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96
2018/08/31 16:14 입력
트위터로 기사전송 페이스북으로 기사전송
여호와의 선함이 나를 따르리니(시편 23:6)
1-1.jpg
 다윗은 그의 시 23편을 여호와의 선함과 인애하심이 자기를 따르실 것이기 때문에 그는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토록 거할 것이라고 그 끝을 맺고 있다. 여호와의 선함과 인자하심이 그를 인도하시는 것이 아나라 그를 따른다는 것이다.
히브리어 “일대푸니”라는 말은 “라다프”는 “추격하다”(pursue)의 미완료형으로 전쟁용어이다. 전투에서 도망가는 패잔병들을 추격하다는 의미로 많이 쓰이고 있다. 따라서 자칫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도망가는 다윗을 붙잡기 위하여 추격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 문맥을 살펴보면 그러한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뒤를 따라가며 보살피신다는 의미가 더 맞을 것 같다. 이 이미지는 우리가 양치는 목자들의 활동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목자들이 아침에 양들을 몰고 초장을 향하여 나갈 때는  대개 양들 앞서 나간다. 그러나 저녁이면 양들이 앞서고 목자와 목자의 개가 뒤따르며 양들이 곁길로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양들을 좌우로 그 방향을 조종하여 집에 도착하여 우리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6절은 귀향 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윗은 그의 말년을 생각하며, 그의 귀향길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호와께서 자기를 곁길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그의 선함과 인애하심으로 그를 여호와의 집으로 인도하셔서, 그가 영원토록 여호와의 집에서 거하는 모습을 마음에 그려보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이 땅에서 살다가 때가 되면 이 땅에 묻힘으로 그의 인생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가야 할 곳은 하나님의 집이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신앙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종말적인 신앙은 다윗뿐만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가진 소망이고 신앙이었다. 아브라함은 본향을 생각하고 찾았으며, 만일에 그가 떠나 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이지만 그는 하늘에 있는 더 나은 곳을 사모하였기 때문에 돌아가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히 11:13-1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출해내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순히 액면 그대로의 그곳이 가나안 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모세가 쓴 “바다의 노래”(출 15장)를 보면 “주님의 인애로 주께서 구원하신 백성을 이끌어 주시고, 주님의 힘으로 그들을 주님의 거룩한 처소로 인도하십니다.”(출 15:13)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았고, 방금 홍해를 건넌 상황인데, 모세는 여호와께서 자기들을 주님의 거룩한 처소로 인도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가는 곳이 가나안 땅이 아니라 “주님의 거룩한 처소”이다. 히브리어 “나바”라는 말은 “거처”(dwelling place), 특히 유목민들이나 양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가,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거하며 양들을 먹이다가 다시 자기 본 집으로 돌아올 때의 집을 일컫는 말이다. 출 15:17에도 “주께서 주님의 백성을 인도하여 주님의 유업의 산에 심으실 것입니다. 여호와시여, 그 처소는 주께서 거하시려고 만드신 곳입니다. 오 주님, 그 성소를 주님의 손으로 만드셨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 주님의 유업의 산이라는 말은 주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유업(유산)으로 주실 산이라는 뜻이고, 바로 주께서 거하시려고 만드신 곳이란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내 산으로 데려와 언약을 맺은 후,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그가 그의 백성들 가운데 거할 성막을 만들라고 명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두신 궁극적인 뜻은 그의 백성과 동거하는 것이고, 이스라엘도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집이 그들의 최종적인 목적지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시편기자들은 항상 주님이 계신 곳과 주님을 사모하고 살았다. 시편 26:8;  27:4;  84:1-2 등은 시편 저자들이 다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거처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거하기를 사모하며 하나님과 함께 거하기를 바라며 쓴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 신자들의 궁극적인 소망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 그보다 하나님 그 자신이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애하심이 무엇인가? 먼저 선이란 무엇인까? 히브리어 “톱”()이라는 말은 “좋다”(good), “즐겁다”(joyous), “적절하다”(suitable), “바람직하다”(desireable)등 그 사용 범위가 다양하고 넓은 말이다. 윤리적인 면에서 사람의 성품을 가리켜 “선하다” ‘착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이 어휘는 한 마디로 그 의미를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그 어휘가 사용되는 그 문맥을 살펴 그 의미를 추정하는 수밖에 없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예를 살펴보면 성경적으로 가장 보편적인 의미가 되지 않을까 싶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손 오그라진 자를 고치는가 엿보고 있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목숨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옳으나?“ 하고 물은 적이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선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 악은 목숨을 죽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선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그 생명이 육신의 생명이든, 영혼의 생명이든 그 생명을 살리는 일이 선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살리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한 젊은이가 그를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영생의 길을 묻자,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막 10:17, 18). 하나님 한 분 외에 사람을 살리는 자가 없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심지어 자신에게도 선하다는 말을 피하시고, 하나님 한 분만이 선하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한 분 외에서는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선하신 것이다. 선이란 살리는 것이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지고의 선이다.  하나님이 지고의 선이시다. 다윗은 그동안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그 때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 다윗은 이것을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그를 지켜 주셨다고 믿는 것이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기를 살렸고, 자기를 지켜주셨다고 믿는 것이다.
인애라는 말은 개역성경에서 “인자”라고 번역하고 있다. 히브리어 “헤세드”()라는 말은 “변함없는 사랑” “한량없는 사랑” “faithful love” “steadfast love”라는 말이다. 이 말은 많은 경우에 언약적 문맥 속에서 쓰이는 말이기 때문에 “언약적 사랑”(covenantal love)이라고도 지칭하는 자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그의 반역적이고 배신적인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 사랑을 인애, 곧 “헤세드”()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의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는데(요한 13:1), 이때 “아가파오”라는 말을 쓰고 있다. 신약적인 말로 하자면 “헤세드”가 바로 “아가페”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한량없이 사랑하셨다. 그러나 그의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났다. 이스라엘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할 수 없는 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그를 팔아먹으려고 자리를 뜨는 유다에게도 떡을 떼 주셨다. 그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신 것이다. 배신의 순간까지도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셨다. 그래서 그의 사랑은 변함없는 사랑이다. 사람은 변할 지라도 하나님은 변하시지 않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도 없고, 끝도 없다. 이것이 바로 헤세드이고 아가페이다.
다윗은 이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뒤를 따라 다녔고, 다닐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애하심, 여호와의 선하심과 여호와의 변함없는 사랑이 자기를 지키시고 자기를 곁길로 가지 못하도록 자기 발걸음을 지켜주시리라고 믿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은 여호와께서 계신 그 여호와의 집에 그가 이르게 하실 것임을 확신하며, 그때 그는 여호와와 더불어 영원히 함께 살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교제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epnnews@empas.com
교회연합신문(www.ecumenicalpress.co.kr) - copyright ⓒ 교회연합신문.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화제의 포토

화제의 포토더보기

  • 회사소개
  • 광고안내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회원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
  • 교회연합신문 (http://www.ecumenicalpress.co.kr)  |  발행인 : 강춘오  |  설립일:1991년 11월 16일
    | 사업자:206-19-64905  | 03127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16길 73-10  |  대표전화 : 02-747-1490              
      Copyright ⓒ  교회연합신문 All right reserved.
    교회연합신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