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16
2019/08/21 16:41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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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생겨난 교파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기본으로 로마교회로부터 분리


루터교
(Lutheran Church)
중세의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비텐베르그에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95개조로 된 공개 신학토론을 제기한데서 비롯되었다. 당시의 독일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권 아래 있었다.
마르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 아이슬레벤에서 광부인 한스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는 가톨릭교회의 수도사였다가 사제 서품을 받고 비텐베르그 대학의 신학교수로서 유럽 역사와 세계사를 바꾼 인물이다.

독일 비텐베르그의 마르틴 루터
중세 비텐베르그 대학에는 금요일마다 신학자들이 모여 이슈가 된 신학문제를 놓고 토론하는 관례가 있었다. 당시 교회의 신학적 이슈는 ‘면죄부’였다. 1517년 10월 31일 정오경 비텐베르그 성(城)교회 정문에 라틴어로 쓰여진 장문의 논쟁문이 나붙었다. 마르틴 루터와 그의 동료 요한 쉬나이더(Johann Schneider)가 내붙인 ‘95개 논제’였다. 비텐베르그 대학 부속 교회당으로 사용되는 그곳에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루터는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을 초청해 로마 가톨릭교회에 고용된 면죄부 장사꾼들이 팔고 다니는 면죄부에 대해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고자 했을 뿐이었다.
루터는 95개조에서 다음과 같이 로마교회의 비신학적, 비신앙적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어, “죄나 형벌의 사면은 죄를 깊이 뉘우치고 회개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교황의 면죄증으로 죄를 없이 할 수는 없다. 교황은 다만 자기가 세상에서 부과한 형벌을 방면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왜냐면 예수님은 내가 하늘에서 매는 것을 너희가 땅에서 풀어도 좋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논쟁의 확대
이상과 같은 루터의 논박은 교황청의 오랜 착취에 불만을 품고 있던 독일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리고 루터의 논박은 죄나 형벌의 사면을 위한 연옥에 대한 교황의 권력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게시물이 누군가에 의해 인쇄되어 배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는 마침 구텐베르그의 인쇄술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논쟁의 확대는 95개 조에 격분한 교황청의 면죄부 장사꾼 테첼(Tetzel)이 106개 조에 달하는 반론을 전개하면서부터이다. 여기에 또 요한 에크(Johann Eck)라는 잉골쉬타드 신학교수도 루터를 비난하는데 가담했다. 루터는 1518년 4월 25일 하이델베르그에 있는 어거스틴파 수도사들에게 논쟁을 위한 모임을 통고하고, 거기에서 바울과 어거스틴에게서 계승된 신학적 논제들에 대해 논쟁했다. 루터는 하이델베르그 성직자들 앞에서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교황청은 루터를 로마로 소환했다.
루터가 희생되는 것을 원치않던 독일 작센주 프레드릭 선제후는 1518년 10월에 교황청 대사인 추기경 카예타누스(000)를 아우그스부르크로 불러 루터의 주장을 듣게 했으나 일치점을 찾지 못했다. 카예타누스는 루터에게 그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으나 루터는 이를 거절했다. 이어 1519년 1월에는 교황청 대사 밀티츠(Karl von Miltitz)가 알덴부르크에 있는 프레드릭 선제후의 전속사제 겸 비서인 슈팔라틴의 집에서 루터와 만났다. 그러나 루터를 회유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또 루터는 1519년 6월 27일부터 7월 15일까지 라이프치히에서 에크와 논쟁했다. 에크는 교황이 베드로의 계승자이며, 신적 권리에 의해 그리스도의 대리자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루터는 그러한 주장은 성경에도, 초대교회에도, 니케아 공의회에도 반대되는 것이며, 단지 로마 교황들의 형식적인 교서들에 근거할 뿐이라고 반박했다. 이에 에크는 루터를 체코 보헤미야의 얀 후스와 같은 이단이라고 비난했다.
라이프치히 논쟁이 무위로 돌아가자 교황의 사절들은 루터가 매우 고집이 세고 위험스러운 이단이라고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교황은 1520년 6월 15일 루터를 정죄하고 그의 저술들을 불태우라는 파문 교서를 발표했다.
“오,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주의 원통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옵소서. 주의 대적을 잊지 마소서, 당신 자신 때문에 탄원하나이다. 여우가 당신의 포도원을 황폐케 하고, 숲속의 돼지가 포도원을 피폐케 하고, 사나운 들짐승들이 그것을 탐식하나이다.”
이 파문교서는 1520년 10월 3일 에크를 통해 비텐베르그 대학 총장에게 보내졌다. 그러나 루터는 물러서지 않았다. 루터는 그 해 12월 10일 오전 9시 교수들과 학생들 앞에서 교황의 이 파문교서와 교황의 서적들, 교황의 문서들, 교회법전을 모두 불태웠다.
21살의 독일 황제 카를 5세는 1521년 1월 28일 다시 한번 종교개혁으로 갈라진 상처를 회복하려고 시도했다. 보름스에 소집된 제국의회에는 프로테스탄트 측과 로마교회 측 지도자들이 같이 초청되었다. 루터는 소환되어 그의 책과 주장을 취소할 것을 종용받았으나, 끝까지 “나는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다”고 밝히고, “여기 내가 서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이라고 토로했다.

루터와 농민전쟁
루터의 종교개혁은 1524과 1525년에 일어난 농민봉기로 큰 위기에 봉착했다. 그 원인은 복합적인 문제로 전적으로 종교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귀족들의 착취에 시달려온 소작인들인 독일의 농민들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빌미로 귀족들에 항거했다. 이 항거는 땅을 많이 소유한 주교들과 수도원장들도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루터는 처음에는 농민운동에 대하여 방관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농민혁명의 과격화를 목도한 후에는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농민 폭도를 치라”는 격문을 내고 오히려 제후들 편을 옹호했다. 자칫 종교개혁이 농민전쟁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귀족들의 비난을 받을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루터는 결과적으로 제후의 편에 섰다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농민전쟁으로 죽은 농민들의 수는 무려 10만 명에 이르렀다.
루터의 개혁운동은 이처럼 과오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의 횃불은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가 신교(新敎)의 승리를 가져왔다.
루터는 1546년 3월, 63세를 일기로 그가 태어난 아이슬레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비텐베르그로 옮겨져 그가 처음 95개 조 논쟁문을 내건 그곳 성(城)교회에 안장되었다. 그때까지도 루터파의 신앙은 국가나 교황청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루터파의 신앙을 인정받은 아우그스부르크 종교화의(宗敎和議)가 열린 것은 그가 죽은 6년 후인 1552년의 일이다.

독일과 유럽의 루터파 교회
루터는 종교개혁의 지도자이면서도 쯔빙글리와 칼빈과 같은 개혁파들과는 교리에 대한 의견이 달랐다. 그리하여 루터가 죽은 후 루터를 추종하던 교회들은 개혁파 신앙과 갈라졌다. 그래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따르는 교회들을 중심으로 루터파가 생겨났다.  
루터교 교리는 초기 교회의 사도신경, 고대에큐메니칼 교리인 니케아 콘스탄틴노플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와 16세기 종교개혁에서 나온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슈말칼덴 조항, 루터의 대(大)·소(小) 교리문답, 협화신조(Formula of Concord)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처음 3개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Augsburg Confession)은 모든 루터교가 공통적으로 받아들이는 교리이고, 루터의 대·소 교리문답은 대부분의 루터교가 받아들이지만, 협화신조는 잘 인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협화신조가 엄격하고 너무 세세한 교리가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과 루터의 소 교리문답은 교리적인 측면에서 루터교를 잘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이후 생긴 여러 논쟁으로 인해 루터교는 여러 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루터교는 전세계에 분포하고 있다. 특히 지리적으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등 북유럽과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에 많으며, 독일인과 스칸디나비아인이 이주해서 세운 신생국에도 많다. 유럽에서도 개혁주의 신앙이 우세한 곳에서는 루터교가 약하고,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과 같이 성공회가 우세한 곳에서는 성공회 다음으로 영향력이 강하다. 초기부터 계속된 유럽 대륙의 선교단체와 후에 분산된 루터교단의 끊임없는 선교활동으로 루터교는 선교지(宣敎地)와 소위 신생교회 형성에 많은 공헌을 했다.
루터교는 세계 본부를 인정하지 않으나 세계 대부분의 루터교회는 제네바에 본부를 둔 루터교세계연맹(Lutheran World Federation)에 협력한다. 전 세계 루터파 교인은 약 7300만 명이다.

한국 루터교회
한국에 루터교가 설립된 것은 1958년 1월 13일에 미국의 미조리 시노드 루터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함으로 시작되었다. 한국루터교회는 1972년 ‘루터교세계연맹’(LWF)에 가입함으로써 세계의 루터교회와도 교류를 시작하였고, 미조리 시노드(LCMS)가 이끄는 ‘국제루터교협의회’(ILC)의 회원 교회이기도 하다. 1973년부터 한국루터교회(LCK)로 불리다가, 1980년부터는 기독교한국루터회(LCK)로 이름을 바꾸었다. 경기도 용인시 기흥에 루터대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한국루터교회는 현재 전국에 60개 교회와 6000여명의 교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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