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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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출신의 영국 작가 로알드 달(Roald Dahl, 1916-1990)은 교훈적인 내용을 재미있고 깜찍한 캡슐에 담아내는 이야기꾼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 <남쪽에서 온 사나이>는 오래전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세인의 주목을 끈 바 있지만, 히치콕은 이렇게 말했단다. “아무렇게 다루어도 괜찮을 일은 모두 잘라 버리고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것에만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편 <남쪽에서 온 사나이>는, 제목 달기에 따라서, 오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까지도 웃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소개해본다.
“나”라는 스토리 텔러가 등장한다. “나”는 그야말로 스토리 텔러, 다시 말해서 방관자이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의 짓거리를 그냥 바라보기만 하는 방관자의 눈을 빌어 이야기를 꾸려간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나나 내 이웃의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와 내 이웃을 그냥 바라보고 있는 한 방관자의 눈을 빌어 또 그의 어법을 따라 이해해보는 것은 어떨지.   
해질 무렵 자메이카의 한 호텔의 수영 풀. 거의 여섯시가 되어갈 즈음이라 맥주라도 사서 풀 가에 있는 덱 체어에 기대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면 좋을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노란 파라솔 아래, 의자 넷이 비어 있는 테이블까지 걸어가서 자리를 잡는다. 컵에 맥주를 따르고 담배를 입에 문다. 등받이에 길게 몸을 맡긴다. 저녁 햇빛을 받으며 맥주와 담배를 손에 들고 오래 앉아있는 노릇은 아주 기분 좋은 일. 게다가 옅은 녹색 물속에서 물장구를 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 또한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 때 풀 저쪽을 몸집이 그리 크지 않는 초로의 사나이가 힘차게 걸어오는 것을 본다. 새하얀 슈트에 챙이 넓은 크림 색 파나마모자를 쓴 그는 곧게 허리를 펴고 마치 리듬을 타듯 잰 걸음으로 걸어오는 데, 한 치의 틈도 없어 보인다.
나와 노인이 풀 가에서 쉬고 있자니, 풀에서 올라온 젊은 미국 해군병사와 그의 걸프렌드가 다가왔다. 노인이 시거를 뽑아 물자 “불을 붙여드릴까요” 하며 라이터를 내민다. “바람이 부는데” 하고 노인이 말하자 청년은 문제없다고 응수했다.
“그렇군, 음, 그렇군, 이게 ‘틀림없이 불이 붙는다.’는 그 유명한 라이터로구먼?” 그러더니 노인은 청년에게 내기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운을 뗀다. 노인의 호텔 방에서 청년이 이 라이터로 열 번 연달아 불을 붙일 수 있는 지를 내기해보자는 것이다. 청년이 이긴다면 저기 세워 둔 캐딜락을 주겠다고 노인이 말한다. 반대로 노인이 이기면, 그러니까 연달아 열 번 불붙이는 데 실패한다면, 노인은 청년의 왼손 새끼손가락을 가지겠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막바지로 내 닫는다.
노인의 호텔 방. 청년의 왼손은 노끈으로 테이블에 묶여 있고, 노인의 손에는 식칼이 들려 있다. 청년이 아홉 번 불을 붙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아홉 번째는 불꽃이 작았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독자가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 터에, 느닷없이 노인의 아내가 돌아온다. 아내는 노인을 야단치고, 청년에게는 사과한다.
“저 양반에게 또 고약한 버릇이 도졌나 봐요.” 아내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리는 남쪽 나라에서 살았답니다. 저 양반은 거기에서 여러 사람에게서 무려 마흔 일곱 개의 손가락을 빼앗았고, 또 자동차는 열 한 대나 빼앗겼답니다. 마침내 사람들이 감금해버리겠다고 어르는 통에 내가 저 양반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거랍니다.”
이렇게 약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노인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약간 누그러진다. 독자는 캐딜락도 실은 부인의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면서 노인의 모습은 약간 어릿광대처럼 비치기 시작한다.
그렇게 독자가 한숨 돌리는 데, “내가 열쇠를 잡으려 내뻗는 부인의 왼손을 보게 된다. 지금도 그녀의 손이 뚜렷하게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 손에는 엄지 와 또 하나의 손가락만이 붙어있는 것이었다.”
혹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달의 다른 작품 <맛>을 맛보는 것은 어떨는지.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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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알드 달의 ‘남쪽에서 온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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