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동아시아 역사와 기독교의 역할 - 3.1운동과 기독교
2018/03/21 11:39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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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교단 조직화, 민족운동의 조직적 참여 가능
본고는 지난 3월 9일 종교교회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 3월 월례회에서 이만열 교수가 발제한 ‘동아시아 역사와 기독교의 역할’ 중 중요부분을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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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의 기독교 전통
동아시아 국가 중 중국과 일본이 기독교와 관련을 맺는 것은 한국보다 훨씬 이르다. 중국은 당(唐, 618~907) 제국 초기(635)에 페르시아로부터 동방기독교의 일파인 경교(景敎)를 받아들임으로 기독교와 접하게 되었다. 경교는 그 뒤 경정(景淨)이라는 경교승에 의해 781년 <대진경교유행중국비>를 세워 경교의 교리와, 경교가 중국에 유행하게 된 내력 등을 자세히 적어 놓았다. 천주교는 1581년 마테오리치(利瑪竇)의 중국 도착으로 본격화되어 명청(明淸)대를 거쳐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개신교는 1842년 남경조약에 의해 문호개방이 이뤄지면서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1872년 요동반도 영구 우장에 도착한 로스(John Ross 羅約翰)에 의해 1882년 3월과 5월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순 한글로 번역 출판되어 한국 복음화에 큰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일본은 유럽의 ‘반동종교개혁’의 여파로 자비엘(Francisco de Xavier)이 1549년 일본에 천주교를 전파시킨 이후, 임진왜란 때(1592)는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영세명을 가진 고니시(小西行長)이 천주교 부대를 끌고 한국을 침략했다. 그 뒤 1853년 일본이 본격적으로 미국과 서양에 개항함으로 개신교도 들어오게 되었다. 뒷날 한국에 선교사로 오게 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도 일본에서 선교하던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조합교회는 특히 침략세력에 편승하여 한국기독교인들의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설득, 일본 정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려고 했다.

3.1운동과 기독교
3.1운동에서 기독교는 천도교 불교와 제휴하여 이 운동을 선도했다. 그러나 기독교계가 당시 선도적으로 참여했음에도 역사의식의 결여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시각, 나아가 3.1운동 후에 훼절한 기독교 인사들 때문에 기독교의 역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3.1운동은 준비·점화 단계에서 전국적인 만세운동 단계, 그리고 새로운 방향 설정을 모색하는 '정리 단계' 혹은 국가건립 단계로 넘어갔다. 우선 준비(점화) 단계에서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은 거사일시와 장소를 협의하고 거사에 따른 업무도 분담했는데, 독립선언서의 기초와 인쇄는 천도교측에서 맡고, 지방 분송은 기독교측과 협력키로 했고, 독립선언서를 일본정부와 귀족원에 전달하는 업무는 천도교 측이, 미국 대통령과 파리 평화회의에 전달하는 일은 기독교측이 맡았다. 독립선언서명자를 모집키로 하여 16명의 기독교인이 서명했는데 5명이 더 서명자로 지원했으나 시간이 늦어 취소되었다. 점화단계의 48인 중 24명이 기독교인이다. 천도교와의 합작에 앞서 기독교계는 적어도 세 갈래(서북 장로교, 북감과 남감, 2.8독립선언에서 보이는 재동경Y 등)로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고, 첫날 봉화를 든 것은 기독교계였다. 그러나 중앙조직이 약한 기독교계가 천도교로부터 5천원을 빌렸지만, 5천원의 용도는 대부분 여행경비(중국 일본 만주와 국내 3,170원, 수감자 가족생계비 640원, 독립선언서 발송비 250, 기타 경비 80원)에 사용되었다.
지방화·전국화 단계의 기독교의 역할은 주목할 만하다. 교회나 기독교계 학교가 있으면 대부분 기독교인들 중심이었다. 예를 들어 3월 1일 첫날 서울 외의 8곳이 대부분 기독교계 중심이었고, 의주와 평양은 목사들이 주동하였다. 천도교측과의 합작도 보이는데, 운동의 주동세력이 뚜렷한 지역이 311개로 나타나는데, 기독교(78지역)·천도교(66지역) 그리고 양교 합작지역이 42개 지역이다. 전국화 단계에서 기독교인의 참여정도와 관련, 체포·투옥자를 통해서만 숫자를 파악할 수 있다. 6월 30일까지 투옥자 9,458명 가운데 기독교인이 2,087명으로 22%를 차지하였고, 12월 말까지 복역자 19,525명 가운데 기독교인은 3,373명으로 17%이고, 천도교인은 2,297명으로 11%였다. 이 통계는 바로 기독교인의 운동량을 계량화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지방 자료를 보면 기독교인 여부가 빠진 경우가 많다.
이 통계에서 기독교인의 역할은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때 한국의 인구가 1,600만 명 정도였는데, 기독교인은 1918년 현재 20만(장: 160,913, 북감:41,044, 남감:10,740, 계:212,703)을 상회하여 한국 인구의 1.3〜1.5%를 차지하였다. 거기에 비해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의 운동량은, 주동세력면에서 25〜38%, 체포·투옥면에서 17〜22%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3.1운동에서 기독교인의 운동량은 대략 20〜30%로 계량화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당시 1.3〜1.5%의 기독교 인구가 3.1운동에서 행한 역할은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도의 참여가 이렇게 적극적이고 광범위하였기 때문에 그 결과 일제의 박해도 다른 종교에 비해 컸다. 제암리교회당에서는 비신자를 포함하여 한꺼번에 29명이 희생되었다. 1919년 3.1운동으로 한 달이나 늦게(10월 4일 개회) 그것도 그 해 총회장인 김선두 목사가 3.1운동으로 '미참'(未參)한 상황에서 열린 장로교 제8회 총회에서는, 사살·타살 52명(각 노회 보고), 체포된 신자 3,804명(이 가운데 목사·장로 134명: 장로교 전체 목사·장로 1,024명 가운데 13%에 해당)이나 되었다. 총회에 보고한 노회의 보고는 '대한(조선)독립운동' 혹은 '독립사건'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운동이 전국화되는 단계에서 기독교가 갖는 문제 또한 없지 않았다. 3월 1일 선언 당일 기독교 대표 16명 가운데 4명이 불참하였는데, 그 이유가 납득된다 하더라도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또 당일 서울의 선언발표 장소를 명월관[泰和館]으로 옮긴 것이 선교사 베커(Becker)의 제의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도 기독교 운동의 한계와 관련된다고 할 것이다. 일제가 폭력으로 나오는 데도 교단적 차원의 대응이 없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물론 제암리의 만행을 세계에 알려 그 여론을 환기하는 데는 선교사 스코필드(Scofield) 등의 노력이 있었다. 끝으로 당시 장로교·감리교 연합기관지인〈기독신보〉등의 보도 태도는 일제의 언론 검열때문이었다고는 하나 그 대응이 대단히 미약했다고 지적된다.

기독교인들의 3.1운동 참여 이유
이처럼 기독교가 민족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기독교의 민족관이나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교육이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한말이래 기독교인들의 민족의식·민족운동의 전통을 적극 참여의 배경으로 지적할 수 있다. 흔히 말하는 대로 아시아·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는 기독교 국가의 침략을 당하였으나, 한국은 일본이라는 비기독교국가에 의해 침략을 당함으로써 기독교 이념에 입각한 독립운동이 가능했다. 한국의 기독교 민족운동은 한말부터 시작되었는데, 을사늑약이 이뤄진 1905〜1910년 사이의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으로 장인환의 스티븐스 암살, 전덕기의 을사오적 처단 미수, 안중근(가톨릭)·우덕순(기독교)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재명의 이완용 암살미수 등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또 기독교계의 교단 조직화가 이 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점은 앞에서 간단하게 지적했다. 또 일제가 강점한 후 기독교회의 예배를 방해하고 설교에 제재를 가하는 등 종교적인 자유마저 박탈하려 했다. 특히 금주·금연에 관한 설교나 '다윗과 골리앗'을 주제로 한 강론도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거기에다 강점한 지 얼마 안되어 벌인 '105인 사건'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하려 한 사건이었다. 1915년에는 사립학교법을 개정하고 포교법을 제정하여 기독교학교의 성경공부와 채플 등을 금지하고 선교를 방해하였다. 이것은 한국인에 대한 생존권을 위협한 데다 이제는 신앙의 자유마저 빼앗아 버리려는 것이었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도 궐기치 않을 수 없었다.
끝으로 우리는 당시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의 신앙적인 행동에서 그들의 신앙과 민족사랑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이미 모세·삼손·다윗·다니엘의 사적 등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우리 민족의 역사와 대비하고 있던 한국인들은, 3.1운동의 만세시위가 한창일 때, 기독교회가 작성한〈독립단 통고문〉을 뿌렸다. 내용은, ① 매일 3시에 기도하고, ② 주일은 금식하고, ③ 매일 성경을 읽는데, 월요일-사 10(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화요일-렘 12(유다가 멸망한 원인에 대한 설명,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버리셨기 때문'), 수요일-신 28(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에게 침략받아 고통받게 되리라는 예언), 목요일-약 5(고난당하는 기독교인들에게 기도와 인내할 것을 권면), 금요일-사 59(죄지은 백성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다는 예언), 그리고 토요일-롬 8(성령이 주시는 생명,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등이었다. 여기서 민족운동을, 신앙고백 위에서, 신앙운동과 함께 진행시킨, 민족과 신앙을 일치시킨 것을 엿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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