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은 목사의 이야기
2020/06/12 16:10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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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고향서 체포 당해… 계엄사무소서 군사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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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병 현 목사 <전 총회신학연구원 교수>


1. 법원에서 걸려온 전화
2019년 4월 초였다. 광주지방법원 해남지원에서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내 인적 사항을 확인하고 물었다.
1972년에 계엄 군사재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은 일이 있습니까? 그렇소.
그 형을 선고했던 포고령이 2018년 12월 대법원에서 위헌 판결이 내린 것을 알고 계십니까? 알지 못하고 있소.
그럼 재심을 청구하시겠습니까? 물론 재심을 청구하겟소.
이렇게 해서 재심을 받게 되었다.

2. 47년만에 무죄 선고를 받다.
2019년 6월 19일 광주지방법원 해남지원에 출석하여 재심을 받았다. 참으로 간략한 재판이었다.
재판장이 사건을 개요하고 군사재판의 요체였던 포고령이 위헌이므로 원천무효가 되었다고 판시하고 검사에게 구형을 요청하였다. 검사는 무죄를 구형하였고,  관선 변호사는 할 말이 없다고 하였다.
재판장은 나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비록 늙어 지팡이를 짚고 왔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아직도 살아 있다. 법관 여러분께 간곡히 부탁한다. 다시는 불법한 집단에게 무릎 꿇치 말고 이 땅에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무리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추상같은 법집행을 하여 민주헌정을 지켜 내는 용사가 되어 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한다고 하였다.
재판장은 곧 무죄를 선고하였다. 실로 47년민에 받은 무죄 판결이었다.

3. 47년 전에 받았던 군사재판
①1972년 10월 17일 평온하던 세상에 갑짜기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군인들이 탱크를 몰고 중앙청을 점령하고 국회를 해산하고 이튼날 전국대학에 긴급 휴교령을 내렸다. 10월 18일 마지막 수업을 하고 학교는 문을 닫아야 했다. 기숙사까지도 폐쇄되었다. 당시 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 2년에 재학중 이었다.
②해남에서 체포되다.
서울에 있지 못하고 고향 해남으로 11월 초에 귀향하였고 11월 8일 수요저녁 해남군 삼산면 화내교회에서 설교하고 다음날 마을회관 앞에 부착된 대통령 담화문을 읽어 보고 모여있는 마을 사람 앞에서 7년제 대의원 투표의 대통령제가 연임에 관한 조항이 없으니 이게 바로 총통제 개헌이라고 설명하였는데, 누군가가 신고하여 이를 저지하는 여자 집사님(71세)도 함께 연행되었다.
해남경찰서에서 1박하고 다음 날에 손에 수갑을 채우고 칼빈소총을 내 등에 겨눈체 짚차에 실려 광주 전남북 계엄사무소로 인계되여 군사재판을 받게되었다.
③군사재판의 내용
재판장은 대령이었고 군 법무사(판사)와 감찰관(검사) 감찰장교 등이 배석하여 하는 재판이었다. 전날 군 검사와 5시간 여의 심문과 나의 까다로운 이의 신청으로 실랑이를 벌리다가 간단한 몇 가지로 기소하여 법정에 서게 되었다. 재판정에서 누가 재판관이고 누가 피고인일지 모르는 공방이 벌어졌다. 나는 성경과 신앙에 입각한 애국론을 거론하였고 선지자들의 민권사상을 주장하였다.
판사와 검사에게 당신들은 민주대학 교육을 받고 고시에 합격하여 판·검사가 된 지성인들로서 불법계엄령과 헌정중단과 유신헌법이 양심 앞에 합당한가를 질문하였다.

4. 최후 진술과 선고
나는 재판장을 향하여 가볍게 인사하고 나 자신의 국가관을 간략히 피력한 후 한가지 부탁을 드렸다. 나를 연행하는 경찰관과 다투다가 함께 붙잡혀온 연로한 윤감동 집사님은 애국자이다. 두 아들이 6·25사변 때 군대에 입대하여 전사한 아픔을 가진 어머니며 진짜 죄가 없는 분이므로 석방하여 주실 것을 요청하였다. 그 때 법무사가 내게 질문하였다. 윤 집사님은 진짜 죄가 없다고 했는데 그럼 당신은 죄가 있소? 이 질문을 받고 대답하기가 난처하여졌다. 지금까지 무죄라고 싸워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싱긋 웃어보이고 대답하였다.
나는 죄가 엄청 많은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였더니 갑작히 재판장이 크게 웃고 법무사, 검찰관 배심 장교들이 화기가 돌았다. 말 한 마디에 분위기가 확 바꿔져버렸다. 그리고 선고하였다. 윤감동 피고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나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나머지 7명에게는 징역 3년형이 선고되었고 나는 그 날로 풀려나게 되었다.  
수감된지 50일 만이었다. 법무사는 내게 당부하였다. 당신은 나가면 또 잡혀올 사람이다. 제발 입조심하고 신학공부에 열심하라는  충고였다.
5. 문교부 장관의 퇴학명령서와 중앙정보부 요원의 감시
1973년 3월 학교문이 열리게 되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계엄 중 있었던 일들은 김의환 교수로부터 들어 알게 되었다. 11월 중순쯤 권오병 문교부 장관이 전국 대학총·학장 회의를 소집하였고,  그 자리에서 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된 명단을 낭독시켰다.
연세대 ○○○, 총신대 박현 등 13명을  호명하고 총·학장에게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였다 한다.  그후 학교로 나를 퇴학처분하라는 장관의 명령서가 왔고, 교수회의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한다. 일부 교수들은 장관의 명령을 따를 수 밖에 없다고 하였고, 또 다른 교수들은 강력히 반대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용기가 없고 겁이 많아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학생은 용기가 있어 말하였고 선지자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선지자 학생을 어떻게 짜른단 말인가? 최의원 교수, 김의환 교수, 김득룡 교수님들께 감사말씀 드린다(이제 모두, 고인이 되셨지만) 고마운 스승님들이었다.
나는 이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남은 1년 말썽 피우지 않고 조용히 보냈다. 3월 개강 이후 중앙정보부 요원 1명이 매일 학교로 출근하였다. 노량진경찰서 형사도 매일 출근하였다.
현관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학생들을 감시하였다. 즉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강의 끝나면 녹색 운동복 입고 대학부 학생들과 축구를 하였다. 감시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시작한 축구를 60세가 넘도록 계속하였다. 졸업 후 결혼하고 목회지로 떠났다. 그러나 그때 부터 본격적인 감시가 시작되었다. 박정희가 죽고 나서도 전두환 시대가 끝날 때까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시를 받고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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