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1.jpg
최근 들어 한 탈렌트가 지인과 관련된 음란물을 카톡방에 올려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이는 관련 여성에게 수치심을 일으키게 할 뿐만 아니라, 그의 윤리관이 올바르지 못함을 잘 나타내는 사례다. 우리 사회에서 여러 사람들이 야동에 대한 관음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없지 않다. 이는 우리 사회에 성 윤리관이 바르게 정착되어 있지 않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잘못된 사례를 들춰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건전한 인간미를 발굴하는 일도 필요한 것 같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나온다. 그 중에 사마리아 땅에서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에 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강도를 당해 쓰러져 있는 유대인을 보고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다. 그러나 그 당시 유대인이 천시하던 사마리아인은 그를 여관에 데려가 치료하고 그의 숙박비까지 내 주고 간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시키기 위한 비유다. 하나님의 그 자녀에 대한 사랑이 원관념에 해당한다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위는 보조 관념이다. 율법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아름다운 마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그 자녀에 대한 사랑을 유추해 볼 수가 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땅에서 비유를 많이 사용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사마리아인에게 구약시대부터 내려온 역사나 율법이 굳어진 언어를 사용하면, 그들이 이해를 못하거나 식상해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 같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과 그 자녀를 화목하게 하기 위해 희생양 역할을 해야 하고, 이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사랑에 바탕한다는 말을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말해 봐야 설득력이 없다고 보신 것 같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의 일상에서 흔히 보고 들을 수 있는 이야기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그것이다. 하나님의 인류 구속에 대한 원대하신 계획을 그들에게 어떻게 이해시키겠는가.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유대인을 도왔듯이, 사랑이란 상대방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을 몸소 행하는 것임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요즘에는 사회에 다양한 문화 양상이 나타나면서, 교회에서도 기존의 경건함만으로는 교인들이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도록 계도하는 데 한계가 없지 않다. 물론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절대성을 부각시키면서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도 윤리관 확립에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경건한 마음을 가지다가도, 네비게이션이 작동하고, 자율 주행 자동차가 다니고, 인공 지능이 발달한 세상에 나가면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는 교인이 없지 않다. 예배당에서는 건전한 마음을 가지다가도 교회 밖에서는 죄를 짓는 양가 감정을 가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는 성직자들이 교회 안에서 교인들의 경건함만 보고 교회 밖에서의 이중적인 생활을 모르는 척하는 데서 나온 역설적인 현상이다. 그러므로 교회 밖의 일상에서도 신자로서의 경건함과 멋을 유지할 수 있는 로드맵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신자가 일상에서도 교회에서와 같은 경건함을 표현할 수 있는 멋을 연출하는 것도 그 한 방법이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어디에도 임재하신다는 것을, 머리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일상에서 나타내는 신자로서의 멋을 교회 안에서 제시하여도 좋을 것이다.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면서 배꼽을 드러내 놓고 춤을 추었듯이, 하나님 앞에서 율법에 얽매인 데서 벗어나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어린 아이가 부모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듯이, 전지전능한 하나님 앞에서 예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생각해 낸 것이 예배 시간에 찬양을 부르며 마이클 잭슨의 「빌리진」에 나오는 로봇춤을 추어 보는 것이 어떤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의견을 내가 다니는 교회의 장로에게 내놓았더니, ‘추수 감사 찬양제’ 시간에 한 번 시도해 보란다.
팔백여 명이 들어가는 예배당에 교인들이 자리를 잡고 목사의 설교가 짤막하게 끝나자 기관별로 찬양을 하는 대회가 열렸다. 물론 이 대회에는 등수를 매기지 않고, 참가한 모든 기관이 상품을 받는 축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일 먼저 순교한 제자는?”
이렇게 퀴즈가 진행되고 예쁘게 포장된 선물이 정답을 맞춘 자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주일학교 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기관별로 찬양이 진행되었다. 나의 차례는 일곱 번째였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주만 바라볼지라」가사 중 일부). 나는 이 찬양을 부르면서 마이클 잭슨의 「빌리진」에 나오는 로봇춤을 추었다. 교인들이 눈을 휘둥그레하고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날 찬양제는 멋있었다.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기독교인의 행복론 - 104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