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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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구포에서 출생
노진현목사(1908. 8. 28~1998. 10. 15)는 부산 구포에서 아버지 노원필과 어머니 장소개씨 사이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구포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동명학교(동래고보 전신)에 진학하였으나 당시 이 학교는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면학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상경(上京)하였다.
그가 소학교를 마치고 동래고보를 다닐 때 친구를 따라 구포교회에 나가게 된 것이 교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서울에서의 노진현은 몇군대 학교를 알아보다가 중동학교(中東學校)에 입학 허락을 받게 되어 중단되었던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때 마침 보성학교(普成學校)에 다니는 고향 친구를 만나 종로 YMCA 뒤에 있는 중앙감리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그 교회에서 고향 구포(口浦)소학교 여교사로 있었던 분을 만나게 되어 계속 그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방학이 되어 귀향하면 옛날 다니던 구포교회에 출석하곤 하였다.  노진현은 구포교회에서 학습을 받았다.
그를 집례한 목사는 호주장로회 소속 예원배(Rev.A.C. Wright 芮元培)선교사였다. 예원배 선교사는 1912년 내한해 1942년까지 30년간 주로 마산과 진주 그리고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일제 간섭과 핍박이 극에 달하자 다른 선교사들은 고국으로 혹은 추방당하였음에도 예목사 부부는 다른 3명의 선교사와 함께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다가 강제연금 끝에 출국당한 선교사였다.

주기철목사로부터 세례받음
세례(洗禮)는 구포교회에서 주기철목사로부터 받았다. 주목사는 1926년 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12월에 부산초량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여 처녀목회를 시작했는데 당년 30세의 청년목사였다. 주목사는 노진현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구포교회의 당회장을 맡았음으로 종종 사무행정을 집행 하거나 성례식 거행을 목적으로 구포교회에 와서 설교를 하게 되어 그의 설교를 가끔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노진현 목사는 생시에 자기가 순교자 주기철목사로부터 세례 받은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지인들에게 이야기 하곤하였다.
노진현이 세례를 받은 시기는 주기철목사가 초량교회에 부임한 후 구포교회 당회장을 맡은 1927년 1월부터 노진현이 진주 광림학교 교사로 부임하기 전까지로 보는데 이 당시에 있었던 비화가 하나 있다. 잘 몰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워낙 사람이 없어서인지는 모르나, 노진현은 학습교인으로 교회의 집사가 되었다고 한다. 주목사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았으나 세례를 베푼 후 집사직을 계속토록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노진현은 장질부사에 걸렸다. 당시 장질부사는 염병이라고 해서 친척들도 외면하는 고질병이었다. 정진희 영수가 은행업무를 마치고 귀가 길에 자주 들려 간절히 기도해 주어 죽을 줄 알았던 노진현 청년에게 큰 감동이 되었다. 병세가 호전되어 몸을 추수릴만큼 회복되었을 때 진주에 있는 광림학교(廣林學校)로부터 교사로 부임해 달라는 초청장이 왔다. 이 학교는 호주장로회 선교부에서 1906년에 세워 운영해 오고 있는 소학교로써 학생이 100여명, 교사가 7~8명 가량 되었다. 이 일을 정진회 영수를 찾아가 의논했더니 그에게 목사될 꿈이 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음으로 그곳은 미션스쿨이니 신학교에 갈 수 있는 길도 열릴 수 있을지 모르니 진주로 갈 것을 권했다. 그래서 노진현은 광림소학교에 부임하였다. 부임하고 보니  그 학교 교장이 자신에게 학습을 준 예원배 선교사였고 노집사는 광림학교에서 동료교원 중 훗날 출옥성도로 고신 교단을 세운 한상동(韓尙東)을 만났다.
당시 한상동은 노진현보다 3세 연상이었고 기혼자였다. 그후 노진현과 한상동은 일본 고배(神戶)와 한국 평양에서 각각 신학공부를 하였고, 부산이 고향인 이들은 광복 후에도 부산에서 목회를 하며 때로는 동료로, 때론 서로 이견(異見)을 보이면서도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역사를 엮어 갔다(이상규, 한상동과 그의 시대 p.20~21 참조).

광림학교시절 황봉예와 결혼
노진현은 광림학교에 재직하는 1928년 10월에 역시 미션스쿨인 진주 시온여학교 교사로 와 있는 황봉애를 만나 결혼하였다. 황봉애 사모는 부산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에 가서 고배여자신학교를 졸업한 인텔리였다.
그 즈음 광림학교는 신사참배를 완강히 거부하여 폐교의 위기에 처해 있어 노진현은 예원배 교장에게 일본에 가서 신학을 공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의 소개로 일본 고베에 있는 중앙신학교(中央神學校)의 입학 허락을 받아 도일하게 되었고, 재직했던 광림학교는 1929년 폐교의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고베에 있는 중앙신학교는 보수적인 칼빈주의 신학사상에 기초한 5년제 학교로 1년에 10명 이상을 받지 아니한 고로 전교생 수가 50명을 초과하지 않았다.
전원이 기숙사생활을 하되 크게 규제 하지는 않았다. 이 학교출신으로 일본과 한국에서 유력하게 일한 지도자들이 많다. 국제적 지명도가 있는 가가와 도요히꼬가 있고, 한국인으로써는 김우현 전필순 김치선 유호준 김만제 김광현 한명동인데 거의 장기목회자로 혹은 각자 속한 교단의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노진현은 특히 풀턴 교장의 조직신학과 그의 신앙인격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가 4학년일 때 학생들이 매년 2회씩 실시하는 정기 건강검진에서 폐가 좋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교수회에서 집에 돌아가 1년 쉬었다가 오도록 결정했으나 교장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려 계속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단히 어려울 때 카나다 선교사 영재형(Rev. L.L.Young) 목사가 그를 찾아와 도움을 주었다. 영재형목사는 노진현을 독일인이 운영하고 있는 병원에 맡겨두어 치료받게 한 후 치료가 끝난 다음부터는 선교사 서기일을 보게 하여 졸업할 시에는 비교적 생활이 안정되었다고 회고했다.

일본 고배 중앙신학교에 유학
영목사는 원래 함경도 지역에서 선교했으나 카나다 장로교회가 타교파와 연합하게 됨으로 합류를 거부하고 일본으로 건너와 선교하고 있었는데 대한신학교 설립자 김치선목사의 양 아버지로도 알려진 분이다.
노현진목사의 목회사역에 대해 고찰해 보므로 그의 지도자상을 살펴보자.
노진현목사는 일본에서 10년동안 3개 교회를 담임한 적이 있고, 조국 대한민국에서 1975년 은퇴하기까지 30년간 승리로운 목회사역과 교정(敎政)의 일생을 감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첫 사역으로 신학교 재학 중 와까야마 교회를 맡아 전도사로 봉사하였고, 후에는 교토(京都) 한국인 교회로 임지를 옮겼는데 이는 고베 중앙신학교를 졸업한 대구출신 최경학목사의 임지와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노진현목사는 교토로 목회지를 옮긴지 6개월이 지난 1935년 6월에 목사 임직을 받았다. 목사 안수는 잠시 귀국했을 때 경남노회에서 주기철목사의 안수로 목사장립을 받게 되어 더욱 감격적이었다.
일본에서의 목회가 평탄치는 못했다. 일본 현지임에도 조선인과 조선인 교회에 대한 탄압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교회를 건축하면서도 헌당식이나 입당허락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고 노목사는 말했다.
그후 노목사는 오사까(大阪) 니시나리 한인 신앙공동체인 대판서성교회(大阪西成敎會)에 부임하며 귀국하기까지 7년간 사역하였다. 이곳에 있을 때는 일본말로 사회하고 일본말로 설교하라는 압력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수상한 사람이 들어오면 일본말로 하고 없으면 조선말로 설교했다.

부산 YMCA 재건사업
1945년 6월 태평양전쟁에서 미군기의 공습이 강화되고 일본이 패색이 짙어갈 무렵 노진현목사는 일본생활을 정리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귀국 3개월만에 8·15 광복을 부산에서 맞이하였다. 초량교회 양성봉장로의 요청으로 청년의식의 중요성을 인식 YMCA 재건사업에 양장로는 회장으로 노목사가 총무로 Y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1945년 12월 2일 첫주일에 노목사는 부산중앙교회를 설립했다. 감리교회였던 대청동의 교회를 그 교회목사로부터 안수받아 교회를 시작했다. 노목사는 이 중앙교회에서 평생목회의 과정을 영광스럽게 마치게 되었다.
이 날은 서울에서 한경직목사가 베다니교회를 영락교회로, 송창근목사가 바울교회를 성암교회로, 김재준목사가 야고보교회를 경동교회로 바꾼 역사적인 인연이 있는 날이기도 하다(장차남 회고록, 소명과 순명 2015. p.788~798참조).
그의 목회를 요약하면 ①신학적 바탕 위에 설교하라. ②모든 목사는 다 부목사(주님의)이다 ③예절과 유머를 겸비하라. ④기도와 심방을 게을리 하지 말라 ⑤일치와 화합하는 일에 투신하라.
노진현목사가 총회장에 피선된 것은  1959년 9월 제44회 대전총회의 분리사건을 예견이나 한듯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던 1958년 9월 25일 서울 영락교회에서였다.
총회장 당시 결의된 중요 안건들을 보면 ①지금까지 기독교교육협회에서 발행된 주일공과를 총회이름으로 개편, 아동들의 연령계층에 맞게끔 계단식공과 발행을 정책적으로 결의한 것, ②계류중이었던 경기노회를 경기노회와 한남노회로 분립하기로 결의, ③월남에 선교사 파견하는 안건 결정, ④각 신학교수들은 3년마다 해 이사회에 서약하게 하는 것 등이다.
노진현목사의 목회와 교정(敎政)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증경총회장 장차남목사는 그는 목회자이면서 뛰어난 교정가(敎政家)였다고 한마디로 결론짓고 있다(장차남 회고록 소명과 순명 p.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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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제43회 총회장 노진현(盧震鉉)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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