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교회 성장시대 이후를 맞이한 한국교회를 향한 성서신학적 제언
2018/10/19 10:40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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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속에 교회가 흡수되어서는 안된다”
본고는 한국복음주의월례회가 지난 12일 서울 마포 신촌성결교회에서 개최한 10월 월례회 ‘개혁을 넘어 이제는 변혁이다’ 중 왕대일 교수가 발제한 ‘교회성장시대 이후를 맞이한 한국교회를 향한 성서신학적 제언’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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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에서 변혁으로
이사야서 66장에서 예루살렘 성전은 현실에 기반을 둔 성전이 아닌, “그 날에” 하나님이 세우실 성전에 대한 조감도에 기초한다. 현실에 매여 있는 성전이 아닌 하나님의 은총을 누릴 성전을 조망한다. 하나님 신앙과 세상의 가치관을 적당히(!) 얼버무린 혼합주의의 탈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낳으실 순결한 새 시온을 바라본다. 그 내일의 시온이 너무나 확실하기에 오늘의 시온을 과감히 내려놓는다. 그 종말의 성전이 너무나 분명하기에 오늘의 성전에서 과감하게 벗어난다.
이사야 66장이 그리는 조감도는 기존 성전종교에 대한 대대적인 변혁을 밑그림으로 삼는다. 폐쇄적이던 회중이 드리는 제사중심의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사 56:7)으로 변혁시키고자 하였다. 혈통을 따지던 공동체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사 56:3-7). 종교법칙을 따지던 공동체 유형을 하나님의 영이 이끄시는 하나님의 선교 중심으로 변혁시켰다(사 61:1-2). 그러면서 부성적인 성전종교를 모성적인 성전신앙으로, 어머니 시온으로, 바꾸어놓았다.
스데반의 설교는 이사야가 품었던 그 종말론적 성전의 위상을 나사렛 예수가 구현하신다고 증언한다.  신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성막이 되신 하나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 가운데 성막으로 오셔서 거하시는 하나님이다(요 1:14). 교회는 성막정신으로, 성육신 신앙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그리스도 찬가처럼 교회는 낮아져야 하고, 비워야 하고, 종의 형체를 가져야 하고, 복종해야 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빌 2:5-8). 그럴 때 하나님은 교회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빌 2:9) 이름을 얻게 하신다. 여기에서 사도행전기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사야서 66:1의 탈(脫)성전적인 신앙을 아예 반(反)성전적인 가르침으로 적극 제시하였다.
신약에 인용된 구약구절은 여러 시각에서 해석할 수 있다. 사도행전 7장도 사도행전 본문이 자기 신학을 입증하려는 증빙문서(proof text)로 이사야 66:1-2를 제시한 경우로 보아야 한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왜 그런가?
중요한 것은 사도행전 7장 본문이 예루살렘 성전종교의 변혁을 부르짖고자 붙든 구약의 말씀이 출애굽기 25-31장의 성막공동체와 이사야 66장의 종말론적 성전이라는 사실이다. 이사야 66장이나 사도행전 7장은 모두 기존종교에 대한 변혁을 주창한다. 기존종교를 변혁시켜야 하나님의 백성에게 살 길이 열린다고 주창하고 있다. 거기에는 모두 기존‘유대성전종교를 넘어서는’(beyond Jewish temple piety) 신앙유형을 적극 모색한 결과가 담겨 있다. 이사야의 경우는 그 유형이 예루살렘 성전을 종말론적으로 조망하는 태도를 취하지만, 스데반의 경우는 그 유형이 성전을 대체하는 광야 교회의 회복으로 나타났다.
사도행전 7장에서 들었던 스데반의 설교나 이사야 66장의 예언은 각각 자기 시대의 신앙공동체에게 쏟아낸, 그 신앙공동체의 존재양식이 변혁되어야 한다는 일갈(一喝)이었다. 일갈, 한 일(一), 꾸짖을 갈(喝)! 큰 소리로 꾸짖었다. 목이 메도록 소리 높여 외쳤다. 무엇을 외쳤는가? 현실주의에 붙들린 성전보다는 “그 날에” 완성될 성전을 외쳤다. 그 내일의 성전이 있기에 오늘의 성전에 매여 있는 자들을 향해서 그것은 혼합주의의 온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꾸짖었다. 무엇을 외쳤는가? 사람이 만든 집보다도 하나님이 지으실 “처소”를 외쳤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광야 교회의 유산을, 하나님을 위한 처소라는 유산을 이어가지 않는다면, 그런 공동체가 이 땅에 있어야 될 이유가 없다고 꾸짖었다. 그랬기에 이사야는 성전의 진정한 실체를 종말론적으로 조망하는 방식으로 당시의 성전종교가 거듭나기를 소망했고, 그랬기에 스데반은 그 종말론적 비전에 기대어 아예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신다”고 설파(說破)하였다.
이사야나 스데반의 말은 단순한 설명(說)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존 성전종교를 깨뜨리는(破) 외침이었다. 신앙공동체는 처음부터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였다던 것이다. 그러니 기억해야 한다. 교회는 유대성전종교를 깨뜨리는 변혁공동체이었다. 그 변혁공동체의 완성을 현실이 아닌 종말론의 지평에서 소망하였다. 그 날에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의 지평에서 오늘의 교회를 보았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늘 ‘도상의 교회’(Church on the Way)가 되어야 한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길” 따라 “흩어진 사람들”(행 8:4)이 무더기로 쏟아지지 않았던가!

△ 한국교회, 어떻게 변혁되어야 할까?
오늘의 한국교회가 스데반이 외친 광야 교회에서, 이사야가 외쳤던 종말론적 성전에서 깨닫는 것은 무엇인가? 한국교회의 변혁을 향한 “타는 목마름”은 우리 모두에게 다 절실하다. 그 절실함을 한 두 마디로 다 거론할 수는 없다. 다만, 여기에서는 사도행전 7장과 이사야 66장에 근거해서 한국교회의 변혁을 향한 이정표를 제시해볼 뿐이다.
스데반이 예루살렘의 교회를 유대성전종교로부터 떨어져나가게 했듯이 오늘의 한국교회는, 그 규모가 대형교회든 개척교회든, 탈(脫)성전화, 탈(脫)성전종교화해야 한다. 교회의 존재양식이 달라져야 한다는 소리다. 교회가 성전을 짓지만, 그 성전은 성전종교의 성전이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흩어져야 하고, 각 지역사회나 분산된 각 계층에 세워지는 공동체이어야 한다. 요즈음 우리 교회에서 성전은 교회의 하부구조(집회장소)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교회 안에 성전(예배당)이 있어야지 성전(성전종교) 속에 교회가 흡수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시작은 유대성전종교로부터 뛰쳐나온 프로테스탄트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가 다시 유대교식 성전종교로 되돌아가버려서는 안 된다.  
교회의 규모를 축소하자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규모는 하나님이 정하신다(마 25:14-30). 크게 자라는 나무도 있고 작게 자라는 나무도 있다. 다 주님이 키우시는 나무다. 단, 교회마다 자라서 교회끼리 더불어 숲을 이루어야 한다. 사도행전에서 계시록으로 이어지는 신약의 말씀에서 교회는 서로 더불어 숲을 이루는 방식으로 퍼져나갔다. 예루살렘, 안디옥,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빌립보, 골로새, 데살로니가, 고린도, 로마 교회 식으로 당시 지구촌에 교회라는 숲을 이루어나갔다. 
이 점이 중요하다. 한국교회가 숲을 이루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개체 교회들이 각각 약진하고 경쟁하는 방식으로 생존했지만, 이제부터는 나무와 나무가 함께 하는, 큰 나무와 작은 나무가 공생하는, 그러기 위해서는 조림(造林) 방식으로 교회변혁을 설계하고 실행해야 한다. 큰 교회는 있어야 한다. 아니, 있게 된다.
작은 교회도 마찬가지다. 단, 지금 모습으로는 아니다. 담임목사의 생계형 교회로서는 교회역할을 할 수 없다. 큰 교회가 교회 안에 여러 공동체들을 연합체 형태로 두듯이, 작은 교회도 작은 교회들끼리 연대하여 디아코니아를 공동으로 실천해야 한다.
스데반이 순교하는 자리에서 맞섰던 자들은 유대교의 바리새파 학자와 사두개파의 종교인들이었다. 레너드 스윗의 표현을 빌리면, 현상유지(maintenance) 타입의 종교인들이었다. 스데반은, 그리고 스데반 이후에 등장하게 된 교회의 지도자들은, 역시 레너드 스윗의 표현으로 설명하면, 전도(mission) 형의 종교인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신앙공동체의 지도자가 달라져야 한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담임목사(당회장) 중심의 교회다. 이 체제를 존중하면서 변혁을 이루어야 한다면, 교회 안에 여러 명의 목사들이 공동으로 목회하는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전도사, 강도사, 목사, 선교사만이 아닌 수도사 등도 같은 교회를 더불어 섬기는 목회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신학교를 나와서 목사고시(강도사고시)를 패스했다고 해서 꼭 담임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고집해서도 안 된다. 평생을 한 공동체에서 목사로 사역하다가 은퇴하는 트랙도 마련되어야 한다. 회사에 들어간 사원들이 모두 다 나중에 그 회사의 CEO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숲을 이루기 위해서는 때로는 교회끼리도 통폐합해야 한다. 시장의 용어로 말한다면, 구조조정이나 MOU를 해야 한다. 교회 수가 너무 많다. 목사후보생을 배출하는 신학교가 너무 난립되어 있다. 한 교회가 한 교회건물을 세우고 짓고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가 연대하여 함께 교회를 세우거나 교회건물을 짓고 공유하며 유지하는 형태로 존재방식을 변혁시켜야 한다. 그런 변혁을 위해 목회구조 마저도 공동목회 형태로 변환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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