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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회 논평] 대한민국호를 바뀐 정권이 바로 세울 수 있을까?
    6월 3일 치러진 대선에서 대통령이 결정되었다. 수많은 ‘사법리스크’와 부정·부패의 큰 결함을 가지고 있는데도, 특정 지역의 절대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당초에는 절반에서 60%대가 넘는 지지로 당선될 것이란 전망은 깨지고 말았다. 절반 가까운 국민들은 그를 지지하지 않은 것이다. 이번의 대통령 당선은 당시 여당의 갈팡질팡이 빚은 결과이기도 하다.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자신들이 뽑은 대선후보를 불법적으로 바꿔치기하려는 시도까지 한, 정체성 불명의 정당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새로운 대통령은 다수결에 의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그에 대한 사법적 무거운 굴레는 여전히 남아 있다. 방송 3사가 선거 당일 5,190명을 대상으로 ‘이미 진행 중인 재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을 때, 응답자의 63.9%가 재판을 계속해야 한다고 답했다. 심지어 민주당 지지자들 중에서도 42.7%가 재판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고 보면 대통령 당선인이 얼마나 취약한 상태인가를 알 수 있다. 정말 사법부가 법과 양심에 흐트러지지 않는 결정을 내린다면, 그 결과는 얼마나 더 큰 혼란이 될 것이며, 국가적 위신을 떨어트리게 될까? 그런데도 여당에서는 대법원의 법관을 현재 14명에서 30~100명으로 늘리는 ‘입법발의’를 하였다. 그 엄청나게 늘어나는 법관을 모두 새로운 대통령이 임명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금은 완전히 입법부, 행정부를 차지했는데, 이제는 사법부조차 완전히 틀어쥐고 나가겠다는 시도가 아닌가? 전 정권과 지금은 야소(野小) 정당을 제2의 적폐로 몰아가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없고, 또다시 국민들을 분열시키는 결과가 될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대통령 당선인은 본인이 주장한 대로, 진보와 보수를 따지지 않는 절제와 포용과 협치를 실행해야 한다. 어느 언론의 말처럼 ‘권불 5년은 뭔가를 이루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지만, 뭐든 망치기에는 하염없이 긴 시간이라’고 했다. 우리는 지난 8년 사이 두 명의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여, 새로운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다. 신임 대통령은 이러한 점들을 감안하여, 함부로 권력을 남용하고, 지나친 욕심으로 국정을 망치지 않기를 바란다. 만약 그런 분위기가 감지된다면, 그를 지지하지 않았던 절반의 국민들이 결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황금 같은 시간을 지난 6개월간 한없는 다툼과 분열과 혼란으로 지새웠다. 이제는 그렇게 낭비할 시간이 없다. 국제적으로 냉혹하고, 국내적으로도 숱한 난제들이 쌓여 있다. 대통령은 국가의 미래와 국민들을 생각하며 ‘국민 머슴’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새로운 대통령은 국민을 무시하면 국민들로부터 막 바로 버림받는다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란다. 또한 기독교계에 약속한 ‘차별금지법’과 같은 악법(惡法)을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또 종교와 관련된 법들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우리 기독교는 애국의 종교로, 나라를 위하여, 국가 지도자를 위하여, 국가의 바른 정체성을 위하여 늘 기도하는 종교이다. 이 나라가 불행한 나라가 되지 않도록 더욱 힘써 기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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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5-06-2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평화에 이르는 새 길”
    명지대학교 정성철 교수께서 쓰신 ‘국가는 왜 싸우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한반도 평화로 가는 길에 대해서 로버트 저비스의 이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국가는 왜 싸우는가, 사회평론 아카데미) 로버트 저비스에 의하면 나선형 모델(Spiral 모델)과 억제 모델(Deterrence 모델)이 있습니다. 나선형 모델은 안보 딜레마에 기초하여 충돌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두 국가가 모두 자국의 안보를 위해 방어적 행동을 취하지만 이는 상대의 안보 불안을 야기 시킨다고 합니다. 결국 두 국가는 위기의 고조를 막지 못한 채 충돌에 이른다는 것이죠. 이러한 모델은 유화와 관용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남북한 모두 평화를 희망하더라도 오해와 불신으로 상대의 방어적 행위를 공격적으로 바라보게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한 경우 남북한은 번갈아 가며 그러한 오해에 따른 대응을 취하면서 소용돌이에 휘말린 채 충돌로 치닫게 되고 맙니다. 바로 그러한 비극은 상호 인정을 바탕으로 신뢰를 쌓아갈 때 피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억제 모델의 관점에서 평화는 상대의 공격에 맞서 싸울 결연한 의지를 보일 때 가능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상대의 도발에 미온적으로 대처한다면 결국 양측은 대규모 분쟁에 휩싸이고 맙니다. 상대방이 군사적 수단 자체를 고려하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압박하고 봉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 모델에 따르면 평화는 역설적이게도 싸울 준비를 마치고 결의에 찬 국가들 사이에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죠. 상대를 공격하여 압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과거 6.25 전쟁의 발발도 김일성이 승리할 수 있다는 오판에 따른 결과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과 미국이 적극적으로 북한의 공격이 엄청난 피해를 불러올 것이라는 메시지를 다양한 방법으로 전달하였을 때 한반도의 평화가 보장되어왔다는 것이죠. 이러한 두 가지의 주장은 모두 한반도 평화를 지향해 왔습니다. 하지만 상반된 가정에서 기초한 두 입장의 정책제안은 상이하다고 합니다. 나선형 모델에서 국가는 현상 유지를 희망하는 불안한 행위자이지만, 억제 모델에서 상대국은 불만족으로 현상 변경을 노리는 도전적 행위자입니다. 그래서 정성철 교수에 의하면 우리는 북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북한은 오랜 경제 실패와 외교 고립으로 생존을 갈구하는 국가인가? 이라크 전쟁과 후세인 처형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힌 실패 국가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핵과 미사일 개발을 지속하면서 체제 안정이 위협받을 경우 모험적 도발도 감행할 준비가 된 도전 국가인가? 그것도 아니면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외부 세력의 영향을 차단하며 정권 안보에 사활을 건 공격적 행위자로 볼 것인가?” 저자에 의하면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우리의 대북 통일정책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북한은 안보 불안에 시달리는 국가인가? 아니면 정권 안보를 추구하는 불만족 국가인가?” 이에 대한 우리 안에서 열린 토론이 합의에 이를 때 저자는 장기적 관점에서 지속 가능한 대북 통일 정책이 가능하다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다소 전문가적이고 어려운 글이긴 하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이 얼마나 아슬아슬했던가를 느낄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6.25 참전용사들의 헌신과 희생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지금의 번영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와 평화는 절대로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6.25 참전용사들의 수고와 지금도 우리나라를 지키고 있는 안보의 힘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국민 모두가 서로 단합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평화에 이르는 새 길입니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우리 교회는 6.25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19년째 맞이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행사들이 거룩한 낙수 효과를 이루며 나비효과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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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6-22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고전 16:21-24)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친필로 문안합니다. 바울은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실제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저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 승천과 재림에 관한 복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구원과 복을 받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믿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한 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라고 축복합니다. 바울은 저주와 축복 사이에 왜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마라나 타)라고 말했을까요? ‘마라나 타’는 고린도전서 16장에 한 번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b)는 ‘마라나 타’가 아닙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 22:20a)에 대한 응답입니다. 고린도전서의 ‘마라나 타’는 같은 의미의 아람어 음역이고, 요한계시록의 응답은 헬라어 표현입니다. ‘마라나 타’는 세 가지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첫째,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재림을 기다리는 간구입니다. 둘째, 우리 주님이 오셨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살려 주는 영”으로 재림하신 것을 확실하게 말한 것입니다. 재림 원어는 ‘와 계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에 임한 영 곧 살려 주는 영이 되어 오순절에 순식간에 임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우리 주님이 오신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지금 예배와 성만찬 가운데 임재하시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위와 같이 ‘마라나 타’의 미래, 완료, 현재형의 번역은 모두 합당합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알파와 오메가로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시공간 지평 융합 속에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입니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7-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저주와 축복 사이에 말한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그러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도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라고 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바울이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한 것은, 우리 죄를 씻기 위해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 되어주시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바울의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간구는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심을 증언한 것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살려 주는 영, 즉 다른 보혜사 성령으로 이미 오셔서 우리 가운데서 지금도 일하고 계신 것을 믿기 바랍니다. “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 그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행 2: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몸은 살려 주는 영이 되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곧 다른 보혜사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고전 6:19) 그래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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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5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위대한 헌신을 우리 모두의 가슴에
    “당신의 희생 위에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나라를 지켜낸 위대한 헌신, 그 숭고한 정신이 지금도, 여기에 새겨져 있습니다.”(내레이션) “나의 무덤엔 묘비가 쓸데없다. 고향에 묻히어 한 줌 흙 되면 그뿐. 이름 없는 꽃이나 한 그루 심어다오. 나는 썩어 거름이 되리니 고향의 봄에 한 송이 더 많은 꽃이 되리라.”(애국지사 노성원 묘비),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 강한 정신력으로 군인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굴욕적인 삶 대신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 고인의 숭고한 군인 정신은 바로 우리들의 살신성인의 정신이었습니다.”(애국지사 육군 중령 장철부 묘비),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국립서울현충원 현충탑) 윗 글은 지난 6월 6일 제70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있었던 애국지사들의 묘비를 성우가 내레이션한 내용입니다. 글로 보면 평범할지 모르지만 남자 성우, 여자 성우가 번갈아 가며 낭독하였을 때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몸을 불사른 참전용사들의 희생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19년째 해오고 있는 참전용사 초청행사야말로 얼마나 고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특별히 1951년 강원도 정선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전사하신 고 송영환 일병의 이야기를 듣고 마침내 눈물이 터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고 송영환 일병의 딸 송재숙 님은 아버지가 어머니와 혼인신고를 하지 못하고 입대하셔서 큰아버지의 호적에 올리고 평생을 살아왔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너무 애처롭기 그지없었습니다. 73년 만에 시신이 발굴이 되고 복원된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뵈니 너무나 알 수 없는 반가움에 눈물이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 많이 울었습니다. 성우가 이런 묘사를 할 때는 더더욱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고 송영환 일병은 세 살배기 외동딸을 남겨두고 6·25전쟁에 참전했습니다. 내가 지켜낸 국토 어딘가에 쓰러져 돌아갈 수 없게 될지라도 긴 세월 그리움과 아픔을 남기게 되더라도 기꺼이 총탄과 맞서며 나아갔던 이유, 반드시 지켜야 할 소중한 나의 나라, 소중한 나의 가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희생 위에서 대한민국이 다시 일어나 빛나고 있을 때 가족의 품으로, 국민의 곁으로 돌아온 고 송영환 일병, 당신의 위대한 헌신을 우리 모두의 가슴에 새깁니다.” “(송영환) 사랑하는 나의 빵구 재숙아, 아빠가 미안하다. 언제나 너를 사랑한다.” “(성우) 새하얀 꿈처럼 기억이 가물합니다. 너무도 그립고 보고 싶은 아버지의 얼굴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울먹이며 지내온 긴 세월이었습니다. 아버지, 오랜만에 인사를 드립니다. 할머니께 자주 듣곤 했어요. 고된 일 마치시고 집에 오시면 밤이 늦도록 저를 업고 동네를 다니시며 빵구 재숙아, 우리 빵구 재숙아 부르셨다지요. 아버지의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버지가 저를 얼마나 예뻐하고 아끼셨는지 알 것만 같습니다. 저는 풀잎만 보아도 아버지 목소리가 듣고 싶고 꽃잎만 보아도 아버지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 세 살 아이 빵구 재숙입니다. 1951년 아버지가 전사하셨을 때 엄마와의 혼인신고가 되어 있지 않아 큰아버지의 호적에 제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렇게 70년이 넘는 아득한 시간을 살아오다 이제라도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되어 형언할 수 없는 반가움에 눈물만이 흐릅니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은 게 있으셨겠지요. 아버지가 지켜내신 것, 대한민국이었고 엄마였고 할머니였고 빵구재숙이었겠지요. 그래서 그렇게 쏟아지는 포탄과 총탄에 아버지를 내던지셨겠지요. 지난달 어버이날에 그립던 아버지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복원된 아버지의 영정 사진 앞에서 저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 아버지가 그렇게 안아주시던 아이가 된 듯했습니다. 매년 비어 있는 아버지의 묘역에 저는 아버지께 드린 것 하나 없는 것 같아서 심심한 마음을 담아 하얀 카네이션 한 송이를 드렸습니다. 아버지의 희생으로 남겨지고 지켜지고 새롭게 태어난 수많은 생명들이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 감사합니다. 참 고맙습니다. 다시 뵈올 그날까지 편히 쉬세요.”(고 송영한 일병의 딸 송재숙)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헌신해 주신 모든 성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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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5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에벤에셀의 하나님’(삼상 7:12~14)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이긴 후에 도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사무엘이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운 기념비의 이름이 에벤에셀이며, 이는 그 지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일궈낸 승리는 단번에 시원하게 얻은 승리가 아닙니다. 사무엘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은 아벡에 진을 치고 있던 블레셋을 상대로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했던 전적이 있습니다(삼상 4:1-3). 그 뒤에도 이스라엘은 승리를 위해서 실로에 있던 언약궤를 이곳으로 가져왔지만, 재차 패배하고 언약궤마저 탈취당하게 됩니다. 즉 에벤에셀은 과거에 실패했던 자리였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치욕의 장소였고 적국인 블레셋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블레셋에게 참패해서, 이스라엘군 3만 4천 명이 죽었고,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던 하나님의 법궤마저 빼앗겼던 곳입니다. 인생으로 말한다면 커다란 상처와 약점이 있는 치욕스러운 부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뼈아픈 실패의 자리가 기도의 자리로 되었고, 주님의 전적인 도우심으로 인해 승리의 자리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큰 변화의 이면에는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을 통해 중요한 작업이 선행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여호와의 궤를 옮겨 언덕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두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해서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기 위해 세상과 세속으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과 교회를 잘 섬기고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온 집에 말하기를 “만일 너희가 여호와께 전심으로 돌아오려면, 너희 중에서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오직 그분만을 섬겨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내실 것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바알은 하늘의 폭풍과 비, 기후 등을 다스리는 신이며, 아스다롯은 땅의 곡식과 가축, 사랑과 전쟁을 다스리는 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현재 자기의 모습에서 제거해야 될 바알과 아스다롯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계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사무엘의 선포를 따라, 자신들이 숭배하던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게 됩니다. 이에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미스바로 모이게 해서, 그 날을 금식하면서 여호와께 범죄했음을 고백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어린 양을 잡아 여호와 하나님께 온전한 번제로 드린 후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 목놓아 기도드리자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응답하십니다. 얼마 후 다시 칼을 들고 찾아온 블레셋은 하나님이 일으키신 큰 천둥소리로 인해 어지럽게 되어, 결국 이스라엘에게 대패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천둥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최근 한국의 일부 지역에 여름철인데도 불구하고 콩알 반쪽만한 우박이 내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상식을 넘어 자연만물을 통해 역사하시기도 합니다. 이것이 에벤에셀이 승리의 장소로 되기까지의 내용입니다. 여기까지 우리를 도와주신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기적과 같은 큰 도움을 주실 것을 믿고 소망합니다. 그러한 승리를 위해 우리는 잘못한 부분에 대한 인식과 해결, 죄의 회개, 그리고 간절한 기도와 결심을 통해 하나님과 긴밀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고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의 길로 행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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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3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이제부터는 기도해 주세요”
    저는 국민일보 이사를 하다가 어찌어찌해서 CBS 이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CBS에서 이사장이 될 뻔도 했는데 저보다 더 훌륭한 분이 하시고 싶다고 해서 제가 양보를 했죠. 그런데 얼마 전부터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CBS 내부에서도 그렇고 또 주변 이사님들이 저를 지원해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장 후보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총회장도 그렇고 한번도 선거를 해 본 적이 없고 다 추대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양보하지 않는 한 분이 계셔서 어쩔 수 없이 선거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단 한 번이라도 누구를 만나서 밥을 먹은 적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선거 운동을 하나도 안 했다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CBS 이사장이 된 것입니다. 우리 합동 교단에서는 임시 이사장은 몰라도 정식으로 이사장으로 선출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초유적인 사건이죠. 제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요 수준 높은 이사님들께서 선견지명을 가지고 저를 선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실 우리 교인들에게 CBS 이사장 나간다고 아무런 말도 안 했거든요. 기도해 달라고 부탁도 안 했습니다. 더 많은 기도거리가 있는데 이걸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혼자만 기도하고 나갔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CBS 이사장으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CBS는 1954년 출범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영 방송사로 ‘올바름’(흔들림 없이 진실과 정의를 전하는 정도 언론), ‘따뜻함’(어두운 사회를 밝히고 약자를 감싸 안는 따뜻한 방송), ‘새로움’(미디어 혁신을 이끌어가며 다양한 소통창구 역할을 하는 미디어4.0)을 핵심 가치로 하며 기독교 선교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사랑과 자유, 정의를 구현하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방송사입니다. 특히 군사독재 권력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민주언론으로 한국 민주주의 발전과 자유 언론 창달에 크게 기여하며 방송 저널리즘의 꽃을 피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CBS는 시사·뉴스 채널(표준 FM)과 음악전문 채널(음악 FM)로 전문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다채널 특성화 전략을 펼치게 되었고 2000년 중반 이후부터 인터넷 뉴스, 지상파DMB, OBS 투자, 무료 신문, 스마트미디어 등 다양한 매체에 투자하며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CBS는 순수 복음을 전하면서도 공정한 뉴스와 시사, 음악을 통해서 기독교적 가치와 정신을 세상에 실현해 가고 교회와 세상과의 교량 역할을 하는 방송입니다. CBS의 장점은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비기독교인들도 CBS를 신뢰하고 많이 보고 경청하면서 대사회적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특정 이념이나 진영의 시선으로 CBS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공정한 뉴스 보도와 시사 프로그램도 결국은 CBS가 직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며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 목사가 CBS 이사장이 되면 CBS가 너무 보수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CBS가 너무 진보 쪽으로만 가는 것도 안 됩니다. 너무 극좌나 극우로 가면 중도로 와야 할 것입니다. 아니, 성경적 가치관과 세계관에 뿌리를 내리고 사회적, 문화적 다양성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을 섬기듯이, CBS 이사장의 직함이 있을 때 오히려 CBS를 더 잘 섬기고 직원들도 잘 섬기겠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어떻든지 CBS가 우리 교회가 섬기는 선교의 대상지라고 생각하면서 많은 사랑의 기도와 후원이 필요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제가 CBS 이사장으로 잘 섬길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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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6-08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양식을 나눠주는 삶’(요 4:27-38)
    우리의 사명은 전도와 선교입니다. 전도는 바로 나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딛 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항상 전도자를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영혼을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불바다에 던져지기 때문입니다.(계 20:15) 본문을 보면, “이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르는 이것이니라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품행이 좋지 않은 사마리아 여자의 말을 듣고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께 나아온 것을 보면, 그 여자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전력으로 증거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전도는 강권하는 것입니다. 나의 양식은(34절), 즉 나의 사명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아버지의 뜻은 무엇일까요? 잃은 자를 찾아내서 살리는 것이며,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39-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을 얻는 것은 육체가 죽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요 5:24) 그래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38절)은 영적인 추수를 위하여 수 세기 전부터 복음의 씨앗을 뿌린 사람들, 즉 예수님과 세례 요한, 구약의 모든 예언자를 가리킵니다. 제자들과 그 이후의 복음 사역자들은 영적인 추수에 참여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영적인 추수에 참여하도록 적극적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눅 19:10) 예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셔서 생명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보혈로 구속의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죄와 사탄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것이 우리의 구속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 전체를 대가로 지불하여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예수의 보혈은 우리를 죄에서 정결하게 해주셨습니다.(요일 1:7) 하나님과 교제를 갖게 해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습니다.”(엡 2: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도는 기회입니다. 함께 있는 자들에게 함께 있을 때 전도해야 합니다. 같은 집에 살지만 전도하지 않고, 같은 장소에서 일하지만 전도하지 않으면 영원히 분리되고 맙니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눅 17:34-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도는 기쁨입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이 돌아올 때 주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양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한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니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 8:4-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성은 혼합 종교 영향을 많이 받은 곳입니다. 그러나 빌립이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 성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도 복음을 통해 화해되었습니다. 우리도 사마리아 여자처럼, 빌립처럼 복음을 담대하게 전해서 영원토록 빛나기 바랍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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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1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윤동주처럼, 이육사처럼
    저는 윤동주를 만나본 적도 없고 그에 대한 연구를 집중적으로 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윤동주에 관한 책을 두루두루 읽었습니다. 그리고 윤동주의 삶의 흔적이 묻어 있는 용정 명동촌, 그가 다니던 교회, 용정학교, 연희전문학교, 일본 후쿠오카 감옥, 릿쿄대학까지 다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윤동주 특강”까지 했고요. 그리고 ‘별빛 언덕 위에 쓴 이름’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제 안에 윤동주 시심이 들어오고, 제가 윤동주 시 속에 들어가서 시적 대화를 하며 차마 윤동주가 말하지 못한 내용을 시적 화자가 되어 ‘다시, 별 헤는 밤’이라는 시집을 썼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누구에게 미안함이 들었냐면, 이육사 시인에게 죄송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이육사 시인은 아주 강인한 성품을 지닌 실천적인 시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만 쓴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그의 막내딸 이옥비 여사에 의하면, 20년 동안 총 17번이나 수감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육사의 원래 본명은 이원록인데, 그가 처음으로 감옥에 갔을 때 수감번호가 264번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제에 저항하는 의미로 이름을 이육사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시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 시를 쓰게 된 문학적 영감과 독립운동의 정신적 동기가 성경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의 딸 이옥비 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중국어 성경을 늘 품고 다니며 틈틈이 성경을 읽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독립운동을 하다 베이징 감옥에 수감 되어 견딜 수 없는 고문과 매를 맞다가 1944년 1월 16일, 40세의 나이로 순국을 합니다. 윤동주의 시가 개인적이고 보편적 인류의 가치를 읊었다면, 이육사는 그야말로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시의 지평이 더 넓고 웅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는 잔인하다 할 정도로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미안한 마음에 몇 년 전에 안동에 있는 이육사 문학기념관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를 다시 한번 보았습니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역사를 기록하거나 서술한 게 아니라 어떻게 자신의 애국적 혼을 시적으로 웅장하게 담아낼 수 있었는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별히 ‘광야’ 같은 시를 보면 그 광활한 시 세계에 경탄하게 됩니다. “까마득한 날에 /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모든 산맥(山脈)들이 /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 지금 눈 나리고 / 매화(梅花) 향기 홀로 아득하니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 이 광야(曠野)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여라.” 그의 시는 원시적 광야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처음 하늘이 열리고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 광야는 바다로 향하는 산맥마저 차마 범하지 못하는 순결한 땅이었습니다. 그 위로 끊임없는 세월이 흐르고 사계가 흐르면서 드디어 역사의 강물이 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 광야에 지금 눈이 내립니다. 그런데 겨울 광야에 매화가 필 수 없지만 매화 향기가 가득하다는 것은 그 어떤 폭압과 압제에도 굴하지 않는 독립운동가들의 지조와 자신의 내면의 절개를 보여줍니다. 또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기독교의 메시야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에 대한 여망이야말로 조국의 독립과 광복의 축복을 염원하고 있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가 옥고를 치렀던 중국 북경 감옥도 한번 방문해 보고 싶습니다. 문학뿐만 아니라 목회도 그렇다고 봅니다. 때로는 윤동주처럼 따스하고 푸른 빛처럼 설교도 하고 사역도 해야 하지만, 때로는 이육사처럼 승부 근성을 갖고 장엄하고 또 잔인스러울 정도로 광폭적 공공 사역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윤동주처럼, 눈 내리는 겨울 광야를 백마 타고 달리는 이육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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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1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6.3 대통령 선거 이후를 걱정하며!’
    6.3 대통령 선거 이후 한국 사회가 분열과 갈등의 늪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갈등을 넘어 사회 전반의 불신과 분열, 가치관의 충돌이 깊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위기를 극복하고 국민 통합과 사회 안정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차원에서 다각도의 노력이 요구된다. 첫째 정치적 관점에서 책임 정치와 협치의 회복이 무엇보다 급선무라고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선 선거 이후 당선자는 당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보다 국민 통합의 메시지를 강하게 던져야 한다.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국민들까지 포용하는 자세를 보이며, ‘반쪽 리더’가 아닌 ‘전체의 대통령’임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실질적인 협치의 실현, 즉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를 존중하며, 야당과의 정책적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국회 내 ‘초당적 의제별 협의체’를 구성하거나, 여야가 함께 참여하는 사회통합특별위원회를 설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정치 개혁과 제도 개선, 즉 갈등과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정치 구조 자체를 개선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예컨대 중대선거구제나 이원집정부제 논의처럼, 제도의 근본적 개혁도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진지하게 검토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둘째, 사회적 관점으로서 시민사회와 공론장의 재구성이다. 이는 신뢰 회복을 위한 소통과 투명성 강화하는 것으로 가능할 것이다. 정부와 언론, 시민사회는 정보를 정직하고 투명하게 전달해야 하며, 허위 정보와 혐오 표현에 강력히 대응해야 한다. 또한 국민과의 지속적인 소통 채널을 통해 정부 정책 결정에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다음으로 해야 할 것은 교육과 미디어를 통한 갈등 완화이다. 가짜뉴스와 극단주의를 부추기는 미디어 환경을 개선하고, 비판적 사고와 공감 능력을 키우는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학교와 언론, 종교단체 등은 시민교육과 공동체 의식 회복에 중심적 역할을 맡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 보호와 공정성 제고, 즉 사회경제적 불평 등이 심화할수록 갈등은 깊어질 것이다. 청년, 노인, 장애인, 이주민 등 소외된 집단에 대한 실질적인 복지 정책과 차별 해소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공정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핵심이다. 세번째 종교적 관점으로서 영적 치유와 윤리적 지도력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종교의 역할은 분열이 아닌 연대의 상징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종교는 정치적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며, 사회 갈등을 조장하는 언어가 아닌 치유와 연대의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특히 대형 교회나 종단 지도자들은 정파성을 떠나 사회 통합에 이바지하는 공적 역할을 고민해야 한다. 또한 공동체 회복과 봉사 중심의 실천이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종교는 신앙의 내면적 안정뿐 아니라, 실천적 사랑으로 분열된 이웃을 향한 연대를 실현할 수 있는 장입니다. 다양한 종교가 협력하여 ‘이웃 돌봄 운동’, ‘갈등 치유 캠페인’ 등을 펼치며 사회적 신뢰 회복에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윤리적 지도력의 회복이 시급한 일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사회적 모범이 되며, 진실과 정의, 사랑과 평화를 실현하는 윤리적 목소리를 내야 한다. 정치와 지나치게 밀착하거나, 사회적 갈등의 한쪽 입장을 편들기보다 양비론적 접근이 아닌 ‘정의로운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한국 사회가 분열과 갈등을 넘어 통합과 상생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정치가 책임지고 소통하며, 사회가 신뢰를 회복하고, 종교가 영적·윤리적 나침반의 역할을 회복해야 한다. 이 세 영역이 함께 노력할 때, 한국 사회는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며 더욱 성숙한 민주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정치적 영향으로 인해 갈기갈기 찢어진 깃발 같다고 할 수 있다. 높이 세워져 자랑스럽게 펄럭여야 할 깃발이 찢어지고 갈라서서 초라하게 날리는 깃발을 내리고, 새롭고 산뜻하게 준비된 새로운 깃발을 이제 올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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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5-05-27
  • [언론회 호소문] 자유민주 주권을 가지신 국민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국민 여러분 정말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임하게 되기 바랍니다. 우리는 한때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안녕하셨습니까?’라고 인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녕을 한 동안 잊고 사는 듯 했는데, 이제는 또 다시 ‘밤새 안녕하셨습니까?’라고 인사해야 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나라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이며, 지금까지도 놀라우신 돌보심과 축복해 주심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민주화를 꽃 피고’ ‘세계 5위를 꿈꾸는 나라’가 되어, 그야말로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가 되었다는 자긍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국인의 여권(旅券)이면 전 세계 200여 국가를 북한을 제외한, 세계 어떤 나라에도 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대통령이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에 의하여 탄핵과 파면을 당하여, 갑자기 선거를 치루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분노하고 안타까와하는 국민들이 많은 줄로 압니다. 그렇다고 대통령 선거를 손 놓고 한탄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한반도를 둘러싼 여러 상황들이 복잡하고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대한민국호’가 선장 없는 배와 같이 표류하면 안 될 것입니다. 선거를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분을 대통령으로 세워야 합니다.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민주주의는 투표를 통해 유지된다. 말이 아니라 행동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투표를 하느냐가 중요하고, 어떤 후보를 결정하느냐도 매우 중요합니다. 1. 수개표(手開票)를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 번에 걸쳐 국민투표를 했는데, 개표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일부는 수개표를 하는 과정도 있지만, 표의 분류에서부터 집계까지 완전히 수작업으로 해야 합니다. 개표는 어떤 부정이나 부당한 개입이 없도록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국민들이 선거의 빠른 결과를 알고 싶어하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전산시스템을 도입했지만, 여기에 여러 가지 변수가 많다는 중론(衆論)입니다. 따라서 투표소에서 참관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투표 종료와 함께 개표를 하면 된다고 봅니다. 이것을 국민들이 요구해야 합니다.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수개표를 진행하는 나라는 프랑스, 스위스, 캐나다, 인도네시아, 대만, 루마니아 등이 있습니다. 개표의 신속성보다 중요한 것은, 정확성과 부정의 소지를 없애는 것입니다. 2. 본투표에 참여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본투표에 앞서 사전 투표를 이틀씩이나 주고 있는데, 여기에서 여러 관리상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확하고 공정한 투표가 이뤄지려면, 사전투표보다는 본투표에 절대적으로 참여하여, 국민들의 민의(民意)가 제대로 반영되고 사전 투표의 허점에 대한 논란을 종식시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국민들은 투표일을 한 날로 정해서 시행하는 것이 오히려 공정성과 안정성을 확보한다고 판단합니다. 최근 발간된 “부정선거 해부학”이라는 책에 의하면, 관내 사전투표에서는 ‘표더하기’ 조작 메커니즘과 관외 사전투표에서는 ‘표더하기’와 ‘표버리기’ 조작 메커니즘이 적용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투표율을 높이기 위하여 사전투표를 허용하는 경우들이 있지만, 우리나라처럼 소위 ‘조작의 메커니즘’으로 시끄러운 나라는 드뭅니다. 그러므로 사전투표율이 높을수록 선거의 공정성에 문제가 된다면, 그래도 사전투표를 강행하실 건가요? 3. 후보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현재 대통령 후보 가운데 유력한 두 후보는 어릴 때 가난한 삶을 살았다고 하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그러나 두 후보는 그 가난의 밑바닥에서 처리하는 방식이 정반대라고 합니다. 한 후보는 이를 긍정적으로 승화시켜 가난 속에서 인간에 대한 애정을 체득하고 불의와 싸우는 전사가 되었고, 부정부패에 초연한 청정인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 용감하게 자신이 신봉하던 사상이 잘못됨을 알고 전향하였으며, 권력을 위해 정치하는 것이 아니라, 대의에 헌신하고 애국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민주화운동을 했지만, 민주화 보상금을 받지 않은 아주 소수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그는 오랫동안 정치 활동을 했으나, 지금도 청렴합니다. 그는 자신을 고문하고 박해한 사람을 용서하였고, 분노와 증오를 버렸다고 합니다. 반면에 다른 후보는 수많은 문제점과 심지어 언론에서는 ‘총통의 징후’가 보인다고까지 우려 합니다. 대통령은 나라의 얼굴이며, 수준이며, 인격이며,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또 자신을 위한 권력 쟁취가 아니라, 국가를 위한 헌신과 장래를 생각하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야말로 우리 후손들에게도 자랑스럽고 존경스런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국민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나라의 운명을 가를 지도자를 선택하시는데, 신중하시고, 과감하시기 바랍니다. 4. 공약을 보시고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정치적인 정책을 보면 나라의 장래를 예견할 수 있습니다. 기호 1번 후보는 5•18정신을 헌법에 수록, 대통령 임기 4년 연임하고 결선투표제 도입, 감사원을 국회로 이관, 국무총리를 국회가 추천, 대통령 및 직계가족의 범죄 관련 법안 거부권 금지, 비상계엄, 계엄선포 국회 통제 강화, 수사기관과 중립적 기관장 임명 시 국회 동의 필수, 검찰의 영장 청구권 독점 폐지, 지방자치권 보장 위한 헌법기관 신설 등을 주장합니다. 반면에 기호 2번 후보는 차기 대통령 임기를 3년으로 단축, 대통령 4년 중임 직선제 도입, 대통령 불소추 특권 폐지, 대법관 및 헌법재판관 중립, 독립성 확보, 국회의원 불체포 면책 특권 폐지, 국민 입법제 국회의원 소환제 도입, 국회 권한 남용 견제 방안 강구 등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한 후보는 상대적인 권력을 박탈하려고 하고, 다른 후보는 권력자의 권력을 내려놓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민주주의의 요체인 ‘삼권분립’을 확립할 것인가가 명확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른 분야의 정책도 꼼꼼히 살펴보고 결정해야 합니다. 5.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면 안 됩니다 진보 정당에서는 지난 20여년간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차별금지법의 핵심은 동성애를 차별하지 말라는 것이며, 이를 어길 경우 심각한 벌금과 인신구속을 법률 내용에 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동성애에 대하여 차별하거나 불이익을 준 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동성애 권력’으로 차별금지법을 주장하는 것은 대다수 국민들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다행히 지금까지 국민들과 기독교와 시민단체들의 반대로 차별금지법 제정을 지금까지 미뤄왔습니다. 그런데 한 후보는 ‘차별금지법’을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차별금지법’은 말이 좋아 ‘차별금지’이지, 가정과 사회를 망가트리는 흉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절대 반대합니다. 6. 국민의 주권 행사인 투표는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국민들이 ‘그 사람이 그 사람이지, 별다른가?’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만큼 정치와 정치 인물에 실망한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국민의 주권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투표는 총알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또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는 ‘모든 변화는 한 표에서 시작된다’고 하였습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무지한 선택은 무서운 결과를 만든다. 공부하고, 생각하고, 투표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6월 3일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되, 당일 투표에 참여하고, 수개표가 이뤄지도록 요구하고, 자유민주주의와 한국의 운명과도 같은 자유민주 정치 확립을 이루고 진정으로 국민을 사랑하고, 국가 발전을 이룰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해야 합니다. ◦ 국민 주권 포기하면, 국가 장래 망가진다! ◦ 투표는 당일에, 개표는 현장에서 수개표로 하자! ◦ 후보 잘못 선택하면 5년간 우울•울화병에 시달린다! ◦ 우리 아이들에게 자랑스럽게 여길, 후보를 선택하자! ◦ 자유대한민국의 정체성, 현명한 국민들의 선택에 달렸다! 2025년 5월 23일 (사)한국교회언론회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5-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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