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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24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기 위해서는 훈련이 있어야 한다. 그 훈련은 의와 평강과 희락을 이루기 위한 훈련이다. 우리는 먼저 의를 이루어야 하는데,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며(롬 10:10), 그리고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 따라서 우리가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믿음이 자라도록 말씀훈련을 해야 한다.또한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평강은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얻을 수 있다는 것이므로 우리가 평강을 얻기 위해서는 기도훈련을 해야 한다.그리고 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렁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9-12)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곧 우리가 희락을 얻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므로, 따라서 우리가 사랑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런데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이 이르렀다는 기쁜 소식이다. 그리고 구원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은혜의 반대말은 공로이고 그리하여 은혜는 훈련을 포함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성훈련은 필수적이다.구원: 칭의(중생)와 성화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곧 믿는 성도들은 이미 영생 곧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라고 말한다.그런데 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살후 2:13)라고 하고,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라고 하여, 우리의 구원이 진리를 믿음 곧 ‘칭의(중생)'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 곧 ‘성화'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이와 같이 구원은 칭의와 성화로 이루어지는데, 이 칭의와 성화는 분리되지 아니한다고 하더라도 구별은 가능하다. 그리고 이 구원 가운데 진리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중생의 씻음 곧 칭의는 우리가 이미 받은 것이고,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는 성화는 우리가 아직 얻지 못한 것으로써 지금 여기서 이루어 가야 한다. 이 성화가 바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이와 같이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 것은 성화를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벧전 1:16)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 거룩은 하나님 안에 발견되는 모든 것의 속성으로 단정할 수 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하나님의 본성과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근본 토대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기독교신학의 초석이다. 하나님의 사랑도 그분의 거룩함의 표현이라는 사실은 피할 수 없으며, 또한 죄에 대한 분노(의)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표현이다. 이와같이 거룩이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되는 것 곧 성화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완성하는 것을 말하며,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신(골 1:15)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이 거룩(성화)의 내용은 진·선·미(眞善美), 곧 ‘진’=참되고 성실한 것과, ‘선’=착하고 좋은 것과, ‘미’=아름답고 개끗한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은 ‘최고의 본질, 최고의 진선미’라고 정의했다. 그것은 하나님은 참되시고(요 3:33), 예수님께서는 진리(참)이시며(요 14:6), 성령님께서는 진리의 영(요 14:17)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호와는 선하시고(시 100:5), 예수님께서는 선한 목자이시며(요 10:11), 또한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시기 때문이다(시 135:3).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의 대표적인 속성인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 내용으로 진(참되고 성실함) 선(착하고 좋음) 미(아름답고 깨긋함) 모두를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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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13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23
    그리고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셨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4, 5)라고 하시고, 이어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 17:10)라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의 사명을 감당(완수)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우리를 위하여 마지막으로 기원하셨던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변화산의 영광이다(눅 9:32).부활 : 승천과 승귀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중심 내용이지만, 그것은 부활로 완성된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라고 하신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 15:20).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라고 하신 바와 같이, 죽음이 없으면 부활이 없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고자 하지만 그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은 죽음을 통과하지 아니하고서 부활에 연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예수님께서 스스로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느니라”(눅 22:69)라고 하신 대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 스데반은 순교직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으며(행 7:55),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히 10:12)라고 했다.여기에서 하나님 우편이라는 말의 뜻은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리이다. 이를 승귀(Exaltatlon)라고 한다. 승귀에는 부활 승천과 보좌에 앉으심과 재림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요(빌 2:6), 하나님의 형상이요(고후 4:4),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히 1:3). 따라서 승귀는 그 복귀일 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우편이란 의로움이 있는 최상의 축복을 말하며 평화와 기쁨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루터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권세라고 하였으며, 칼빈은 통치하시는 자리라고 했다. 이것은 곧 예수님께서 지상명령을 주시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 우편에 앉은 예수님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엡 1:23)로서 우주를 통치하고 섭리하시고 계심을 뜻한다.따라서 예수님의 승천은 창세 전에 가지셨던 영광의 보좌로의 복귀이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예수 주시니라”(눅 2:11)라고 하신 대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구주로 오셨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의 설교대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 2:36). 그리하여 구주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님이 되신 부활이 복음의 중요한 내용이 되는 것이다. 천국 복음(복음의 형식): 의와 평강과 희락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라는 말씀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눅 4:43)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은 복음의 중요한 내용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중요한 사역 가운데 하나이다.이 하나님의 나라는 장차 우리가 들어가야 할 목적지이지만, 또한 우리가 삶에서 이 땅에도 임하게 해야 할 대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이미’와 ‘아직’의 성격이 있는 것 같이 천국에도 ‘이미’와 ‘아직’의 의미가 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 곧 성령의 지배를 말하고, 그 표지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를 지칭하고, 평강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누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희락의 중요한 원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나라의 표지인 ‘의와 평강과 희락’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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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6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22
    말씀 : 묵상그러므로 우리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말씀훈련이 필요하다. 말씀훈련의 기본은, 하나님께서 쉐마를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신 6:5)고 말씀하신 후 곧 바로 이어서,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신 6:6)라고 하신다.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입에 있으며 우리의 마음에 있어야 이를 행할 수 있다(신 30:14).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변화받고 그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우리의 머리에서 마음으로 내려가게 해야 하는데, 그 방법이 바로 말씀에 대한 묵상이다. 묵상이란 성경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이며,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리는 것을 의미한다.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하여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8)라고 말씀하셨고,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2)라고 노래했다.우리말 개역성경이 묵상으로 번역한 히브리어에는 ‘하가’(hagah)와 ‘시아흐’(siach)가 있다. 하가는 ‘속살거리다’(사 8:19)라고 번역되었고, 시아흐는 개역개정성경이 ‘읊조리다’(낭송)로 번역했다. 이것은 소리를 내지 아니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리를 내면서 깊이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원래 묵상은 하나님을 전인격적으로 알아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마음과 마음이 만나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과 만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방법은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십자가(보혈):못 박힘과 영광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라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라고 말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에게는 우리의 죄를 대속할 예수님의 피(보혈)와 우리의 옛 사람을 못 박아 죽일 십자가가 있어야 한다.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라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성경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고후 4:4)을 말하고 있다. 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승귀)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6)라고 말씀하신 대로, 그 영광의 내용은 십자가라는 사실을 우리는 특별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3,24)라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곧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구원의 열매를 가져오는데, 이러한 열매를 얻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예수님께서 최후의 순간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하셔야 했던 일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마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열매를 맺는 것처럼, 그분께서 그렇게 죽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의 원리는 죽는 원리 곧 십자가의 원리이다.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의 기도를 시작하시면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라고 기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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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23
  • 홍 성 표 목사 / “모른다”
    거짓의 역사, 거짓 국가, 거짓 정치, 거짓 재벌과 경제, 거짓 사회, 거짓 교회, 거짓 종교, 우리 사회는 지금 거짓과 가짜가 판을 치고 홍수를 이룬다.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서 국민을 억압하고, 착취해도 된다. 그리고 소수의 희생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필자가 23년 전 학위 과정 시 설문 조사 과정에서 이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꼽힌 부분이 바로 ‘신뢰’였다.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갈파했다. 데카르트는 “생각하기 때문에 고로 존재한다”라고 인간을 이해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정치적 동물이다. 이 말은 인간이 관계적 존재라는 것이다. 관계를 통해서 신뢰를 쌓고 발전적 모색을 한다. 관계가 금이 가고 깨어지는 것은 서로가 믿을 수 없는 불신이 시작되고 신뢰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관계가 깨어지는 것은 상호 불행의 시작이고 아픔과 상처를 받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 전통적 구원론과 속죄론에 의하면 원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자녀관계를 이룰 수 없는 죄인의 입장인 인간의 속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을 통해서 죄인 된 인간의 죄를 용서받게 하셨다는 것이다. 죄를 속죄 받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첫째가 거짓이다. 동료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며, 역사를 속이며, 국민과 민중을 속이며, 관계를 속인다. 거짓이 죄를 낳고,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사망에 이른다.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304명의 생영이 진주의 차가운 바다에 수장 되어 생사를 오가는 시간에 피부시술과 머리를 하기 위해서 살아보지도 못한 어린 꽃들이 바다 속에 흩날려 떨어져 갔다. 그 연상을 보면서 필자의 가슴은 찢어지고 아파서 잠들 수 없는 날들을 보내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 세월호 참사 이후 소위 대통령과 그 당들은 거짓과 협박으로 지금까지 일관하고 있다. 박근혜와 최순실의 치마폭에 놀아난 오늘의 대한민국의 현실에 모든 국민은 분노하고 절망하며 좌절하고 있다. 유신의 악마적 존재인 김기춘과 그 수제자격인 우병우를 비롯하여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권력과 최고의 재벌들은 자본과 권력의 정경유착의 고리를 통해서 민중을 착취, 억압하고, 속이고 있다. 검찰도, 법원도 신뢰할 수 없는 국민과 민중들은 광장으로 달려가 하늘과 땅에 호소하고 부르짖고 있다. 검찰과 국회 청문회 과정에서 권력과 자본에 아부하고 악을 행한 자들은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있다. 거의 모두가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 라고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이 나라가, 이 사회가, 이 역사 속에서 진실은 없고 거짓이 홍수를 이룬다. 거짓된 역사는 망하는 길이다. 거짓된 관계는 깨어질 수밖에 없다. 믿을 수 없는 관계는 바른 관계를 지속될 수 없다. 오늘날 교회가 거짓을 가장 많이 말한다. 오늘날 종교인이 가장 거짓을 말한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거짓말이다. 이 역사와 나라가 사는 길, 한국교회가 사는 길은 거짓을 버리고 진실과 사실을 증거하고 말하는 것이다. 권력과 자본이 결탁하고, 여기에 교회와 목사들, 종교 지도자들이 아부와 아첨 공존과 기생하려 하면 이 나라와 역사는 미래가 없다. 우리는 본 것과 아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해야 한다. 검찰과 국정청문회 과정에서 기억이 나질 않는다. 모른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라는 거짓말을 계속해서 보는 국민들은 식상하고 좌절감에 빠진다. 대통령과 권력 집단을 믿을 수 없고 여기에 교회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믿을 수 없다면 우리의 미래는 불확실하고 희망이 없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서로를 믿을 수 없고 신뢰할 수 없으며 바른 관계를 할 수 없는 불행한 시간들을 목격하고 살고 있다.부부의 관계, 자녀와 부모의 관계, 스승과 제자의 관계, 지도자와 국민의 관계, 친구와 동료의 관계가 신뢰할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삶은 빛을 잃게 된다. 교회의 분쟁은 목회자와 성도들의 신뢰의 관계가 깨어지게 된다. 국민이 대통령에게 분노와 저항을 하고 퇴진과 화해를 요구하는 것은 신뢰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잘못했어도 진실을 듣기를 바란다. 죄인이 진실로 회개하면 용서 받을 수 있다.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라는 식의 거짓이 국민들의 뇌리에 새겨지고 있다. 교회만이라도, 살아 있는 종교만이라도 진실을 말하였으면 한다. 모든 문제는 거짓에서 시작 된다. 거짓이 죄를 낳고, 죄가 욕심은 죄를 낳고 그리고, 죄는 사망을 낳는다. 국민은 진실에 목말라 있다. 세월호의 학살의 진실과 통진당 해체의 진실, 그리고 지난 역사의 많은 의문사들의 진실, 간첩공안 사건의 조작의 진실 등 숱한 거짓으로 묻어진 역사의 진실을 알고 싶다. 거짓이 홍수를 이루는 역사는 죽음을 향하여 간다. 우리의 희망을 위해서라도 서로 믿고 살 수 있는 진실이 회복되는 사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특히 한국교회가 역사의 진실을 회복하는 것이 살 길 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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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16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21
    말씀 : 로고스와 레마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감동’은 헬라어로 ‘데오프뉴스토스’((Theopneustos)로서, 우리말로는 ‘하나님께서 숨(호흡, breath)을 불어넣어 주셨다’라는 말이다. 따라서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하나님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다는 뜻이다(창 2:7, 요 20:21-22 참조).그리고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헬라어 성경은 로고스(logos)와 레마(rhema)라는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하는데, 우리말 성경은 로고스와 레마를 구별 없이 ‘말씀’ 또는 ‘말’로 번역하고 있다. 신학적으로는 별 차이는 없지만, 그러나 로고스와 레마를 엄격히 구별하자면, 로고스는 문어(文語)- 글자로 나타낸 모든 말-라고 할 수 있고, 레마는 하나님의 구어(口語)-입으로 하는 말-라고 할 수 있다.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골 3:16)라고 할 때, 말씀은 로고스(logos)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또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라고 했을 때, 말씀은 레마(rhema)이다.우리가 영적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먼저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잘 이해하고, 더 나아가서 그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개인적이고 주관적으로 특수적으로 들려오는 선포되는 말씀(spoken word)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개혁자 루터는 성경이나 선포되는 말씀을 다 ‘외적인 말씀’이라면서, 이것은 외부로부터 인간에게 들어오고 다른 사람에 의해 전달되고 중개된 말씀이라고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말씀하시는 ‘내적인 말씀’과 구별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 받아들여 믿게 되는데, 이것을 성령의 사역이라고 한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외적인 말씀을 통하여 다시 우리 마음에 말씀하시는 이 내적인 말씀에 의하여 자라게 된다. 우리는 루터가 말하는 외적인 말씀을 로고스라고 하고, 내적인 말씀을 레마라고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께서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히 8:10). 또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히 10:16)라고 하셨다고 가르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로고스’라고 하고, 우리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레마’라고 할 수 있다.또한 우리는 로고스를 머리로 아는 것(지식)이라고 하고, 레마를 마음으로 아는 것(깨달음)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 깨달음이 중요하다. 그것은 이 깨달음이 심오한 진리를 더 없이 명쾌하게 통찰하고, 거기서부터 감정이 물밀듯이 함께 솟아나는 순간으로서 삶을 영영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깨닫는다’라는 말의 의미를 특히 ‘안다’는 말과 관련하여 어떻게 다른지 알 필요가 있다. ‘안다’라는 말의 히브리어 ‘야다’(yada)는 첫째는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지식적(인식적, 이지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그것을 경험하여 체험적(정서적)으로 아는 것으로서 얼굴로 아는 것(갈 1:22)을 말한다. 또 셋째는 의지적으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 곧 실천적(의지적)으로 아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말씀에 대한 지식적 앎을 신학이라고 하고, 말씀에 대한 경험적 앎을 영성이라고 하고, 말씀에 대한 실천적 앎을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지식적 앎인 신학과 경험적 앎인 영성이 합해져야 나올 수 있는 것이다.헬라어로 ‘깨닫다’라는 말은 ‘suniemi’이다. 이 말은 ‘sun’(함께)과 ‘iemi’(보내다)의 합성어로 ‘함께 보내다’, ‘같이 놓다’, ‘모으다’라는 의미에서 ‘깨닫다’라는 의미가 생겼는데, 우리말 성경은 ‘깨닫다’라는 말 외에 ‘이해하다’(엡 5:17), ‘지혜있다’(고후 10:12)로도 번역됐다. 따라서 이 깨달음은 성령님의 조명으로 지(머리). 정(마음) . 의(몸)를 포함하는 전인격적인 앎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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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16
  • 라마의 통곡 그 후에-유종만 목사
    “라마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렘 31:35).라헬이 남편 야곱의 사랑은 받았지만 자녀를 낳지 못하여 업신여김을 받고 눈물로 세월을 보낼 때에 하나님께서 라헬을 생각하셔서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님께서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고 하여 요셉이라고 불렀습니다.그 후 야곱이 처가살이를 청산하고 온 가족과 함께 짐승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에 라헬이 또 출산하게 되었지만 난산이었습니다. 라헬이 핏덩이 아들에게 젖 한번 물려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면서 ‘이 아들은 슬픔의 아들이로다’ 라며 그 이름을 ‘베노니’라고 불렀으나, 야곱은 열두 번째 아들을 안고 이름을 베냐민이라 불렀습니다.핏덩이 베냐민과 요셉을 두고 떠난 라헬은 슬픔을 안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 후에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가는 대상에게 팔려간 후에 야곱에게는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지하에 있는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통곡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무덤 속에서 라헬의 통곡은, 지금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나라도 잃고 자유도 잃고 신앙도 잃은 소망없는 이스라엘의 청년들을 위하여 울고 있는 모든 어머니를 대신하는 통곡으로 들었습니다.베들레헴의 통곡그 후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베들레헴 인근 라마의 땅에서 라헬은 다시 통곡합니다. 동방박사들을 만나 메시야 탄생을 알게 된 헤롯 왕은 첫 번 성탄에 위장된 평화를 앞세우고 권력의 야욕에 눈이 멀어서 베들레헴과 그 지경 안에 있는 두 살부터 그 아래의 모든 사내아이들을 죽입니다(마 2:16). 광란의 대학살 속에서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이리저리 좇기는 젊은 엄마들의 비명과 통곡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통곡은 칼날을 피하여 애굽으로 먼 길을 떠나는 어린 예수를 전송하는 눈물이 되었습니다.라마의 통곡 소리는 오늘 이 시대 역사에도 수없이 터져 나옵니다. 입시지옥에 시달리는 청소년, 취업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청년들, 권력과 금력이 공정한 경쟁을 무너뜨리는 사회를 향해 청년들의 절망감이 ‘이게 나라냐?’하는 비관적인 눈물을 쏟고, 뺑소니 차량에 아빠를 잃고 남편을 잃고 ‘목격자를 찾습니다’고 울부짖는 젊은 부인과 아이들의 눈물,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패를 나누어 싸움질을 그칠 줄 모르는 위정자들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한숨, 촛불과 횃불이 난무해도 내 심령은 어두워 갈 길을 잃은 무언의 시위자들, 양심을 팔아버리고 오히려 ‘인정이 매말라야 잘 살 수 있다’고 믿는 비양심적인 인간들이 득세하는 이 세상이 시베리아의 찬바람보다 더 매섭습니다. 라마의 통곡 소리가 어찌 그 옛날 베들레헴에서만 들리겠습니까? 이 온 나라에 사무쳐 있습니다. 이 아픔과 통곡을 누가 멈추게 하고 싸매 줄 수 있습니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어둠 속에 빛으로 오신 예수, 통곡 속에 소망으로 임하신 임마누엘 예수, 성탄은 우리의 아픔과 통곡 속에서 예수를 만나는 사건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아픔이 없고 눈물이 없는 상태가 평화가 아니라, 아픔이 있는 곳일지라도 그 아픔에 위로자로 동참해 주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거기에 그 아픔을 이기고 그 통곡을 그치고 나아가는 용기와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과 평화가 임할 것임을 확신합니다. 이사야 7:14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제 라마의 통곡 소리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천사들의 합창이 되어 온 세상에 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마 5:4). 이것이 성탄입니다. 이 혼란한 시대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임마누엘의 성탄을 맞습니다. 여기에 진정한 평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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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16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20
    그런데 하나님께서 스스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벧전 1:16)라고 하신 대로 거룩하심이 하나님의 속성의 대표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한 마디로 거룩한 하나님이시다. 이 거룩은 의에 기초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사 5:16)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는 의의 하나님(시 4:1)으로 나타나고, 신약에서는 은혜가 전면에 나타나면서 사랑이 강조되고, 사도 요한은 아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 16)라고 선언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대속하는 큰 사랑을 보이셨기 대문이다.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고, 의의 하나님이시고, 사랑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성부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고, 의의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나타내고, 사랑이신 하나님은 보혜사이신 성령 하나님을 나타낸다.그런데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정의(현상)와 의(본질)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인자(현상)와 사랑(본질)을 같은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의와 사랑을 대립되는 개념으로 보면서 의보다 사랑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을 베푸는 데는 힘쓰지만, 의를 세우는 데, 즉 불의에 항거하는 데는 잘 나서려 하지 아니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사랑을 베푸는 데는 칭찬이 따르지만, 불의에 항거하는 데는 고난이 따르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사랑이 사적인 것이고 개인적인 것이라면, 의는 공적인 것이고 공동체적인 것이다.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요일 5:3).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의 뜻을 밝혀놓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주의 모든 계명들이 의로우시며”(시 119:172),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기(롬 7:12)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다.우리는 사랑이신 하나님만 강조하고 의의 하나님을 소홀히 하다가 거룩히신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의의 하나님을 다시 찾으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추구해야 한다. 거룩의 회복이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하기 위한 시급한 과제이다.“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는 말씀에 따라, 이 시대의 세속성에 물들지 아니하고 거룩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이 거룩은 의를 추구함으로 회복된다.예수님게서 산상수훈의 결론적인 말씀으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는 말씀에 따라 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 이 의를 회복하는 것이 복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회복되어야 교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복음이 하나님의 복음일지라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성육하시고 오셔서 이루신 것이 복음의 주된 내용이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더 많이 소개된다. 예수님께서는 태초에 계신 말씀으로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내용으로는 ‘말씀’과 ‘십자가’와 ‘부활’이 있다.1. 말씀: 로고스와 레마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첫 내용은 말씀이다. 그것은 말씀은 우리를 거룩하게 할 뿐만 아니라(요 17:17), 또한 생명의 말씀으로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rhema)은 영이요 생명(zoe)이라”(요 6:63)고 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태초에 계신 말씀이시고(요 1:1),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내용인 말씀과 십자가와 부활 가운데 말씀이 가장 중요하다. 말씀의 회복이 없이는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말씀에 영적인 생명이 들어 있다는 사실과 그 영적 생명을 전달하는 레마를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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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07
  • ■ 기고/ 추수감사절의 근대적 유래
    본래 감사절의 유래는 구약시대 맥추절부터이다. 맥추절(the Feast of Harvest)은 5월 중순에서 6월 중순 밀(wheat)추수가 끝날 무렵, 우량품들로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추수 감사제이다(출 23:16, 34:22). 그러나 그 근대적 유래는 북미 대륙을 개척한 청교도들(Pilgrims)로부터 유래한다.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지의 북미 대륙으로 온 경건한 신앙인들이었다(청교도란 영어로 Puritan이라고 하는데, 그 말은 purify; 정화하다, 깨끗하게 하다, 순결하게 하다에서 비롯됐다).헨리 8세의 박해헨리 8세(Henry 8, 1491-1547, 재위 1509-1547)는 자기 아내 캐터린(Catherine)과 이혼하고(1527), 앤 보레인(Anne Boleyn)과 재혼했다(1533). 청교도들은 정당하지 못한 이혼과 재혼을 반대했다. 헨리 8세는 그 일로 로마가톨릭으로부터 파문(성찬참여 정지 등)은 당했으나, 생애 동안 천주교 교리를 신봉했다. 그는 또 1534년 자신(영국의 왕인 동시에 수장(首長)이 된다)을 영국 교회의 머리(the head of the Church of England)라 주장하면서, 로마가톨릭의 교황청과 행정적 관계를 단절해버렸다. 동시에 영국교회는 캔터베리(Canterbury)와 요크(York) 회의에서 헨리 8세를 교회의 수장(首長)으로 모실 것을 결의하고, 교황은 영적 문제에 권리가 없음을 선언했다.메리 여왕(Queen Merry, 재위 1553-1558)은 헨리 8세와 그의 첫 아내 캐터린(Catherine) 사이에 태어난 딸로, 고집불통의 잔인한 여왕이었다. 그녀는 폴(Pole) 추기경을 앞세워 천주교 회복을 도모했다. 그때 개신교 지도자들인 토마스 크램머(Thomas Crammer), 라티머(Latimer), 리들리(Ridley) 등 약 200명의 감독들, 학자들 그리고 남녀 성도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여 화형(火刑)시켰다. 그때 청교도들은 제네바, 취리히, 프랑크푸르트 등으로 망명하게 됐다.엘리자베스(Elizabeth 1, 1533-1603)는 메리 여왕에 이어 1558년 11월 17일 왕위에 즉위한 후, 1559년 4월 29일 수장령(The Act of Supremacy)을 공포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8세와 둘째 부인 앤 볼레인(Anne Boleyn)의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수장령이란 왕이 종교와 정치에 유일한 통치자임을 공포한 법령이다. 그리하여 왕이 국가의 머리도 되고 동시에 (영국)교회의 머리도 됐다.영국교회(Anglican church)는 왕이 교회의 머리요, 교회의 감독들은 왕을 대신하여 교회를 다스리기 때문에 감독교회(Episcopal Church)라고도 부른다.영국 정부와 영국 교회는 상호 결탁하여 정교분리 원칙을 반대하는 청교도들을 반대·탄압·투옥·고문 등 심한 핍박을 가하였다. 그리하여 헨리 8세, 제임스 1세(1600-1649), 찰스 1세(1625-1649) 때 청교도들은 북아메리카로 많이 떠났는데, 1620-1640년대까지 북미로 건너간 청교도들은 약 22,000-50,000명에 달한다.그들은 영국을 떠나기 전, “나라는 있어도 왕이 없는 곳, 교회는 있어도 교황이 없는 곳,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곳, 기름진 땅과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 도착하도록” 기도했고, 그러기 위해 북미 대륙으로 건너갔다.102명의 청교도들과 메이플라워호북미 대륙을 발견한 것은 스페인의 콜럼버스(Columbus, A.D. 1446-1506)였고, 북미로 처음 이주한 사람들은 영국 청교도들이었다. 이들을 가리켜 순례자의 조상들(Pilgrim's Fathers)이라 부른다. 이들은 1600년대 초기부터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Atlantic Ocean)을 건너 미 대륙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102명의 청교도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미 대륙으로 이주했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다.청교도들은 영국 남해안 플리머스(Plymouth) 항구에서 1620년 8월 5일(지금 달력으로 8월 15일) 스피드웰(Speedwell)과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미 대륙을 향해 항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초반에 배가 고장나 물이 새 다시 귀항했다. 한달 후인 1620년 9월 6일, 결국 메이플라워호만 25명의 선원과 102명의 청교도들이 승선하여 미국 동해(대서양) 중부지방 버지니아(Virginia)를 목적지로 삼고 재차 출발했다. 남자 78명과 여자 24명 등 전체 102명이 출발했으나, 항해 도중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탄생했다.그들은 그해 11월 11일 버지니아 대신 미국 동북부 메사츄세츠 케이퍼 카드(Cape Cod) 해안가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5일간 주위를 답사한 후 11월 16일 현재의 플리머스(Plymouth)에 정착했다. 63일간 3400마일(5,440km)의 멀고도 긴, 그리고 위험한 항해 끝에 돛을 내렸던 것이다. 그들은 영국을 떠날 때 항구 이름을 따라, 그곳을 플리머스라 명명했다.미국 동해안은 항상 북서풍이 불기 때문에, 남쪽 버지니아로 가려던 배는 북쪽 메사추세츠에 도달했다. 그들은 토요일에 도착했지만, 주일을 지키기 위해 길고도 지루하고도 위험한 항해를 거쳤음에도 주일을 배 안에서 보냈다.그들은 항해 동안의 시간들을 어떻게 보냈는가? 그들은 찬송을 많이 불렀다. “우리는 대부분 시편을 찬송으로 불렀다. 주일은 모두가 찬송만을 불렀다. 그리고 기도를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청교도 개척자들)은 도착한 후 형언할 수 없이 어려운 난관에 부딪쳤다. 11월 중순에 도착한 그들은 강풍과 눈보라 치는 혹독한 추위, 질병과 식량 부족, 원주민들의 냉대, 들짐승들의 위험, 거할 집 하나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결국 그해(1620-1621) 겨울, 2-3개월 이내에 102명 중 절반 이상이 운명을 달리했다.특히 1-2월의 혹독한 겨울에는 하루에 2-3명씩 죽어나갔다. 생존자는 50명 뿐이었고, 그들 중 다수도 지치고 건강이 쇠약해지고 질병으로 신음했다. 그러나 6-7명의 건장한 사람들이 땔감을 마련하고, 침실을 만들고, 병자들을 간호하며, 병자들과 노약자들의 옷을 빨아입히고, 칠면조와 사슴 등을 사냥하여 고기를 조달하는 등 자발적으로 헌신했다. 이들 경건한 청교도는 굳건한 믿음 위에 마음을 하나로 통일한 불굴의 의지를 지녔다. 엄동설한도 지나고 따스한 봄날이 찾아오자, 생존한 청교도들은 땅을 개간하고 싸를 뿌리고 가꾸어 여름과 가을 기대 이상에 넘치는 추수를 하게 됐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눈물로 감사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시 126:6)”. 엄동설한에 황무지에서 살아남은 것,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여 주신 것, 미 대륙 개척자들로 삼아주신 것 등을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깊이 감사드렸다.청교도들은 북아메리카로 건너 온 다음 해인 1661년 가을, 하나님께 첫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렸다. 추수한 첫 곡식들과 채소들 중 최고 우량품들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께 드렸다. 그들은 기도 중에 “우리는 대서양을 건너와 여러 친구들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첫 열매를 드리나이다” 라고 기도했다.청교도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첫 추수 감사예배를 드렸다. 첫날인 주일에는 온종일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찬송부르고, 말씀 받아 묵상했다. 둘째날에는 칠면조 요리, 감자, 옥수수 요리 등을 만들어 서로 나눠먹고, 셋째날에는 인디언 추장 마싸소이트 등을 초대해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친교했다. 90명의 원주민 인디언들은 칠면조 구운 요리와 호박파이(pumpkin pie)를 가져와 같이 친교를 나눴다. 그것이 유래가 되어 추수감사절에는 칠면조 고기와 호박 파이를 먹게 됐다.청교도들은 통나무들을 잘라 먼저 교회를 짓고, 학교를 지은 다음에야 자기들의 집을 지었다. 그들이야말로 북아메리카의 개척자들이요, 믿음의 선조들이었다. 그들은 철저한 주일 성수, 십일조, 경건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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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24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19
    그러므로 의란 윤리적 의미에서 인간의 올바른 자세를 말한다. 이 의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으로 의의 ‘선언적(법정적) 의미’이고, 둘째는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성화)으로 의의 ‘내용적(윤리적) 의미’이고, 셋째는 의의 ‘관계적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 곧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됨'을 뜻한다. 이 관계적 의미가 의의 본질적 내용이다.그리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성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가 누구인가를 아는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성도의 자기 정체성은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리스도의 제자이고, 성령의 전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도의 정체성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이다.그런데 현대교회의 목회자들의 설교에 하나님 나라 복음이 빠져 있다는 비판이 많다. 정작 바울의 칭의의 복음이 사실은 우리 죄인들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인 되게 하는 것임을, 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임을 모르고 있다. 의인은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삶은 구체적으로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의 법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마 22:37-40), 곧 이중사랑계명을 지키는 삶인데, 그러한 강해와 권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아니한다. 그러나 복음의 본질적 내용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인 의이고, 또한 그것은 이 중 사랑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다.하나님 사랑의 반대말은 우상숭배이다. 그리고 모든 우상은 사탄이 우리에게 자신의 지배권을 확보하는 수단이다. 그런데 에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경계한 우상은 신상이나 불상이 아니라, 맘몬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눅 16:13).오늘날 교회에 만연한 번영신학과 공로신학, 상급신학이 바로 맘몬 우상숭배의 표현들이다. 하나님에게서가 아니라 돈에서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얻고자 하는 것이 맘몬 신앙의 핵심이다. 사도 바울이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라고 말한 부름의 상은 구원을 말하지, 구원에 더하여 받는 어떤 부상이 아니다. 그리고 번영신학에 따르면 바울은 실패자에 지나지 않게 된다.특히 많은 한국교회의 구원론은 고대의 영지주의의 구원론에다가 중세 가톨릭의 공로-상급신학을 합성하여 놓은 것이고, 그들의 윤리는 세 가지, 즉 주일성수, 헌금, 전도 ‘하기’와 세 가지, 즉 술, 담배, 제사 ‘안하기’로 축약된 바리새파적 경건주의요, 그들의 성경해석은 성경의 정확무오 교리만 앞세우며 문자주의와 율법주의를 주입하는 것이어서, 성도들을 성경의 이곳저곳 본문들을 들이대며 접근하는 갖가지 이단사설의 쉬운 제물이 되게 하는 것이며, 그들의 영성은 다분히 샤마니즘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다.하나님의 복음: 거룩한 의와 사랑(하나님의 속성)사도 마가는 마가복음의 시작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면서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말한다. 또 사도 바울은 그의 아들의 복음(롬 1:9), 그리스도의 복음(롬 15:19, 고전 9:12, 고후 2:12, 9:13, 10:14, 빌 1:27, 살전 3:2),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고후 4:4), 주 예수의 복음(살후 1:8)이라고 말한다. 또한 사도 바울과 베드로는 하나님의 복음(행 20:24, 롬 1:1, 15:16, 살전 2:2,8, 벧전 4:7)이라고 말한다.그것은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으로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할 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말씀하시고 행동하셨다는 좋은 소식이 복음인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그것은 복음이 먼저 하나님의 복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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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24
  • 기고/ 정 학 채 목사
    성경 엡 2:5에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하셨고 8절을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셨다.즉 군원 받은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9절에 보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다. 그렇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로 된 것이다. 우리의 행위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해서이다.또한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권한이 아니라 우리는 그저 구원 받음에 감사하고 주님께 충성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파나 교단을 떠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유기적 관계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면 다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 부족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주님나라에 들어가는 날까지는 누구나 완벽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다. 조금 부족해도 마음에 안 들어도 서로 보완하며 격려하며 이해하면서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야하는 존재들이다.요즘 한국교회가 하나가 되자고 난리이다.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하나 되지 못했는지 모르지만(주님께서는 아시겠지만)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엡 4:5에 보면 “주도 하나이요 세례도 한”라고 하셨다.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리 교파가 많고 교단이 많을까? 정녕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결국 모든 교파고 교단도 인간의 아집 때문에 나온 것이다. 아니 인간이 아니라 목회자들이 만든 것으로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보면 보수적인 분들은 진보적인 분들을 이단이라고 하고 진보적인 분들은 보수적인 분들을 바리새인이라고 한 것이 생각난다. 그러다보니 지금 현재 장로교단만 해도 수백개나 있으니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그런데 요즘 한국교회가 하나가 되자고 한다. 너무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여기에 조건이 붙어서는 안된다. 들리는 말에 대형교단끼리 하자는 등 이단을 빼고 하자는 등, 물론 이단은 같이 할 수 없는 것이 기정사실이다.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이단의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은 누구나이다. 그가 죄인이든 무당이든 점쟁이든 이단 사이비종교인이든 타 종교인이든 누구나이다.그런데 목회자가 너는 되고 너는 안 된다는 식으로 편을 가르면 되겠는가? 기준이 무엇인가? 언젠가부터 우리나라에 이단 감별사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이단을 만들기도 하고 사면도 하고 하는데 도대체 그들에게 누가 그런 권한을 주었는가? 물론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을 지키기 위해 필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 목회자들이 신앙의 양심으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또 한 가지 한국교리가 하나가 되려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교단이나 단체나 개인은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실수로 혹은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이단으로 정죄 받았다 하더라도 본인들이 이제는 한국교회의 지도를 받고 건전한 그리스도인으로 한국교회와 하나가 되겠다고 회개하고 돌아오면 마땅히 받아 줘야 한다.그런데 우리가 무슨 권한으로 회개하고 이젠 예수님 잘 믿겠다는 그들을 아니다. 너희는 그대로 이단을 하라고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는가? 특별히 4개 단체를 사면했다가 다시 이단으로 정죄한 통합교단에게 다시 묻고 싶다. 정말 성경을 믿으십니까?그리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이단들이 있어서 하나가 될 수 없다고 공식적으로 말했던 한국교회연합회(한교연) 조일래 대표회장에게도 묻고 싶다. 한기총에 어떤 이단이 있어서 하나가 되지 못하는가? 한기총은 건전한 교단들이 모인 연합체로 각 교단의 정체성을 인정해주고 한국교회가 하나가 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단체이다. 한기총은 각 교단을 존중한다. 조일래 한교연 대표회장에게 묻고 싶다. 귀 교단이 소위 대형교단이라는 한국의 교단들 속에는 과거 착하고 죄 안 짓고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람들만 있는가?아닐 것이다. 필자가 아는 것 만해도 과거 승려였던 이들이 목회도 하고 과거 무당이었던 사람도, 깡패였던 사람도 예수님께 구원받아 함께 신앙생활하고 있지 않는가? 주님은 마 7:3에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셨다. 한국교회가 하나가 되는 일은 대형교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누구 때문도 아니다 다만 이해와 사랑과 용서와 화합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누가 주님 앞에 완벽할까? 누가 누구를 정죄하고 판단할 수 있는가? 누가 회개하고 주님께 오는 자를 막을 수 있겠는가? 정말 하나가 되고자 하면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는 편 가르기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대형교단, 작은 교단을 갈라서는 안 될 것이다. 진정 하나 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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