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이효상 목사.jpg
 
당신은 까칠하고 예민하다. 가까이 다가가기엔 너무 부담스럽다. 뭘 그리 아는 게 많은 건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꼭 옳은 건지는 잘 모르지만 그대를 보면 그냥 좋습니다. 그냥 말없이 받아주면 안되는 걸까. 그대를 향해 다른 이들이 너무 계산이 빠르다고 하는 말은 칭찬이 아닌 것 같다. 매사에 시념이 너무 강해 무슨 장사꾼이나 판사처럼 행동하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어려운 시대를 다들 힘들어할 때, 까칠하고 예민하게 행동하면 자신이 돋보이고 남들이 알아준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행동하는 걸까.

 

이런 관계에 대해 20 여년 가까이 강연을 해왔다. 1천여회가 넘는 강의와 수많은 모임을 통해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만난다. 직장인들도 만나보면 보다는 관계때문에 힘들다는 고백을 듣게 된다. 많은 주부들의 심각한 고민도 가사 때문에, 경제문제보다도 가족과 만족스럽지 못한 관계때문이란다.

 

특히 코로나로 근접 접촉없이 소통이 계속되면서 우리 사회의 관계형성은 어떻게 변할까? 형식적이고 불필요한 대면접촉들이 없어져서 좋다는 견해도 있지만, 직접 만나지 않고 비대면 방식은 관계를 단절시키고 고립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빠지게 한다. 직접 만나지 않으니 상호간에 공감이나 연결성이 별로 없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 그동안 비접촉 방식은 대면을 보완하는 정도의 교류 방식이었고 사람들은 접촉을 통해 친밀감을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인간은 여전히 사회적 동물이며, 서로 간의 협력을 기반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선택의 차원이었던 간접적인 대면 방식이 일상화되면서, 안전함과 편리함의 이면에서 느끼는 사람들의 관계단절감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변화와 적응의 갈림길에 서 있다.

 

모두들 관계가 서툴다. 친밀한 인간관계를 이루지 못하다보니 고독과 소외감 속에 괴로운 인생을 산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관계 갈등 때문에 괴로워한다. 인간관계에서 갈등은 항상 있고 그것이 정상처럼 느껴진다. 어찌보면 서로의 생각과 문화, 살아온 라이프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요인은 생겨날 수 밖에 없다. 흔히들 착각한다. 내가 변화시킬 수 있다고. ‘다른이를 나처럼 변화시키려 욕심내지 말고 다른 이는 어차피 나와 다른이 다. 그 다름과 싸우면 평생 불행하다. ‘다름그 자체를 인정해야 행복해진다.

 

이런 문제는 먼저 나 자신과의 관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실제로 나 자신과 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법은 사실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그대로 반영한다.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며, 나 자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방식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어려운 건 다른이의 문제가 아니라 본인에게 달려 있는 건 아닐까.

 

한국인 누구에게나 특유의 까칠하고 예민한 기질(야성?)이 있다. 그래서 부부나, 자녀, 타인과의 관계회복이 더디고 어렵다. 어떻게 이런 관계의 벽을 넘을 수 있을까. 까칠하고 예민성을 줄이면서 더 나은 삶을 살 수는 없을까. ‘예민함의 성격적 특성은 감정이 침체되고 불만이 많아지는 우울증 증상과 비슷한 결과를 낳기에 예민함만 잘 다스린다면 우울증 치료 효과까지 기대해 볼 수 있다. 우울증 진단을 받은 환자 다수가 성격이 예민한가물으면 그렇다고 답하지만, “우울한가라고 질문을 바꾸면 아니다라고 답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50대가 되면 남녀 모두 갱년기와 맞물려 까칠함에 예민함이 더 해진다. 서양문화에 비해 감정 표현이 많지 않은 한국인의 경우 감정의 찌꺼기가 쌓이다보니 특성상(우울감을 느끼는 것보다는) 몸이 아픈 신체반응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더 흔하다. 이런 예민하거나 까칠한 기질이 어릴 때 형성된다면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내게 된다. 꽈배기장사를 하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배배 꼬여 있다.

 

타인과의 관계가 그렇다. 말을 놓으면 관계가 가까워지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긴장이 풀리게 되고 예의를 벗어나 무례하게 된다. 서로 친하다고 가볍게 상대하게 된다. 좋을 때야 웃지만, 감정이 틀어질 때는 상대 눈치 안 보고 욕설을 내뱉는 일도 어렵지 않다. 말과 행동은 한번 거칠어지면 되돌려지지 않는다. 거친 말에 중독되면 어지간한 욕설이나 육두문자로는 표출된다. 이런 현상은 그 사람의 열심의 단계를 넘어 욕심이 밑바닥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를 단절시키고 평상심을 잃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적 욕심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흔히 겪는 갈등은 이런 평상심의 상실’, ‘사적욕심’, ‘양심의 불감증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동시에 여기서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보다 언어의 폭력성’, ‘말의 횡포’, ‘예절의 상실’, ‘관계의 단절에 빠져 들게 한다.

 

어떤 사람이라도 비난, 비평, 불평 세 가지만 안 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링컨의 성공비결은 절대 타인을 비판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판단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이나 판단 받지 않을 것이라는 성경말씀을 삶의 원칙으로 삼았다.

 

흥미로운 것은 말이란 것이 그렇다. 불특정 다수앞에서 뒷담화로 남을 비난할 때는 우월해지는 것 같은 쾌감마저 느끼겠지만, 나는 저 사람을 맘대로 비난해도, 반대로 내가 비난을 들으면 그게 진실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이 처음처럼 서럽고 억울하고 분노하게 된다. 그래서 말하는 사람은 남의 인생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고, 성숙한 관계를 위해 한번 더 깊이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까칠하고 예민한 그대가 범하는 실수는, 타인의 인생을 모르면서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주워들은 몇 마디로 타인의 잘못이나 부족함을 지적하는 사람도, 그걸 듣는 사람도 모두 거칠다. 그래서 정작 전해져야 할 진심도, 고쳐져야 할 문제의 본질도 사라지고 서로의 가슴과 머리에 분노의 성냥불을 확 집어던져 불길을 일으키고는 서로를 홀라당 태워 죽인다. 우리 모두는 타죽지 않으려고 누군가 성냥불을 탁 그었을 때, 파르르 떤다. 두려운 것이다. 그로인해 뒤끝이 생긴다. 혹시 당신은 뒤끝이 작렬하지는 않은가. 잘못이 있다면 조용히 물어보고 충고하고,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자.

 

까칠하고 예민한 우리는 관계에서 정말 중요한 사과용서도 잘못한다. 왜냐하면 ‘()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의무책임에 대해서는 아주 낯설고,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는 것도 여전히 어색하다. 우리들 속에는 화 잘 내고, 원망 잘 하고, 남 탓 잘 하고, 남 핑계 대는 거 좋아하고, 쉽게 서운해 하는 피가 흐르고 있는 것 아닐까. 자유니, 평등이니, 공동체니, 책임이니 하는 것을 몸에 익힌 지 고작 75년이기 때문일까.

 

까칠하고 예민한 우리는 한 번도 주인공으로 살아본 적 없다가 이제 겨우 내 집 갖고, 내 차 갖고, 내 가족 부양하며 안정된 자리를 갖고 살게 된 사람들. 그래서 잠시만 한 눈 팔면 누군가 빼앗아 갈 것 같은 불안과 경쟁심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그 뜨거운 피. 그래서 상대의 눈치보며 긴장하고 경계하고, 그러면서도 남의 일에는 사사건건 간섭하면서도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하면 부르르 주먹 쥐고 뜨거운 분노부터 보여주는 마치 자신의 몸을 부풀려 크게 보이려는 개구리처럼, 건드리면 가시 확 세우는 고슴도치들처럼 그렇게 살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보면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거짓으로 고발돼 왔다. 그러나 정말 위험한 것은 거짓말로 여러분을 사로잡고, 있지도 않은 죄로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다. (거짓 고발이기 때문에)그런 그림자와 싸워야 하고 대답할 자가 없는 상태에서 논박해야 한다. 내가 파멸 당하면 그것은 비방 때문이며, 앞으로 더 많은 선량한 사람을 죽게 할 것이다.”

 

까칠하고 예민한 그대가 보다 성숙하고 더 깊은 인간관계로 나가려면, ‘이권을 나눠먹는 그런 야바위꾼 수준이 아니라 칭찬과 경청, 상대방을 세워주는 참다운 지혜가 필요해 보인다. 칭찬은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천박한 아첨이나 비위를 맞추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진심에서 나오는 격려와 관심의 표현이며,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성장시키고자 하는 성숙한 삶의 표현이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고아와 빈자의 어머니로서 살았던 데레사(Teresa) 수녀는 자신의 업적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한 일은 사람들이 와서 무언가 내게 말 할 때 그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잘 들어준 것 뿐이라고 했다. 인류애를 몸소 실천하는 그녀가 배려한 일은 어려움 당한 이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는 것, ‘경청그 한 가지였다.

 

까칠하고 예민한 그대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상대방의 필요를 채울 때, 그 사람을 얻을 수 있고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려면, ‘나를 따르라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성공시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람들 속에 있는 가치와 능력을 발견하고 그들로 성공할 수 있도록 자질을 키워주고 세워주는 것이다. 내가 주인공이 되고, 내가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그가 주인공이 되게 하자.

 

까칠하고 예민한 그대가 웬지모를 원인을 알 수 없어 신경 쓰이는 불면증과 몸이 자꾸 아플 때, 병원을 찾아다니기보다는 관계의 긴장이나 마음의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충동적으로 일터를 도피하거나 관둘 생각은 절대 하지 말고, 타인의 반응에 과도한 의미를 두지 않는 연습하기 등 실생활에서 예민함을 최소화하고 줄이는 방법이 필요해 보인다.

 

까칠함과 예민성을 줄이면서 더 나은 삶을 살 수는 없을까. 삐딱한 마음에서 오는 까칠함유연함으로, ‘예민함을 조금 더 둔감함으로 바로 잡아보는 것은 어떨까. 어떤 사건이든 마음의 슬기로움희극을 만들기도 하고 비극을 만들기도 한다. ‘죄인웬수도 친구로 변하게 하는 관계의 벽을넘는 건 순전히 마음먹기에 달렸다. 그래서 사람은 행복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행복하다.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이효상 칼럼] 까칠하고 예민한 그대를 위하여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