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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칼럼 / 모방자살이 걱정된다 미디어의 사회적 책임
    최근 아이돌 출신 연예인의 죽음 이후 청소년들의 상담이 많이 늘었다. 대부분 그녀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인해 큰 충격과 고통을 느낀다는 내용이다. 가슴이 뛰고 우울하고 불안하여 잠이 오지 않는다거나 자신들도 힘겹게 살고 있는데 그 기사를 보니 자살 충동까지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녀의 죽음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깊이 각인되고 전염된 것 같아 보여 상담원들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많은 청소년들이 학업과 진로 문제, 대인관계 갈등문제, 우울증과 같은 정신과적 문제 등을 경험하고 있다. 필자는 이번 사건으로 청소년들이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모방 행위가 발생될 것 같아 염려가 된다.앨버트 반두라(Albert Bandura)의 사회학습이론에서는 타인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모방학습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모방학습은 타인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는 단계, 관찰한 행동을 기억하는 단계, 그리고 이에 따라 기억한 행동을 자신의 행동지침으로 받아들이는 단계, 관찰행동의 수행여부를 결정하는 동기화 단계 총 4단계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팬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각종 언론 및 매체에는 그녀의 죽음 기사가 넘쳐난다. 그녀를 죽음을 이해하고 애도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마치 죽음을 문제해결의 한 방법인 것처럼 미화하고 합리화한다.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던 사람들이 그녀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녀의 행동을 모방하여 자살이나 자살시도를 하게 될 수도 있다. 실제로 통계청 사망원인 발표(2019)와 여러 연구에서 나타난 유명 가수, 배우, 정치인의 죽음 이후에 자살률이 증가했다는 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다행히 보건복지부와 한국기자협회에서는 ‘자살보도 권고기준 3.0’을 만들어 신중하게 보도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 이후 보도를 보면서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권고기준에 의하면 자살 사건은 주요 기사로 다루지 말아야 하는데, 일부 매체에서는 자살을 너무 지나치게 부각하였으며 ‘사망’, ‘숨지다’와 같이 객관적 사망 사실을 표현해야 하지만 ‘스스로 목숨끊다’ 또는 ‘극단적인 선택’과 같이 자살을 의미하는 표현을 무분별하게 사용하였다. 또한 구체적인 자살방법, 장소, 동기 등을 보도하지 말도록 권고하고 있는데 이 또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하지만 자살과 관련된 사진이나 동영상 사용을 자제하고 보도 말미에 자살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기관 정보를 제공한 것은 바람직한 변화이다.유명인의 자살보도는 모방자살을 일으킬 수 있다. 만약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이 잘못된 자살보도를 보고 자살 시도를 하게 된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사람의 생명보다 더 큰 보도의 가치는 없다. 다시 높아진 자살률을 낮추고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언론의 자율적인 규제 노력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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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23
  • 종교인 퇴직금 과세, 법리적 접근 필요
    지난 3월 종교인 퇴직소득의 과세기준일에 대한 소득세법일부개정안이 국회기획재정위원회를 통과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종교인의 사례비 및 퇴직금에 대한 과세규정이 2018년부터 시행되도록 마련되었기 때문에, 이전에 적립된 퇴직금상당액은 퇴직소득 과세대상에서 제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부 시민단체 및 언론에서는 연일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모처럼 마련된 종교인과세가 일 년 만에 후퇴한다.” “직장인 유리지갑은 털고 종교인은 감세하려 한다.”, “정치인이 자기표를 의식해서 지나치게 몸을 사린다”. “종교인과세 완화법은 대형교회 특혜법이다.”, “종교인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정치권”, “원수 같던 여야가 종교인과세 완화 앞에선 동지로” 등등 원색적 감정이 묻어나는 제목들로 넘친다. 한 번 미운털이 박히면 무슨 짓을 해도 미워 보인다는 말이 있다. 종교인들이 미운털이 박혀도 단단히 박힌 모양이다.이제는 감정을 걷어내고 논리적 법리적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때다. 퇴직금에 관한 세법의 규정을 살펴보자. 1974년 소득세법 제4조(과세대상소득) 제4호에 “근로의 제공으로 인하여 받는 봉급 급료 보수 세비 임금 수당 상여 연금 또는 퇴직금과 이에 유사한 성질의 급여”를 근로소득으로 규정되어 있었던 것을, 1975년부터는 현행과 같이 근로소득과 퇴직소득을 분리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근로의 제공으로 인하여 받는 봉급 급료 보수 세비 임금 상여 수당과 이와 유사한 성질의 급여는 소득세법 제20조에서 근로소득으로 규정하고, “갑종(을종)의 근로소득이 있는 자가 퇴직으로 인하여 지급받는 소득”을 퇴직소득으로 하여 제22조에서 규정하였다. 이후 퇴직소득의 개념이 2010년에는 “퇴직함으로써 받는 소득 중 일시금”으로, 2013년에는 “사용자 부담금을 기초로 하여 현실적인 퇴직을 원인으로 지급받는 소득”으로 바뀌었다. 용어의 변경은 있었을 지라도 퇴직소득은 근로소득이 있는 자가 퇴직 시 지급받는 소득으로 한정됨은 변함이 없다. 바꿔 말하면 과세대상이 되는 근로소득 중의 일부를 적립하였다가 퇴직 시 일시금으로 지급하는 것이 퇴직소득이라는 말이다. 이는 달리 해석하면 근로소득 과세대상이 아닌 자가 지급받는 일시금은 퇴직소득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를 염두에 두고 종교인 퇴직소득으로 돌아가 보자. 소득세법시행령에서 종교인 퇴직소득은 2018. 01. 01. 이후 발생하는 소득 분부터 과세하는 것으로만 규정하고 있을 뿐, 과세기준일 및 과세기준금액에 관한 규정이 없으므로 인하여 2017년까지 적립된 금액이 과세대상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논란으로 번지고 있는 실정이다. 규정이 없다 하더라도 과세대상 여부의 판단기준은 있다. 즉, 2017년까지의 종교인 사례금이 근로소득 과세대상이었는지 아닌지에 따라 판단하면 될 일이다. 즉, 2017년까지의 종교인 사례금이 근로소득 과세대상이 아니라면 그에 따른 적립금도 퇴직소득 과세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그렇다면, 종교인 사례금이 근로소득 과세대상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부터 하여야 한다. 근로소득에 대한 과세는 1949. 07. 15. 처음으로 만들어진 소득세법 제10조 제4호에 과세근거를 두어 과세하여 오고 있으나, 종교인 사례금에 대하여는 1949년부터 2017년까지 68년간 과세하지 않았다. 그 동안 정부는 종교인의 사례금이 근로소득 과세대상인지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가부를 밝힌 적은 없으나, 언론(한겨레 타임라인, 세금을 허하라-종교인 과세 논란 46년)의 보도에 의하면, 1992년 국세청은 성직자의 과세문제에 대하여 “강제 징수할 의사가 없음을 밝히고 성직자의 자율에 맡기는 것”으로 공식발표 한 적이 있고, 2006년에는 성직자에게 소득세를 과세하지 않는 것은 국세청장의 직무유기라는 한 시민단체의 고발 건에 대하여 “종교인에 대한 과세의무가 명문화돼 있지 않고, 건국 이후 성직자에게 세금을 물리지 않은 관행 등에 비추어 비과세를 국세청장의 고의적 직무태만으로 볼 수 없다”며 무혐의 처리한 적이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후에도 정부는 종교인에 대하여 소득세를 강제징수 하였다거나 국세청장이 직무유기로 법의 제재를 받은 일이 없다. 이는 종교인 사례금은 비과세가 관행으로 성립되었으므로 과세대상이 아니라는 의미로 읽힌다.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만약, 종교인 사례금이 법에 의한 과세대상이라면 자진신고하지 않는 종교인에 대하여는 강제징수를 반드시 하여야 하고 이는 과세관청의 고유의무이다. 이 고유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경우 직무유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법에 의한 제재를 받아야 했음이 마땅하다.따라서 위 내용으로 본 정부의 입장은 종교인 사례금은 근로소득 과세대상이 아니라는 판단을 하고 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이상, 과세대상이 아닌 사례금의 일부를 모았다가 나중에 일시금으로 지급하더라도 이는 퇴직소득의 성격상 과세대상이 아님은 당연하다. 2017년까지의 적립금이 퇴직소득 과세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의 논거는 또 있다. 종교인이 매월 지급받는 사례금이든 퇴직 시 받는 퇴직금이든 이를 과세대상으로 하는 세법은 2018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만약, 기존의 법령에 의하여도 과세대상이었다면 굳이 법을 새로 만들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이미 존재하는 법에 따라 과세하면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을 새로 만들었다는 것은 그 이전에는 과세대상이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이다. 결국은 2017년까지는 종교인 사례금이 과세대상이 아니었고, 과세대상이 아닌 사례금의 일부를 모아서 나중에 지급했다 하더라도 이는 과세대상이 되는 퇴직소득이 아니라고 보는 것은 또한 당연한 논리이다. 결론적으로 1949년 소득세법이 처음 시행된 이래 68년간 숱한 논란을 거치면서도 강제징수하지 않은 것은 종교인 사례금의 비과세는 관행으로 성립된 것으로 보아야 하고 이에 대한 신뢰이익은 보호받아야 함은 당연하다. 이러한 신뢰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2018년 이후 발생하는 소득 분부터 적용하도록 하는 새로운 법령이 만들어졌음을 볼 때, 법 시행일 이전에 적립된 퇴직금은 과세대상이 아닌 사례금의 일부이었으므로 퇴직소득 과세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 합당한 일이다.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종교인의 일탈행위로 인하여 마치 모든 종교인이 그러한 것인 양 비춰지고 그에 따라 종교인에 대한 여론이 곱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탈 종교인에 대한 정죄를 빌미로 하여 모든 종교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세법의 법리가 잘못 세워짐은 더더욱 크게 경계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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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26
  •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
    최근 모 언론사가 설문조사한 자료에서 눈여겨보게 되는 것은 가장 존경하는 역대 목회자와 차세대 지도자 설문이었다.성도들은 ‘생존 여부와 관계없이 역대 한국교회 목회자 중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는 누구인가’를 물었을 때 한경직(11.2%)·옥한흠(10.6%)·주기철(9.9%)·손양원(9.2%) 조용기(4.7%)·장경동(4.6%)·문익환(2.8) 목사 순으로 7인을 꼽았다. 하지만 28.5%는 ‘없음·모름·무응답’이라 답했다.역시 주기철·손양원 목사는 한국교회의 자랑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설문조사에서 한경직·옥한흠· 조용기 목사 이후 주목할 만한 지도자가 없다는 점이다.교계에서 30여년을 다양한 계층의 지도자들을 만나다보니 혹 대중의 인기가 꼭 좋은 리더십이라고 말하긴 뭐하다. 인기발언으로 인기만 얻고 한국교회를 위한 공공성과 헌신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어느 단체나 두 가지 부류의 리더가 있다. 하는 일은 없어도 시간만 때우며 자리와 인기만 차지하려는 사람과, 반대로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헌신하는 사람이다. 당연히 존경받는 리더는 후자이다. 이런 리더가 없으면 조직은 결국 쇠퇴하고 망하는 길을 걷게 된다.리더는 한 순간의 인기와 자리에 목숨을 걸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먼 미래를 보고 가야 한다. 그가 리더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설문조사에서 빠졌지만 장종현·이영훈·정성진·윤보환 목사 등과 같은 좋은 지도자들도 있다. 오랜 교계 생활에서 만난 사람 중 이들을 보면 그들의 열정과 헌신에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인지 그들을 오해하거나 평가절하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또 설문조사에서는 ‘한국교회 목회자 중 공적 교회를 지향하며 사회와 교회 연합, 일치를 만들어 낼 차세대 지도자(60세 이하)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는 성도 62.1%, 목회자 74.2%가 ‘없음/모름/무응답’이라 답했다.이렇듯 ‘한국교회’라는 모판에서 좋은 지도자 나오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다. 최소 10년 아니 20년 이상의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인정해주지 않으면 좋은 지도자로 세우기가 어렵다.설문조사에서 미래를 이끌 차세대 지도자 부분에서 가능성을 보인 소수 답변으로 성도들은 이찬수 목사(5.8%), 목회자들은 소강석 목사(8.1%)를 가장 많이 꼽았다. 그 외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이 자천 타천 거론 되었지만 검증이 안되어 낮설고 생소한 도토리 키재기 수준이다. 이처럼 한국교회에 뚜렸한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지도자가 나지 않는 한 교회의 번창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도 교회가 안고 있는 리더십과 리더의 한계가 있다면 상대가 나와 다름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데 있다.한국교회가 풀어야 할 숙제가 산적하다. 교회는 지금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그런데 마땅한 지도자가 없는 리더십 공백의 상황이다. 개 교회나·기관·연합기관까지 지금 당면한 문제는 일회용 이벤트대행 지도자가 아닌 미래를 이끌 리더십을 지닌 차세대 지도자를 준비하고 있는가 이다.그런가하면 지도자로 거론되는 이들도 교회가 조금만 성장하면 나홀로 독자생존의 길을 가려한다. 그러다보니 한국교회가 당면한 현실에 대하여는 무관심하거나 무지하다. 자신들이 쳐놓은 교회담과 울타리를 넘어서질 못한다. 그것이 주는 편리함 때문일 것이다.한국교회는 안팎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 대사회적 역할 수행이 시급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개인기에 취해서인지 ‘연합’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들어 진다. 그래도 가끔은 ‘연합’을 하기도 한다. 각자의 이해타산이 맞을 때만 말이다.앞으로 미래지도자의 필수 전제조건은 ‘연합을 실천할 능력‘이다. 이런 마인드가 없으면 대표나 총회장, 대표회장이라는 자리를 그만 둬야 한다. 연합할 줄도 모르면서 존경받는 지도자란 먼 나라 이야기이다. 개인기 말고 동역자의식이나 형제애를 가지고 교회와 역사의 시대정신을 읽으며 팀웍을 이룰 수 있는 자이다.이번 조사에서 ‘젊은세대의 이탈’로 대변하는 다음세대 문제와 더불어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풀어 나가야 할 과제중 하나로 ‘대형교회와 소형교회 간 양극화’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다’(92.3%)고 응답한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다음세대’와 ‘양극화’의 문제는 교회와 동역자의 생존이 걸린 목회생태계의 최우선의 과제이다. 늙은 교회는 젊은이들을 품지 못하고, 다음 세대는 교회 밖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형국이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일에 충분하게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필자가 교계생활에서 만나보고 생각나는 가장 존경할 만한 목회자라면, 고인이 된 이중표 목사, 현재 원로인 장차남· 림인식 목사나 나의 멘토 박종구 목사처럼 신앙인격과 삶이 아름답게 조화된 목회자를 꼽고 싶다. 또 오랜 세월 연합운동에서 섬김으로 분열된 교회의 상처를 감싸고 치유하며 소외된 자를 품은 한경직 목사처럼 그런 통합형 지도자를 요즘처럼 갈급해 한 적도 없다.한국교회 전체를 읽고 사회와 소통시키며 다음세대를 이끌 리더가 보이지 않는다.역사와 미래, 세상과 사람을 품고 양극화를 치유하며 한국교회의 미래를 열어보려는 리더십도 보이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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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21
  • 황금돼지
    세간의 민중속설로 올 기해년(己亥年)인 2019년을 황금돼지 해라고 한다. 또한 언제적부터인지 돼지를 다산과 재복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 가히 문질문명의 첨단시대에 와서도 삶의 팍팍함은 여전하여 황금돼지라는 유토피아를 찾게 되는 것 같다. 12년 전, 정해년(丁亥年)을 맞았을 때에도 백년 만에 맞이하는 황금돼지의 해라고 돼지에 대한 설화와 예찬이 대단했었다. 황금돼지모형의 금 폐물을 장만하려 들었고, 저자거리의 가게나 집집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황금색 돼지저금통이 금고처럼 버티고 있었다. 더욱이 자녀를 돼지의 해에 낳게 하려고 연전에 결혼식을 올렸고 그로인해 출생한 돼지띠 아이들이 5만 여명이 더 출생했다는 보도가 있었다.오래전 제주도를 여행하다가 재래식 돌담 우리에다 몸집이 작은 검정돼지를 사육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안내자는 사람의 인분을 먹고 자란다는 제주도의 토종흑돼지라 했다. 작지만 비계가 없고 육질이 좋아 그 맛이 일반 사료로 사육되는 여늬 돼지들과는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그렇게 사육할 수가 없다고 했다. 이것은 단순한 관광용이고, 명맥을 잇기 위해 산자락 일정한 곳에서 놓아 기르는데 맛이 좋아 수요대로 공급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해방 후 일본에서 나와 전라남도 장흥군 부산면 용두리 자미마을에 있는 큰외가집을 찾아 갔을 때를 떠올리게 된다. 밤에 변을 보려는 나를 이모님이 호롱불을 들고 안채 건너 편으로 데리고 갔다. 일본에서 살 때는 안방과 건너 방 사이로 연결된 곳에 있는 변소를 사용했는데 낯설고 캄캄한 밤이라 오금이 저리게 무서웠다. 인기척이 나서인지 어둡고 음습한 곳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이모가 시키는 대로 2층처럼 된 곳으로 올라갔을 때 아래쪽에서 새까만 것들이 꿀꿀거리는 게 얼핏 보였다. 희미한 불빛에 기괴하게 생긴 것들의 움직임이 무섭게 느껴져 어머니를 부르며 뛰쳐나와 밖에서 일을 보고 말았다.어머니께서 내가 무서워했던 것들은 집집마다 기르는 돼지라는 순한 짐승이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간밤에 괴상하게 보였던 것이 어떻게 생긴 것들인지 자세히 보고 싶은 생각에 어머니를 따라 헛간으로 갔다. 어른 한길보다 더 깊게 파인 반 지하 형태의 넓은 공간에는 검불같은 짚더미가 쌓여있었다. 인기척이 나자 새까만 것들이 그 속에서 꿀꿀거리며 기어 나왔다. 어머니가 곁에 서 있고 밝은 대낮이라 안심하고 똥을 누었다. 개만큼 한 흑돼지 네 마리가 짧고 가는 꼬리를 흔들어대면서 위에서 떨어지는 대로 받아먹으려고 다투며 옆엣 놈 등에 묻은 것을 서로 핥아먹으려 밀쳐대고 꿀꿀대는 것들은 처음 보는 대단한 구경거리였다.돼지들을 구경하는 재미로 외갓집에 있는 동안 매일 헛간에서 일보기를 즐겼다. 개는 잔 밥을 먹고 마당에서 집을 지키고, 돼지는 헛간에서 변을 먹고 살면서 거름을 만드는 짐승이었다. 헛간 돼지들에게 넣어준 짚검불이 많이 더러워졌다 싶으면 거름으로 쓰려고 밖으로 꺼내고 새것을 넣어주는 것도 열심히 지켜보았다.후일 우리 집에서도 토종흑돼지를 길렀는데, 외가에서처럼 헛간에서 기르지 않고 그냥 나무와 돌담을 쌓아 만든 우리에다 길렀다. 어머니가 아침저녁으로 밥찌꺼기가 들어 있는 구중물에 쌀 등겨를 타서 넣어주었다. 나는 냇가에서 시금치처럼 생긴 풀을 베어다 주고 짓뭉개며 먹는 걸 살펴보는 게 재미있었다.그 시절 명절 때나 집안 잔치날엔 동네에서는 돼지를 잡았다. 동네아이들과 구경을 하면서 형들이 돼지 오줌보를 얻어 바람을 불어넣어 공처럼 차고 놀았다. 돼지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동남아 사람들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1969년 파월 당시 베트남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아주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돼지들이 많이 크지를 않아 우리나라의 중돼지 정도가 보통이었는데 거래되는 값이 큰 황소 한 마리보다 더 비쌌다. 작전이 끝난 후에 나트랑 해변에 있는 휴양소를 찾아 통돼지를 바비큐해서 맥주를 마시며 휴식을 가졌던 때의 장면이 스쳐간다.전원목회를 할 때 이웃 노인장께서 ‘사람이 제 똥을 먹지 않으면 죽는 법이여’ 라고 일러주었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돼지는 못 길렀지만 인분과 개똥을 섞은 거름으로 황금빛 나는 호박을 수확해 나누어주며 맛있게 먹었던 시절을 추억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 쾌적한 주거환경과 그에 따른 식생활 변화로 천지가 개벽한 것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서구화된 식생활에 혼탁해진 공기와 미세한 오염물질에 잠식된 식재료 때문에 우리의 몸에서 나오는 대소변을 씻어서 버리고 있다. 가난했었지만 돼지가 인분을 먹던 시절의 순수함이 마냥 그리워진다.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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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07
  • 그리운 금강산-최 건 차 목사
    지난 연말, 세찬 바람결에 코끝이 알싸해지는 저녁. 기독언론계 지인들과 송년가곡의 향연이 펼쳐지는 세종문화회관을 찾았다. 우리가곡과 이탈리아 노래를 좋아하는 클래식 팬인 것을 알고 음악회에 늘 초청해주는 이가 있어서다. 오늘은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최영섭 선생의 구순을 축하하며, 한국예술가곡보존회가 2018년을 마무리하는 정기음악회로 열렸다. 초장에는 낯설은 남녀성악가가 등장하고 이어서 이전부터 낯익은 유명성악가들이 대거 출연하여, 최선생이 작곡한 수많은 곡들 중에서 특별히 선정한 것들을 저마다 그윽하게 열창하는 가곡의 한마당이었다.초청장을 보내주는 이는 이번 공연의 음악감독인 소프라노 임청화 교수이다. 내 고명딸이 재즈클래식을 전공하려고 유학한, 헤이그에 있는 네덜란드왕립음악원 최고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한 분이라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딸 결혼식을 현지에서 치르느라 헤이그에 십 여일간 체류한 적이 있었던 터라 친근감도 든다.최영섭 선생과 각별한 사이라는 임 교수는 네덜란드 유학시절 “아시아 평화의 날”을 맞아 한국을 대표하는 독창자가 되어 헤이그 국회의사당에서 <그리운 금강산>를 부르다 이준 열사를 떠올리며 울컥했다고 한다. 왕립음악원 졸업식전에서도 우리가곡의 위상을 높이고 알리고 싶어 ’Longing for Mt. KUMKANG’이란 연주곡을 선정받아 당당하게 연주하여 국위를 선양했다고 해 존경스럽기도 하다.우리가곡 애창 상위수준에 속한 <그리운 금강산>은 세계유명성악가들도 즐겨 부르고 있는 추세다. 우리 국력의 역할도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세계적 음악가인 임청화 교수와 같은 분들이 국제무대에서 활동한 영향이지 않나 싶다. 나는 50년대에 중학시절을 보냈었기에 아쉽게도 최 선생이 작곡한 노래를 배우지 못했다. 그 시절 음악시간이면 우리가곡과 이탈리아, 미국, 영국, 독일과 스페인 민요를 즐겁게 배웠던 게 남아있어 지금껏 애창하고 있다. 특히 감미로운 벨칸토 기법의 이탈리아 남부민요가 내 적성에 맞아 즐겨 부른다. 근래에 와서는 전 세계 클래식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스리테너의 파파로티가 생전에 카레라이스, 도밍고와 여러 나라로 순회공연을 하면서 <그리운 금강산>을 늘 불렀다는 것이다. 최근에 내한공연을 가졌던 도밍고는 우리말로 능숙하게 불러서 뜨거운 사랑의 갈채를 받았었다.최영섭 선생께서는 1961년 <그리운 금강산>을 KBS로부터 위촉을 받아 그 시대의 정서에 맞게 작곡했다고 한다. 요즘 같이 북한을 도와주려고 애를 쓰는 좌편향정부시대라면 한상억 시인이 이런 글을 발표하기도, 가곡으로 유명하게 불러질 수가 있었겠는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오늘 음악회에서 알게 된 것이 있다. 시작하는 첫 노랫말이 ‘누구의 주제련가로 되어 불리어지고 있었지만 작사자인 한상억 선생께서는 당시 ‘누구의 주재련가’로 썼다고 한다. 이는 사람이 절대 소유권을 지닌다는 뜻으로 이해가 되는 ‘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했다는 것을 믿고 강조하고픈 그분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주제’가 ‘주재’로 고쳐지는 게 마땅하다고 하는 것이어서 맘에 들었다. 최근에 와서는 전체 가사의 1,2절 글 중에서도 ‘짓밟힌 자리’는 ‘예대로인가’로 ‘맺힌 원한’은 ‘맺힌 슬픔’으로 ‘더럽힌 지 몇몇 해’를 ‘못가본 지 몇몇 해’로 고쳤다는 것이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시대적인 아픔을 함께하기 위한 노랫말로 바꾸게 된 것이라고 한다.아이러니하게도 최영섭 선생은 나라가 분단되었기에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함으로 유명해진 분이다. 선생은 이제라도 무명가로 돌아가고 싶으니 통일이 빨리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북한이 가까운 강화도 도화면 사기리에서 출생한 분이라서 통일에 대한 염원이 남다를 것이다. 나도 같은 마음이지만 북한이 공산주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통일은 어려울 것 같다. 나는 등반을 좋아해 중국 쪽의 백두산을 비롯하여 한라산과 지리산, 북한산 등 국내 유명산을 거의 다 올라봤다. 하지만 햇빛정책을 내세워 금강산을 떠들썩하게 했을 때도 돈을 드려서 북한의 핵무장을 도우며 그들의 통제를 받고 싶지 않아 금강산을 보류했었다. 노랫말이 고쳐진 것은 다행한 일이다. 북한은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기를 바라면서 우리민족끼리라는 말을 자주 쓰고 있는데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주었으면 한다. 우선 암벽에 새겨 논 이념의 선전문구들을 다 지우고 우리관광객 피살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재발방지를 약속해야 할 것이다. 지금 남한에서는 수많은 탈북자들의 증언으로 북한 내부사정을 잘들 알고 있다. 핵과 남침을 위한 무장시설, 가혹한 인권유린과 비참해진 인민들의 실상을 감추기 위한 통제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정도지 그 이상이 아니라고 판단된 지가 이미 오래다. 통일은 차제하고서라도 유엔의 제재가 풀리고 이전 같은 분위기가 해소된다면 나도 배낭을 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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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18
  • 신년기고 / 2019년, 사랑과 힘과 정의의 유기체로서의 평화를 위하여!
    사랑이 없는 힘은 폭력이며, 사랑이 없는 정의는 무자비하며, 힘이 없는 사랑과 정의는 무의미하며, 정의가 없는 사랑은 불의요, 정의가 없는 힘은 독재다. 이 사랑과 힘, 그리고 정의를 분리할 수 없는 유기성이 평화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존재의 근거이기도 하다. 이것이 흔들리면 아무리 기회의 균등을 외쳐도 균등할 수 없으며, 제아무리 공정한 과정을 이야기해도 결코 그 과정은 공정할 수 없으며, 정당한 결과를 이야기해도 결코 정당할 수 없다.사랑과 힘과 정의는 권력의 세 축이다. 어느 한축이 무너지면 그 자체로서 사회의 평화는 깨어지고, 아무리 주권자가 평화를 외쳐도 그 자리에서 기회와 과정과 결과는 불합리, 불공평, 부당한 혼란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사회가 깨어진 평화 앞에 신음하고 있다. 지금의 사회적 현상에서 누가 기회가 균등하다고 하며, 누가 과정이 공정하다고 하고, 결과가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권력의 그 어느 누구도 감히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없다.인간의 사랑과 정의와 힘은 사랑하는 자로서의 신, 정의로운 자로서의 신, 전지전능한 자로서의 신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비록 인간에 의해 파악된 신의 사랑과 정의와 힘을 인간이 제대로 실천하지는 못하지만, 권력자는 자신이 가진 그 권력에 이 세 요소가 어느 한쪽에 치우침으로 기울게 하거나 함몰하게 해서는 안된다.인간의 평화를 유지하는 사랑과 힘과 정의는 그 구조상 신적인 요소이다. 즉 하나님의 성부, 성자, 성령으로부터 유추된 것으로 성부 하나님의 정의로움, 성자 예수님의 사랑, 성령 하나님의 힘이 그것이다. 그것은 하나이며 동시에 셋으로 나타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과도 일치한다. 성부는 성자와 성령을 관통하고 완전히 파악한다. 성자는 성부와 성령은 완전히 관동하고 파악한다. 성령도 성부와 성자를 관통하고 완전히 파악한다. 고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완벽한 개체로 계시면서도 완벽한 하나로 일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존재요 평화이다.이것이 인간에게 유기적으로 위임될 때 창조세계에서 하나님의 평화는 완성된다. 인간은 그럴 책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타락 이후 인간의 질서는 동물적 위계로 재편되었다. 동물의 세계에서 힘과 사랑과 정의에 의한 평화는 그 개념조차 성립하지 않는다. 적용시키고자 하는 것이 무의하다는 뜻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짓밟고 잡아먹는 것이 정의이며, 생태 환경에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고 그러하지 못한 자는 도태된다. 자연도태의 과정을 거쳐서 힘없고 약한 생명체는 사라지고 먹이사슬의 변형에 따라 생명 개체의 수도 달라진다.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존재 법칙이 아니다. 인간의 창조와 그 유지를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창조 윤리, 곧 인간의 존재 법칙은 동물의 존재법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돌보아야 한다. 부한 자는 가난한 자를 책임져야 하며, 배운 자는 그렇지 못한 자를 위해 지식을 사용하여야 한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를 도와서 건전한 사회의 일원이 되게 해야 하며, 도태되지 않도록 세워 주어야 한다. 이것이 창조의 윤리질서이다. 이 질서의 완성이 바로 인간에 의해 구현된 사랑과 힘과 정의의 유기적 관계의 평화 실현이다.문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고 김정은 위원장이 답방을 한다고 해서 이 땅에 평화가 오지 않는다. 복지 자금을 풀어 대고 세금으로 직장을 찍어내도 이 땅에 산재한 젊은이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왜 모를까? 지금 청와대와 여당은 추락하고 있는 지지도와 국정실책을 언론과 과거 정권의 잔재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비록 그 말이 맞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집권자이며, 바로 그런 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세력이기 때문이다. 서서히 등을 돌리는 국민을 나무라거나 원망하면 안된다. 우리 국민들이 그 만큼 어리숙한 사람들이 아님을 아직도 모르는가?청와대와 정부는 국민의 불만과 이탈을 단말마적으로 보지 말고 누구 탓으로 돌리려고 하지 말라. 지금 이 현상은 어디선가부터 사회적 힘과 사랑과 정의의 긴밀한 관계가 어긋나면서 벌어지는 불협화음으로 인한 평화의 상실에 있다. 헤겔의 정반합의 원리는 바로 이러한 현상을 바로잡으려는 철학자의 고뇌의 산물이다. 헤겔이 철저하게 인정하고 인용했던 것이 반(反)이다. 그는 정(正)을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반(反)의 실체를 끌어 왔다. 그래야만 변증법이 멈추지 않고 진행하기 때문이다. 어느 한 곳에서 정(正)이 반(反)을 무찔러버렸을 때 역사발전은 그 자리에서 중단되고 만다. 지금의 역사가 멈추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적폐를 청산하는 것은 좋지만 보수를 청산하면 안된다. 그러면 진보도 설자리가 없다. 보수가 없는 진보가 있는가? 보수가 없다는 진보 그 자체가 곧장 보수가 된다. 아니면 멸절된 보수를 대체한 세력이 없으면 그 자체로 곧장 독재가 시작된다. 이것이 역사발전의 원리에 기인한 당연한 현상이다. 지금 집권세력은 바로 이런 길, 자살 골, 자멸의 길로 가고 있다. 어쩌면 이런 실수는 과거 두 보수 정권의 실패이기도 하다. 알면서도 왜 정권만 잡으면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혁하자는 것이 정당한 주장인지도 모른다.청와대와 여당은 각성해야 한다. 국민을 무시하고 어설픈 돈 몇 푼이나 비상한 정치 이벤트로 마음을 잡으려 하지 말라. 지금 국민들이 얼마나 냉철한 눈으로 그대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무서운 잠재력을 간과하지 말라. 촛불의 민심이 항상 진보 쪽에만 있을 것이라는 오판이 가져올 무서운 결과를 던져주면서, 힘과 사랑과 정의의 평화를 허락하시고 그 성취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은혜가 황금 돼지해를 맞는 모든 독자들과 기독인들에게 함께 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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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04
  •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2018년 한 해가 저물어가는 세모(歲暮)가 되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은 세월 속에 사는 인생들의 연륜과 함께 저물어 간다.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을 사람들은 ‘쏜 화살’과 같다. ‘달리는 말(走馬)’과 같다고 했는지도 모른다.우리는 이 한 해를 보내면서 많은 아쉬움과 고민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우선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앞날을 염려한다. 정말 ‘적폐청산’이라는 과거에 매달린 한 해 동안 수없는 갈등과 분열, 좌절을 겪으면서 용서와 화해가 없는 시간을 보냈다. 이 한 해를 보내면서 새삼스럽게 넬슨 만델라의 ‘용서와 화해’의 정치가 생각난다. 한 해의 마지막 갈무리를 해야 하는 풍요로움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불투명한 미래를 예감하는 염려로 가슴을 조이고 있는 것은 지울 수가 없다.국민들은 사업장에서, 일터에서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 원망과 불평이 산더미처럼 쌓여가고 있지만, 정부나 정치인은 명쾌한 해답을 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어쩌면 삶의 기로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진심어린 ‘측은지심’의 심정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우리의 마음이 희망적인 모습으로 자라고, 우리의 기쁨이 현실 속에서 꽃피어나고, 아름다운 미래가 햇빛같이 밝게 보여져야 하는데 전혀 반대로 가슴속에 아픔이 자라고 서글픔만 더해가고 있다.국가사회가 해결해야할 문제가 많은데도 통로를 바로 찾지 못하고 일방통행으로 가고 있는 상황이 한계선을 넘은 것 같다. 개혁에 앞장서야 할 학자들과 지식인은 벙어리가 되었고, 패기와 열정으로 우리 사회의 기둥이 되어야 할 젊은이는 상실감에 묻혀 있다. 저명한 학자들이 경제위기를 진단하고 있지만 정책의 변화는 없고 좌충우돌하고 있다. 소 상고인의 고통, 청년 일자리 문제, 저 출산 문제, 고령화문제, 탈 원전문제, 교육과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불안한 모습이 계속되지만, 우리 국가 사회의 희망지수는 자꾸만 하락하고 있다. 한마디로 기대가 무너지고 있다. 당리당략(黨利黨略), 사리사욕(私利私慾)의 늪에 빠진 우리 사회는 안팎을 바로 보는 눈으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잦은 사고와 욕구불만의 시위가운데 공정성과 진정성을 가지고 어려움을 타개하는 밝은 미래의 지표를 마련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국민을 생각하는 측은지심일 것이다.한국교회도 2018년 저물어가는 세모에 교회의 유익과 성도들의 신앙성장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반성해 봐야 한다. 결론적으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단체들의 연합과 일치운동은 실망스럽도록 후퇴했고 절망적이라고 말하고 싶다.다만 교회가 교회답게 서야 하기 때문에 개체교회는 공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과 같이 ‘거룩한 공교회’의 모습이 회복 되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지역적으로 교회는 우주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형제가 연합하고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순수하고 은혜로운 열정이 담긴 예배의 회복과 성도들을 바르게 지도하는 권징이 바로 시행되어야 한다. 직분은 상하 우열의 계급이 아니고 봉사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봉사와 헌신을 함에 있어서 담임목회자나 사람 앞에서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바르게 감당해야 한다. 목회자는 성도를 차별하고 편애할 때 교회의 화평을 깨뜨리고 나아가서는 분쟁으로 비화 될 수 있기 때문에 빈부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랑으로 감싸는 측은지심을 가질 때 공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길이 될 것이며 건강한 교회로 가는 길이 될 것이다.그리고 교회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재정운용과 투명성이 확실하게 이루어 져야 한다. 교육과 선교, 지역봉사와 구제에 이르기 까지 투명하고 깨끗한 집행이 되어야 한다. 교회 재산과 재정의 많고 적음을 가늠하여 목회자의 능력과 성공여부를 판가름하는 세속적인 기준이 우리 교계에는 만연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교회는 매주 교회 재정상황을 주보에 게재하여 헌금이 바로 사용되는 것을 확인 시켜준다. 교회는 철저한 재정 감사 제도를 시행하여 교회 구성원 중에 어느 누구도 의혹이 없도록 깨끗하고 투명해야 한다.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위대한 미국을 만들자."고 했다. 한 해를 보내는 이 세모에 우리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고, 교회는 형제가 연합하여 사랑과 헌신이 살아있어 '위대한 대한민국'을 세워가는 새해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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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21
  • 원칙과 공평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수많은 사건과 일들을 처리하고 시행하는 가운데 두루 적용되는 기본적인 규칙이나 법칙이 바로 ‘원칙’이다. 이 원칙이 바로 시행 되어야 더 나은 바른 사회로 가는 길이다. 그리고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고르고 공정하게 시행되는 법과 행정을 ‘공평’이라고 한다. 원칙과 공평은 우리 사회를 맑고 투명하게 만들어 가는 원동력이 되는 중요한 기본이다.교회는 더욱 그러하다. 한국교회는 지난 9월 각 교단이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임원선출과 안건들을 처리했다. 목사와 장로가 모인 소위 성(聖)총회는 코람데오(Cora Deo) 정신, 즉 하나님 앞에서 원칙을 지키고 공평으로 회무를 처리해야 한다. 그런데 과거의 관습대로 계파의 이익을 위해 세몰이 식으로 밀어붙인다거나, 일부 교권세력의 이익을 위해 나이와 임기를 일방적으로 연장한다거나, 또는 체면과 관습에 얽매여서 원칙과 공평을 져버린 정책을 결행하지 않았는가를 반성해 봐야 한다.우리교계에는 아직도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한 사람이 평생 총회장을 차지하고 앉아있는 교단도 있고, 또 어떤 교계 공기관은 이미 교단에서 은퇴한 인사들을 끌어들여 이사와 이사장직을 중임으로 맡기고 나누어먹기 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는 한국교회가 반성해야 할 심각한 문제이다.총회 구성원들 중에 자파 세력이 많고 목소리가 큰 파벌은 법위에 법을 만들고, 규칙을 두고 또 다른 규칙을 만들어 자신들의 의견과 맞지 않는다고 상대를 압박하고, 심지어 권한을 박탈하여 혼란을 자초하는 경우도 있다. “원칙은 진리로 나아가고자 하는 정열”이라고 한 말처럼, 어쩌면 원칙을 지키기 위해 이런 불합리와 싸워야 한다.어느 대교단의 경우 지난 회기에 세운 재판국원들이 수 많은 회의와 논의를 거쳐 결론을 내린 판결이 자신들의 맘에 안든다고 총회는 보고도 받지 않은 채 묵살하고, 재판국원 모두를 교체하여 재심을 결정하는 등 절차에 문제가 있는 무례한 결정을 하기도 했다. 때로는 재판국의 판결이 마음에 안 들면 또다시 특별재판국을 설치하여 재판국위에 재판국이 법과 원칙을 마음대로 자행하여 깡패나 조폭수준의 원칙 없는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 아니 특별위원회가 수많은 시간과 재정을 투입하여 연구하고 결론을 내린 안건을 총회장이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사회봉을 두드리고 받아들인 안건을 또다시 번복하는 총회장도 있었다. 모름지기 한국교화와 교단의 지도자들은 교회의 유익이 무엇인가를 깊이 고민하고 반성해야 한다. 마치 현 정부가 헌법기관 적폐청산이란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최근의 사태처럼 교권이 군림하고 있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한국교회가 원칙과 공평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교회 지도자들이 패거리 정치를 지양하고, 교단과 단체를 영향력 아래 두고 있는 교권 장악 세력들이 척결되어야 한다. 개교회 행정에서도 원칙과 공평이 시행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담임목사의 신분을 보장하는 위임목사로 청빙을 받고도 얼마 안가 더 좋은 조건의 교회로 옮기는 목사의 경우를 허다하게 보게 된다. 교회는 공동의회를 거쳐 최선의 예우를 갖추어 위임목사로 청빙했는데 이를 져버리고 떠나면, 성도들은 매우 황당하고 한심하게 느끼게 된다. 교회에 위임으로 청빙을 받아 부임했다면 적어도 10년은 책임 있게 그 교회에서 목회를 해야 하지 않을까?또한 본교회에서 안수 받고 장립한 장로들도 담임목사와 성도간의 갈등으로 교회를 떠나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는 것을 보게 된다. 교회골동체도 인간이 모인 집단인데 완전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름지기 장로로 장립을 받았으면 그 교회에서 종신토록 헌신해야 할 것인데, 왜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아 다니면서 ‘문제 있는 장로와 교인’으로 눈총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는 공평하고 투명한 행정을 시행하여 성도들이 불평과 불만이 없도록 해야 한다. 당회가 인사원칙을 정했다면 그 원칙아래 공평한 행정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마른 수건을 쥐어짜듯 독선적 행정으로 일관하고, 좌충우돌 하는 인간관계와 교인들을 편애하는 행정으로 인하여 갈등을 일으키는 교회가 많다. 그러므로 원칙과 공평으로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는 확고한 교회의 정체성을 세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인도의 거성(巨星) 간디는 “원칙 없는 정치, 희생 없는 종교”는 망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원칙과 공평을 시행하려면 양보하고 희생하는 신앙으로 관용과 포용이 절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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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05
  • 올드보이 전성시대, 언제까지인가?
    몇 해 전 교계단체가 기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은 기자들이 한국교회의 부정적 현상에 대해 지도자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한국교회가 뼈아프게 들어야 할 대목이다. 응답자의 90%가 한국교회 분열의 가장 큰 이유를 지도자들의 명예와 욕심, 공교회를 사유화하려는 시도 때문이라 지적한 것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를 자처하는 이들 모두가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기자들은 한국교회의 연합이 잘 안 되는 이유에 대해 한국교회를 이끌 ‘지도자의 부재’ 때문이라 지적했고, 한국교회 연합의 가장 큰 걸림돌을 교권과 명예에 대한 ‘지도자들의 욕심’이라 답해 한국교회 지도자의 문제가 심각함을 엿보게 했다.결과적으로 한국교회가 분열되고, 갈등을 겪는 가장 큰 이유가 지도자들의 문제라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지도자들 때문에 교회가 갈라지고, 지도자들 때문에 개신교가 하나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한국교회는 이미 노화되고 고령화되어 6.13지방선거에서 보듯 그와 마찬가지로 어느 특정정당과 같은 이미지로 한국교회의 가장 큰 고민은 젊은 다음세대에게 매력을 주지 못하고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다.‘올드보이’(Old Boy)는 박찬욱 감독이 2003년에 찍은 영화다. 이유도 모른 채 15년을 갇혀 지낸 남자가 자신이 감금된 이유를 알아내는 과정을 그렸다. 이처럼 기존세대에서 10년 이상 차이가 나며 소통이 되지않고 단절되는 세대를 가리켜 일명 ‘올드보이’라고 부른다.한국교회의 문제중에 일부를 제외하고 후유증도 따지고 보면 일선 교회나 목회자, 교인들과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다. 결국 연합기관의 사분오열 사태도 ‘지도자들의 문제’라 말할 수 밖에 없다.교계에서 어떤 조직이나 단체가 만들어지면 역할의 성격과 상관없이 정치적 수완이나 전직 경력이 화려한 정치꾼들과 노인들이 제일 앞줄의 감투를 차지한다. 나이와 교단 순에 의해 위계질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은퇴한 70대 노인이 지시하고 50, 60대는 애 취급받으며 움직이는 시스템이 된다.몇 년 동안 그렇게 회의하고 밥먹고 모여서 한 일이 생산적이고 영향력 있는 일이 아니라 자신들의 자리나 감투를 지키기 위한 일이었고 패거리를 늘리는 일이었다. 이렇게 지도자들이 문제를 만들었고, 지도자들이 문제를 키우고 있는 셈이다. 교계 기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한국교회를 이끌 지도자의 부재가 오늘의 사태를 초래했다는 말이다.지도자는 연예인이 아니고, 지도력은 장식물이 아니다. 연예인은 대중의 인기 자체가 목적이지만, 지도자는 현실을 타개하고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지도력을 사용한다. 이런 지도력은 평상시에 단련돼 실전(實戰)에서 빛나고 결과로 평가받는다.러시아 월드컵에서 보듯 지도력이 장식물이 되면, 평상시 의전(儀典)에는 강해도 실전에서는 오합지졸 약한 군대가 되기 십상이다. 실전에 강한 군대의 의전은 소박하다. 겉치레가 아무리 화려해도 지도자로서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 되지 못하는 지도력은 허상(虛像)에 불과한 것이다.한국교회의 마음은 ‘연합기관’을 떠나 있는 듯하다. 분열과 갈등, 허송세월 10년이다. 이쯤되면 부부싸움에 집나간 자식 돌아오게 하듯 지도자들이 ‘연합’에 진정성을 가지고 나서야 한다. ‘연합하지 못하면 연합기관 간판내리겠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여전히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한국교회의 현실 앞에서, 한목협의 성명처럼 ‘더 이상은 안된다’는 절박한 외침이 바닥에서부터 터져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을 애써 외면할 것이 아니라 이른바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겸허하게 그리고 지혜롭게 머리를 맞대고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나가야 살길이 있다.‘교단 연합기관’들의 통합논의가 몇 년째 매주 기사화 된다. 교계 연합기관들을 언론에서는 관심을 가지고 비중 있게 보도해 준다. 지리멸렬한 연합기관이 한국교회의 구심점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반영됐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은 분열의 연장이었다.이런 관심밖의 잊혀진 연합기관의 행사를 보면 마음이 짠할 때가 많다. 살아온 경험에서 비롯된 이들의 교회와 시대를 향한 고민과 걱정이 왜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않는다. 왜 이들은 자신들끼리 고립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모를까?'한국교회를 대표하겠다'는 이런 여러 연합기관들을 보면 20명 가까운 공동회장들이 60대 중반에서 70대다. 총회장을 역임하고 물러났거나 아니면 은퇴한 분들이 모여 이런 역할을 하기에는 이미 올드하다.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이런 인적 구성의 기구는 '연합운동은 늙은 정치꾼 올드보이들의 전유물인가'라는 인상을 또 한 번 주게 된다. 이런 기구가 실제로 어떤 역할을 얼마나 할지 모르나 이미 굳어버린 이런 경로당 이미지와 사고로 인해 그 폭(幅)을 좁히는 손실이 더 크다.차라리 저분들이 나서서 아끼는 후배나 제자들을 설득해 이런 기구를 운영하게 한다면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겠다'는 기대를 걸어볼 수 있었는지 모른다. 기업이나 어떤 조직도 젊은 세대를 공급받지 못하거나 길러내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지난 시절 어떤 기관의 대표회장은 소위 한국교회를 지키기 위해 열심이었다. 교단을 만들기도 하고 10년 이상을 총회장과 대표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 자리가 '벼슬'처럼 되고 ‘총회장’이 직업이 되었다. 그 단체 구성원들도 그와 함께 덩달아 늙었고 수는 줄어들었다. 이렇게 되면 한국교회가 세상 흐름과 감각을 따라잡는 게 어려워진다.아무리 명분이 뛰어나고 인품, 신망이 뛰어나도 조직이 망하면 그는 최악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누구보다 이런 이치를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렇다고 조금 젊다고 하는 60대도 마찬가지이다. 호랑이 사라진 골목에 토끼가 왕노릇한다고 막상 본인들이 60대에 들어서면 매스컴에 소개되는 조직을 만들어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에 주력한다. 정책이나 경륜과 상관없이 인물위주의 이벤트라는 이미 선배 ‘올드보이’들이 했던 그 코스를 그대로 답습한다. 그래서 또 다시 ‘올드보이’의 시대를 만든다.늙은 교회는 젊은이들을 품지 못하고, 다음 세대는 교회 밖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형국이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일에 충분하게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한국교회는 언제까지 장기적 정책 대안은 없이 1년직 자리나 인물중심의 ‘올드보이들’의 전성시대인가?그래서인지 혼돈의 시대에 한국교회의 역할은 더욱 요구되지만, 현실에서 교회는 더욱 고립이 심화되고 있다.한국교회, 변화할 것인가? 변신할 것인가? 한국교회의 미래를 진정 걱정을 한다면 정책 아젠다를 개발하고 후배들을 키우고 그들을 무대의 주인공으로 내세워야 한다. 50대 대표, 40대 총무와 사무총장이라는 인적쇄신은 불가능한 것인가? 교단이든 기관이든 같은 자리를 세 번이상 역임했으면 그는 이미 원로다. 자신은 뒤에서 경제적·정신적으로 지원하고 조직은 또 다른 세상의 변화와 함께 가야 성공할 수 있다. 아마 이런 글을 읽으면서 감정이 상하고 화가 나며 열을 많이 받으신다면 정말 죄송하다. 그런데 그는 이미 ‘사고(思考)의 올드보이’이다. 한국교회를 아우르는 유연성도, 사회변화를 읽고 받아 드리는 수용성도 떨어지니 그것이 그 수준이자 한국교회의 한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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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28
  • “충분히 슬퍼할 수 있다”
    한국생명의전화가 지난 6월 22일부터 23일까지 1박 2일 동안 원주 오크밸리 리조트에서 자살 유가족 힐링캠프 ‘유(遺)유자적’ 프로그램을 가졌다. 이 프로그램은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은 ‘자살유가족 힐링캠프’ 개최를 위한 온라인 공익캠페인을 실시하고, 블로그에 올려진 시민들의 댓글 또는 공유를 통해 모아진 관심을 기부금으로 환산하여 이번 힐링캠프를 지원하였다. 이번 캠프는 첫째 날은 주변 경관 관람, 이화여대 이광자 명예 교수가 진행하는 회복과 나눔을 위한 집단 프로그램, 부모, 자녀, 남편 혹은 아내 사별 등 사별 대상자별로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갖고, 둘째 날은 무용·동작테라피, 원주 레일바이크 체험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들 유가족들은 이 프로그램에 참여 하기 위해서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그들은 사랑하는 가족의 자살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고통스러운 날을 보내고 있고, 자살자의 가족이라는 사회적 오명 때문에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수치감에 시달렸다. 미국의 유명한 자살심리학자 슈나이더만은 자살 유가족들은 가장 큰 정신건강의 피해자들이며 그들은 평생 자살자의 유골을 가슴에 묻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이들이 밖으로 나와 힐링캠프에 참여한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진전이다. 같은 아픔을 갖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유가족들에게는 큰 위안을 주게 된다. 그들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 주면서 그들이 빠져있는 비탄이라는 웅덩이에서 벗어나올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필자는 이번 힐링캠프를 통해서 짧지만 유가족들이 상실의 고통을 딛고 서서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회복하여 공동체에 복귀해서 함께 어울리며 건강하게 살아가길 바란다. 그리고 이번에 참가한 유가족들 뿐 아니라 매년 70만 명 이상 발생하는 자살 유가족(자살자 당 6명 이상 발생)들이 정상적인 애도과정을 거쳐 충분히 슬퍼할 수 권리를 회복하고, 또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유가족들에 대한 긴급 지원은 물론 상담과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법과 제도가 확충되어나가기를 바란다. 끝으로 이번 힐링캠프에 참여한 유가족들이 또 다른 유가족들을 참여시키도록 하는 릴레이 캠프가 이어져 나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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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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