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로마교회 ‘교황’은 역대 교황들의 사악한 역사에 책임 있어
지금도 ‘이단재판소’ 교황청 내에 이름만 바꾸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중세의 ‘마녀 재판’과 ‘종교재판소’는 교황제의 보호 위해 설치
양심의 자유 따라 믿을 수 있는 개혁교회의 일원 된 것 감사해야



처음 팔레스틴에서 시적된 기독교는 오랜 기간 로마사회 안에서만 전파됐다. 로마령 밖에도 인도의 도마교회나 페르시아의 네스토리우스교회 같은 기독교 세력이 있었으나, 당시 ‘가톨릭’(catholic)이라고 불린 보편적 교회의 일원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당시 기독교는 5대 교구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째는 기독교가 시작된 예루살렘 교구이고, 둘째는 예루살렘교회가 전도한 시리아 안디옥 교구이며, 셋째는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에 있던 알렉산드리아 교구이고, 넷째는 사도 바울이 순교한 로마 교구이다. 4세기 초까지는 이 4대 교구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후 다섯번째 로마가 330년에 비쟌티움에 새로 낙성한 동로마 수도 콘스탄티노플 교구가 생겨남으로써 5대 교구가 되었다.
초기 기독교는 중요한 교리적 결정을 할 때에는 이 5대 교구 대표자들이 모두 참여했다. 지역 교회의 문제는 그 교구 차원이나 지역 차원의 공의회를 통해 처리했지만, 기독교 전체의 정체성과 관련된 교리나 기념일 등은 5대 교구 전체 대표들이 모여 오랜 기간 논의한 끝에 결정했다.
각 교구는 대감독(대주교) 혹은 총대감독(총대주교)이 책임자로서, 대등한 위치에 있었다. 다만 예루살렘 교구와 안디옥 교구, 알렉산드리아 교구는 7세기 중반 이후 이슬람의 점령으로 기독교 세가 약화돼 힘을 쓰지 못했다. 자연히 로마 교구와 콘스탄티노플 교구가 경쟁하는 양상을 띠었다.

로마 교구의 수위권 주장
그런 과정에서 로마 교구가 다른 교구들을 무시하고 ‘수위권’(首位權)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 교회의 분열을 가져오게 된 동기이다. 로마 교구를 주로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방 교회’라 하고, 콘스탄티노플 교구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 교회'라 불렸다.
거기에다가 로마 교구는 대감독을 성경 어디에도 전혀 그 근거가 없는 '교황'(Pope)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마치 세계교회를 로마 교구가 통치하는 것처럼 교권주의를 극대화했다. 뿐만 아니라 교황무오설까지 주장하여 교황을 그리스도의 지상대리인으로 우상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로마 교구에 속한 교회들은 결국 성경과는 다른 기독교로 변질해 간 것이다.
그 결과 중세 로마교회는 교권을 내세워 허망한 짓을 많이 했는데, 이후에도 이를 시정하지 않은채 ‘교회의 전승’이란 이름으로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로마교회는 역사적 기독교의 일파임에는 틀림없으나, 성경의 기독교는 아니라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우상을 만들고 섬기는데 대한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기 위함인지 알 수 없으나, 성경에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20:4)는 제2계명을 삭제하고, 제10번째 계명을 둘로 나누어 “구.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십.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고 고쳐 사용하고 있다.
교황 제도 아래 있는 로마교회가 해온 ‘허망한 짓’들 가운데 몇 가지를 살펴본다.

십자군 전쟁
십자군은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이슬람에 점령된 성지 예루살렘과 시리아 안디옥을 구하러 가는 자는 "영생을 상으로 주겠다"고 호소해 시작된 성지회복운동이다. 십자군은 1270년 프랑스 왕 성 루이의 죽음까지 7차에 걸쳐 170여년 간 수십만명의 청년들의 죽음을 가져왔다.
제1차 십자군은 한때 안디옥과 예루살렘 등 성지를 회복했으나 십자군 지도자들의 반목과 분열로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제1차 십자군의 정규군은 약 30만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1097년 6월에 니케아를 함락했고, 1098년 6월에는 안디옥을 되찾았으며, 1099년 7월에는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예루살렘에 라틴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또 어린이들도 십자군을 만들어 무모하게 달려드는 바람에 약 3만여명에 이르는 어린이들이 죽거나 노예로 팔렸다. 그리고 제4차 십자군은 엉뚱하게도 기독교 국가인 비쟌틴 제국을 침략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거기에 또 다른 라틴 제국을 세워 온갖 범죄를 저질렀다.

마녀 재판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유럽 전역에서 벌어진 마녀 재판은 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런 짓을 했는지 오늘날 그 원인을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 마녀 재판은 전적으로 국가의 관장아래 교회가 형언할 수 없는 인간 확대를 끝없이 연출한 사건이다. 마녀 재판은 1487년부터 1669년까지 무려 300여년을 거듭하여 엄청나게 많이 보급된 “마녀 망치”라는 책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었다. 이 책은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스콜라 신학자들이 이단을 방지한다는 명목하에 기술한 마녀 감별서이다.
교황청 종교재판소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향권에 있는 전 유럽 세계가 마녀 재판에서 여자들에게 사용할 고문도구를 생산 조달하느라 빠빴다. 한 마을에서 어떤 여자가 '마녀'로 몰려 밀고되면 당국이 이를 은밀하게 심리했고,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무지막지한 고문이 따랐다. 이 끔직한 고문을 견뎌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받아낸 충분한 자백은 사형판결로 이어졌고 차마 말로 표현할 수없는 고통 속에서 이른바 공범자들의 이름이 튀어나오면 또다시 새로운 재판과 고문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는 시민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화형에 처했다. 약 1만명 이상이 죽은 이 마녀 재판의 희생자는 모두 하창민 여인들이었다.
이것이 교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로마교회가 저지른 범죄이다.

종교재판소
로마교회의 교황제는 무고한 수많은 신도들을 이단이란 명목으로 무참히 학살했다. 로마교회의 저 비인간적 범죄행위인 이단 심문과 재판 과정의 악랄한 고문의 결과는 결국 종교개혁과 계몽주의를 낳았다. 지금도 로마 가톨릭교회 내에는 버젓이 그 이름만 다를뿐 종교재판소가 존재한다. 교황청의 검사(檢邪)성성, 또는 신앙교리성이라고 불리우는 기구가 그것이다. 이 종교재판소는 지금도 중세의 그것과 똑같이 그 원칙들을 따라 작동한다. 그 재판소의 목적은 진리나 진실 여부를 찾으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진실을 진리와 동일시 되는 로마교회의 교리에 굴복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기독교인들은 우리의 구원의 주 예수를 믿는데 있어 로마교회의 일원이 아니라 오늘날 양심의 자유를 따라 믿을 수 있는 개신교 또는 개혁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강>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기획/ 오는 8월 교황의 한국방문을 앞두고 3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