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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대한민국 국회, 정말 이래서는 안 된다
- 현재 국회에서는 이재명 정부 들어 처음으로 국정감사가 진행되고 있다. 국정감사는 말 그대로 국가의 중요 기관들에 대하여 그 실태를 파악하고, 그 잘•잘못을 찾아서, 국가 전체가 바로 가도록 하는, 국회의 매우 중요한 역할이다. 그런데 그렇게도 중요한 국정감사가 사적인 감정에 이용되는 질 나쁜 현장이 되었다는 개탄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국정감사NGO모니터단>에서는 2025년도 국정감사 간이평가 보고서를 10월 28일에 냈는데, ‘2025년 국감은 역대 최악의 권력분립 파괴이며, 저질 국정감사로 F학점’이라고 규정한다. 이 단체는 각 시민•사회 단체가 연대하여 각계 전문가 1,000여 명이 참여하여, 27년 동안 국감을 모니터해 온 국감 전문 모니터단으로 알려진다. 이 단체가 분석한 2025년도 국정감사 특징을 보면, 가장 먼저 손꼽힌 곳은 법사위원장의 파행이다. 교섭단체의 간사 선출을 부결시켜, 국회법 제49조를 위반하였고, 인사하러 온 대법원장의 이석(移席)을 90분 동안 허락하지 않았으며, 현장 검증을 빌미로 대법원 법대에 올라갔으며, 감사위원의 발언권과 퇴장 명령을 반복했다. 또 감사위원의 질의 시간보다 3배 이상을 위원장이 많이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또 과학기술방송통신위원장은 국감 기간 중에 자녀의 결혼식을 국회에서 열어, 낯 뜨거운 진실 공방이 오갔다. 이 결혼식 문제는 국회의원의 윤리 의식이 얼마나 망가졌느냐하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현직 상임위원장이 국정감사 기간에 자녀의 결혼식을 국회에서 진행하고, 청첩장을 돌리고, 심지어 잠간 동안 신용카드결재 링크까지 했으니, 이런 일이 어찌 일어난단 말인가? 그렇게 되면 피감기관과 대기업들에 엄청난 부담을 주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그 상임위원장은 반성이나 사과 한마디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거기에다 피감기관이 되어야 할 정부에는 여당의 중진 의원 7명이 장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행정부에도 속해 있고, 입법부에도 속해 있어, 때로는 피감 기관장이 된 자신들이 감사위원들과 같은 태도를 보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국회의원•장관들은 버젓이 각각 소속 상임위원회에도 속해 있다. 그리고 각 상임위원회에서는 감사위원의 발언권을 제한하거나 퇴장 명령을 남발했다. 또 감사를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어, 자신의 문제를 보도한 언론을 퇴장시키고, 자신의 사건에 대하여 문제 삼았던 감사원장에게 사과하라고 하고, 자신을 기소했던 검사장에게 검찰 수사를 사과하라고 하는 등, 그야말로 국감이 아닌, 정쟁과 자신의 분풀이를 하는 수준으로, 국민들의 공분(公憤)을 사고 있다. 이것이 과연 대한민국 입법부의 민낯이 아닌가? 이런 정치인들의 잘못을 따끔하게 지적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곳은 언론이다. 그러나 언론들조차, 이런 국회의원들의 비행(?)을 눈감아 주고 있지는 않은가? 국민들이 국회의원을 국민 대표와 일꾼으로 뽑을 때는 이런 일들은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그들이 국민들의 입장과 국가를 위한 일에 충성하는 선량(選良)이 되기를 원한 것이다.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자신들의 행동을 모든 국민들이 지켜보고, 평가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찌 어찌하여 국민들의 선택으로 금뺏지를 달았다 하여도, 자격이 없으면 스스로 물러나는 용기라도 보여야 한다. 더 이상 국감장을 사감을 충족시키는 곳으로 전락시킨 의원들은 국민의 대표로서 자격이 없다. 국민들도 스스로 품격을 떨어트리는 의원들에 대한 질책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정치가 바로 간다. 한편 한국의 입법부(국회)는 세계적으로 볼 때 어느 정도일까? 글로벌 비영리단체인 월드저스트프로젝트(WJP)에 따르면, <2025 세계 법치주의 지수>에서 한국의 국회는 조사 대상 143개국 가운데 68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 단체는 지난 2015년부터 전 세계 143개국의 정부 권한에 대한 견제, 부패의 부재, 열린 정부, 기본권, 질서•보안, 규제 집행, 민사 사법, 형사 사법 등의 47개 지표를 평가하여 법치주의의 점수를 매기고 공개해 왔다. 그런데 사법부(법원)의 점수와 등위를 살펴보면, 민사 사법은 0.76점으로 13위, 형사 사법은 0.72로 15위에 올랐다. 특히 한국 형사재판의 시의성과 효율성은 0.76점으로 세계 3위를 기록하였다. 그런데 입법부(국회)는 ‘공무원의 사적 이익을 위해 공직을 이용하는지 여부’에서 0.32점으로 68위를 기록한 것이다. 정부에 대한 입법부의 견제도 0.67점으로 38위에 그쳤다고 한다. 왜 우리나라 국회가 이렇게 수준 낮은 기관이 된 것인가는 세계적인 평가에서도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거대한 힘으로 모든 것을 개혁하겠다는 국회는 자신들부터 돌아보고,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스스로를 먼저 개혁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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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대한민국 국회, 정말 이래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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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 4:1~9)
-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2-3절) 바울이 그러했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사모하며 서로의 기쁨이 되고 면류관이 된다는 것이 서로 간에 얼마나 큰 힘과 능력과 삶의 기쁨이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따라다니면서 증오하고 혐오하며 핍박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형제자매로 부를만한 기쁨과 소망과 힘이 되는 많은 성도와 동역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사랑과 힘이 되는 성도들을 자신의 면류관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성도들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기를 권면하였습니다. 그 권면의 중심된 내용은 주님 안에서 서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름이 명명된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모두 여인이었습니다. 빌립보교회가 자색 옷감 장사인 루디아에 의해서 설립되었기에 상대적으로 여인들이 많았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동역자들에게 이 두 여인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볼 때 유오디아와 순두게 사이에는 다소 어려운 관계전선이 형성돼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여인들은 글레멘드와 그 밖의 바울의 동역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애쓴 사람들이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니는 일반적인 교회 안에도 이러한 상황들은 즐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교회 안에서 열심을 내는 성도들 간에 발생하는 심각한 감정의 깊은 골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각자 부족한 부분이 있기에 곧잘 트러블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점점 시험에 들게 되면 교회 전체에 어두운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면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각자 자기 마음이 있고, 자기의 삶의 방식이 있으며, 자기만의 유전된 감각과 방식이 있기에 서로 같은 마음을 품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즉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고 강조한 것입니다. 제각각 특성과 기질이 다른 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뜻을 가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온전히 합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일을 감당하려면 먼저 주님 안에서 일을 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관계하고 주 안에서 협력해야 하며, 주 안에서 모두의 목적을 두고 일치시키며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만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바울은 서로의 관계로 인해 침체의 늪에 빠진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우리도 교회 안에서 이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기뻐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하며, 오직 기도로 간구하고 염려치 말며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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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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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학교 부흥과 민족 화해를 위해 걸어온 대인
- 지지난주 금요일 단국대학교에서 중재(中齋) 장충식 장로님의 평전 출판 헌정회가 있었습니다. 단국대학교는 중재 장충식 장로님의 선친이신 범정(梵亭) 장형 선생님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장형 선생님은 위대한 독립운동가요 교육가셨습니다. 그런 그가 단군 정신을 기초로 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문화적 뿌리를 되살리자는 설립 목적을 가지고 학교를 세우신 것입니다. 장충식 장로님은 36세 때에 전국의 대학교 총장들 가운데 가장 젊은 나이로 총장이 됩니다. 총장이 된 그는 세 가지 원칙을 다짐했습니다. 어떤 경우도 기업 활동을 하지 않을 것, 정치에 발을 딛지 않을 것, 정부의 제안으로 봉사하는 자리를 맡아도 급여는 반드시 받지 않을 것 등이었습니다. 장충식 장로님은 서울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석학이지만 미국 유학의 길을 떠납니다. 그러나 선친이신 범정 선생님의 소천으로 귀국길에 올라 학장과 총장에 취임 합니다. 장충식 장로님은 범정 선생님의 “너는 어떤 경우에도 학교를 지켜내야 한다”라는 유언을 가슴속에 품고 오로지 학교를 지키는 데 전념하였습니다. 학교가 성장하고 교세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말할 수 없는 고난과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정치 자금을 후원하지 않았다는 괘씸죄로 학교는 부도 위기, 아니 학교를 하마터면 빼앗길 위기를 맞을 뻔했습니다. 그때 장충식 장로님께서는 수면제가 없이는 잠을 주무실 수 없는 고통스러운 밤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대역전극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반세기 전 선친 범정 선생님이 이희호 양의 도미 유학길에 적지 않는 장학금과 생활비를 보태주는 일이 있었는데, 반세기 후 이희호 양이 김대중 대통령의 영부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정부에 겪었던 억울함을 이희호 여사를 통하여 DJ 대통령이 알고 대통령 인수위원에서부터 단국대학을 다시 살리고 그 주인에게 되돌려주는 정책을 펴게 된 겁니다. 세상에, 반세기 전에 선친 범정 선생님이 심은 사랑의 씨앗이 반세기 후에 단국대가 오늘의 명문사학, 그것도 우리 교회 바로 옆 죽전 단국의 전당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입니다. 범정 선생님의 피와 정신을 이어받은 중재 장충식 장로님도 은혜받은 사람에게 잊지 않고 갚아드리고 항상 나누어 주고 베풀어 주는 삶을 사셨습니다. 또한 부조리한 일에는 결코 타협이 없고 원칙을 고수 하였지만 약자와 억울한 자에 대해서는 측은지심을 베푸셨던 분이십니다. 그는 학교를 지키고 교세를 확장하는 일뿐만 아니라 88서울올림픽 유치를 위한 대외 활동에 수고를 하셨으며 남북 체육회담에 참가하여 남북 단일팀 성사를 이루어 내고 대표팀을 이끄셨으며 대한적십자사를 통한 민족 화해와 통일 추구를 이루신 대인 중에 대인의 삶을 사셨습니다. 저는 중재 장충식 평전 출판 헌정회 메인 테이블에 앉아서 행사 진행을 지켜보면서 그분이 우리 교회 장로님이 되셨다는 것이 정말 감사하고 한없이 영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일정 때문에 오찬을 함께하지 못했지만 저는 이틀 밤에 걸쳐 중재 장충식 장로님의 평전을 읽고 다시 한번 장충식 장로님의 과거와 현재를 느꼈고 그분의 특별한 역사관과 역사의식에 감탄을 느꼈습니다. 거의 800페이지에 달하는 평전을 쓴 김학준 교수님의 필력과 노고에도 감탄을 했습니다. 단국대학교와 함께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향해 대인의 길을 걸어온 장충식 장로님, 제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자원하여 주일 낮 예배를 비롯, 각종 행사 때 대학교 주차장을 사용하도록 제안해 주신 장충식 장로님께서 더 무병장수하시고 대인의 뜻을 오래오래 펼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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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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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학교 부흥과 민족 화해를 위해 걸어온 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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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문화로 가장한 어둠의 축제인 할로윈의 실체
- 10월이 되면 도심 곳곳은 해골, 유령, 마녀 복장으로 채워지고, 상점들은 ‘할로윈 세일’이라는 문구를 내건다. 이제 할로윈은 단순한 외국 축제를 넘어, 한국 사회에서도 하나의 문화 트렌드가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시선에서 볼 때, 이 현상은 단순한 오락의 문제가 아니다. 문화로 포장된 이 축제의 본질은 죽음과 어둠을 미화하는 타락한 영적 상징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할로윈의 기원은 고대 켈트족의 ‘사윈(Samhain)’ 제사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한 해의 끝을 10월 31일로 정하고, 그날 밤 죽은 자의 영혼이 돌아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불을 피우고 제물을 바치며 영혼을 달랬다. 이러한 종교적 의식이 세월이 흐르며 민속 축제로 변했고, 중세 이후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이후 20세기 미국에서 상업화되면서 지금의 코스튬·파티 중심의 문화로 재탄생했다. 그러나 그 핵심에는 여전히 죽음과 귀신, 악령에 대한 상징적 모티브가 남아 있다. 문제는 이 문화가 아무런 분별 없이 교회 안으로도 스며들고 있다는 점이다. 일부 교회와 기독 가정은 ‘아이들이 즐거운 분장놀이를 하는 harmless event(무해한 행사)’로 여기지만, 할로윈의 본질은 기독교의 신앙적 가치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성경은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를 이루리요”(고후 6:14-15)라고 경고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되, 세상의 가치관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할로윈이 청소년 문화로 확산되며 죽음과 공포를 유희의 대상으로 소비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귀신이나 악마의 복장을 하며 ‘공포를 즐기는 경험’을 반복할수록, 생명과 죽음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죄에 대한 감수성도 둔화된다. 이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영적 감각을 흐리게 만드는 과정이다. 기독교는 인간의 생명을 거룩한 가치로 보며, 그 중심에는 “나는 곧 생명이라”(요14:6)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이 있다. 생명 중심의 복음과 죽음 중심의 문화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일부 전 사탄교 신자나 영적 상담가들은 할로윈 시기에 폭력·실종·자해 사건이 증가한다고 증언한다. 이는 영적 현상으로서 사회적으로 어두운 심리와 자극적 욕망이 강화되는 시기임은 부정할 수 없다. 결국, 할로윈은 인간의 영혼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악한 문화적 통로로 기능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생명, 빛, 그리고 진리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파괴와 공포가 아닌, 구원과 회복의 상징이다. 반면, 할로윈은 피와 죽음을 장식화하여 생명의 가치를 희석시킨다. 이 두 세계는 결코 공존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어둠을 빛으로 대체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교회는 자녀들에게 할로윈의 실체를 올바로 가르치고, 그날을 오히려 생명을 기념하는 신앙의 시간으로 전환시키는 교육적 역할을 해야 한다. 이제 할로윈을 향한 기독교의 대응은 영적 분별과 신앙의 정체성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우리는 세속 문화 속에서도 하나님의 거룩을 지킬 책임이 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는 말씀처럼, 교회는 어둠을 피하지 않고 그 한가운데서 빛을 비추어야 한다. 할로윈의 화려한 불빛 뒤에 숨은 영적 실체를 분별하고, 무분별한 사람들과 자녀들에게 이를 가르치며, 세상문화 속에서도 진리를 세우는 것이 오늘의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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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문화로 가장한 어둠의 축제인 할로윈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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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2025 인구주택총조사 ‘동성 배우자’ 등록 허용, 국가가 헌법과 창조 질서의 근간을 흔드는가?
- 202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처음으로 ‘동성 배우자’ 항목이 허용되었다. 국가데이터처는 차별 논란을 이유로 동성 가구주의 관계 입력 제한을 해제했다고 설명했지만, 이는 단순한 행정 절차의 조정이 아니다. 이번 결정은 결혼과 가정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상징적 변화이며, 헌법 제36조 1항이 명시한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한다”는 원칙, 즉 남성과 여성을 전제로 한 혼인 질서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헌법이 규정한 ‘양성의 평등’은 남녀의 구분을 없애자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창조 질서 안에서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존재로서 동등한 존엄을 지니며 조화를 이루는 관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동성을 배우자로 국가 통계 항목에 포함시키는 것은 헌법이 전제한 혼인의 구조를 무너뜨리는 행위로, 단순한 통계 조정이 아닌 법적·이념적 변질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은 결혼의 정의를 분명히 제시한다. 창세기 2장 24절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마태복음 19장에서 이를 다시 확인하셨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 앞에서 한 몸을 이루는 거룩한 언약이다. 동성 간 결합을 ‘배우자’로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도전이며, 교회의 신앙과 교육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다. 더 큰 문제는 이 결정이 앞으로 사회 전반에 미칠 파급력이다. 인구조사에서의 인정은 곧 제도적 인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건강보험, 세제, 복지, 입양 등 각종 사회제도에서 ‘동성 배우자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동성혼 합법화 논의가 확산될 수 있다. 이는 가정 해체를 가속화하고, 다음 세대의 성 가치관에 심각한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기독교는 어떤 형태의 차별이나 혐오를 조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이란 이름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의 소중한 가치를 무너뜨리는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창조주의 뜻 안에서 질서를 지키는 것에서 비롯된다. 교회는 이 시대의 가치 혼란 속에서도 결혼과 가정의 거룩한 질서를 지키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동성 배우자’ 항목 허용은 인권의 진보가 아니라, 헌법적 가치와 신앙적 원리를 훼손하는 위험한 전조다. 국가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법과 통계의 이름으로 왜곡할 때, 교회는 침묵할 수 없다. 사랑과 진리로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한다. “가정은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의 질서이며, 그 기초는 남자와 여자의 결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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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2025 인구주택총조사 ‘동성 배우자’ 등록 허용, 국가가 헌법과 창조 질서의 근간을 흔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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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하미자 목사의 ‘5대 확신’(요일 5:11~12 외)
- 5대 확신은 신앙의 뿌리입니다. 5대 확신은 구원의 확신(요일 5:11-12-“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기도응답의 확신(요 16:24-“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승리의 확신(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사죄의 확신(요일 1: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인도의 확신(잠 3:5-6-“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입니다. 5대 확신을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1. 구원의 확신: 구원에 대한 질문과 답을 풀어봅니다. 첫째, 어떻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나요?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요 3:16) 영생은 무엇입니까?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 둘째, 왜 구원받아야 하나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롬 3:23)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될 수 있나요? 예수님을 영접하면 됩니다.(요 1:12) 영접은 예수님 믿지 않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내 마음의 주인으로 믿는 것입니다. 넷째,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나요? 누구든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면 됩니다.(계 3:20) 2. 기도응답의 확신: 쉬지 말고 기도하면 항상 기뻐할 수 있고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기쁨이 충만하면 기도응답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 주 안에서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욥 33:26)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할 때 성령께서 친히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주십니다.(롬 8:26)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어야 그대로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1:24) 우리가 새벽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시 46:5b) 우리를 일생동안 즐겁고 기쁘게 해주십니다.(시 90:14) 내가 다닐 길을 알려주십니다.(시 143:8) 새벽기도는 무기입니다. 3. 승리의 확신: 고린도전서 10장 13절 말씀은 내가 감당할 만한 시험만 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당하는 고난은 세상 사람들도 당하는 고난이며, 그 고난을 믿음으로 견뎌내면 승리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충만해도 고난 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고난받는 까닭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험은 우리의 믿음을 성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고난 당할 때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힘써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위로를 통해 고난을 견디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후 1:6) 4. 사죄의 확신: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가 아무리 많을지라도 우리가 회개하면 그 죄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주님의 발로 밟으셔서 깊은 바다로 던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미 7:19) 우리가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벧전 1:18-19) 그래서 주님의 보혈은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5. 인도의 확신: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앞길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잠 20:24) 출애굽기 13장 17-22절을 보면, 하나님의 인도 방법은 가까운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안전하게 인도해주십니다.(17절) 믿음의 선배가 인도하게 하십니다.(19절) 앞서 인도하십니다.(21절) 하나님은 앞서 우리를 보호하시며 계획하시고 인도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영원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업어서 인도해주시고(출 19:4), 우리를 안아서 인도해주십니다.(신 1:31) 그렇게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시 48:14) 말세에 세 가지 악이 있는데, 방탕함, 술취함, 생활의 염려입니다.(눅 21:34) 그만큼 염려는 큰 죄악입니다. 신앙의 반대는 염려입니다.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5)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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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하미자 목사의 ‘5대 확신’(요일 5:11~12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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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흙수저였기에 더 간절했습니다”
- 지난 화요일 모처럼 명성교회 원로 목사님이신 김삼환 목사님과 오찬을 하였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에티오피아에 갔다 오신 지가 며칠밖에 안 됐기 때문에 제가 교회로 찾아가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해서 교회로 갔습니다. 사실 제가 문재인 대통령 집권 시기에 국가조찬기도회 때 설교를 하면서 김삼환 목사님께서 설립하신 '에티오피아 MCM기독병원'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제가 월드비전과 함께 에티오피아에 봉사활동을 하러 가서 보니까 명성교회에서 600억원을 넘게 들여 엄청나게 큰 병원을 짓고 의과대학을 설립하여 아프리카를 섬기는 것을 봤습니다. 그래서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우리 대한민국을 향해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김삼환 목사님께서도 선교사들의 영향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님과 배석자 없이 단둘이 식사를 나눴는데 이런저런 얘기를 하시다가 “소목사, 소목사나 나나 한 가지 특징이 있어. 그게 뭔지 아는가? 우리는 모두 흙수저 출신이데이. 누가 뭐라 해도 흙수저래이. 나나 소목사나 금수저 출신이었다면 지금 이런 교회를 섬길 수가 없데이. 나는 소목사를 볼 때마다 너무나 나와 비슷하고 나를 닮은 것 같아서 너무나 자랑스럽다네.” “저도 목사님을 큰바위얼굴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제가 가락동에서 개척을 하고 분당으로 교회를 이전했을 때 명성교회 대형버스가 우리 교회 앞에서 교인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 정차하고 성도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제가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주여, 이 버스가 가득가득 차게 하여 주옵소서. 명성교회가 부흥해야 우리 교회도 부흥하고 우리 교회도 부흥해야 한국교회가 부흥합니다. 목사님, 저도 이런 정도의 마음 그릇을 갖고 있었던 사람 아닙니까? 그래서 목사님, 아직은 그림자를 밟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목사님 흉내라도 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김삼환 목사님도 흙수저로서 젊었을 때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분이 스펙이 화려한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지혜를 주시고 또 목회의 천재적 은사를 허락해 주셔서 사람이 모일 뿐만 아니라 그 어느 석박사도 생각하지 못하는 순간순간의 지혜를 터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르신의 장신대 동기 가운데 총회장이 6명인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분이 직접 그런 말씀은 안 하셨지만, 제가 보기에는 김목사님의 후원을 받고 총회장이 되셨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목사님의 배웅을 받고 돌아오며 차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 역시도 얼마나 초라한 흙수저였는가. 흙수저였기 때문에 더욱 간절한 마음이 마음속에서 일렁거렸지 않았던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 성도들을 향한 간절함, 말씀에 대한 간절함, 또 목회에 대한 간절함이 얼마나 가득했는가...” ‘시크릿’이라고 하는 책에서 간절하게 원하는 만큼 이루어진다는 거죠. 저는 그 책을 보기도 전에 간절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신학생 시절부터 그 간절한 마음을 채플에 쏟고, 무등산기도원에 쏟고, 또 가락동 시절에 그 지하 예배당에 쏟고, 그 간절함이 축적되고 또 무르익어서 부족하지만 오늘의 소목사가 된 것 같습니다. 저는 지난 수요일 생전 처음으로 유송근 장로님과 함께 골프장을 간 적이 있습니다. 연습한 지 한 달도 안 된 사람이 필드에 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너무나 죄송하기도 하고 감격하기도 했습니다. 필드에 가서 공을 치는데 왜 이렇게 간절한 마음이 생기는지요. “만약에 값비싼 시간을 내어서 와 가지고 공도 안 맞고 또 제가 원하는 만큼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는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그리고 저녁예배 때 어떤 얼굴로 교인들을 볼 것인가...” 유장로님이 순간순간 코치도 하셨지만 저 역시 정말 간절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것을 마치 목회인 것처럼, 또 저의 사역인 것처럼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주여”를 몇 번을 부르며 공을 치고 또 “생명나무”를 몇 번을 주문 외우듯 하면서 공을 쳤습니다. “하나님, 이 흙수저 출신 종이 드디어 골프장 필드까지 와서 잔디를 밟네요.” 저는 카트도 거의 타지 않고 잔디를 밟는 것도 너무 죄송해서 잔디를 뛰어갔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저의 간절한 마음이고 애절한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옆에서 신프로님과 유송근장로님이 잘 코치를 해 주셔서 그렇지만, 저도 열과 성의를 다하고 어떻게 집중력을 발휘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비록 완전 초짜였지만 공 한 타 한 타를 칠 때도 간절함을 넘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공을 쳤습니다. 그 결과 88타라는 믿기지 않을 점수가 나온 것입니다. 저는 돌아오면서 생각했습니다. “주님, 이제 여한도 없습니다. 더 이상 골프장 안 가도 됩니다. 이제 주님이 저에게 감동을 주실 때 하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나와서 88타점을 얻었으니 오늘 예배 마치고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럴 때 제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이런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래, 너는 끝까지 흙수저라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거라. 너의 간절함이 살아있을 때 너의 사역도 더욱더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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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흙수저였기에 더 간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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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갈 5:13~14)
-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셔서 우리는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율법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할례를 받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간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구약 시대처럼 율법 전체를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면,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끊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될 것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이 소망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다면,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인해 나타나는 믿음뿐입니다. 우리의 달려가는 믿음의 길을 누군가가 막아 진리를 따르지 못하게 한다면, 그런 유혹은 하나님이 아닌 어둠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적은 누룩이 반죽 전체에 퍼져서 부풀게 만든다는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누룩은 어떤 것을 변화시키거나 부패시키고, 점진적인 작용을 통해서 전체를 변화시키기 위해 쓰이는 혼합물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데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 누룩은 천국 비유를 설명할 때를 제외하곤 대부분 성경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누룩 역시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본질적인 사랑과 믿음이 아닌, 율법주의자들의 거짓된 종교심과 위선으로 가득한 실상을 숨긴 채 어두운 마음이 사방에 번지도록 하는 죄악성을 누룩에 비유한 것입니다. 성도와 교회 안에서 교회와 말씀의 순수성과 거룩함과 진실된 열심 위에 누룩과 같은 죄와 욕심이 사방으로 퍼져서 개인이나 온 성도들을 혼란하게 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을 것에 대해서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즉 개인의 율법적인 성향과 회개되지 않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더럽고 추악한 인간의 정욕과 교만함이 묻어있는 교회와 개인의 빗나간 잘못된 전통을 가르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인 것이며 이는 세상이 좋아하는 일이 되는 것임을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희생과 십자가 사랑이 아닌, 빗나간 종교성을 주장하는 이른바, 할례를 주장하면서 혼란만 일으키는 사람들은 할례의 대상이 되는 그 지체를 아주 잘라 버리기를 바란다고 성경은 강력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거세를 뜻하는 것으로, 차라리 연자맷돌을 매고 물속으로 빠지는 게 낫다는 표현과 동등한 내용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그 사랑에 누가 되고 역행하는 어둠의 마음이 되지 않기를 하나님은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자기의 욕망을 채우는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겨야 합니다(13절). 성경의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고 말씀하신 한 가지 계명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14절).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우세함을 보이기 위해 서로를 해롭게 하는 마음이 아닌,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의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의 사랑으로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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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갈 5: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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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결국은 B.T.S 4로 돌아왔습니다
- 요즘 교회에 있으면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찾아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온 분들도 있습니다. 대부분 그런 분들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 오신 분들입니다. 그래서 청아한 가을바람도 쐬고 가을 잎사귀들이 단풍 드는 모습을 보며 가을 단상을 느껴보기 위해서 며칠이라도 교회를 떠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수요예배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주일 저녁에 수요예배 설교를 준비하고 월요일 날 영상으로 설교 녹화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영상실 직원을 비롯해서 다른 분들이 다 쉬는 날이고 또 멀리 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 어디 가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는구나...” 그래도 월요일 날 잠깐이라도 어디를 갔다 오고 싶었습니다. 마음에 두 곳을 정해 놨습니다. 하나는 남한산성, 또 한 곳은 남산을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려고 하니까 또 저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고 여러 가지로 부담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남산에 올라가도 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래도 일단 송종호 안수집사님에게 서울로 나가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서울로 나가니까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박태혁 원장님이 운영하시는 줄기세포 병원 제타리움에 가서 정혈 시술을 받고 간만에 저녁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식당에 가도 직원들이 저를 다 알아보지 않습니까?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아이고, 나는 어디로 갈 곳도 없네...” 그리고 서울에서 교회로 오는데 몇몇 분들이 B.T.S 4 기도회에서 성도들이 기도하는 영상과 사진을 보내주는 것입니다. ‘B.T.S 4 기도회’는 ‘Blue Tide Seekers 4 Weeks’의 약자로 블루 타이드의 은혜를 찾고 갈구하며 4주간 동안 담임목사와 교회를 위해서, 또 우리 성도들의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발적인 기도회입니다. 특히 제가 힘들 때 교역자들이 이런 때일수록 담임목사님과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자발적으로 기획한 기도회입니다. 제가 지시하거나 주문한 것도 아니고, 또 제가 인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제가 교회에 도착하여 보니까 비전홀이 가득 찰 뿐만 아니라 뒤에서 방석을 깔아놓고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담임목사와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자발적으로 기도하는 교역자들과 성도들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가을 단풍보다도 더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튿날부터는 아예 처음부터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마무리 기도는 제가 직접 하였습니다. 제가 바깥에 나가 하루 이틀이라도 조용한 시간을 가져보려고 했는데 결국 하나님은 저를 B.T.S 4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수요예배 설교를 직접 하게 하시고 또 철야기도와 주일설교 준비에 만전을 기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목요일 날은 김동섭 장로님으로 부터 전화가 온 것입니다. 다시 조직 검사를 한 결과 폐암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하나님 은혜가 너무나 감사했고 제가 받은 감동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저는 어디 가고 싶어도 딱히 갈 곳도 없습니다. 미리 계획된 사역이 아니고 미리 계획된 일정이 아니면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습니다. 이처럼 갈 곳 없는 저는 교회로 돌아왔고 B.T.S 4 기도회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B.T.S 4 기도회가 앞으로 우리 교회를 더 역동적이고 살아 움직이는 교회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B.T.S 4 기도회에 참여하신 성도들, 그 기도회를 인도하신 교역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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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결국은 B.T.S 4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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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오직 한 길’(요 14:6)
- 세상에 많은 길이 있으나 그 길이 모두 옳은 길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은 의의 길로 나아가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죄인 된 백성을 구원하려고 찾아오셔서 만백성이 따라야 할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길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지만 쉽지 않은 좁은 길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알 수 없는 신비한 길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르는 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 없이는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탄의 종노릇하며 죽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길, 그들로 하여금 진리와 생명의 길을 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멸망의 길과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비좁아서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마 7:1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는 곁길도 있습니다. 우리가 곁길로 가면 길 잃은 양떼처럼 방황하며, 쉬던 곳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나의 백성은 길 잃은 양 떼였다. 목자들이 그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여, 그들이 산 속에서 헤맸다. 양떼가 산과 언덕에서 방황하며, 쉬던 곳을 잊어버렸다.”(렘 50: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만 똑바로 바라보고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9:23) 그 길은 고난의 길이 아니라 영광의 길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귀는 아담을 유혹하여 죄를 범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단절되게 하였습니다. 아담은 진리와 생명의 길을 택하지 않고 거짓과 죽음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 타락 이후에 많은 사람이 생명의 길을 찾으려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길을 제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노력은 헛수고였습니다.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 없이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주님만이 진리와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도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늙어도 그 길을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걸어야 할 그 길을 아이에게 가르쳐라. 그러면 늙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않는다.”(잠 2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우선순위를 두는 가치관을 가져야 하며, 자꾸 세상을 돌아보면 안 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6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농부는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뒤를 돌아보면 밭이랑이 굽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세상 관심을 가지고 따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공의를 실행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께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는데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고 말하였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28-29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면서 보상을 기대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공로와 노력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어지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롬 3:22)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 그리고 나의 십자가의 길 뒤에는 부활이 있고, 하나님 나라의 영생이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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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오직 한 길’(요 1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