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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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심리학의 입장에서 신도들의 신앙발달이나 도덕발달 등에서 나타나는 법칙을 보면, 발달단계에서는 결코 월반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발달단계는 점진적인 발달 과정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달단계의 특성상, 각 사람의 인격발달 단계의 처한 위치가 저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개개인의 특성을 존중해야 하고, 인격적으로 만나지기 위해서도 획일적으로 수련생들을 다뤄서는 더더욱 아니 될 것이다.
우리 교계는 여름철이 다가오면 심신 수련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다양하게 구성되고, 교회들이나 단체별로 저마다 진행되어지는데, 진행 단체의 구성원들의 관심은 모두다, 행사에 참여한 수련생들로 하여금 지금의 현재 상태에서 보다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도록 자신을 돌아보는 깊은 성찰과, 성찰로 인해서 깨닫게 된 더 나은 가치관의 발견, 그 새롭게 발견된 가치관의 의미와, 완성을 향해서 새롭게 나아가게 하는 동기를 부여하고, 새로운 동력을 얻게 하는데 있을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가 사람들에게 주려하는 선물들이 그의 서신들에서 발견되는데, 아주 명백하게 나타나는 선물들은 세 가지다. 하나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고, 또 하나는 성령의 은사들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과 은사가 역학적으로 작용해서 개개인과 교회 공동체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성과인 성령의 열매들이다.
이 모두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실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에 모두 내포되어 있다.
신도들의 신앙발달 단계가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체험이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도들 중에 어떤 이는 치유를 받지 않으면 더 이상의 단계로 나갈 수 없는 고착 상태에 머무른 이도 있을 것이고, 어떤 이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벗어나질 못하여서 그리스도마저도 자신의 아집과 욕구의 도구로 이용되는 어둠에 머무른 상태로 있을 수 있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이기적인 껍데기를 깨트리고 과감하게 새로운 광명의 세계를 맞이하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신도들이 저마다 성장하기 위해서, 개개인이 자숙하는 시간과 공간을 향해서 나아간다면, 마땅히 환대를 받아야 할 것이리라. 그런데 우리 개개인이 저마다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려 해도, 우리가 처한 사회적 문화적인 수준이, 개개인의 변화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수용할 만큼 그릇을 크게 갖추질 못하였다면, 사회적 구성원의 수준은 전체적으로 그들을 구성한 사회적 문화적인 틀을 넘어서질 못한다. 종교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종교는 세상에서 그 어느 것 보다도 보수적이고 경직되어 있어서, 그 패러다임이 넉넉하질 못하고, 사회적 변화에 적응력도 게으르기 때문에, 변화하려는 세상을 억압하려고 할 뿐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역기능적인 방해기제로 전락될 수 있다. 그 병폐적인 사례들이 중세기의 종교 활동에서 충분하고도 확실하게 나타난 바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인지해야 할 것은, 교회가 새로운 틀과 새 부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 구성원들은 모두다 이 낡은 부대를 터트리고서 빠져 나가 버릴 것이다. 이미 2,000년 이전에, 예수께서 건물 성전을 헐고, 삼일 만에 새로운 성전을 건축하지 아니하셨던가? 예수께서는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우리에게 부어주심으로서, 이제는 우리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고, 성령이 거주하시는 거룩한 처소가 되어 진 것이다. 이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 이전과 뚜렷하게 달랐다. 성령이 한 사람에게만 임하신 것이 아니라 구성원 모두에게, 개개인에게 다양하게 부어 진 것이다.
교계의 지도자들은 이제 교인들 하나하나가 모두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설 수 있도록 하는 마음가짐부터 추슬러야 할 때이다. 우리 교회가, 신도들이 왕 같은 제사장이 될까 보아서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만 있다면, 우리 영적 지도자로 일컫는 이들은 옛날 제후들과 왕들이 버림을 받고 처형되었듯이, 그렇게 되어 질 확률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TV매체에서 서비스를 하는 일은 재고되고, 본을 보이는 프로그램으로 재편성되어야 할 것이다.
아놀드 토인비가 유니온신학교에서 강연한 것 같이, 오늘의 기독교 문제는 설교자들의 부재가 아닌, 순교자들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울은 성령을 소멸하질 아니하고 고린도교회를 효율성 있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재구성하였다. 더 나아가서는, 말로서는 다 가르칠 수 없는, 신앙의 본을 꾸준히 보임으로써 거룩한 신부로서의 교회를 세울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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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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