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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목사의 구속사 만나] ㊲ 가인 계열의 라멕 - 1: 살인자 라멕
- (창 4: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가인 계열의 족보를 살펴보면, 그 죄악이 점차 심화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가인의 후손 라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라멕은 인류 최초의 일부다처제를 시작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잔인한 살인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을 정당화하고,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오만방자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1. 살인자 라멕 라멕은 자신의 힘과 권력을 과시하며 사람을 죽이는 것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라멕은 살인을 저지른 후에도 전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죄악을 정당화하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거짓된 노래를 불렀습니다. 창세기 4장 23절에서 그는 자신의 아내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외칩니다.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1) 자신의 작은 상처를 핑계로 소년을 살해했습니다. 여기서 ‘창상’은 히브리어 ‘페차(פֶּצַע)’로, 뼈가 부러지거나 생명이 위독한 중상이 아니라 ‘가벼운 타박상이나 멍이 든 정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라멕은 아주 가벼운 상처를 입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의 보복은 엄청났습니다. ‘죽였도다’는 히브리어 ‘하라그(הָרַג)’로, ‘살해하다, 때려서 죽이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라멕이 소년을 아주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구타하여 살해했음을 보여줍니다. (2) 자신이 보복해 놓고, 하나님이 보복하시리라고 거짓말을 노래했습니다. 창세기 4장 24절에서 라멕은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휘선 박아브라함 목사님께서는 「창세기의 족보」 101페이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라멕은 ‘나를 건드리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77배로 보복해 주실 것이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창 4:24). 라멕은 이처럼 하나님이 보복해 주신다고 노래는 했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보복을 자행하였습니다. 원수에 대한 보복은 하나님의 권한에 있습니다(신 32:35, 롬 12:19, 히 10:30).” 성경은 원수 갚는 것이 오직 하나님께 있다고 말씀합니다. 신명기 32장 35절은 “보수는 내 것이라”고 선포하며, 로마서 12장 19절이나 히브리서 10장 30절에서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수를 갚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갚아주시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라멕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자신이 직접 심판자가 되어 보복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행해 주신다고 거짓말을 노래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명백한 신성모독이었습니다. (3) 자신을 신격화하고 영웅화하였습니다. 라멕의 노래 속에 담긴 ‘77배’라는 숫자는 그의 교만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줍니다. ‘7’은 하나님의 완전수입니다. 그런데 라멕은 ‘7’을 두 번 반복하여 완전하고 완전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77배로 갚아주실 것이라고 노래한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은근히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위에 놓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년을 잔인하게 죽여놓고도, 자기를 건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이 77배로 보복해 주실 것이라는 라멕의 말에는, 자신을 신격화하고 영웅화하려는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의 힘과 권세가 하나님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하는 신격화와 영웅화의 표현입니다. 결론 휘선 박아브라함 목사님께서는 저서 「창세기의 족보」 105페이지에서 라멕 시대의 죄악상을 다음과 같이 진단하셨습니다. “이제부터 라멕에게는 신의 노여움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담의 죄는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요, 가인의 죄는 말씀을 거부한 후 살인으로 표출한 것이요, 라멕의 죄는 살인의 보편화, 복수심의 극대화입니다. 죄가 점점 구조적으로 증대되고, 살인하는 피의 복수로 세계는 온통 죄악으로 물들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가인 계열의 불경건은 아담의 7대손인 라멕에게서 최고 정점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라멕은 작은 상처를 핑계로 살인을 저지르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자신을 영웅화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신앙생활 하면서 나도 모르게 나를 은근히 하나님보다 높이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때때로 “나 때문에 이 가정이 산다”, “내가 있어서 교회가 돌아간다” 말하며 순간적으로 자신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는 교만함은 없습니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우리가 이렇게 잘 살고 자녀들이 잘 되고 형통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셨다”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라멕처럼 은근히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거나 자신을 신격화하고 영웅화하려는 교만의 싹을 잘라버리고, 끝까지 겸손하게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살아 계셔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온 우주를 섭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라멕은 자신의 힘을 믿고 살인을 저지르며, 스스로를 하나님보다 높이는 패역한 죄를 범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고, 심판자의 자리에 앉아 이웃을 정죄하고 미워했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나도 모르게 내가 영광 받으려 했던 모든 교만을 내려놓고, 늘 하나님 앞에 피조물로서 겸손하게 엎드리게 하시고, 오늘 하루도 나의 영광을 나타내지 않고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나타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감사드리옵고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영상 링크 https://youtu.be/d1GS6H46Jro?si=0h26D2ehPUgguPzU 본 기고는 구속사시리즈 제1권 창세기의 족보(저자 박윤식 목사)를 토대로 구속사 말씀 전파와 그리스도인의 묵상을 위해 구성한 큐티입니다. 이승현 목사는 서울대학교 경영학과(B.A.)를 졸업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M.Div.), 미국 Knox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D.Min.)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IVY College 부총장과 사)세계구속사말씀본부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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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목사의 구속사 만나] ㊲ 가인 계열의 라멕 - 1: 살인자 라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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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하나님의 섭리’(마 10:29-31)
- 섭리는 사전 결정이나 운명과는 아무 상관없고, 앞을 보고, 앞서 살피며, 일찍 깨닫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닥칠 재난을 미리 내다보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울 수도 있겠지만, 예언자들은 실제를 점쳐보거나 해답을 손에 쥐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언자들은 실제를 미리 엿본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미리 맛본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29-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섭리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고, 모든 개별적인 사건에도 적용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주밀하게 인도해주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준비해 놓으시고 최선의 때에 공급해 주시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해야 합니다. “누가 나처럼 선언할 수 있으며, 미래를 예고할 수 있느냐? 나를 누구와 견줄 수 있느냐? 만일 있다면, 내가 옛날 사람들에게 미래를 예고했듯이, 그들에게 다가올 일들을 미리 말하여 보라고 하여라.”(사 44: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섭리 방식을 보존, 동행, 통치로 구분하였는데, 동행을 세 가지로 정리해 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가시면서 악한 세력들과 싸워주십니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신 1: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안고 다니셨고, 품고 다니시면서 함께 가십니다. “야곱의 집안아, 이스라엘 집안의 모든 남은 자들아,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태어날 때부터 내가 너희를 안고 다녔고, 너희가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내가 너희를 품고 다녔다.”(사 46: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우리 뒤따라가시면서 보호해주십니다.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출 14:19-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동행해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만물을 먹여주십니다.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시 145: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주시고, 비를 주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 5:45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섭리를 잊고 사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 20: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앞길을 알 수 없기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며 따라가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행 14:19)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바울은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딤후 3:11)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하나님은 그때마다 바울을 건져 주심으로써 그와 함께하시는 것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했기에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언제까지나 근심하게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 크신 사랑과 긍휼로 인도해주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보십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죄가 극성을 부리지 못하게 막지 않으시며, 피조물의 불행도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막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사람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일을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 가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우리와 동행하시며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함으로 근심을 내려놓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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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하나님의 섭리’(마 10: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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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⑦ 무엇이 구원을 주는 믿음인가 : 관념을 넘어 능력으로 역사하는 믿음
-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진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명백한 진리 앞에서 한 가지 중대한 오해를 하곤 합니다. 바로 머리로 동의하는 지식적 동의를 구원 얻는 믿음의 전부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5절에서 27절 말씀은 우리 삶을 실제로 변화시키고 위기 속에서 힘을 발휘하는 진짜 믿음이 무엇인지 명확히 제시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이 생명력 있는 유정란인지 아니면 겉모양만 살아있는 무정란인지 정직하게 점검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결코 수동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적인 능력이 지금 나의 현실 속에서 실재가 되게 하는 강력한 엔진과 같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발걸음을 옮겼고 백 세에 얻은 아들을 바치라는 시험 앞에서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것을 믿으며 순종했습니다. 진짜 믿음은 내 안의 두려움과 이성을 뚫고 하나님의 언약이 내 안에서 작동되게 만드는 영적인 열쇠입니다. 만약 고난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삶의 변화가 전혀 없다면 그것은 성경이 보증하는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닐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본문 25절은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며 그 피를 믿을 때 구원의 역사가 유효하다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성령께서는 우리 영혼에 인을 치십니다. 죽었던 영이 부활 생명의 능력으로 살아나는 거듭남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깊은 회개를 이끌어내시고 예수의 피가 나의 모든 죄를 씻었음을 확신하게 하십니다. 이때 우리는 단순히 죄 사함을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던 정죄의 장벽이 무너지며 비로소 영적인 자유와 해방을 맛보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의 역사는 우리의 감정이나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절대적인 신뢰를 기초로 합니다. 많은 사람이 상황이 좋아지면 믿음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다가도 문제가 생기면 금세 불신앙의 늪으로 빠져들곤 합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환경을 바라보는 눈을 들어 환경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치 보이는 분처럼 신뢰하며 나아갈 때 우리 삶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평안과 담대함이 임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소유한 세상 이김의 비밀이며 어두운 터널 속에서도 찬송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이제 우리는 내 힘으로 의로워지려 했던 행위의 법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의 법으로 살아야 합니다. 27절 말씀처럼 믿음의 법 앞에서는 인간이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는 그저 그 통로인 믿음을 사용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일상의 모든 순간에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그분의 지혜를 구하십시오. 내가 약할 때 주님이 강함 되시며 내가 무능할 때 주님이 나의 전부가 되심을 선포할 때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이 믿음의 작동 원리를 깨달을 때 신앙은 지루한 종교 활동이 아닌 역동적인 기적의 현장이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일상의 작은 선택들 속에서 증명됩니다. 직장에서 정직을 선택하고 가정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믿음의 발현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죽어서 천국에 가는 입장권이 아니라 오늘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하는 통치 원리입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매 순간 그분의 인도하심에 나를 내어드릴 때 우리는 비로소 종교인의 굴레를 벗고 참된 제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나의 어떠함이 아닌 주님의 신실하심에 인생의 닻을 내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험난한 세상 속에서 풍랑 위를 걷는 기적을 맛보고 싶다면 다시금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환경이 변하지 않아도 육신의 질병이 찾아와도 인생의 결핍이 우리를 위협해도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약속을 붙잡으십시오.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나아가는 자에게 성령께서는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관념의 종교를 넘어 능력의 믿음으로 승리하는 리얼 크리스천의 삶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구원의 모습입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수지선한목자교회(담임 강대형 목사)는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치유하고 제자 삼는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삶의 실제적인 능력으로 선포하며,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있는 예배를 통해 영적 회복과 돌파를 돕고 있습니다. 특히 다음 세대를 말씀으로 세우는 교육과 체계적인 선교 훈련에 집중하며,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이끄는 건강하고 역동적인 신앙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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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⑦ 무엇이 구원을 주는 믿음인가 : 관념을 넘어 능력으로 역사하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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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읽는 만큼 안다”
- 지난 주간에 저는 월요일과 화요일 동안 CBS 이사 해외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원래는 3박 4일인데 저는 부득이한 일정상 1박 2일로 다녀왔습니다. CBS 이사님들과 함께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고 더 친근한 사이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 이사님들을 인솔하는 현지 가이드가 있었습니다. 일본에 대한 역사를 상당히 해박하게 알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분은 시종일관 ‘에도 막부 시대’에 대한 설명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혹시 그분이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아서 공개적으로 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가이드 선생님, 일본 ‘에도 막부 시대’의 역사를 상당히 꿰뚫고 계시는데 왜 정작 조슈번 얘기를 안 합니까? 적어도 야마구치현 조슈번 하기시에서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을 이야기해야 되고 그 정한론 사상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보수 우익 총리가 9명이나 배출되었고 우리나라가 일본 식민지배를 당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역사를 이사님들에게 가르쳐 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역사학자이신 김인호 장로님이 쓰신 ‘조슈 이야기’를 몇 번이나 읽어서 다 꿰고 있거든요. 그러자 가이드 선생님이 놀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목사님이 이런 일본의 역사에 대해서 해박하십니까?” “명함을 주시면 제가 반드시 저희 교회 장로님이 쓰신 ‘조슈 이야기’라는 책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다음 날은 윤동주의 발자취를 찾아 릿교대학을 방문했습니다. 윤동주가 기독교 학교인 릿교대학을 6개월간 다녔거든요. 그런데 윤동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긴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수박 겉핥기식으로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유 시간에 조용히 불러서 “우에노 준 교수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일본인이지만 윤동주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연구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가이드가 아예 공개적으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평생 가이드를 하면서 우리 소강석 이사장님처럼 일본 역사와 윤동주에 대해서 잘 꿰고 있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제가 윤동주 다큐를 찍고와 평전을 썼거든요. 마침내 릿교대학 니시하라 렌타 총장을 만났습니다. 그분이 환영사를 하고 제가 답사를 했습니다. 그 총장님은 오에노 준 교수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가 쓴 ‘예언 시인 윤동주’라는 책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설명을 쫙 해줬습니다. 릿교대학에서는 주로 기독교 정신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윤동주 시비나 어떤 형상을 안 세우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니시하라 렌타 총장님이 추진해서 시비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저는 윤동주 시비를 건립해 준 것에 대해 너무나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詩는 말씀 언(言)변에 절 사(寺)자가 합해져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나라에서는 절 사로 사용했지만, 원래는 관청 시였습니다. 그 관청에는 왕과 재상들이 백성을 다스렸던 곳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전해지지 않던 때에도 땅의 왕을 하제라고 부르고 하늘의 왕을 상제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통치하는 하제는 하늘의 상제의 말씀을 잘 받들어서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하제가 하늘의 상제의 말씀을 받은 것을 바로 시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의 원래 뜻은 상제의 말씀을 모시는 신전, 곧 하나님의 말씀을 모시는 성전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왕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대로 통치를 하고 정치를 하도록 가르쳐주고 견제해 주는 사람이 시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는 서정성과 심미적 운율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예언성이 있어야 되고 제사장적 마인드를 가지고 시를 써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윤동주는 시인다운 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윤동주의 시를 인류의 보편애와 가치를 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윤동주는 결코 심미적 서정적 시만 쓴 게 아니라 일본에 저항하는 제사장적 예언시를 썼다고 말했습니다. 윤동주의 ‘서시’에 대해 사람들이 보편 인류애나 보편적 가치를 쓴 것으로 생각하는데, 암울한 일제시대를 살아가는 민족을 향해 시대의 저항정신을 표현한 것입니다. 특별히 ‘십자가’, 또 ‘쉽게 쓰여진 시’는 나름대로 저항을 하는 시입니다. 물론 ‘간판 없는 거리’를 통해서 한일, 한중이 서로 평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바램을 마지막으로 썼습니다만. 함께 동행하신 CBS 나이영 사장님은 고려대학교에서 한국사를 전공해서 저보다 더 많은 지식을 꿰고 있으시겠지만 일언반구도 없이 알아도 모르는 척 하시는 모습이 너무나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분이라고 하고 싶은 말씀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이사님들을 섬기는 데만 집중하셨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나이영 사장님을 우러러봤습니다. 저는 일정상 일찍 돌아왔지만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사람은 역시 읽는 만큼 아는구나...” 앞으로도 저는 바람에 이는 잎새에도 괴로워하며 부지런히 독서하고 하늘을 향하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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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읽는 만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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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목사의 구속사 만나] ㊱ 가인 계열의 라멕: 강한 자의 교만
- (창 4:18)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오늘은 가인 계열의 족보 중 므드사엘의 아들인 ‘라멕’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라멕이라는 이름의 뜻과 그의 두 아내, 그리고 그가 저지른 끔찍한 죄악들을 살펴보며, 타락한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을 떠난 가정의 비극적인 말로를 깊이 상고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 ‘라멕’의 의미와 강한 자의 특징 신학자 랑게(Johann P. Lange)는 라멕의 뜻을 ‘강한 자’로 해석하였습니다. (1) 스스로 강하다고 자부하는 교만한 자 라멕은 이름 뜻을 볼 때 자신이 ‘강한 자’라고 자부하는 교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은혜를 구하지만, 교만한 자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시편 73편 6절에서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라고 말씀하듯이, 라멕은 교만을 목걸이처럼 자랑스럽게 걸고, 폭력을 옷처럼 입고 다니며 잔인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2) 월등하게 강한 자들의 특징 라멕처럼 주변 사람보다 힘이나 세력이 월등하게 강하다고 자부하는 자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나타납니다. 첫째, 남을 짓누르고 폭력을 행하는 데 자유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타인을 억압하고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둘째, 약한 자들에게 무슨 짓이든지 서슴없이 행하고 군림합니다. 셋째, 스스로 영웅 의식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멀리 떠납니다. 자신의 힘에 도취되어 스스로를 영웅시하며, 결국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고 멀리 떠나는 패역한 길을 걷게 됩니다. 2. 신성한 결혼을 육체적, 쾌락적 도구로 타락시킨 라멕 라멕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일부다처제를 시작한 인물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인 신성한 결혼을 육체적, 쾌락적 도구로 전락시켰습니다. 창세기 4장 19절은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라고 기록합니다. (1) 첫째 아내 ‘아다’의 의미 ‘아다’라는 이름은 ‘장식한 자, 꾸민 자’를 뜻합니다. 이는 본성과 내면의 아름다움이나 덕성보다는,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 겉치장에만 치중하는 여인을 상징합니다. 온종일 몸단장하는 데에만 시간과 정성을 다 쏟으며 거울 앞에서 스스로 만족해하는 매우 천박한 여자라고 추정됩니다. (2) 둘째 아내 ‘씰라’의 의미 ‘씰라’는 ‘그늘, 그림자(엉큼한 곳)’ 또는 ‘딸랑딸랑 울리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어딘가 음침하고 본성이 음흉하며, 엉큼한 마음을 품고 남자들에게 아부를 잘하는 여인을 연상케 합니다. (3) 살인을 찬양하는 끔찍한 가정 라멕은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 돌아와서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두 아내를 불러놓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살인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창세기 4장 23-24절을 보면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라고 기고만장하게 외칩니다. 여기서 ‘창상’은 아주 경미한 상처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고작 그 작은 상처 때문에 어린 소년을 잔인하게 살해한 것입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두 아내의 태도입니다. 남편이 살인을 저질렀으면 마땅히 그 악행에 대해 책망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를 촉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다와 씰라는 남편의 살인에 관한 노래를 듣기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박수를 치며 동조했을 것입니다. 살인을 자랑하는 남편과 그에 장단을 맞추는 아내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타락한 가정의 적나라한 모습입니다. 결론 휘선 박아브라함 목사님께서는 저서 「창세기의 족보」 101페이지에서 라멕과 두 아내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셨습니다. “아마도 아내들은 남편 라멕을 즐겁게 하기 위해 아다는 매일 꽃단장하고 꾸미는 데 온 정신과 시간을 다 소모하고, 씰라는 라멕의 살인 노래를 같이 따라 부르고 온갖 유혹적인 애교를 부리며 딸랑딸랑 장단을 맞추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다와 씰라는 오직 육신의 남편인 라멕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았습니다. 그 결과는 파멸뿐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참된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고후 11:2). 우리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해 꾸미고 아부하는 삶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신령한 남편 되시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신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가치있는 삶이 되고, 더 나아가 우리 육신의 가족들까지도 생명의 길로 인도하여 천국에 함께 입성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신령한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기쁘시게 하는 정결한 믿음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라멕은 강한 자였습니다. 라멕은 하나님께서 주신 힘과 능력을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고 교만하여져서 서슴없이 살인을 자행하는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아내 아다와 씰라 역시 죄악에 동조하며 육신의 남편만을 기쁘게 하며 살았습니다. 사랑이 가득하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는 아다와 씰라처럼 어리석은 길을 따르지 않게 하시고, 오직 우리의 참 신랑 되시는 예수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정결한 신부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저희 육신의 남편과 아내,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전도하게 인도해주셔서, 온 가족이 손잡고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는 놀라운 복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삶의 순간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는 믿음의 생애가 되기를 소원하오며,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영상 링크 https://youtu.be/Q67WJbw0F2Q?si=vm90dNxlJVmn8VYR 본 기고는 구속사시리즈 제1권 창세기의 족보(저자 박윤식 목사)를 토대로 구속사 말씀 전파와 그리스도인의 묵상을 위해 구성한 큐티입니다. 이승현 목사는 서울대학교 경영학과(B.A.)를 졸업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M.Div.), 미국 Knox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D.Min.)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IVY College 부총장과 사)세계구속사말씀본부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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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목사의 구속사 만나] ㊱ 가인 계열의 라멕: 강한 자의 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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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목사의 구속사 만나] ㉟ 가인 계열의 므드사엘(2): 생명과 사망의 갈림길
- (행 13: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지난 시간에 이어 가인 계열의 므드사엘에 대하여 계속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므드사엘이라는 이름에는 ‘지옥의 아들’이라는 뜻과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전혀 상반된 두 가지 의미가 공존하고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이 두 가지 개념을 깊이 대조해 보며, 과연 우리는 어떠한 길을 선택해야 할지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 ‘하나님의 사람’의 개념 우리는 마땅히 ‘지옥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입니까? (1) 하나님께 소속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 소속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8장 47절은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라고 증거합니다. 마귀에게 소속된 자는 마귀의 말을 듣습니다. 세상에 소속된 자는 세상적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속된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청종합니다. (2)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그릇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1절은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처럼 배우지 못하고, 건강하지 못하며, 가진 것 없는 연약한 인생들이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쓰임 받게 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3)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여 그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첫째,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둘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며, 셋째, 하나님의 손에서 크고 존귀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성경은 다윗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느 12:24)이라 칭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마음에 합한 사람’은 영어로 ‘a man after my heart’, 즉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내 인간적인 생각과 고집을 포기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생각을 좇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2. ‘지옥의 아들’로 사는 자들 반면에 므드사엘의 부정적인 의미인 ‘지옥의 아들’로 살아가는 자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유다서 1장 13절은 지옥을 가리켜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이라고 묘사합니다. 어둠에 사로잡혀 사단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습니다. 유다서 1장 11절은 이러한 자들의 세 가지 특징을 경고합니다. 첫째, 가인의 길에 행하는 자는 살인과 거짓으로 얼룩진 가인의 악한 행실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둘째,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가는 자는 돈과 재물을 탐하여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불의한 길로 몰려가는 자들입니다. 셋째, 고라의 패역을 좇는 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 모세를 대적하고 반역하는 패역을 행하다가 멸망 받은 고라처럼,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길은 결국 멸망으로 이어지는 ‘지옥의 아들’의 길입니다. 3.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우리 인생의 앞길에는 언제나 상반된 두 가지의 삶이 펼쳐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신명기 30장 15절은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 사이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신 30:19)고 간곡히 권면하십니다. 생명을 택하는 길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신명기 30장 20절은 다음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둘째, 그 말씀을 순종하며, 셋째, 그에게 부종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종(附從)’한다는 것은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이시요 장수이시기에, 그분께 온전히 붙어 있을 때 우리는 참된 생명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결론 휘선 박아브라함 목사님께서는 저서 「창세기의 족보」 98페이지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와 우리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신 30:20)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이 될 때에 비로소 지옥의 아들이라는 의미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와 우리 자손이 살기 위해 생명을 선택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께 딱 붙어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지옥의 아들’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승리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지난날 저희들도 알게 모르게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을 향해 가는 ‘지옥의 아들’과 같은 삶을 살 때가 있었음을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저희를 용서하시고 흑암에서 건져내어 주시옵소서. 이제는 생명을 택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절대 순종하며, 하나님께 딱 붙어 떠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남은 인생이 온전히 하나님께 소속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존귀하게 쓰임 받는 복된 생애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옵고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영상 링크 https://youtu.be/xr95DYrPrpM?si=QJU27XRKjqR_DZZe 본 기고는 구속사시리즈 제1권 창세기의 족보(저자 박윤식 목사)를 토대로 구속사 말씀 전파와 그리스도인의 묵상을 위해 구성한 큐티입니다. 이승현 목사는 서울대학교 경영학과(B.A.)를 졸업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M.Div.), 미국 Knox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D.Min.)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IVY College 부총장과 (사)세계구속사말씀본부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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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목사의 구속사 만나] ㉟ 가인 계열의 므드사엘(2): 생명과 사망의 갈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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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목회 사역의 현장과 분별’(고전 9: 1~10)
- 바울서신을 접하게 되면, 당시 초대교회에서 성도들 앞에 그가 얼마나 심사숙고하였으며, 온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채 뼈아픈 시절을 보냈는지 알게 됩니다. 본문은 사역자의 권리와 함께 복음의 질서와 교회의 바른 분별을 세우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한때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연보를 부탁하면서, 억지가 아니라 자원하는 은혜가 되기를 원했습니다(고후 8:1-5, 9:7). 또한, 사도로서 생활비를 받을 권리가 있었지만, 복음이 장사처럼 오해될까 하여 그 권리를 절제했습니다(고전 9:12, 15). 이를 위해 손수 일하여 자신의 필요와 동역자의 필요를 감당했고(행 20:34, 살전 2:9), 궁핍과 부족 속에서도 교회의 신뢰와 복음의 순수성을 먼저 세우려 했습니다(고후 11:8-9, 빌 4:12-16). 바울이 이 글을 기록한 목적은 교회가 복음의 일꾼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당시 바울은 뭇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같은 권위가 없다거나, 또는 스스로 일을 하니 일반적인 사역자가 아니라는 식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도들과 게바는 믿음의 아내를 동반하고, 교회의 충분한 공급을 받으면서 사역에 임했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그런 권리조차 없는 사람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에 대해 감정적으로 맞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리를 몇 가지로 설명합니다. 먼저, 군인이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지 않듯이, 복음의 일꾼도 사역을 감당하면서 정당한 공급을 받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포도를 심은 사람이 그 열매를 먹는 것처럼, 교회를 세우고 양육한 사역자도 그 수고의 열매를 함께 누릴 권리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양 떼를 기르는 사람이 그 젖을 먹는 것처럼, 목양의 수고에는 마땅한 돌봄과 지원이 따른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단지 인간의 사회적인 관례로만 말하지 않았고,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율법까지 들어서 설명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일하는 자의 수고와 소망을 귀하게 보신다는 내용을 전한 것입니다. 바울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입니다. 복음의 일꾼을 인간적인 기준으로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그 사역의 열매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은혜를 받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이들을 말씀 안에서 존중하고 책임 있게 돌보아야 한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겪은 현실적인 어려움은 컸습니다. 그는 교회를 세웠지만 때로는 여러 의혹을 받았고, 성도들을 사랑했지만 비판을 들었으며, 복음을 전하고 주의 사역을 했지만 마땅히 누려야 할 자기의 권리조차 일일이 설명해야 했습니다. 사역자는 영적인 일을 하면서도 생활의 필요를 피할 수 없는데 비해, 교회는 은혜를 말하면서도 때로는 사역자의 수고를 쉽게 넘기거나 가볍게 여기곤 합니다. 바울은 자기 권리를 주장하되 말씀과 복음의 질서 안에서 말하고,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과 사역의 열매로 자신을 증명했습니다. 교회는 비판보다 분별을 앞세우고, 의심보다 감사와 책임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이 오늘 교회와 성도들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교훈입니다. 성도는 만인제사장적인 직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성도이면서도 교회의 사역에 직접 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역자를 단순한 평가의 대상으로 보지 말고, 복음 안에서 함께 책임을 나누는 동역자로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이 겪었던 일이 곧 나의 일이 될 수 있고, 바울의 아픔도 자신의 아픔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로서, 일꾼으로서, 하나님의 직분 맡은 자로서 말씀에 근거한 분별력과 사역의 수고를 알아보는 마음, 교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겸손, 그리고 비판보다 기도로 모든 관계와 책임을 세워가는 성숙함이 한국 교회에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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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목회 사역의 현장과 분별’(고전 9: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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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⑥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 절망의 끝에서 만나는 유일한 소망
-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시급한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정말 구원받았는가? 오늘 밤 이 세상을 떠난다면 천국에 갈 확신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질문을 기독교의 초보적인 내용으로 치부하며 가볍게 여기곤 하지만, 구원의 문제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바로 이 구원의 확신이 진리 위에 촘촘하게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기쁨이 사라졌다면 그것은 영적인 빨간불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3장 23절과 24절의 말씀을 통해 우리 영혼의 현주소를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성경은 모든 인류를 향해 충격적인 사망 진단서를 내놓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죄란 단순히 도덕적인 실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어 살아가려는 본성적인 완고함을 뜻합니다. 우리는 환경만 조성되면 언제든 부패한 본성을 드러내는 존재들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얼마나 철저하게 망가졌는지를 비추는 거울일 뿐, 우리를 스스로 치료할 능력은 없습니다. 마치 파열된 근육으로는 아령을 들 수 없듯이, 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어버린 우리는 스스로의 선행이나 의지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 거룩한 절망을 인정하는 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우리에게 새로운 솔루션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입니다. 24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속량이라는 단어는 노예의 몸값을 대신 지불하여 자유케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로 우리의 죄라는 엄청난 빚을 대신 갚아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마음 깊이 믿고 그 피를 붙잡을 때, 우리 영혼을 가로막았던 죄의 벽이 허물어지고 성령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순히 죄 없는 상태로 사면해주시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며 당신의 자녀로 입양하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자격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어마어마한 신분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과거 구약 시대 대제사장조차 두려움 속에 일 년에 한 번 겨우 나아갔던 그 하나님께, 우리는 이제 언제든 달려가 품에 안길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가진 구원의 능력입니다. 만약 지금 당신의 마음에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거나 종교적인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면, 다시금 믿음의 주이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동력은 나의 열심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서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고백이 매일의 삶에서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그 믿음만이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승리하게 하고, 영원한 하늘 소망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수지선한목자교회(담임 강대형 목사)는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치유하고 제자 삼는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삶의 실제적인 능력으로 선포하며,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있는 예배를 통해 영적 회복과 돌파를 돕고 있습니다. 특히 다음 세대를 말씀으로 세우는 교육과 체계적인 선교 훈련에 집중하며,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이끄는 건강하고 역동적인 신앙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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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⑥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 절망의 끝에서 만나는 유일한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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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장충식 장로님, 하나님 품에서 길이 안식하소서.”
- 장충식 장로님, 우리는 장로님을 보내드릴 준비를 하지 못했는데 어찌 이리 훌쩍 떠나셨습니까? 몸이 불편하셨어도 휠체어를 타고 항상 주일예배 자리를 지켜주셨던 장로님,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지만 다시 돌아올 줄만 알았습니다. 병문안을 가고 싶어도 안정을 취하셔야 한다고 해서 멀리서만 기도를 하였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떠나셨단 말입니까? 천국에는 휠체어를 타지 않고 천군 천사들의 옹위를 받으시고 훨훨 날아 하나님의 품으로 가셨죠. 저는 장로님의 소천 소식을 듣고 하룻저녁을 꼬박 새웠습니다. 장로님께서 저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크고 저희 교회에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크셨는지 말입니다. 장로님의 삶은 한마디로 대하드라마와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독립운동가였던 선친 범정 장형 선생님의 DNA를 이어받아 꼿꼿한 정신과 기개로 오늘의 단국대학교를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 사학으로 발전시키셨죠. 보안사에 끌려가서도 수사관들의 싸대기를 갈길 정도로 송죽 같은 굳은 기개와 절개가 강하셨던 장로님, ‘그래도 강물은 흐른다’라는 책을 보면 장로님의 삶이 얼마나 푸른 낙락장송과 같은지를 능히 알고도 남겠습니다. 북경아시안게임 한국선수단 단장, 남북체육회담 수석대표, 세계 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 남북 단일팀 단장,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대한적십자사 총재, 세종문화회관 이사장 등을 역임하셨고, 특히 대한적십자사 총재 시절에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 사업을 성사시키는 등 남북 화해의 새 장을 열어가는 자리에 서셨던 분입니다. 더구나 ‘학연가연’을 통해서 보면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시고 운동권에서 활동을 하다가 퇴학을 맞은 학생들도 제자로 받아들여서 나라의 지도자가 되게 하신 장로님이 아닙니까? 이렇듯, 장충식 장로님은 인간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함으로써, 잔인한 상황 속에서 사랑과 평화의 라일락 향기의 역사를 만드신 분입니다. 얼마 전에 펴냈던 ‘중재 장충식 평전’이라는 책을 봐도 가히 장로님의 살아온 족적을 능히 헤아리고도 남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1시간에 걸친 장로님의 입관식을 지켜봤습니다. 저는 너무 장로님을 존경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어서 양볼에 스킨십을 하고 입술에도 입맞춤하였습니다. 장례지도사께서는 손과 입을 닦으라고 했지만, 저는 차마 그날 돌아오면서 손을 씻고 입을 닦을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로 돌아와서 잠을 자기 전 샤워를 할 때 손을 씻고 얼굴과 입술을 닦았지만요. 살아생전에는 손만 붙잡고 고개 숙이며 악수를 해드렸는데 돌아가신 후에야 시신의 싸늘한 얼굴에 입맞춤을 하고 입관식을 하는 동안 내내 장로님의 발을 붙들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장로님께서 예배당에 앉아 계신 자리는 너무나 소중해서 그 빈자리를 누가 감당해 주실 수가 있을까요? 물론 우리 교회 한 명의 식구가 줄었지만 천국에서는 또 한 명의 가족이 늘어난다는 걸 생각하고 위로가 되었습니다. 장로님, 천국에 가시니까 얼마나 황홀하십니까? 장로님께서 받아 쓰신 의의 면류관이 얼마나 찬란하고 눈부십니까? 너무너무 기뻐서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겠죠. 꽃은 져도 향기는 남아 있듯이 장로님은 가셨어도 장로님이 머무셨던 자리, 그리고 그 삶의 궤적에는 장로님의 향기가 계속 머물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 장로님이 남기신 삶의 궤적은 천년의 바람에도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모쪼록 천국에서 편히 쉬소서. 저희들도 언젠가 뒤따라가서 천국에서 장로님을 뵈올 것입니다. 그동안 단국대학교의 발전과 새에덴의 부흥을 위하여 기도하고 또 기도하겠습니다.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a Gratia,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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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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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장충식 장로님, 하나님 품에서 길이 안식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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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목사의 구속사 만나] ㉞ 가인 계열의 므드사엘(1): 지옥의 아들인가, 하나님의 사람인가
- (창 4:18)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오늘은 가인 계열의 족보 중 므후야엘의 아들인 ‘므드사엘’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므드사엘이라는 이름 속에는 놀랍게도 전혀 상반된 두 가지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 이름의 의미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신앙의 길을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 ‘므드사엘’의 이중적 의미 므드사엘은 가인 계열의 후손으로, 그의 이름은 어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극과 극의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는 ‘지옥의 아들’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한 사람의 이름 속에 구원과 멸망이라는 두 가지 운명이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지옥의 아들’로서의 의미 ‘므드사엘(מְתוּשָׁאֵל)’은 ‘일반적인 사람(성인 남자)’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마트(מַת)’와 ‘지옥 또는 무덤’을 뜻하는 ‘스올(שְׁאוֹל)’의 합성어로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스올’은 주로 죽은 자들의 세계를 가리키는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므드사엘은,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세상의 욕심과 자기 정욕을 좇아 살다가 결국 죽은 자들의 세계인 지옥으로 떨어지고 마는 비참한 인생을 의미합니다. (2)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의미 반면에 므드사엘은 ‘사람’을 뜻하는 ‘마트(מַת)’와 ‘하나님’을 뜻하는 ‘엘(אֵל)’의 합성어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그 뜻은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아버지 므후야엘은 자신의 이름처럼 하나님께 ‘쓸어버림’을 당하는 허무한 인생을 살았기에, 자식만큼은 자신과 달리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축복받는 삶을 살기를 소망하며 이런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므드사엘의 아들인 라멕이 가인보다 더 흉포한 살인자가 된 결과를 볼 때(창 4:23-24), 안타깝게도 므드사엘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결국 ‘지옥의 아들’로서의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린 인물들 비록 므드사엘은 실패했지만, 성경에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람’이라 불리며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위대한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사람들 성경은 여러 인물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첫째, 모세는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할 때 ‘하나님의 사람 모세’라고 불렸습니다(신 33:1). 둘째, 사무엘 선지자 역시 사환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경받았습니다(삼상 9:8). 셋째, 엘리야 선지자는 사르밧 과부에게 ‘하나님의 사람’이라 불렸으며(왕상 17:18), 넷째, 그의 후계자 엘리사 또한 이스라엘 왕과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왕하 5:8). 다섯째, 다윗 왕도 느헤미야서에서 ‘하나님의 사람 다윗’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느 12:24). 여섯째, 비록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던 무명의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사람’이라 불렸습니다(삼상 2:27, 왕상 13:1). 이들은 모두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위해 헌신한 자들이었습니다. (2) 신약 시대의 하나님의 사람, 디모데 신약에서는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를 향하여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불렀습니다(딤전 6:11). 바울은 디모데에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됨을 경계하며,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아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딤전 6:10-11).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순간에 믿음에서 떠나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이 오로지 돈 문제에 얽혀 살아서는 안 됩니다. 참된 하나님의 사람은 돈을 사랑하기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사랑하며 순종하는 자입니다. 결론 휘선 박아브라함 목사님께서는 「창세기의 족보」 97페이지에서 므드사엘의 삶을 다음과 같이 통찰하셨습니다. “므드사엘의 아버지 므후야엘은 자식을 낳고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지었을 것입니다. 므후야엘은 ‘하나님이 흔적 없이 쓸어 버린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의 뜻대로 자기가 성취한 모든 것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허무한 인생을 살면서, 자식만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평안과 축복의 삶을 살기를 소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므드사엘로 이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므드사엘의 자식인 ‘라멕’이 가인보다 더 악한 살인자가 된 것을 볼 때(창 4:23-24), ‘므드사엘’의 삶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지옥의 아들로서의 삶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앞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길과 ‘지옥의 아들’로 사는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습니다. 므드사엘은 이름으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으나, 실제 삶은 정욕을 좇아 ‘지옥의 아들’로 마감했습니다. 우리는 디모데와 같이 돈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의와 경건을 좇아 하나님께 인정받는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믿음으로 승리하여 천국 생명책에 그 이름이 빛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므드사엘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귀한 이름의 뜻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지옥의 아들’과 같은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 결과 므드사엘의 아들 라멕의 시대에 가인보다 더 악한 살인 행위가 펼쳐졌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이 역사를 거울삼아, 남은 생애는 이름만 성도인 사람이 아니라 참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디모데처럼 돈을 사랑하지 않고,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며, 돈보다 말씀을 더 사랑하며, 오직 하나님의 사람으로 의와 진리를 좇아 믿음으로 순종하는 복된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영상 링크 https://youtu.be/SBMsgQzPRhs?si=XeWyFBhqBeioIHXZ 본 기고는 구속사시리즈 제1권 창세기의 족보(저자 박윤식 목사)를 토대로 구속사 말씀 전파와 그리스도인의 묵상을 위해 구성한 큐티입니다. 이승현 목사는 서울대학교 경영학과(B.A.)를 졸업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M.Div.), 미국 Knox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D.Min.)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IVY College 부총장과 (사)세계구속사말씀본부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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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목사의 구속사 만나] ㉞ 가인 계열의 므드사엘(1): 지옥의 아들인가, 하나님의 사람인가
