜드에 있는 Bible Training Institute in Glasgow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의 나이 40세 때였다. 그가 유학했던 학교(BTI)는 후에 Glasgow Bible College로 확장하였고, 지금은 또 다른 성서대학과 병합하여 International Bible College로 교명이 바뀌었다. 약산이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당시 학장이었던 죠프리 그로간의 배려로 글라스고대학 사학과에서 강의를 듣기도 하고 , I.B.Cowan은 1451년 개교 이후 처음 강의를 듣게 된 한국 유학생인 그에게 호의를 베풀기도 하였다. 약산은 대학입학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종교개혁사 연구에 몰두하였고, 자신이 장로교인으로서 장로교 본산지에 와서 사료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유학생활 내내 시간만 나면 신간이나 고서를 불문하고 자료수집에 정성을 다했다. 만 2년에 걸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숭의여자대학의 전임교수로 5년간 역사와 문화사를 가르쳤다. 1976년엔 총신대학교 교수로 옮겨 교수로, 부총장으로 성심을 다해 후학들을 가르쳤고, 교단에서 교역자 보수교육을 위해 설립된 목회신학원에서도 장로출신 교수로서 인기를 누렸다. 그의 강의는 어려운 전문용어를 쓰지 않고 평상적인 언어로 강의 내용을 잘 전달하는 테크닉이 있었다. 그의 후학들 중에는 여러 대학에서 가르치는 명망있는 교수들도 상당히 있다. 그는 총신대학교 재직시 1980년 학내 사태가 악화되어 학생들이 이사장 자가용을 뒤집어 놓는 광경을 보고 평생 자가용을 구입하지 않고 대중교통으로 학교를 출입했다는 후일담도 전해진다. 필자와는 '한국교회사학연구원' 학회원으로 만나 교류 필자는 지방 대학에서 은퇴 후 서울 근교로 이거해 한국교회사학연구원에서 약산과 같은 학회원으로 만나게 된 것이 그의 만년이었지만, 필자의 막내 아들이 총신대 재학 시절 '한국 무교회주의자들이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이라는 제목의 한국교회사 관계 논문을 작성했는데, 그때 약산을 지도교수로 문학사 학위를 받은 일이 있어서, 후일 학회에서 만나 그 논문 제목을 이야기하며 인간적으로, 학문적으로 많은 것을 배우며 교류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있다. 약산 홍치모 교수를 이야기하며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에피소드 하나를 적시코자 한다. 그가 은퇴하기 전 사당동 총신대학교 본관 2층 세미나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약산의 강의 중 한 학생이 당시 유명한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려지고 있는 템플턴 상을 받은 서울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에 대한 평가를 물었다. 내용인즉, 한경직 목사가 템플턴 상을 받은 자리에서와 그 이후 뉴욕과 L.A., 그리고 국내에서 축하하는 모임 때마다 한 목사의 첫 인사가 "나는 일제 신사참배 한 죄인이 올시다" 라고 수상 소감을 밝힌 데 대한 것이었다. 이 질문에 약산은 갑자기 억찬 목소리로 한 목사의 그 고백은 안한 것보단 나은 것이지만, 그 고백에 대한 평가는 "Too Late, Too Late"(너무 늦었어!)이라고 해 장내가 조용하다 말고 술렁거렸다. 설명인즉, 한 목사는 한국교회 대표로, 민족복음화 대표로, NCCK 대표로, 통합측 총회장으로 할 것 다하고 받을 것 다 받으시고 한국교회가 분열 될 만큼 다 된 후에 신사참배를 뉘우치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때 그 현장에 있어서 잘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약산의 마지막 절규였는지 모른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새겨 들어야 할 이야기라 여겨 여기에 기록해 둔다. 약산의 철학은 "사람 앞에 거짓말 하지 않는 것" 약산은 철두철미한 개혁주의 역사관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 구체적으로는 장로교 신앙 입장에서 글을 쓰고 강의를 했다. 그의 저서들이 이를 대변해 주고 있다. (종교개혁사 1997, 북구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1983,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과 영국 혁명 1991, 영미 장로교회사 1998 등이 있다.) 그의 제자 채은수 박사는 홍치모 교수의 역사관과 역사 서술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하였다. 첫째, 친히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살아오면서 소시적부터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을 믿고 실현한 학자였다. 둘째, 그는 잉글랜드의 청교도 정신과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정신에 입각하여 신행일치의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셋째, 그는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제하였고 인간의 양면성을 인식하는 가운데 그 한계성을 인정하였다. 넷째, 그는 역사 서술에 있어서 주관적인 요소와 객관적인 요소에 균형을 이루었다. 다섯째, 기독교 역사가로서 교회사 서술에만 한정되지 않고 일반사를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실제적으로 제시하였다. 여섯째, 그는 학문함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뿐 아니라 사람과의 수평적인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여 상식적인 신의와 도리를 다했다. 끝으로 그의 생전 총신대학교에서 함께 했던 명예교수 정정숙 박사(상담학)와의 대담 중 한 마디를 기리며 첨부하고자 한다. "교수님의 삶의 여정에 영향을 준 이념이라 할까, 정신이 있다면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에,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거짓말 하지 않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어요?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 보이는 사람 앞에서 진실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할 수 있겠어요? 내 철학은 거짓말 하지 않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중요한 것은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 삶의 철학입니다. 이러한 삶의 본질이야 말로 일찌기 개혁자 칼빈이 말한 '코람데오'(CORAM DEO)의 삶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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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2021-10-17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윤춘병 목사(1918-2017)
    '한국감리교사학회' 창립 등 감리교를 사랑한 감리교회 사가 동요 '어머님 은혜' '살랑살랑 실바람을 잡아 타고서' 등 문학작품도 남겨 평안남도 중화군 장로교 집안에서 출생 윤춘병(尹春炳) 목사는 평안남도 중화군 양정면 신대리의 장로교회 장로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마을은 대동강 연안으로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마을이었다. 그는 이런 풍광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그의 성격은 성직자적인 온순하고 유순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고, 그의 부친은 '아이생활' '별나라' 같은 잡지를 사다 주었다. 그는 이런 신앙적 분위기와 자연적인 환경에서 자라서인지 후에 여러 편의 주옥같은 문학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동요 <어머님 은혜>로, 1946년 고향을 떠나 경성의 조선신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지은 노랫말이다. 후일 어느 날 객지에 나와 학교 기숙사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외로이 누워있을 때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작품이었다고 술회했다. 당시 교회에서는 어린이 찬송가가 없었을 때인데, 하나님을 향한 깨끗한 영혼과 어린이에 대한 따듯한 사랑이 언제나 그로 하여금 이처럼 아름다운 동시와 동화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제 말엽에 평양에서 '요한신학교'에 다니다가 일제의 횡포가 심해지자 1942년 만주로 건너가 지내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1945년 해방을 맞았다. 이후 고향을 떠나 전영택 목사와 함께 서울로 와 신학교를 마치고 충남 아산에서 첫 목회를 시작했고, 후에 천안, 철원, 제주도, 의정부, 원주 등지에서 사역을 하였다. 그의 목회신조는 "내 생활은 내 스스로 창조한다"였다. 그래서 그는 늘 큰 교회보다는 작은 교회로 가기로 목표하고 살았으며, 타인이 다 이룩해 놓은 곳에 안주하기보다는 내가 창조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는 곳을 찾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40여년 간의 목회 여정을 이어갔다. 고서(古書) 및 기독교 역사 자료 수집 체계화 그는 목회사역을 하면서 여러 지방을 옮겨다니며 그 지역에 있는 고서점을 드나들기 시작하였는데, 목회현장에서 듣고 보기만 했던 기독교 관계 옛 책(古書)들이 눈이 띄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고서를 수집하고 저술활동을 하면서 여러가지 역사자료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최남선의 '백팔번뇌'를 비롯, 1960년대 이전의 국내외 시집과 문학에 연관된 집필자료들을 모으면서 자연히 교회역사 관련 자료들도 모으기 시작하였다. 1895년 출간된 <천로역정> 원본, 신사참배시 법원에서 간행된 목사들에 대한 심문 취재 기록 <만민특위자료>, 만국부인회 기도회 사건 관련 기록(전36권), 감리교 선교 월간지 <KOREAN Misson Field>(전36권) 등. 이외에도 개화기의 교회 관련 자료들을 미국, 일본 등지로부터 구입하거나 입수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는 이런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자신이 일선 목회에서 물러난 이후에 할 일이 감리교회 역사정리 사업이라는 계획을 세우게 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이 즈음에 감리교회 내외에 교수들과 신학자들과 손을 잡고 '한국감리교사학회'를 조직했다. 함께 한 동인들로서는 송길성 김흥수 이진호 이덕주 등이었고,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감리교회 외국인 선교사> <한국선교의 문을 연 매클레이 박사의 생애와 사업> <한국기독교 신문. 잡지 100년사> <8.15 이후 감리교 서부연회 수난사> 등을 정리 간행하였으며, 또 <감리교백년사대계>(1992년)를 출간했다. 이 뿐만 아니라, 그는 목회를 하면서도 자신이 재직하였거나 재직 당시 교회의 역사를 열심히 정리해 간행하였다. 의정부제일교회사, 원주제일감리교회 90년사, 제주감리교회사, 동대문감리교회 100년사 등이 있다. 감리교를 사랑하고, 한국교회를 사랑한 한국교회 사가(史家) 윤춘병 목사가 신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국내 어느 신학교에서도 한국교회사(韓國敎會史)란 과목이 없었을 때여서 한국교회의 역사의 중요성을 특별히 의식하고 있거나 가르치는 자가 없었다. 그는 스스로 자료를 섭렵하고 정리하게 되었고, 교회역사의 중요성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는 원주제일교회 재직시 감리교 동부연회 제1대 감독으로 피선되어 리더십의 끝자리에 오르는 영광을 얻기도 하였다(감독들의 이야기, 홍성현 편, 기감감독협의회 2007, p.218). 은퇴 후엔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교수로서 가르치며 학교 부설기관으로 자신이 평생 수집한 한국교회사 관계 자료를 기초로 설립한 '기독교 역사 자료관' 관장으로 봉사하며 후학 양성에 매진했다. 그는 전국 어느 곳이든 교회 관계 중요 자료가 있다는 정보만 전해지면 수 백리를 마다하지 아니하고 달려갔다. 자료가 있는 곳에 역사가 있고, 자료가 정리되면 역사가 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1985년 5월 경상북도 경산시에서 사역하고 있는 필자(박정규)의 '대구교회사연구소'를 예고도 없이 내방하여 나의 서재에서 한국교회 역사에 관한 대화를 나눈 일이 있다. 훤칠한 키에 안경을 쓴 노신사의 첫 인상이 지금도 생생하게 추억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감리교회를 사랑하고, 한국교회를 사랑하고, 역사의 중요성을 가슴에 지니고 살아가는 한국교회의 산증인이었던 것이다. 윤춘병 목사는 목회자요, 동요 동화 작가요, 한국교회 역사를 위해 헌신하며 감리교회를 사랑한 한국 감리교회사가(監理敎會史家)였다. 결론적으로 윤춘병 감독의 한 생애는 처음엔 <어머님 은혜><살랑살랑 실바람을 잡아 타고서> 같은 주옥같은 동요 작가였던 그는 1945년 해방 직후 공산주의자들의 기독교 탄압을 피해 평남 중화에 가족들을 남기고 단신 월남해, 3년 후쯤 당시의 유행성 말라리아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시로 썼고, 이 시에 한국교회음악의 선구자 박재훈 선생이 곡을 붙여 오늘날까지 애창되고 있는 명곡이 탄생되었다. 그는 1978년엔 감리교 동부연회 감독에 올랐으며, 감리교신학대학의 교수로 후학을 가르치기도 하였고, 목회일선에서 은퇴하면서 평생 모으고 수집한 최초의 신학잡지 <신학월보><신학지남><가뎡잡지><교회> 등 자신이 평생 수집한 역사자료를 대학에 기증, 감리교신학대학교 부설 역사자료관을 세우고 초대관장으로 주님의 부름을 받은 2017년 5월 8일까지 봉사하였다. 그는 진실한 감리교회 목사로, 열정적인 감리교회 사가로 일생을 살다간 주님의 종이었다. <어머님 은혜/윤춘병 작사, 박재훈 작곡>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푸른 하늘 그 보다도 높은 것 같애// 넓고 넓은 바다라고 말들 하지만/나는 나는 넓은 게 또 하나 있지/사람되라 이르시는 어머님 은혜/푸른 바다 그 보다도 넓은 것 같애.
    •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2021-10-17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이천영 목사(1910-1994)
    성결교인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성결교 역사기술 표준 이천영(李泉泳) 목사는 1910년 12월 7일 동만주 도문고에서 부친 이백운과 모친 김성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강원도 철원군 김화면에 살다가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 동만주로 이주해 갔다. 그의 외조부는 한학(漢學)에 밝은 선비였다. 그는 어릴 때 외조부 슬하에서 성장하며 한학을 익혔고, 자연스럽게 일반 상식과 한문전적에 소양을 쌓을 수 있었다. 아울러 외조부가 기독교를 믿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교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는 도문고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50리 가량 떨어진 명월구로 이사하였고, 그곳에서 명월구교회와 목단강교회를 개척하는데 참여하였다. 1932년 김인석 목사가 주축이 되어 개척한 교회에 동참하던 때 장윤숙을 만나 가정을 이루어 함께 교회에 헌신 봉사하였다. 성결교 경성신학교 졸업, 1943년 목사안수 1939년 경성신학교(현 서울신학대학교)에 입학해 1941년 졸업하고, 간도에 있는 용정교회와 회령교회를 섬기었다. 1943년 목사안수를 받고 평남 진남포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1943년은 성결교회의 재림교리가 일본 정치체제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일제 당국에 의해 성결교회 지도자들과 신자들이 체포 구금되던 때였다. 이천영 목사도 이때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황해도 사라원교회로 부임해 사역했으나 공산당의 방해와 핍박으로 1947년 5월 월남해 개성성결교회에서 목회했다. 그곳에서 서부성결교회를 개척하였다. 이때 교회 2층에 반공이념을 지닌 서북청년단이 있었으며, 그는 그들의 자문역할을 하기도 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공산당의 잔학상을 체험한 청년들과 교인 다수가 서울로 내려와 피난지에서 삼각지교회(현 강변교회)를 개척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에 그는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화물차를 타고 대구와 울산을 거쳐 거제도까지 내려가 피난생활을 하던 중, 1951년 5월 전쟁의 와중에 동양선교회의 후원으로 부산온천성결교회에서 개교한 서울신학교 교수로 임용되었다(성결교인물전 제10집). 그의 교수 생활 중 특이한 한 가지는 지금까지 교내외 행사시에 늘 찬송가로만 대체했던 공식행사에 부를 수 있는 서울신학교 교가를 작사한 것이다. 그가 쓴 서울신학교 교가는 간략하면서도 복음선포의 사명이 신학도들의 양 어깨에 메워져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1절: 하늘의 태양처럼 역사 찬란한 진리의 상아탑 예솟았다 시대의 예언자들 몸드려 닦은 성화의 요람 서울신학교 2절: 하늘의 성좌처럼 빛나는 전통 누리의 봉화대 예솟았다 새시대 기수들이 배우고 닦는 성화의 요람 서울신학교 후렴: 온세계로 뻗어나라 빛나는 전통 새역사를 창조하자 복음의 전당. 이는 선지학교 학생들에게 긍지와 사명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교가라 하겠다. 이 교가를 작곡한 사람은 국내 여러 신학교를 비롯 당시 서울신학교에 오랫동안 종교음악을 강의하던 한국교회음악의 대가요 서울영락교회 성가대를 지휘했던 박재훈 박사였다. 한국성결교회사 저술 간행 이천영 목사는 1970년에 <한국성결교회사>를 간행했다. 그는 이 책을 저술하게 된 이유를 성결교회가 6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한국성결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저술이 없어 안타깝게 생각해 왔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이 출간되기 전에는 이명직 목사가 1929년까지만 쓴 성결교회 역사를 약술한 책이 있을 뿐 제대로 갖추어진 저술이 없었다. 이에 성결교회 역사를 바르게 가르쳐야겠다는 사명을 깨닫고, 1907년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무교정에서 천막을 치고, 나팔을 불며 북을 치고 노방전도로 시작한 김상준과 정빈에 의해 시작된 초기 역사로부터 1970년 반세기를 넘긴 교단 역사를 시대별로 나누어 처음으로 정리해 출판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 저서에서 성결교회 역사를 세 가지 시대로 구분하였는데, 첫째는 복음전도관 시대, 둘째는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 성결시대, 셋째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시대로 구분하여 기술하였다. 그는 성결교회사를 한 마디로 사랑할 점도 많았지만, 더 쓴 잔을 마실 때가 많았다고 시대의 아픔을 숨김없이 토로하였다. 그는 성결교회 목사였지만 결코 성결교회에만 치우친 학자가 아닌 객관적인 성결교회사를 기술했다고 하였다. 그는 성결교회의 모체가 된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의 신조는 세계복음주의의 신조를 발췌하였다고 했다. 동양선교회(O.M.S)가 주창하는 신조는 근본주의적인 극단과 칼빈주의 신조도 아니고, 당시에 유행하던 자유주의 신조도 아니요, 순수한 성경적 신조를 중심으로 하여 복음주의 신앙노선을 따라 영혼 구원에 근본 목적을 두고 확립된 교리에 기초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불붙은 성령의 불길이 1908년 서울 무교동에서 일어났다고 하였다. 이 때를 이천영 목사는 “성결교회 오순절”이라고 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연동장로교회 조사로 있던 이명현 등의 적은 무리가 성결교회로 적을 옮기는 일이 생겼고, 그는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초기 성결교회의 초석이 되었다고 기록하엿다. 그는 초기 성결교회가 성경을 강조하므로 타교단으로부터 바리새 파라는 악평을 들었고, 한편 신유(神癒)를 외친다고 하여 비과학적인 미신행위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지에 성결교회가 세워지고 전국 방방곡곡에 교회와 기도처가 산재하게 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이명직 목사를 성결교단의 사부(師父)요 교부(敎父)라고 하였다. 그는 이명직 목사를 평하기를 성품은 양같이 온순하며 비둘기처럼 순결하여 참으로 성결의 사람이며 어떠한 난관에 부딛쳐도 끝까지 인내와 무저항으로 극복해 나가는 참 신앙인이라고 하였다. 한편 최석모 목사에 대하여서도 그는 외모로는 쌀쌀하고 냉냉한 인상이지만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여 그의 품성은 다정다감하여 신학생들을 가르쳤다고 적고 있다. 그는 이러한 리더십으로 아현교회가 일제 말엽에 경성에서 가장 큰 성결교회로 우뚝 서게 된 것은 전적으로 최석모 목사의 인품 덕이었다고 하엿다. 이천영 목사가 쓴 이 <성결교회사>는 1970년대 이후 그의 후학들이 성결교회 역사를 이야기 할 때는 반드시 참고하지 않을 수 없는 성결교회 역사 기술의 표준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는 저술이 되었다. 필자는 그의 생시에 서대문구 아현동 서울신학교 강의실에서 그의 강의를 직접 청강하는 제자의 한 사람이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강의실에 들어오면 딱딱한 의자 위에 곧은 자세로 앉아 때로는 다리를 엇박자로 바꾸어 가면서 나지막한 음성으로 차근차근 학생들을 아들처럼 생각하는 듯, 옛날 서당에서나 볼 수 있는 선비 스타일의 제자들을 아끼는 참 스승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의 두번째 저술은 성지 기행문으로 <이스라엘 견문기>가 있고, 성결교회 기관지 활천(活泉)에 <우리의 신학>이란 논단을 오래도록 발표했다. 거기에는 성결교회가 지향하는 사중복음(중생, 성결, 신유, 재림)에 입각한 복음주의 신학이란 글을 남기었다. 이천영 목사의 중요한 업적은 무엇보다 <성결교회사>라 할 수 있겠다.
    •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2021-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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