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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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올해는 종교개혁(1517) 500주년의 해이다. 마르틴 루터가 본격적인 종교개혁의 선두주자 역할을 맡았다는 관점에서 보아 그러하다. 그가 교회개혁을 위해 면죄부 반박 95개 신조를 독일 비텐베르크 성곽교회 정문에 1517년(10월31일) 공표했었기 때문이다. 이것의 파급효과는 예상외로 컸고 루터가 의도했건 안 했건 간에 그는 이미 종교개혁 운동의 소용돌이에 선두주자로 휘말리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종교개혁 운동은 장 칼뱅과 같은 프랑스 개혁가가 뒤따라 이어가면서 유럽 사회와 교회(종교계)를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켜 놓았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상징적인 두 인물 루터와 칼뱅에게도 성취 못지않게 실패의 면도 있었던 것으로 지적되고 있어서 여기서는 타산지석의 교훈이란 의미에서 그 면을 강조적으로 다루어보고, 마지막으로 현 시국과도 그 점을 연관시켜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 이 ‘실패’의 면을 ‘생명 존중’이란 사항과 관련시켜 접근함이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덕목 가운데 이웃의 인권을 존중하고 특히 그 생명을 존중하는 일은 무엇보다 훌륭한 것으로 찬양돼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그에 반하는 일이 일어났다고 하면 그 점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자연히 뒤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루터(1483-1546)는 종교개혁의 총아로 우뚝 서게 되었을 때, 남은 한 가지 문제 때문에 고충을 겪고 있었다. 그것은 얼마 동안 독일농민전쟁을 주도해온 민중들과 함께해 왔던 그가 더 이상 그들과만 얽혀 가지고선 개혁의 완성(?) 단계에 도달할 수 없다는 판단과 관련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던 농민들을 저버리기로 하고, 그동안 서로 소원(疎遠)했던 제후/영주들과 끝내 손을 잡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 힘을 얻게 된 영주들이 농민들을 적극 공격함으로써 많게는 12만 명의 농민들이 도륙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제후/영주들과 손을 잡았을 때 농민들이 몰살되리란 것을 루터교의 수장이 될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까?
칼뱅(1509-1564)은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하면서 여러 대적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중의 한 사람이 세르베투스(1511-1553)란 박식하고 논쟁적인 인물이었다. 의사이기도 했던 그는 신학적 견해 차이 때문에 칼뱅과 충돌하게 되었다. 칼뱅은 그를 만나 담판을 지으려 했으나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의 교회에 설교를 들으러 온 세르베투스를 발견하고 칼뱅은 수하를 시켜 그를 체포하였다.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그를 회유하다 실패하자 종교재판에 회부해 이단으로 화형선고를 내렸고 그는 1553년(10월27일) 불에 타 숨졌다. 그러나 이런 식의 처형 방식은 개혁가들이 지금껏 저항해온, 중세 가톨릭 교황들의 소위 이단자들에 대한 처형방식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으니 큰 문젯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세르베투스 처형 사건은 그러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였다. 칼뱅이 제네바에 머무르는 동안 1542년부터 1546년까지의 5년 어간에 그에 의해 무려 57명의 자유사상가 또는 개혁가들이 이단 명의로 처형되었다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후에 인문주의자 카스텔리오(1515~1563)가 칼빈의 세르베투스 처형에 항의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끝내는 그 역시 이단으로 몰려 칼뱅의 종교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불행이라 해야할지 다행이라 해야할지 재판 기간 중에 운명하고 말아 처참한 꼴만은 면한 셈이 되었다.
루터가 독일농민들을 제후/영주의 손에 맡기려 했던 즈음 그는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농민폭도들을 치라”는, 절대권 의지를 드러낸 팸플릿을 내어 제후들을 부추겼다. 이로 인해 그 팸플릿은 신학자 리처드 니버에 의해 “기독교적인 내용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무가치한 문서라는 악평을 듣게까지 된 것이다. 칼뱅은 평소 세르베투스에 대해 유감을 품고 있었는데, 그는 개혁의 동료 파렐에게 “세르베투스가 만약 제네바에 오기만 하면, 나는 내가 권력을 갖고 있는 한 그를 결코 살려 보내지 않을 것이다.”고 노골적으로 천명한 바 있었다.
세계적인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에 의해 씌어진, 칼뱅에 저항한 카스텔리오의 전기물이 그때의 사정을 잘 기술함으로써 절대권자로 군림하려 했던 칼뱅의 사람됨에 대해 많은 이들이 그 진면목을 알게 해주었다. 그렇다면 이들(루터와 칼뱅)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그 답은, 그들이 권력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결국 절대권력은 그것이 교권이든 속권이든 똑같다는 점을 위의 사례는 잘 말해주고 있다. 나약한 인간에게 그것의 유혹은 너무도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절대권력을 추구하게 되면 중세의 로마 가톨릭, 또는 그에 저항했던 루터와 칼뱅에게서도 보듯이 부정적인 그늘(부패상)을 필히 남기게 되는 법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탄핵 정국도 그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러므로 국민이나 위정자나, 또는 평신도나 성직자나 “절대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는 교훈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바벨탑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신 주님의 절대적 교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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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권 거부를 위한 절대적 교훈-임 영 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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