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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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교회 성가대에 들어가면서부터 표정 연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는 거냐고요? 찬양 가사 내용에 맞추어 슬프고 기쁜 감정을 적시適時에 표현하는 것입니다. 몇 년 동안 하다 보니 이제는 표현이 자연스러워졌지만, 처음엔 어색하였나 봅니다. 나의 표정 연기에 은혜 받은 교인도 있는 반면에, 또라이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한 이도 있다고 지인으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표정 연기를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1980년대에 Y대 종교음악과에서 성가 지휘 강습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C교수의 “찬양의 마무리는 표정에 있다”는 말이 나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그 강의 덕분에 교회에서 대예배 헌금송을 부르면서 마이클 잭슨의 다리를 떠는 춤 흉내를 내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가해 오는 압력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지휘자는 두 눈 가진 원숭이가 정상이지만 한 눈 가진 원숭이들 사이에서는 바보가 되는 만큼, 혼자서 유별나게 표정 연기를 하는 것도 뭔가 튀어 보인다는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고민도 하였습니다. 그냥 남들처럼 무표정하게 노래 부를까, 아니면 나의 장기를 살려 표정 연기를 계속할까? 그렇게 하여 얻은 결론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찬양을 하면 표정 연기를 하든, 안 하든 상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거울 앞에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연습을 하였습니다. 희로애락의 감정에 따른 표정을 제대로 하는 것도 만만찮았습니다. 잘못하면 교인들 앞에서 개그처럼 보여 예배를 망칠 수도 있었습니다. 이는 괜히 튀는 행동을 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예뻐 보이려면 어떤 표정을 지어 보일까를 나름대로 연구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정성과 마음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의 표정 연기는 연단의 과정을 더해 갔습니다.
표정 연기를 통하여 얻은 것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라면 내 앞에 닥친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까?’ 하고 주님 편에서 나에게 주어진 상황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오늘 K도서관에 이력서를 제출할까요, 말까요? 오전에 수필을 쓸까요, 설거지를 할까요? 오후에 J협회 총회에 참석할까요, 말까요? 이렇게 하다 보니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옆에 계신 주님과 같이, 내 옆에 주님이 동행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이 동행하시니, 행동이 조심스럽고 신중하여졌습니다.
 ‘하나님, 저 예뻐요?’ 이는 평상시 내가 하나님께 던지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맞게 처신하기 위해서 영원 위에 흔적을 남기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가족과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삶, 인류를 감동시키는 글을 창조하는 작업 등을 생각하니 삶이 즐겁고 경쾌하였습니다. 글을 쓸 때에도, 헬스장에 갈 때에도, 인터넷 바둑을 둘 때에도 즐기면서 하게 되었습니다. 식탁 앞에서 아내와 아들과 대화하는 시간도 많아졌습니다.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예수님은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몸소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제단 위에 올려진 양과 같이, 온 인류를 위해서 희생양이 되셨습니다. 이 때문에 인간은 죄로 인하여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사실을 믿어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은 주님이 나에게 주신 행복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이 함께 하시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성령이 우리와 동행함으로 죄짓는 행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탄을 이길 힘을 주님이 주시기 때문이지요.
나는 한때 여자들의 유혹을 이겨내기가 어려운 적이 많았습니다. 젊고 아름다운 미모로 다가오는 여성을 싫어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한때는 여류 문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즐겁게 보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하시면서 그보다 더 즐거운 것이 찬양하고, 기도하며 말씀 보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동역자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더 보람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가족과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름다운 멋임도 알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와 아픈 사람이 많았던 이스라엘, 당시 가장 황폐한 땅이었던 스블론과 납달리 땅에 춥고 삭막한 마굿간에 나셔서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에게 함께 하신 주님이였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형벌을 피하지 않고, 다시 사신 후에도 상심해 있던 제자들을 찾아가 위로하신 주님이셨습니다. 주님은 민중으로부터 외면받던 세리 직업을 가진 삭개오를 찾아가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애통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분단의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메시아로 걸어오십니다. 주여! 어서 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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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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