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7(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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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지난 8월 27일 서울 합정동 100주년기념교회에서 열린 세미나 ‘표절과 한국교회’에서 서문강 목사(중심교회)가 발제한 ‘설교 표절 그 정죄의 기준은 무엇인가?’ 중 표절 설교의 정의 부분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


설교문을 정기 배달해주는 설교 도우미 존재
부목사가 담임목사의 설교 대작하기도


무엇이 표절 설교인가?
(1) 일반적인 정의
표절 설교는 무엇인가? 필자 나름으로 위의 ‘표절’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를 적용하여 이렇게 규정하여 본다. ‘표절 설교란 남이 한 설교를 가져다가 그것이 마치 자기의 연구와 기도를 통해서 나온 열매인양 하며 회중들 앞에 제시하는 행위이다.’ 더 짧게 말하면 ‘남이 한 설교를 순전히 자기가 작성한 설교인양 하며 설교하는 행위’이다. 그러니 이 표절 설교 문제는 설교의 문제 자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 설교자의 신앙 양심까지 수반되는 문제다. 곧 남이 발견하여 증거한 진리를 자기가 발견한 것 같이하여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속여 자신을 높이는 기만적인 술수이다. 어떤 설교자가 설교 시간에 남의 설교를 그대로 베껴 가지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표절 설교이다. 예를 들어서 A라는 설교자가 B라는 설교자에게 언제 설교한 원고를 달라고 해서 그것을 그대로 자기 교회에서 설교한다면, 그것은 분명 표절임에 분명하다. 듣기로는 이전에 설교문을 아예 정기적으로 ‘배달’해 주는 ‘설교 도우미’들이 있다고 한다. 또는 인터넷의 설교문들이나 인터넷방송의 설교프로그램에서 다운 받거나 들은 설교를 그대로 받아서 자기 것인 양 설교한다면, 그것 또한 표절 설교
임에 분명하다. 또는 어떤 경우에는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지금은 아닐지도 모르고, 또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소위 어떤 ‘큰 교회’ 담임 목사는 자기 부목사들에게 설교를 작성하도록 하고 자기는 그 작성된 원고를 가지고 강단에 올라가서 전하기만 한다고 한다. 그 담임 목사의 변이 가관이다. ‘이렇게큰 교회 이끌어 나가다 보면 설교 준비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 부목사들이 나를 도와주어야해요’ 그 소문이 뜬소문이기를 정말 간절히 바란다. 설교 준비하지 못할 정도로 바쁠 만큼 ‘큰 교회’ 라면 설교 준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주어질 정도의 ‘작은 여러 교회들’로 그 ‘큰 교회를 나누어 여러 설교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독설을 발제자는 하고 싶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고서도 어떻게 큰 교회는 되어 가는지, 정말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참 한국교회에서 ‘그런 큰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참 설명이 어려운 기괴한 현상이다.
(2) 표절 설교와 독창설교(창작설교)의 차이
그러면 여기서 위에서 규정한 ‘표절 설교’의 보편적인 정신과 자세대로 하면, ‘표절 설교’와 ‘독창적인 설교’의 차이는 무엇인가? 발제자가 보기에, 오직 한 가지 척도로만 결정될 수 있다고 본다. 곧, ‘설교자가 자기가 할 설교를 위해서 어떤 준비를 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만일 자기가 할 설교의 소임을 위해서 남의 것을 베끼거나 도용하여 회중들 앞에 가지고 나가서 설교하면 그것은 ‘표절 설교’임에 분명하다. 곧 설교 준비를 위해서 쏟아야 할 ‘정상적인 과정이나 수고 없이 그대로 회중 앞에 나가서 마치 자기가 그런 과정을 거쳐서 맺히고 익힌 열매를 준다’는 식으로 설교하는 행위가 ‘표절 설교’라는 말이다. 그러나 설교자가 자기가 할 설교를 위해서 나름으로 ‘자신이 직접 성실하게 준비하여’ 회중 앞에 가지고 나가면 그것은 ‘독창적인 설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자신이 직접 성실하게 준비한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어떤 주어진 예배에 설교할 소임을 받고 그 설교를 위해서 자신이 직접 그 설교할 것을 준비하고 원고나 내용을 작성하거나 정리하는 것을 가리켜 말함일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설교자가 자기가 할 설교의 메시지를 하나님 앞에서 점검하고 그 메시지를 받을 회중들의 영적인 상태를 미리 내다보거나 점검해 보는 것이 수반되는 것이다.
설교를 준비한다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설교할 본문에 대한 바른 이해, 설교할 회중의 영성에 대한 바른 이해, 설교자 자신의 영적인 준비 - 이 준비는 단순하게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것만이 아닌 자신의 삶에 대한 준비를 포함함 - 그것을 위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 등, 소위 설교안(說敎案)이 설교자의 마음속에 보일락 말락 ‘흙을 뚫고 고개를 내밀고 나오는 작고 여리고 노란 떡잎’ 같이 나타나기부터 강단에 서기 전 그의 손에 들려진 ‘설교 원고’로 완성되기까지의, ‘진을 빼는 해산의 수고(말씀 해석과 묵상과 기도를 수반한),’ 또 그 설교내용을 가지고 회중들에게 증거할 때에 함께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간절한(마음 상할 정도의) 기대와 부담 등, 그 모든 것이 다 포함되는 작업이다. 그래서 한 편의 설교를 바르게 준비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얼마나 진을 빼는 고투가 있어야 하는가! ‘표절 설교’는 그러한 과정이 전혀 없었는데도 그러한 과정을 겪은 것 같은 ‘가면(假面)’을 쓰고 행해지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지혜의 방식으로서의 ‘설교’와 설교자의 위치에 비추어 본 표절의 심각성
설교는 그 설교자의 인격을 통해서 회중들에게 전달이 되고 회중들은 그 설교자의 인격을 통해서 증거되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접하는 것이다. Phillip Brooks는 그의 ‘설교론(On Preaching)의 서두에서 “설교는 진리가 인격을 통해서 전달되는 행위이다.”고 정의한다. 회중들은 단순한 어떤 진리에 대한 개념을 접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인격 속에서 숙성(熟成)’된, 본질은 전혀 바뀌지 않으면서도 설교자의 인격 속에서 ‘역사(役事)하고 숙성(熟成)된 진리’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가 설교자의 인격을 통해서 회중들의 인격 속으로 전이(轉移)되고, 그 하나님의 진리가 그 회중들 각자의 인격 속에서 역사하는 것이다. 설교자 중의 설교자였던 사도 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인용되기에 좋은 말을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3:13) 물론 이 말이 더 본질적으로는 신약의 계시를 수령(受領)하고 증거하고 기록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사도의 설교의 위치를 상기하게 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설교와 관련하여서도 인용되기에 전혀 적실성이 없지 않다. 설교자의 인격을 통해서 증거된 하나님의 말씀이 회중들에게 설교를 통해서 증거되어 그 회중들 각자 속에서 역사하였다. 이것이 ‘설교’라는 방식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양육하시고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다. “하나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여기서 ‘전도의 미련한 것’은 개인 전도에도 적용될 수도 있으나 문맥적으로 볼 때에는 ‘설교의 미련한 것’ 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확하다. 이렇게 하나님의 지혜의 방식인 ‘설교’라는 제도는 반드시 설교자의 인격과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인격적인 교감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의 미련한 것’을 통해서 설교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먼저 은혜와 진리 속에서 먹고 자라고 회중들도 함께 자란다. 설교자도 자기가 전하는 진리가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에, 그 진리를 회중들이 듣고 받고 그 인격들 속에서 역사하는 은혜를 받듯이 회중 보다 먼저 자기 속에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정말 ‘설교와 설교자의 제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세우신 거룩한 지혜의 소산이다. 설교자와 회중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주시고 설교자로 부르시고 설교자로서 가져야 할 은사를 주시어 그 일을 감당하게 하셨다. ‘설교와 설교자’의 제도는 사도 시대 이후 주님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교회에서 항상 같은 무게를 가지고 존재한다. 어느 시대 교회도 이 제도를 대체할 것이 무엇이랴. 칼빈 이후 모든 신실한 설교자들은 이 제도를 두신 하나님의 의도를 존중한 자들이다.
그러니 표절 설교의 문제점은 남의 설교를 자기 설교인양 하는 부도덕한 행위로 대번에 정죄당할만한 것 외에 또 더 심각한 것은 바로 그 점에서이다.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세우사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기르시고 먹이시고 자라게 하시는 방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점이 되는 과정’을 빼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도 진리 속에서 자라지 못하게 된다. ‘표절 설교’를 하는 이는 그 설교되는 진리를 먹고 묵상하고 자기 것으로 받고 순종하는 삶이 열려질리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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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한국교회 표절 논란을 넘어 진실성을 회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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